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바람구두 > 세 편의 우중시(雨中詩)

우중행(雨中行)


박용래



비가 오고 있다
안개 속에서
가고 있다
비, 안개, 하루살이가
뒤범벅되어
이내가 되어
덫이 되어

(며칠째)
내 목양말은
젖고 있다.

출처 : 박용래, 먼바다-박용래 시전집, 창비, 1984



추야우중(秋夜雨中)

최치원


秋風唯苦吟(추풍유고음)
世路少知音(세로소지음)
窓外三更雨(창외삼경우)
燈前萬里心(등전만리심)

가을 바람에 오직 괴로운 마음으로 시를 읊으니
세상에 나의 시를 아는 사람이 적구나.
창밖에 밤 깊도록 비가 내리고
등불 앞에는 만 리 고향을 향한 마음만이 서성이네.


----------------------------------------------
박용래 시인의 "우중행(雨中行)"에는 최치원의 한시 "추야우중(秋夜雨中)"의 심상이나 정조와는 다른 느낌이 있습니다. 최치원의 雨中이 창 밖의 광경이고, 시인은 등불 앞에 있어 젖지 않는 것에 비해 박용래의 雨中은 며칠째 목양말을 젖게 하는 비입니다. 그럼에도 박용래의 비는 최치원의 비보다 훨씬 멀리서 내리는 비처럼 느껴집니다. 목양말이 젖는 빗 속에 있는 시인의 비보다 최치원의 비가 더 가까이에서 내리는 비로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까닭은 박용래 시인이 최치원처럼 내리는 비에 마음을 싣지 않고, 관조하는 시적 태도를 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최치원보다 박용래가 빗 속에서 더 외로와 보이는 이유는 또 무엇일까?

혹시 어렸을 때 미래의 나에게 편지를 띄워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알지도 모르겠습니다. 10년 전의 나는 분명 나인데, 현재의 내가 10년 전의 내가 보낸 편지를 읽는 동안 과거의 나란 사람이 과연 어떤 사람이었는지 도통 알 수 없거나 낯설게 느껴질 때...

박용래 시인의 시가 내가 나에게 말을 거는 독백과 같다면, 최치원의 시는 한탄(恨嘆)이기 때문입니다. 최치원은 비록 "세상에 나의 시를 아는 사람이 적구나."라고 노래하지만, 이것은 대상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박용래 시인의 시에서 시인은 그런 대상조차 상정하지 않습니다. 스스로에게 말을 거는 사람은 슬픕니다, 아니 슬프다는 감정조차 맑게 정제된 평온함입니다.

비가 옵니다, 안개 속에서 비는 오는 듯, 가는 듯 합니다.
마음이 실리지 않은 비를 시인은 멍하게 바라봅니다.
비와 안개와 하루살이가 범벅이 됩니다.
어쩌면 시인은 보안등이 매달린 남의 집 처마 끝에 서 있는지도 모릅니다.
갈 곳이 없는 건지, 어디로 가야할 지조차 생각하지 않으며...

슬픔도, 절망도, 비탄도 느끼지 못하는 슬픔이, 절망이, 비탄이 그리고 외로운 평온함이 덫이 되어 (며칠째) 오도가도 못하며 목양말이 젖습니다. 최치원의 시에서 시인의 물리적 위치는 등불 앞에 고정되어 있는 대신 마음이 서성인다면, 박용래 시인의 시에서 시인은 어디론가 가고자 하지만 가지 못한 채 정지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 기형도는 시 "雨中의 나이 - 모든 슬픔은 논리적으로 규명되어질 필요가 있다."에서 "정지해 있는 것은 언제나 독을 품고 있는 법"이라고 이야기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

雨中의 나이
- 모든 슬픔은 논리적으로 규명되어질 필요가 있다.


