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바람구두 > 변경의 역사를 새로 쓰는 방법론 - 구술사
새로운 역사 쓰기를 위한 구술사 연구방법론
윤택림, 함한희 지음 / 아르케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마지막으로 구술 자료는 역사에 좀더 널리 미치고 근본적인 어떤 것을 얻게 해줄 수 있다. 역사가들이 멀리서 역사의 행위자들을 연구할 때, 행위자들의 삶, 견해, 행위들에 대한 역사가들의 성격 규정은 항상 잘못 묘사된 것이거나, 역사가 자신이 경험한 것과 상상한 것의 투사, 즉 학문적 형태의 픽션이 될 위험이 있다. 구술 자료는 연구의 ‘대상’을 ‘주체’로 변형시킴으로써, 역사를 단지 더 풍부하고 더 생생한 것이 아니라 더 진실한 것으로 만든다. - Paul Thompson

오늘날 “역사는 객관적 실체가 아니라 역사가의 생각과 이야기의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포스트모던한 의문에 직면하고 있다. 역사가 어찌되었건 인간이, 인간에 대해 기록하는 것이라 한다면 역사는 문학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인간에 대한 이야기이다. 문학이 인간을 이해하는 방식이 상상력과 개연성에 의한 것이라면 역사는 사실과 해석에 의한다. 그간 역사가들은 자신들이 인간이 아닌 초월적인 존재인 것처럼 간주되도록 애써왔다. 혹은 그들 자신만이 역사의 사실과 진위, 최소한 해석할 만한 전문적인 훈련을 쌓은 것으로 인식되도록 노력했다. 그 같은 역사가들, 역사의 인식은 때때로 역사를 힘 있는 자들의 것, 남성의 것, 변방이 아닌 권력 중심부의 역사만이 존재하는 것으로 기술되게 만들었다. 질적연구, 구술사는 이 같은 기존의 역사 서술에 있어 그동안 역사의 행위자이지만 정작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없었던 것들 - 민중, 여성, 소수자, 변방, 일상 등 - 을 그 대상으로 삼는데서 더 나아가 역사를 기술하는 주체로 변형시킨다.

"새로운 역사 쓰기를 위한 구술사 연구방법론"은 지난 번에 읽고 리뷰를 올린 적 있는 "문화와 역사 연구를 위한 질적연구 방법론"과는 일종의 자매편에 속하는 책이다. 지난 번 책을 읽고 윤택림 선생의 글에 이른바 "삘"이 꽂혀서 이 책말고도 "인류학자의 과거여행- 한 빨갱이 마을의 역사를 찾아서(2003, 역사비평사)", "문화에 발목잡힌 한국경제(현민시스템, 1999)"까지 일괄적으로 구입했다. "인류학자의 과거여행"은 부제에서 보이는 것처럼 우리 사회의 가장 민감한 문제이자 실제로는 현재 우리사회의 뒤틀어진 사회 심리의 원초적인 문제를 보여주는 '바닥빨갱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마침 개인적으로도 인연이 적지 않은 지역의 생애사를 연구한 것이라 무척 관심이 많이 가는 책인데, 아직은 다 읽지 못해서 패스...

이 책이 다루는 내용은 "구술생애사" 혹은 "구술사"라고 말하는 것이다. 구술사란 도리어 일반 대중에겐 매우 익숙한 것이지만 정작 학문적인 연구자들의 세계에 이것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90년대 중엽 이후의 일인 듯 싶다. 사실 구술사가 우리에게 익숙한 까닭은 오늘 저녁에라도 퇴근하여 할머니나 어머니에게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조르거나 혹은 당신이 기분 내킬 때마다 들려주던 신세타령이 곧 구술사, 생애사이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구술생애사는 한 개인이 살아온 삶의 이력을 자신의 말로 타인에게 이야기한 기록이다. 이 같은 방식은 본질적으로 자서전과 다르지 않으나 대개 자서전을 남기는 이가 기존의 역사가들도 주목하는 인물이란 점, 자서전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질문에 스스로 답하는 형태를 취한다는 점에서 구술생애사와 구분된다. 구술생애사 역시 역사이므로 구술자의 생애가 지닌 사회적 ․ 문화적 의미에 주목한다.

