요즈음 건축 - 건축가에게 꼭 필요한 고민과 실천의 기록들
국형걸 지음 / 효형출판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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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건축이 뭐라고 생각하세요?"라는 질문에 망설임 없이 정의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국형걸 교수가 대학 입학 면접에서 교수님에게 받은 질문이다. 건축가를 목표로 둔 전공자에게도 쉽지 않은 이 질문을 나 자신에게 던져 보았지만 역시 쉽게 답할 수 있는 질문은 아니었다. 이것은 우리가 건축을 거창하고 어렵게만 생각하기에 거리감이 생기지는 않았을까? 시대는 변화고 있다. 단순 작은 주택, 카페 인테리어, 대형 건물을 시작으로 건물 설계를 넘어 외벽이나 조형물 디자인에도 건축가를 찾는다.

이 책은 건축이 무엇인지, 변화하고 변화되어야 할 건축의 미래, 그리고 건축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저자의 경험을 담고 있다.

언젠가부터 우리나라 공공건축물이나 주택, 아파트들은 획일적인 구조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국내 건축에서는 '정형'은 경제적이고 합리적인 것, '비정형'은 돈 많이 드는 특이한 건축물로 여기며 피하고 있었는데 시대가 변화고 있는 지금, 저자는 좀 더 자유로운 형태와 다양성을 필요성을 제시한다. 특정 스타일이나 유형을 넘어 프로젝트의 상징성, 기능성, 경제성, 차별성 등을 고려한 연구로 기존의 획일적인 건축물에서 벗어난 새로운 형태에 대한 고찰이 필요한 시대가 온 것이다.

어렵지만 꼭 필요한 색

저자는 모더니즘 사조로 단조로운 백색이나 회색의 벽체를 선호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내 주위에서 유명하거나 특이한 소이 모던하다는 건물은 전부 백색과 회색으로 이루어진 것만 보더라도 그렇다. 색이 지나치게 강조되면 공간과 형태가 죽는다. 인간의 시력과 인지력은 상대적이며, 한 번에 둘 이상에 집중하기 어렵다. 강한 색이 시선을 모으면 음영이 만드는 공간감은 주목받지 못한다. 그러니 공간을 중요시하는 건축가들이 색을 멀리할 수밖에 없다.

건축가들은 기존의 고정관념을 버리고 새로운 시각으로 색을 바라봐야 할 필요성이 있다. 색의 본질을 생각하며 건축물과 주의 환경과 잘 어울리는 색을 찾아 적용해야 하며, 때로는 주위 건축물들 중에서 하나의 포인트로 강한 색을 적용해 반전을 줄 수도 있다. 충분한 이유와 목적만 있다면 자연에 특이한 색을 쓰지 못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과연 무엇이 아름다운 걸까?

미란 무엇일까?

절대적인 걸까, 상대적인 걸까?

건축가가 생각해야 할 건축의 미적 요소는 시대 흐름을 타고 문화와 양식에 따라 변화해 왔고 지금도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구축 방식에서 오는 구축미는 재료와 재료가 만나 적절한 방식으로 쌓여 하나의 집합체가 만들어질 때 이런 미감이 생기는데 유명한 안토니 저자는 가우디의 '카터너리 커브', 최근의 기술인 디지털 패브리케이션까지 구축이 만드는 구축미는 건축만이 제공할 수 있는 특별한 미감이다.

 

장소와 건물 쓰임의 프로그램에서 오는 아름다움 또한 건축미가 가지는 특수성으로 오스트리아 그라츠의 쿤스트하우스를 예로 들고 있는 저자는 주변 도시 환경과의 부조화도 건축미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주위 환경과 완벽한 조화보다는 때로는 개성 있는 건축물들로 랜드마크로 되어버린 건축물들도 다수 존재한다.

