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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엣 1 - 관 속에서 만난 연인
앤 포티어 지음, 서현정 옮김 / 노블마인 / 2011년 12월
평점 :
절판
진짜 줄리엣은 따로 있었다. 베로나의 캐플릿가문이 아닌 시에나 톨로메이가문의 줄리에타 톨로메이가 그녀였다.
지금까지 로미오와 줄리엣이 대문호 세익스피어의 머릿속에서 태어난 이야기라 철썩같이 믿어 왔던 나는 이 비극적인 이야기가 실제 이야기를 토대로 이미 세익스피어 이전에 이탈리아의 작가 마수키오에 의해 쓰여졌다는 사실에 살짝 배신감마저 들었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고 했던가. 한 세기도 더 전에 탄생했던 두 원수 가문에 얽힌 비극적인 이야기를 비틀어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빠진 연인의 로맨틱한 이야기로 승화시킨 것은 세익스피어의 능력이지만 그럼에도 이 매력적인 이야기가 온전한 그의 작품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자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더군다나 이 안타까운 연인이 창작의 산물이 아닌 실존하는 인물이었다는 사실은 책 속에나 등장하는 현실성없는 이야기에서 벗어나 줄리에타 가문의 일대기를 그린 생생한 다큐처럼 다가왔다.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은 한 권의 책으로 두가지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크게는 현재의 줄리에타가 할머니의 유언에 따라 숨겨진 줄리엣의 보석을 찾아나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고, 그 과정에서 독자는 덤으로 또다른 줄리엣의 이야기를 만나는 행운을 누리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현재의 줄리가 들려주는 이야기보다 서기 1340년의 줄리에타의 이야기에 더 매혹되었기에 덤이라 표현하기가 망설여지지만 어찌되었건 모든 사건은 줄리를 중심으로 펼쳐지고 이야기를 풀어가는 이 역시 현재의 줄리다. 조용하고 내성적인 줄리는 로즈할머니의 죽음과 함께 생각지도 못한 비밀에 맞닥드리게 된다. 언제 어디서든 주인공이 되어야 직성이 풀리는 쌍둥이 동생 제니스 몰래 줄리에게만 전달된 유언장에는 할머니가 숨겨왔던 줄리의 비밀이 담겨져 있었다. 그리고 유언에 따라 이탈리아로 향한 줄리는 그곳에서 베일에 싸인 인물들을 만나게 되고, 어머니의 유품을 손에 넣는다. 줄리의 어머니는 생전에 무언가를 애타게 찾아다녔는데 그것은 바로 자신의 딸 줄리를 구하기 위함이었다. 줄리엣의 저주를 풀고 딸을 지키려했던 어머니의 뜻을 알게 된 줄리는 직접 줄리에타 톨로메이와 자신을 둘러싼 비밀을 파헤치고자 과거의 행적을 쫓기 시작한다.
줄리가 찾아낸 엄마의 책에는 줄리에타 톨로메이의 이야기가 쓰여져 있었다. 이 오래된 책을 사이
에 두고 이야기는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독자를 시에나의 거리로 안내한다.
이야기는 서기 134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가면무도회 같은 로맨틱한 만남을 기대했다면 오산이다. 이들의 만남은 로미오가 관 속에 누워있는 줄리에타에게 반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살림베니의 손에 온 가족을 몰살당한 줄리에타는 홀로 살아남아 먼 친척의 집으로 피신하게 된다. 로렌조 수사의 도움으로 관 속에 누워 시신인 척 위장하지만 순탄치가 않다. 곤경에 빠진 그녀를 로미오가 도와주는데 이후 로미오는 관 속에 누워있는 여인의 모습이 눈에 아른 거려 시신인줄 알면서도 그녀를 찾아나선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마음을 빼앗은 이가 시신이 아닌 살아있는 여인임을 알게 되자 환희에 차 사랑을 맹세한다. 그러나 온통 가족을 죽인 원수 살림베니에 대한 증오로 가득차 있던 줄리에타는 로미오에게 자신을 대신해 살림베니에게 피의 복수를 해달라 부탁하고 로미오는 사랑하는 그녀를 위해 복수를 다짐한다.
