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문화사
로저 에커치 지음, 조한욱 옮김 / 돌베개 / 2008년 10월
평점 :
절판


그동안 우리가 배웠던 역사는 결코 완전하거나 객관적인 것이 아니다. 지배자의 역사는 부각되어 있는 반면, 지배를 받았던 민중들의 역사는 무시되었다. 남성이 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면, 여성은 남성의 들러리 역할에 만족해야 했다. 빛이 있는 낮이 역사가 살아 숨쉬는 시간이었다면 밤은 모든 것이 숨을 죽이고 활동을 멈추는 고요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밤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밤은 낮과는 다른 특별한 문화를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근대 이전의 밤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공포와 두려움의 시간이었던 동시에 귀족들에게는 낮이 허락하지 않았던 사교, 성, 쾌락을 즐길 수 있는 자유의 시간이었다. 근대에 들어 밤은 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 책은 밤에 대한 내용적 측면 뿐만 아니라 연구를 위해 '아카이브(Archives)'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등 방법론적인 측면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빛이 존재하지 않는 밤은 대부분의 역사에서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었다. 근대 계몽주의의 영향이 있기 전까지, 혹은 그 이후까지 사람들은 밤의 공기가 사람을 망치는 나쁜 공기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인간이 밤에 잠을 자야하는 이유도 신체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밤의 나쁜 공기를 피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하였다. 중세천년을 지배했던 기독교의 영향으로 밤은 각종 악령과 악마가 출몰하는 시간이라고 믿어졌다. 이러한 심리적인 이유뿐만이 아니라 실제로 밤은 최악의 범죄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시간이었다. 절대주의 시대까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던 유럽의 국가권력은 밤의 폭력을 제대로 통제할 수 없었다. 근대 국민국가가 형성되고 밤의 범죄를 막기 위해 조명을 설치하고 제도를 정비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인 것도 바로 밤에 대한 통제가 국가권력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수단이었기 때문이었다.

밤은 모두에게 분명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었지만 역설적으로 모든 것이 통제되지 않는다는 불안감은 낮에는 불가능했던 각종 자유가 허용된다는 뜻이었다. 상대적으로 과중한 노동과 범죄의 피해로부터 자유로웠던 귀족들은 밤을 이용해 낮에는 금지된 그들만의 쾌락을 즐겼다. 모든 것이 엄숙하게 통제된 중세라는 인식은 밤의 역사에서는 적용되지 않는 것이다. 비단 귀족들뿐만 아니라 민중들도 삼삼오오 모여 음란한 대화를 나누었고, 젊은 남녀들은 낮보다 밤에 연인에게 청혼하는 것이 성공할 확률이 높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러한 자유스러움은 범죄자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것이었고 결과적으로 최악의 범죄로 이어졌다.

근대 자본주의 사회가 형성되면서 그동안 유지되었던 밤에 대한 인식은 변하게 된다. 도시민의 대다수를 형성했던 프롤레타리아트는 밤에도 생존을 위해 노동을 계속해야만 했다. 조명기구가 발달하면서 그 동안은 불가능했던 밤의 사생활에 대한 철저한 감시가 이루어졌다. 이제 밤은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은 아니었지만 자유를 제공하지도 않았다. 물론 새롭게 사회지배세력이 된 부르주아들은 귀족들이 그랬던 것처럼 밤이 주는 자유를 그들만의 방식으로 즐길 수 있었다.

책은 번역자의 지적대로 밤에 대한 지극히 사적인 사건들을 끊임없이 ‘나열’한다. 사건들이 갖는 사회, 역사적 의미에 대해서 집어내지도 않는다. 정치사나 전쟁사 등 거시사가 내세웠던 역사학의 목적에 의한다면 저자는 그저 재미있는 사건들을 찾은 것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이루어진 많은 미시사 연구 성과들이 말하고 있듯이 역사는 한명의 위인이나 하나의 사건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사람들의 삶이 역사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고, 역사가 변화되어 가는 모습을 명확하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은 그러한 작은 역사를 발견하는데 중요한 재료들을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재료들을 발견하는 작업장은 바로 감사의 말에서 저자가 언급하고 있는 수많은 기록보존소(Archives)와 도서관의 기록과 아키비스트들이다. 유럽 각국의 철저한 기록관리 역사와 국가의 지원이 이러한 작업을 가능하게 해준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 책은 왜 아키비스트가 역사학에 대한 지식을 갖추어야 하는지, 기록관리가 어떤 방식으로 역사연구에 이용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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