지금까지 역사의 주류에서 벗어나 있던 평범한 사람(구술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새로운 역사를 재구성(restructure)하고, 구술자 자신이 행위 주체가 되어 스스로 선택한 이야기 속에 나타난 의식구조를 통해 당대의 문화를 이해하고, 개인의 정체성, 사회의식 그리고 역사인식을 드러낸다. 비록 구술자 자신은 개인적인 삶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경험적 맥락(context)이 중시될 경우 마을사, 지역사 또는 국가사를 재구성하는데 일차 사료가 된다. 맥락은 개인이 환경에 영향을 주고, 환경이 개인의 삶을 형성하는 역동적인 과정을 말한다. 앞서 언급한 "인류학자의 과거여행- 한 빨갱이 마을의 역사를 찾아서(2003, 역사비평사)"란 책은 그와 같은 개인의 생애사들이 모여 한 지역의 역사를 재구성해낸 좋은 사례이다.

이 책의 제목에 언급되고 있는 "새로운 역사"란 크게 두 가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첫째는 역사서술의 대상이 힘 있는 자, 권력의 유무에 따르지 않고, 새로운 대상을 찾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를 서술하는 방식이 지금까지처럼 역사가들에 의한 것이 아니라 역사행위자에 의한다는 것이다. 위와 같은 점들이 구술사를 통해 새로운 역사 쓰기를 만들어낸다고 본다. 구술사를 통한 역사 쓰기가 가장 주목받는 것은 일단 크게 두 분야이다. 그 중 하나가 여성사이고, 다른 하나가 지방사인 것도 그와 같은 까닭에서다. 이제부터 밑에 언급하고 있는 여성사와 지방사 부분은 책의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들을 내 나름대로 요약정리해본 것이다.

비어링(Wierling)에 따르면 “여성사”는 19세기말 독일에서 자신들의 기원에 대해 관심을 가진 부르주아 여성운동, 마르크스주의 노동운동사, 그리고 근대의 타자에 대해 질문했던 부르주아 문화사의 일부로 탄생했다. 이 과정에서 근대화 과정에서 배제되었거나 혹은 그 과정과 결부된 사회적 변화의 특수한 희생자가 된 여성들의 경험을 중심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어찌되었든 여성사는 그간 남성 중심으로 기술되어오던 기존 역사서술의 관행에 반대하여 여성을 역사의 주체로 설정하는 것에서 역사 인식의 출발점을 두고 있다. 이때 구분해야 할 것은 여성주의(Feminism)적 시각과 젠더(gender)적 시각의 차이이다. 성의 역사(젠더사)는 여성주의적 역사가 가지는 편향성을 극복하기 위해 나온 대안으로 여성을 남성과 분리하면서 나타나는 한계를 지적하고, 성역할에 대한 의도적 ․ 정치적 구분은 여성만이 아니라 남성에게도 억압적인 상황, 피해를 미쳐왔다는 관점이다.

이와 같은 차이 말고도 여성주의적 시각과 젠더적 시각이 지닌 차이의 핵심은 전자의 경우 여성이 국가사나 지방사에서 중요하기에, 즉 전체사를 움직이는데 중요한 구실을 하기 때문에 여성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라면, 이런 주장은 즉 중요치 않은 여성/사람은 역사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이고, 이는 기존의 역사인식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 젠더적 관점에서 행해지는 비판이다. 다시 말해 여성 중심의 역사 서술의 기준이 사회적 우열이나 정치적인 힘의 강약이 되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여성사에서 구술이 필요한 까닭은 여성과 관련된 자료들이 어떤 형태든 매우 제한적이란 한계 때문이다. 역사는 사료에 입각하여 기술된다고 했을 때, 사료 자체가 남아있지 않을 경우엔 역사 서술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행위의 주체가 민중, 여성, 소수자, 변방, 일상, 피지배계층일 경우 이들의 생애와 증언에 주목하면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다양한 사회구조의 원리들이 서로 경쟁하고 충돌하는 과정이 가장 잘 드러나게 된다.