세익스피어가 로미와와 줄리엣이라는 어린 연인에게 대부분의 이야기를 할애했다면 앤 포티어의 줄리엣에는 줄리엣과 로미오 외에도 살림베니라는 인물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실존했던 인물인 살림베니가 이야기의 한 축을 이루며 시종일관 긴장을 늦출 수 없게 만든다. 흥미로운 점은 줄리엣가문의 원수가 로미오가 아닌 바로 살림베니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에서 원수로 등장하는 두 집안은 로미오의 몬테규가문과 줄리엣의 캐플릿가문이다. 철전지 원수인 두 가문의 아들 딸이 파티에서 우연히 만나 첫눈에 반하지만 끝내 죽음으로써 사랑을 이룬다는 이 이야기에서 파리스 백작은 둘의 애타는 사랑을 돋보이게 할 단역에 불과했다. 그러나 실은 로미오보다 더 주연급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어쩌다 살림베니라는 인물이 파리스백작 같은 작은 역할로 전락해 버렸는지는 모르겠으나 덕분에 세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이 스릴러가 아닌 로맨틱한 사랑이야기로 끝맺을 수 있었음은 분명하다. 파리스 백작에 비할 수 없이 악랄하고 잔인하며, 징그럽기까지 한 이 위인은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참 한결같이 밉상 짓을 골라하며 내 분통을 터뜨렸다. 그러나 살림베니가 있었기에 줄리엣의 이야기가 비로소 극적인 스릴러로 완성되었으니 마냥 불평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온갖 만행을 저지르며 로미오와 줄리엣을 갈라놓기 위해 악행을 서슴지 않는 살림베니는 줄리엣의 가족을 몰살시킨 장본인이다. 줄리엣에 대한 병적인 집착으로 그녀를 차지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소설 전반에 걸쳐 끊임없이 극악무도한 짓을 일삼아 독자를 경악케 한다. 나 역시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은 둘째치고, 저 인간 좀 어떻게 안되나....하는 심정으로 이들의 사무치는 사랑을 지켜봤다.
바극적이기에 더욱 아름다운 사랑이라 말하기에는 비극도 너무 비극이다. 베로나의 줄리엣 캐플릿이 겪은 시련은 시에나의 줄리에타 톨로메이가 겪은 일들에 비하면 시련 축에도 못드는 것이었다. 세익스피어가 왜 원형에서 많은 부분을 버릴 수 밖에 없었는지 알 것도 같다. 그도 그럴것이 살림베니의 악행을 고스란히 담았다가는 그 잔인함에 출간이 정지되지 않았을까 싶다.
이 모든 비밀의 열쇠를 쥐고 있는 톨로메이 가문의 줄리에타는 줄리 자신인 동시에 과거에 존재했던 비운의 줄리에타이기도 하다. 이 연결고리는 과거의 현재를 잇는 비밀스런 인물들의 등장으로 하나씩 모습을 드러낸다. 스릴러적인 요소가 곳곳에 즐비한 가운데 로미오와 줄리엣의 묘미라 할 수 있는 로맨스 역시 빠지지 않는다. 스릴러와 로맨스가 부드럽게 조화되며 적당히 완급을 조절해주는 듯 하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엄청난 스릴러 소설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그것이 이 책의 단점이 되지는 못한다. 예측 가능한 부분들도 분명 있으나 내 예상이 맞았다고 해서 긴장이 풀리거나 김이 새는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줄리에타의 비밀을 풀기 위해 작가가 던져준 단서들을 조합하하는 즐거움, 베일에 싸여있던 과거가 하나 둘 씩 벗겨지는 순간의 희열을 맛보며 책장을 넘기다 보니 어느덧 마지막 장에 도달했다.
줄리가 힘든 여정 속에서 찾아낸 것은 보석보다 값진 진정한 사랑이었다. 그 사랑이 줄리에타와 같은 비극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라며 긴 여운을 안고 책을 덮었다. 부디 세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 만큼 많은 이들에게 읽히는 줄리엣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