세상 모든 사람에게 아름다운 절대미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일까? 물론 보편적으로 아름다운 건축물은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절대미에 대한 정답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모든 평가에는 개인의 주관이 들어갈 수밖에 없으므로 다른 이들과의 소통과 공감이 선행되어야 보편적인 건축미로 한 발짝 다가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삶은 트렌드는 어떻게 변하고 있는가

따로 그러나 같이 산다

코로나의 출현으로 많은 것이 변화했다. 전염을 염려한 개인화가 건축물에서도 중요시되고 있는데 주택에서도 세대 내 독립 공간이 중요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서로를 필요로 하는 사회구조이기에 대부분 인구가 밀집되어 있는 도시에 거주하고 있다. 주변 생활 인프라와 유휴 공간 등을 공유하며 서로의 필요에 의해 함께 거주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내가 사는 공간이 중요해졌다

1980년대 이전의 세대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집이었다. 하지만 현재에 와서 과도하게 상승한 부동산값과 과거 중요시되었던 내 집 마련의 동기가 약해지면서 먼 미래를 위한 재산 가치를 따지기보다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이 편안하고 쾌적하다면 전세나 월세라 해도 괘념치 않고 살아가려는 경향이 뚜렸해지고 있다. 나 또한 그렇다. 부동산의 가치보다는 자신의 생활에 맞는 공간에서 보다 쾌적하고 편안한 좋은 환경으로 시선이 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흐름이지 않을까.

요즘 건축의 네 가지 트렌드

4차 산업혁명과 펜데믹 상황이 겹쳐저 세계는 많은 것이 달라졌다. 저자는 요즘 건축은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네 가지 트렌드로 정리하고 있다.

첫 번째로 '소비재로서의 건축'이다. 오늘날 소비 중심 사회에서 건축은 보존 대상이 아니라 패션과 같이 유행을 타는 소비 대상이다. 개인부터 기업까지 모두가 건축을 자신의 정체성을 보여주기 위한 수단으로 소비하고 있다. 건축은 빨리 만들고, 다시 부수고, 다시 새롭게 지어지는 소비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두 번째로 '이미지로서의 건축'이다. 모든 사람들이 스마트폰 하나로 이미지와 동영상을 주고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건축도 직접적인 공간을 체험하기 전에 누군가가 공유한 이미지로 먼저 접하게 된다. 또한 실제 공간을 방문해 체험하는 동시에 실시간으로 불특정 다수에게 공유까지 하는 세상이다. 이제 전통적인 드로잉이나 모형이 아닌 실제 이미지와 동영상을 담은 온라인 매체로 옮겨 가고 있는 것이다.

세 번째로 '공유재로서의 건축'이다. 전 세계에서 준공되는 수많은 건축 프로젝트는 매일 실시간으로 공유된다. 의도하든 그렇지 않든 유사한 디자인 쏟아져 나온다. 요즘 같은 사회에서는 새로운 디자인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제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디자인을 찾는 창의력과 상상력보다 기존의 다양한 프로토타입을 활용해 주어진 조건에 맞는 새로운 솔루션을 찾는 응용력과 문제 해결력이 중요해졌다.

네 번째로 '유한 산업으로서의 건축'을 들 수 있다. 건축은 구조, 기계, 전기 등 여러 분야가 협력해 만들어지고 있다. 더 나아가 인테리어, 가구, 조형, 조경 등 타 분야로까지 확장되고 있는데 건축업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새로운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서는 융합적인 사고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과거에서처럼 한 건축가의 작품만이 중요한 게 아니다. 작가 개인이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세상에 없던 것을 창조하는 시대는 지났다. 급속도로 변화하는 사회에서 건축은 사회의 일부이기에 변화를 읽고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때, 그리고 스스로 혁신하고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자 할 때 시대로 앞설 수 있다고 저자는 지적하고 있다.