기형도

  

1
미스 한, 여태껏 여기에 혼자 앉아 있었어? 대단한 폭우라구.
알고 있어요. 여기서도 선명한 빗소리가 들려요. 다행이군. 비 오는 밤은 눅눅해요. 늘 샤워를 하곤 하죠. 샤워. 물이 떨어져 요. 우산을 접으세요. 나프타린처럼 조그맣게 접히는 정열? 커 피 드세요. 고맙군. 그런데 지금까지 내 생을 스푼질해 온 것은 무엇이었을까. 시시한 소리예요. 기형도 씨 무얼했죠? 집을 지 으려 했어. 누구의 집? 글쎄 그걸 모르겠어. 그래서 허물었어 요? 아예 짓지를 않았지. 예? 아니, 뭐. 그저…… 치사한 감정 이나 무상 정도로, 껌 씹을 때처럼.


2
등사 잉크 가득 찬 밤이다. 나는 근래 들어 예전에 안 꾸던 악 몽에 시달리곤 한다. 시간의 간유리. 안개. 이렇게 빗소리 속에 앉아 눈을 감으면 내 흘러온 짧은 거리 여기저기서 출렁거리는 습습한 생의 경사들이 피난민들처럼 아우성치며 떠내려가는 것 이 보인다. 간혹씩 모래사장 위에서 발견되기도 하는 건조한 물 고기 알들.
봄이 가고 여름이 가면 그런 식으로 또 나의 일년은 마취약처럼 은밀히 지나가리라. 술래를 피해 숨죽여 지나가듯. 보인다. 내 남은 일생 곳곳에 미리 숨어 기다리고 있을 숱한 폭우들과 나무 들의 짧은 부르짖음이여.
  

3
고양일 한 마리 들여놨어요. 발톱이 앙증맞죠? 봐요. 이렇게 신 기하게 휘어져요. 파스텔같이. 힘없이 털이 빠지는 꼴이란……
앗, 아파요. 할퀴었어요. 조심해야지. 정지해 있는 것은 언제나 독을 품고 있는 법이야.
  

4
시험지가 다 젖었을 것이다. 위험 수위. 항상 준비해야 한다.
충분한 숙면. 물보다 더욱 가볍게 떠오르기. 하얗게 씻겨 더욱 찬란히 빛나는 삽날의 꿈. 당신의 꿈은?


5
지난 봄엔 애인이 하나 있었지. 떠났어요? 없어졌을 뿐이야. 빛 의 명멸. 멀미 일으키며 침입해오던 여름 노을의 기억뿐이야. 사랑해보라구? 사랑해봐. 비가 안 오는 여름을 상상할 수 있겠 어? 비 때문은 아녜요. 그렇군. 그런데 뭐 먹을 것이 없을까?


6
그리하여 내가 이렇게 묻는다면. 미스 한. 혼자 앉아서 이젠 무 엇을 할래? 집을 짓죠. 누구의 집? 그건 비밀. 그래. 우리에게 어떤 운명적인 과제가 있다면. 그것은 애초에 품었던 우리들 꿈 의 방정식을 각자의 공식대로 풀어가는 것일 터이니. 빗소리. 속의 빗소리. 밖은 여전히 폭우겠죠? 언제나 폭우. 아. 그러면 모든 슬픔은 논리적으로 논리적으로, 논리…… 300원의 논리. 여름엔 여름 옷을 입고 겨울엔 겨울 옷을 입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마음의 여행자
한스 크루파 지음, 서경홍 옮김 / 조화로운삶(위즈덤하우스) / 2006년 6월
평점 :
품절


 

유물론자는 아니지만, 나는 종교나 학문이나 예술에서 다루는 마음 정신 영혼 같은 아이템에 홀딱 넘어가는 사람들을 보면 순진무구하다기보다 참 멍청해 보인다. 버스 기다리는 사람 등뒤로 슬며시 다가와 ‘도에 관심 있으세요’ 속살거리는 길거리 도인을 따라가서 거금 30만원을 털리고 왔던 내 남동생한테나 선물하면 적당할 ‘마음의 여행자’ 같은 책도 그닥 안좋아한다. 안좋아하면서도 나는 이 책을 도서자료실에서 빌려와서 마지막 장까지 다 읽었다.


