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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의 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3월
평점 :
어느 순간, 나를 부르는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던 한순간, 파란셔츠의 손을 뿌리치고 뒤를 돌아보던 그 순간, 무수한 얼굴들 사이에서 아저씨를 찾던 짧은 순간, 카메라들이 나를 향해 일제히 섬광을 뿜었다. 나는 빛의 바다에서 홀로 섬이 되었다.
p.8
정유정 작가가 쓴 작품들이 공통점은 이거 아닐까?
'완전 흥미진진!'
유치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정말 흥미진진하다.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와 <내 심장을 쏴라> 두 작품 모두 통통 튀는 캐릭터들 속에서 마음껏 상상하고,
함께 울고 웃는 재미가 있었다. 처음에는 시장통에 있는 것처럼 복작복작한 느낌도 든다.
캐릭터들의 개성만으로도 꽉 찬 느낌이기 때문일까. 하지만 인물들이 문장 속에서 날뛰는 것에 익숙해질수록 유쾌해진다. 어떤 사건이 일어날 지 어떻게 끝이 날 지 기대감에 책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어진다. 그리고 정유정 작가의 작품은 기대를 배반하지 않았다. 등장인물에게 정이 들어 손에서 책을 놓기가 아쉬워 진다.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를 읽고 나서는 머릿속을 자유롭게 뛰어노는 인물들로 뒷이야기를 상상하곤 했다.
<7년의 밤>은 얼핏 '장르소설' 같다. 스케일을 강조한 광고 때문일 수도 있고, 스릴러물 같은 긴장감이 작품 내내 흐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영화 처럼 그려지는 세령호의 이미지 같은 것들도 그렇게 느껴지게 만드는 것 같다. 물론 내가 이전에 신파나 단편소설 위주로 읽었던 탓에 <7년의 밤>이 새롭게 느껴졌을 수도 있겠다.
<7년의 밤>은 일단 재미있다! 독자로서 환영하는 작품이다. 읽는 재미가 있다. 머리 아프지 않고, 문장도 좋다.
이전 작품들에서도 예사롭지 않은 문장들을 보며 친구들과 감탄했었는데 굵진한 장편에서도 역시나 대단하다.
한 작품을 쓸 때 17번의 퇴고를 거친다는 작가의 장인정신이 작품 속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이 책은 간단하게 말하면, 한 남자가 어느날 밤 저지른 실수로 인해 꼬이고 꼬이는 이야기다.
오영재라는 극적인 인물 때문에 그가 페이지에 등장하기만 하면 절로 손이 떨린다. '절대 악' 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집착폭력광기변태' 오영재가 없었다면 이야기는 맥이 빠졌겠지. 인물들 하나하나를 조명하는 작가의 세밀한 묘사력도 감탄할 만하다. 불필요한 캐릭터 하나 없이 꽉 짜여진 세계관인데도 답답하지 않다. 내가 이렇게 찬양하는 것은 아마 세령호의 유령에 홀린 탓인가? 히히~
주변 친구들 중에 '한국 소설이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한다.', '지루해서 안본다.', '아는 체 하고 내가 읽고 싶은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고 하는 이들이 많다. 물론 그래서 그들은 더욱 한국소설에서 멀어지고 그래서 더욱 좋은 작품을 읽을 기회가 적었겠지만, 나도 가끔 질릴 때가 있다. 솔직히 작가지망생들이나 글 자체에 흥미가 있는 학생이 아니면 '베스트셀러' 이외의 한국소설에 별로 관심이 없다. 차라리 외국소설이나 자기계발서를 읽는다. <7년의 밤>은 그런 독자들의 눈도 충분히 충족시켜줄 수 있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블루 오브 증후군 (Blue Orb Syndrome)이라는 게 있어. 바다에서 일어나는 광장공포증이지. 깊고, 넓은 해저에 나 홀로 있다는 인식이 엄습하면, 공포에 사로집하니 나머지 의식이 핀 포인트가 되는 거야. 감압은 말할 것도 없고 숨을 뱉는 일까지 잊어버려. 그 일이 내게 남긴 게 그거다. 뭔가를 쓰려고 노트북을 켜면 내 앞에는 워드화면 대신 블루 오브가 열리는 거다. 길을 찾으려 들면 들수록 넓어지고 깊어지며 광활해지는 공간. 나는 그 어둗ㅂ고 푸은 우주에서 미아가 되곤 했어.
p.501
어쨌든 이야기가 흥미진진해서, 뒷이야기가 너무 궁금해서, 손에서 놓을 수 없는 책이기 때문에 줄거리를 줄줄 말해버리면 나중에 책을 읽을 때 맥이 탁 빠질 것 같아서,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