 

우리 생활에 주변에 늘 조용히, 때로는 제 모습을 드러내며 존재해왔던 건축이라는 단어를 통해서 건축학도와 건축가,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처럼 사고의 확장을 위해 읽고 있는 독자에게 건축의 본질을 다시 한번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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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것들의 목록 - 소멸을 통해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들
유디트 샬란스키 지음, 박경희 옮김 / 뮤진트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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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것들, 소중하게 생각했던 것들에 대한 개인적인 열망이 담겨 있는 이 유니크한 애도의 기록물을 빨리 읽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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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그곳에 : 세상 끝에 다녀오다
지미 친 지음, 권루시안 옮김, 이용대 감수 / 진선북스(진선출판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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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벽 등반을 취미로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평소 등산과 산악 서적, 영화에 관심이 많았던 것 때문일까 지미 친의 첫 사진집 'There and back'의 한국어 버전인 '거기, 그곳에 세상 끝에 다녀오다'의 출판 소식은 여간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마침 진선북스의 서평단에 선정되어고 지미 친의 경이로운 산악 여정을 서평 할 수 있다는 것을 크나큰 행운이라 생각하며 그의 빛나는 여정을 살펴보기로 하자.

중국인 이민자의 자식으로 태어난 그는 성공하기 위해서는 의사나 변호사, 교수 외의 직업은 생각하지도 않는 그의 부모님의 기대와는 달리 20대 시절 취미였던 산악등반으로 세상을 헤쳐 나가기로 결심한다. 직업관이 확고하기는 했지만 사서 부부인 친의 부모는 그에게 끝없는 격려와 책을 안겨줌으로써 이 길을 갈수 있도록 이끌어주었다. 책에서 위대한 모험을 읽게 되면서 그는 자신 안에서 일종의 경외감과 자기 신뢰를 일깨웠고 세계에서 가장 거친 장소로 나아가 남들이 도전하지 못한 것을 이루기 위해 일생을 바치는 모험가로서의 삶을 살게 된다. 그러던 중에 그의 영원한 친구이자 멘토이며 동료인 키트 델로리에, 알레스 호놀드 같은 모험가들을 만나면서 이런 모험가들의 이야기를 자신의 사진과 함께 기록하는 삶의 목표를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위대한 여정의 시작인 셈이다.



어느 등반 잡지에서 전설적 등반가이자 사진작가인 게일런 로웰이 콘래드 앵커와 피터 크로프트가 카라코람 산맥 곳곳을 최초 등반하는 장면을 포착한 멋진 사진을 보고 진정한 등반가가 되고 싶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하지만 친은 파키스탄 원정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몰랐고 사진을 찍은 게일런에게 직접 물어보기로 하고 캘리포니아 주 버클리로 간다. 그는 마운틴 라이트 사무실에서 내리 5일 동안 기다려 게일런을 만날 수 있었고 게일런에게서 차라쿠사의 계곡 여행담과 거기까지 필요한 것들, 그가 주로 접촉하는 파키스탄 연락처를 도움받게 되었다.

그곳이 당신이 갈 곳입니다. 카메라를 꼭 가지고 가세요.

몇 달 뒤 차라쿠사 계곡 입구를 지키고 있는 화강암 암봉인 파티 타워와 파르하트 타워를 보고 그 압도적인 모습에 할 말을 잃었다. 어느 쪽이든 타고 오를 생각을 하니 겁부터 들기 시작했고 그의 동료 브레이디 로빈슨과 파티 타워를 공략했지만, 복잡하고 가파른 이면각을 오르지 못하고 두 번이나 좌절하게 된다. 하지만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고 요세미티와 시에라네바다를 오를 때 익힌 기술들과 등반 잡지에서 읽기만 기술까지 동원하며 등정에 성공한다. 나중에 친구 제드와 더그 워크먼, 에번 하우가 여행에 합류했고 새로운 루트 두 곳을 더 오르게 된다.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았던 바위들 사이를 오르면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고 계곡에서 돌아올 때는 진정한 등반가가 된 느낌이었다고 한다. 친은 그로부터 20년 동안 그때 자신을 사로잡은 그 공포와 경외심을 찾아 전 세계를 다니게 된다.