취향이 아닌 책을 대출해서 끝까지 다 읽은 건 저자인 한스 그루파가 헤르만 헤세 이후 독일 최고의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고 해서다.(영혼 아이템에는 강한데 평단의 평가에는 쫌 약해서리 ㅡㅡ;;) 70년대에 중고등학교 다닌 사람들 대다수가 그렇듯 나 역시 ‘악마에 홀린 것’이라는 뜻에서 유래했다는 ‘데미안’의 카리스마에 꽂힌 바 있으니, 헤세의 전작에 깔려있는 영혼의 구도자니 마음의 길이니 하는 도닦는 소리에 감염된 탓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읽게된 이 책 ‘마음의 여행자’가 ‘유리알 유희’나 ‘마음의 소로’에서 헤세가 그려보인 본질적이고도 근원적인 세계의 그림 비스무리한 걸 드러내느냐 하면, 아니었다. 이 책, 솔직히 지루했다. 꽁트 내지 우화에 가까운 단편소설 열한 편이 하나같이 상투적이고 천편일률적이었다. 매 소설마다 지혜로운 ‘데미안들’이 느닷없이 등장해서는 싹수가 있는 ‘싱클레어들’에게 내가 저 아득한 십대와 이십대의 들녘 어디에선가 누군가에게서 질리게 듣고 감동 먹었던,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를 잔뜩 폼 잡고 되풀이해 들려준다. 대충 이런 구절들이다.

 
“네 마음속에는 다른 사람들과 다른 무언가가 있어. 어쩌면 그것은 늘 깨어있으려는 의식 같은 걸거야. 다른 사람들은 그저 일상에 이끌려 무덤덤하게 살아가고 있는데 넌 그렇지 않아."


"그들은 이미 꿈을 접은 사람들이야. 그런 사람들은 더 이상 이룰 꿈이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꿈조차 앗아 가고 싶어하지. 네 꿈을 잘 간직해야 해. 그렇지 않으면 네 꿈도 날아가버리고 말아. 그 꿈과 함께 나비의 날개도 부서져 버리고... 페터, 너에게 아주 깊은 열망이 있다는 걸 눈빛을 보면 알 수 있어. 넌 너의 삶을 살고 싶어해. 넌 날고 싶은 거야. 그리고 넌 틀림없이 그렇게 할 수 있을 거야."

 

좀 살아본 사람들이라면 대충 눈치 채셨겠지만, 읽고 들을 땐 엄청 멋있고 영양가 있고 그럴싸한데 현실이라는 필드에서는 전혀 힘을 발휘 못하는 말들이다.  


하고보니 말이 좀 심하게 나온 듯한데 이건 어디까지나 삐딱선을 탄 내 경우에 그랬다는 거고, 마음의 여행을 할 자세가 돼있는 사람들한테라면 몹시 매력적인 책일 수도 있겠거니 싶기도 하다. 이 책에 나오는 열한 명의 주인공들이 별 갈등 안하고 마음의 가이드에게 덥석 넘어간 것처럼, 가령 영혼의 목마름을 느껴 길거리 도인의 말에도 귀 기울이는 내 남동생이 읽었다면 울림 깊은 메시지의 성찬에 감격하여 눈길을 조용히 깔 거라는 건 안봐도 비디오니까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말리와 나 - 세계 최악의 말썽꾸러기 개와 함께한 삶 그리고 사랑
존 그로건 지음, 이창희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6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처지가 비슷하다 보면 생활패턴도 비슷해지기 마련, 명절로 주어진 연휴에 은근 싱숭해하던 차에 날아온 문자를 보니 작품 한답시고 화실에 컵라면 쌓아놓고 사는 친구다. 끌끌 혀를 차주고는 동래전철 역 근처 카페로 (득달같이) 나갔다. 친구는 덩치에 어울리잖게 앙증맞은 시츄를 끌어안고 있다. 우여곡절 끝에 맡게된 강아지라는데 어떠냐니까 일초도 안걸려 답이 튀어나온다.