앞서 여성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지방의 역사를 쓰거나 재구성하고자 할 때도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기존의 역사인식이 주목하지 않았던 분야이고, 근대화 이전과 이후 오랫동안 중앙집권적인 권력구조 속에 놓여있던 지방의 역사적 조건 때문에 사료가 충분치 않다. 지방의 역사를 쓰고자 하는 이라면 누구라도 가장 우선해야 하는 것이 사료발굴이다. 그러나 사료 자체가 남아있지 않은 경우도 많다. 지방사에 있어 구술사가 필요한 까닭은 그것이 1차 사료로서의 구실을 한다는 점도 있지만, 그간 역사인식이 지엽적이라고나 보편적이지 않은 사례라 해서 주목하지 않았던 지역사를 복원한다는 측면에서, 무엇보다 지역민들 스스로를 역사행위자(즉, 주체)의 중심에 놓고 새롭게 재구성하는 역사서술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술사는 오랫동안 학문적인 엄밀함이 결여된 연구 방식으로 오해받아왔다. 구술사 자체에 그와 같은 오해를 자초할 만한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 같은 구술사를 중요한 연구방법론으로 주목받게 한 것은 최근의 문화연구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역사와 사회, 문화연구 등 다양한 부분에서 활용되고 있는 구술사는 사실 인류학에서 파생된 방식이다. 문화연구 역시 인류학의 질적연구 방법론에서 많은 부분을 차용하고 있다. 문화사(문화연구)의 영역에서 구술사가 중요한 것은 구술자가 무슨 말을 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무슨 의도로, 무슨 말을 하고자 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구술자의 생각을 안다는 것은 그가 처한 현실적인 상황과 문화적 전통 등에 입각한 그의 인식의 세계 전반을 이해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구술사의 의미는 그 내용의 진실성 여부에 있기 보다는 이야기를 구성하는 틀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주관적인 해석을 통해 스스로 구성해 가는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 문화사의 핵심이 된다. 이처럼 구술자가 객관적인 사실을 말하고 있는가 아닌가를 검증하는 것보다도 주관적 해석이 깃들인 구술사 속에서 구술자의 정체성, 기억 그리고 이데올로기 등을 파악할 수 있기에 더욱 소중한 문화사적 자료가 되는 것이다. <본문189쪽>

앞서 자매편인 책으로 "문화와 역사 연구를 위한 질적 연구 방법론"에서 이미 상당 부분은 언급되고 있어서 앞선 책을 읽었던 내 입장에서는 중복된다는 느낌도 있지만, 이 분야에 대한 방법론을 별도로 접해본 적이 없는 이들이라도 쉽게 읽어낼 수 있는 난이도와 일목요연한 정리 덕으로 초보자라도 읽기 쉽다는 것이 매력이다. 다만 아쉬운 점은 2만원에 육박하는 책 가격이 비록 대중적인 독서를 위한 책은 아닐지라도 다소 비싸게 느껴지긴 한다. 어쨌거나 최근 역사서술에 있어 주목받고 있는 문화사, 일상사, 구술사 등등에서 이용하는 방법론으로서 그것이 표현하는 방식이나 대상은 차이가 있지만 기본적으론 인류학의 방법론을 원용해 각각의 분야에 맞게 변화발전되어가는 것이다. 공부하는 입장에서도 필요하지만 이같은 역사서술을 읽는 재미를 좀더 심화시키기 위해서도 읽어둘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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