인간의 한계를 넘나드는 모험가들의 여정을 이렇게 작은 책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건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행운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극한의 자연환경에서 삶과 죽음이 만나는 순간에 마주치게 되는 존재의 의미를 되새기며, 고산 등반가이지 포토그래퍼로서 삶을 살아갈 지미 친과 그의 동료들의 또 다른 도전을 응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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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스
앤 카슨 지음, 윤경희 옮김 / 봄날의책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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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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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 에세이&
백수린 지음 / 창비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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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린 작가의 소설을 글을 처음 접한 건 한 대형서점에서 '참담한 빛'이라는 제목에 이끌려 홀린 듯 구매하게 되었고 그리 길지 않은 시간 안에 그녀의 모든 출간물을 읽게 되었다. 평소 무거운 주제의 소설을 즐겨 읽는 나에게 있어 백수린 작가의 글은 오랜 장맛비 뒤에 내리쬐는 따뜻한 햇살 같은 존재가 되었고 지금껏 그녀의 글들을 반가이 맞이하며 조용히 응원해 왔다. 또다시 우연한 기회로 창비에서 백수린 작가의 신간 에세이 발매를 앞두고 서평단 이벤트가 진행되고 있었고 보물이라도 발견한듯한 기분으로 서평단을 신청하였는데 운 좋게 선정되어 이렇게 글을 남기고 있다.

산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창비에서 보낸 책이 도착해 있었고 백수린 작가가 필체가 담긴 책갈피와 편지가 함께 동봉되어 있었다.

'우리는 모서리와 모서리가 만나는 자리마다 놓인

뜻밖의 행운과 불행, 만남과 이별 사이를 그저 묵묵히 걸어나간다.

서로 안의 고독과 연약함을 가만히 응시하고 보듬으면서.

라는 에세이 속의 문구가 쓰인 책갈피가 들어있었는데 창비 측과 백수린 작가의 정성이 대단하지 않은가. 편지도 그녀의 정성 어린 글들로 꽉 채어져 있었고 보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선물이었다.

'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 은 [나의 작고 환한 방], [산책하는 기분], [멀리, 조금 더 멀리] 3부로 구성된 에세이로 창비 온라인 플랫폼 '스위치'에 연재한 글들과 이번 에세이 배경이 되는 언덕 위의 집과 인연을 맺으면서 틈틈이 썼던 글들의 모음집이다. 그녀의 따뜻한 일상의 풍경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글들을 언제나 그랬듯 설레는 맘으로 첫 장을 넘겨 보았다.


1부 나의 작고 환한 방

폭이 좁은 골목과 낮은 집들. 검은 개 두 마리가 성곽 길을 따라 사이좋게 뛰어다니고, 폭우가 그치면 성곽 위로 솟은 나무들 사이에서 새들이 부산스럽게 지저귀고, 주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노인들이 평상이나 골목의 벤치에 앉아 살아온 날들처럼 길게 늘어진 하오의 볕을 하염없이 쬐는 이 동네를 나는 좋아한다.

장소의 기억, 기억의 장소 중에서

서울의 많은 장소들이 그렇듯이 언젠가는 이 동네도 흔적 없이 사라지고 세련된 건물들, 생존을 위한 요구와 필요만이 가장 편리한 방식으로 해결되는 공간들로 대체되는 날이 올까? 아마 올 것이다, 불행하게도. 바람이 있다면, 그러 날이 여름의 중앙을 통과하는 민달팽이처럼 천천히 다가오기를. 미래 쪽으로만 흐르는 시간은 어떤 기억들을 희미하게 만들어버리기도 하지만, 장소는 어김없이 우리의 기억을 붙들고 느닷없이 곁을 떠난 사랑하는 것들을 우리 앞에 번번이 데려다 놓는다.

