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이혼 법정에서

2005년 10월 3일 월요일 오후, 서울 양천구 신정동 서울남부 지방법원 205호 협의이혼대기실.
근 한 달여 만에 아내를 만났다.
아내? 맞나? 그 호칭을 써도 될까? 아직 법적으로는 부부이니 써도 되기는 하겠다.

대기실 앞 소파에 앉아 있는데 층계를 걸어 올라오는 아내가 보였다.
별 생각 없이 손을 번쩍 들었다가 슬그머니 내렸다.

아내는 지난봄에 내가 사 준 작은 MP3플레이어를 듣고 있었다. 하얀 이어폰 줄이 눈에 띄었다. 아내는 무심한 듯 내 옆에 앉았다.
귀에서 이어폰을 빼며 내게 물었다.
“언제 시작이에요?”
“조금 기다리면 될 것 같아.”
시간을 확인한 아내는 다시 이어폰을 귀에 꼽고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대기실로 들어오라는 안내를 듣고 일어섰다.
안에 들어가니 제법 넓은 대기실은 이혼서류를 손에 든 남녀들로 꽉 차 있었다.
서로 얼굴도 보지 않고 따로 앉은 부부, 여전히 감정이 날카로워서 말싸움을 하는 부부, 또는 마치 이혼하지 않을 것처럼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거나 손을 맞잡고 있는 부부...
우리는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협의이혼확인실이라는 또 다른 문으로 한 쌍의 부부가 들어간다. 불과 오 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 지나면 문이 열리고 이제는 남이 될 수 있다는 판결을 받은 두 남녀가 나오고, 또 다른 부부가 들어간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우리를 호명하는 소리를 들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음악 소리에 못 들었는지 내가 일어서는 모습을 보고나서야 자리에서 일어서며 천천히 이어폰을 뺐다.

판사, 그리고 두 명의 낮선 사람들이 우리 부부의 이혼서류를 뒤적이며 물었다.
“이혼의사가 있으십니까?”
“네.”

“아이 양육에 관해서는 서로 합의하신 겁니까?”
“네.”

“90일 이내에 관할구청에 서류를 제출하시면 이혼이 성립됩니다. 동일한 내용의 서류를 두 부 드립니다. 이 서류는 둘 중의 한 분만 가셔서 제출하시면 됩니다. 제출하신 날짜로 두 분의 이혼은 성립되는 겁니다. 만일 정해진 기일 안에 서류를 제출하지 않으시면 본 이혼 건은 무효가 됩니다.”
“그럼 어떻게 되는 건가요?”

“만일 피치 못할 사정이 있으셔서 정해진 날짜까지 서류를 제출하지 못하면 이혼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 이후에 이혼의사가 있으시다면 다시 이혼절차를 밟아야 합니다.”
“네.”

참 빠르다.
저렇게 중요한 사항을 모두 알려주고 친절하게 ‘부부가 남이 되는 방법’을 설명해주는데 오 분도 걸리지 않는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대기실을 거쳐 층계를 내려가며 물었다.
“점심은?”
“먹었어요. 전 회사 들어가 봐야 해요.”
“응. 내 차로 데려다 줄까?”
“아뇨. 그냥 갈게요.”
“전철역까지라도...”
“됐어요. 알아서 갈게요.”

아내는, 아니 그녀는 그렇게 돌아서서 갔다.

난 안다.
그녀는 지금 태연한 것이 아니다.
내가 아는 그녀, 12년이라는 시간동안 연애를 하고 결혼 생활을 하며 알게 된 그녀는 이렇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여자가 아니다.

아까 대기실에서, 음악을 듣는 그녀의 손을 보았었다.
그녀의 긴 손가락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단지 태연한 척하는 것뿐이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그렇게 보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돌아서 가는 그녀의 어깨가 오르락내리락한다.
아마도 그녀는 눈물을 참기 위해 커다랗게 심호흡을 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아는 그녀, 내 아이의 엄마, 내 인생에서 12년을 함께 했던 그녀는 그런 여자다.

감당하지 못할 만큼 엄청난 일이 닥치면 오히려 차분해지는 여자.
아니 그렇게 차분한 것처럼 애써 꾸미는 여자, 누구도 접근하기 어려울 만큼 냉정한 척 하는 여자가 그녀다.
지금까지 그녀는 그래왔다. 그리고 그런 애씀이 버티기 힘들 때, 그녀는 항상 내게 안겼다.
내 가슴에 안겨 엉엉 울었고, 넋두리를 했으며, 그렇게 떨리는 가슴을 달랬다.

지금 그녀가 떨고 있다.
눈물을 참고 있다.
후들대는 두 다리를 애써 달래며 서둘러 걷고 있다.
그녀를 안아주어야 하는데...
그녀를 다독여주어야 하는데...
그녀를 달래주고 눈물을 닦아주어야 하는데...
난 그냥 서있다.

갑자기 화가 났다.
아무렇지도 않게 서류를 뒤적이며 이혼을 결정하는 사람들이라니...

그들은 나를, 그녀를 모른다.
그들은 벌써 우리를 잊었다. 아니 애초에 기억하지도 못했다.
그런 그들이 우리의 이혼을 결정했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생각해보니 그들은 제대로 우리 두 사람을 쳐다보지도 않았었다.
자신들의 말 몇 마디와, 형식적인 절차를 거쳐 남으로 돌아가는 두 사람에게 제대로 눈길조차 건네지 않는 그 사람들이 우리의 운명을 최종적으로 결정했다는 사실에 분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차에 시동을 걸고 앉아서 창문을 열었다.
가을이지만 날씨는 제법 더웠다.
담배를 물고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천천히 더 천천히...
그렇게 담배를 한 대 다 피우고 나서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