장소의 기억, 기억의 장소 중에서

낯선 동네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집을 갖게 되면서 만나는 이웃들의 이야기로 동네의 풍경은 위의 짧은 문구들로 요약될 수 있을지 모른다.

M이모로 인해 알게 된 언덕 위의 동네에서의 익숙지 않은 동네 생활을 다정다감하게 도와준 이웃들, 자신만의 리듬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옆에서 비슷한 색으로 물들어가는 삶 속에서 언젠가 사라질지도 모르는 정겨운 풍경에 대한 안타까움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내 것이 아닌 욕망과 거짓된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운 '나의 집'에. 그곳을 이정표 삼아 걷는다. 아무리 쫓아내봤자 다시 떼를 지어 찾아오는 불안과 유혹에 눈이 가려져 몇 번이나 방향을 잃고 헤매게 될지라도. 먼 나라에 살았다는 어떤 왕의 말처럼 인생이 결국엔 헛된 것에 불과할지라도.

여름 식탁 단상 중에서

집을 재화의 가치로만 생각하는 주위 사람들의 충고와 시선은 뒤로한 채 자신에게 있어 소중한 것들, 타인에겐 무용이라 불리는 것들을 사랑하며 간직해 온 자신을 돌아보며 결국 그런 것들로 인해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되는 부분이 굉장히 마음에 와닿았는데, 나의 4년 6개월이라는 긴 일본 유학을 견디게 해주었던 것도 여유가 될 때마다 들리는 라면 가게와 한 장씩 사 모으던 음반. 이런 소소한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2부 산책하는 기분

우리의 존재가 서로에게 깃들고, 이렇게 서로를 비춰주는 조그만 빛이 될 수 있게 해준 그 힘이.

말도 통하지 않고 종마저 다른 둘 사이에 사랑의 시간이 쌓여 서로가 서로의 불안을 잠재울 수 있는 존재로 거듭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기적이 아닐까?

사랑의 날들 중에서

오랜 시간 함께 한 반려견 봉봉과의 만남과 이별, 말도 통하지 않고 종마저 다른 둘이 오랜 시간을 거쳐 쌓인 신뢰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로 서로에게 인식되며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도 자신을 살리고 싶어 하는 그녀를 위해 하루라도 더 버티려고 애쓰는 봉봉의 마음이 전해져 눈시울을 적셨다. 아직 일어나지 않았지만 반려묘를 키우고 있는 나에게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쓸모와 효용이라는 물감으로 짙게 덧칠한 색안경을 벗고 나서야 비로소 보이는 빛깔들. 나는 빛을 채집하는 사람처럼, 저층 빌라들 틈새의 좁은 마당 위로 익어가는 감의 주홍빛과 누군가가 창가에 매달아 말리는 고추의 붉은빛을 눈에 담았다. 쇠락한 벽돌 담벼락 위로 일렁이는 가을 빛을 나침반 삼아 걷는 날들이 쌓일수록 나뭇잎의 색이 바뀌고 하늘의 색은 깊어졌다.

다시 운동화를 신고 중에서

이제 영혼이 된 봉봉과 가만가만 걷는다. 색색의 팬지를 정성껏 키워놓은 어느 집 앞 화분에 주인이 붙여놓은 '꽃 꺾어 간 도둑놈아, 달라면 주었을 텐데'라는 문장을 보며 잠시 웃고, 정자 앞에 앉아 바둑을 두며 심각한 듯 미간을 모으는 할아버지들을 훔쳐본다. 골목의 평상에 앉아 참외를 깎아 먹는 할머니들, 지붕 위에서 말라가는 애호박. 내가 이 동네에서 좋아하는 풍경들.

초여름 산책 2 중에서

봉봉을 떠나보낸 슬픔을 떨쳐내려고 시작한 산책길에서 만나는 건 가슴 깊이 그리워하는 봉봉의 모습이었다. 걷는 걸 힘들어했던 봉봉을 안고 한참을 걷다가 벤치에 앉아 천 가방에 넣어둔 물을 사이좋게 나눠마시던 일이며, 석양으로 물든 하늘에 봉봉의 형상과 꼭 닮은 구름을 발견하는 것도, 십여 년을 함께한 봉봉을 그리워하는 그녀의 애틋한 마음이 느껴졌다.

3부 멀리, 조금 더 멀리

소설을 쓰는 일이란 내 기호대로 높이가 알맞게 짜인 푹신한 침대에 홀로 누워 잘 닦인 유리창 너머로 풍경을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풍경을 보기 위해서 저마다의 서사를 가진 타인들이 만든 침대 위에 의자를 놓고 가까스로 올라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것은 지붕도 벽도 없는 거리에서 뙤약볕에 익어가며 누군가 발견해 주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한나절 동안 살구를 파는 것처럼 고독한 일이라는 사실을.

나의 창, 나의 살구 중에서

내게는 다 낡은 집의 수도가 터진 게 아닐까 걱정할 자유가 있었고 임박한 마감 날짜를 지키지 못하더라도 골목에 나가 얼음을 망치로 깨부술 자유가 있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때로 그런 것들은 나를 고단하게 하고 안락해 보이는 타협책을 향해 손을 뻗고 싶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날에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몫의 수고로움을 스스로 감당하며 살아내는 것이 값진 일이라는 걸 안다. 그것들은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글을 쓸 자유, 사랑하는 사람과 다른 형태의 공동체를 꿈꿀 자유, 타인의 기대나 시선에 부합하는 내가 아니라 오롯한 나 자신으로 존재할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내가 기꺼이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나로 존재하는 수고로움 중에서

마흔에 생긴 기미는 잘 지워지지 않는다던데. 봄볕 아래서 잠깐 그런 생각을 했지만 그런 것 따윈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그 오후의 몇 시간 동안 나는 그저 행복했다. 얼마나 지속될지 알 수 없는 행복이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행복은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깊은 밤 찾아오는 도둑눈처럼 아름답게 반짝였다 사라지는 찰나적인 감각이란 걸 아는 나이가 되어 있었으니까.

마흔 즈음 중에서

여성작가로서의 자유로운 자신을 되찾기 위해 남편과 정상가족이라는 안락함을 대가로 지불하고 고군분투하는 리비의 모습을 기록한 '살림 비용'을 읽으면서 리비를 조용히 응원하는 그녀.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혼자 생활한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인지 그녀도 안락해 보이는 타협책을 향해 손을 뻗고 싶기도 하다고 고백하고 있다.

여성 작가인 그녀의 당당하면서 빛나는 40대는 즐겁고 신나는 모험으로 가득하리란 예감하며 자신을 날마다 사랑하고 있지는 않지만 지금의 이런 생활도 나쁘지 않다며 앞으로 긴 세월을 살아가며 채워나갈 새하얀 페이지들에 써 내려갈 존재들의 사랑을 적어나가고 싶다는 다짐들. 그런 밝고 사랑스러운 내일을 응원하고 싶은 건 같은 40대의 동질감이 아닐까 한다.

오래된 것이 아름다운 건 시간을 품었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사람이나 동식물처럼 생명을 지닌 것이든 공간처럼 그러지 않은 것이든, 무언가가 품위와 존엄을 가질 수 있는 건 수많은 상실과 슬픔을 견디며 쌓아올린 세월의 무게가 있기 때문이라는 믿음이 있다. 시간을 견뎌낸 것들은 그것만으로도 존중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

다시 운동화를 신고 중에서

세월이라는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자신만의 리듬으로 살아가는 진솔한 이웃들과의 어울림, 어떠한 통보도 없이 찾아오는 소중한 존재들과의 작별로 한 사람의 여성으로서, 백수린이라는 작가로서의 성숙한 성장을 지켜보면서 그녀의 글들로 인해 내 안에서 아주 조금씩 변해가는 것들을 담으며 마음을 톺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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