“사람하고 똑같아. 정말 똑같다니까.”


어찌나 똑같은지 기가 차다는 듯 고개를 젓는 친구에게 나 역시 너무 잘 알고 있노라 안심시켰다. 개라는 동물이 얼마나 친인간적인지, 먹여주고 재워만 주는 주인에게 바치는 그들의 순도 100%짜리 믿음과 애정이 얼마나 민망할 정도인지 개를 길러본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다.


또한 개를 키우다 보면 분명히 알게 되는 한 가지 사실이 어떤 개도 연습용이나 대체용 존재가 아니라는 점이다. (애들 정서에 좋아서 개를 데려다 키운다는 정도라면 또 몰라) 개의 1년이 사람 7년에 해당하니까 개의 죽음으로 사람과의 이별을 연습해 볼 수 있어 좋다는 식으로 내뱉는 사람은 절대로 애견가라 할 수 없다는 걸 개를 키워보면 저절로 알게되는 법이다.


정말 그럴까 의심스러우면, 그리고 혼자사는 게 적적하다거나 사람한테 부대끼다 못해 넌덜머리가 난다든가 기타 등등으로 개를 한번 키워볼까 마음먹은 적이 있다면 ‘개죽음’으로 사람과의 이별연습을 꾀하는 야멸친 개주인과 별다를 것 없는 이유로 개를 키우기 시작해  자전적 소설을 펴내기에 이른 존 그로건의 '말리와 나'를 읽어볼 일이다.


존 그로건 부부가 처음 개를 맞아들이려 했던 건 자신들이 장차 아이를 키울 수 있을지 여부를 동물 돌보는 것으로 타진해보자는 이유에서였다. 그랬던 그로건 부부도 ‘세상에 말리 같은 개는 없었다’는 사후 진단을 받은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장애(ADHD) 혐의가 농후한 리트리버종 개 '말리'와 함께 살게 되면서 깨닫는다. 개는 애들 정서함양 내지 상황판단을 돕는 보조 대체물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인간과의 감정교류가 가능한 존재라는 걸 말이다.


말리가 13세의 고령으로 사경을 헤매자 그로건은 안락사를 결정한다. 그리고 그로건은 온집안을 어질러놓고 문짝과 가재도구를 부수고 마당을 파헤치고 차안에 온통 침을 묻혀놓았던, 생존시 세상에서 가장 말썽꾸러기라고 생각했던 말리를 추억하는 칼럼을 쓴다. 그 결과?


다음날부터 그로건에게 수백 통의 메일이 날아들고 ‘세상에 말리 같은 개는 없었다’는 게 완전 착각이었던 걸 알게 된다. 차고 넘칠 정도는 아니라도 말리 같은 개는 세상에 많았다. 자신이 지금 키우고 있는 개가, 혹은 자신이 키웠던 개가 얼마나 멍청하고 얼마나 주책 대책 없고 얼마나 집안 살림을 망쳐놓고 날이면 날마다 갖가지 분란을 일으키는지 낱낱이 고하는 메일에는 그들이 돌보고 키운 말썽꾸러기 개에 대한 사랑과 애착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러니까 단적으로 말해 ‘말리와 나’는 말리에 대한 추억과 함께 전국의 골칫거리 개주인들로부터 날아든 메일을 통해 사랑의 본질을 일러주고 진정한 소통이 어떤 건지를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대낮부터 맥주잔을 함께 기울이며 나는 여러모로 칠칠치 못한 친구 품에 안겨있는 시츄를 염려하여 ‘그 많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 단점조차도 사랑했다.’고 회고하는 그로건의 말을 들려주고는 ‘말리와 나’의 일독을 권했다. 친구는 그러나 시츄의 눈을 그윽이 응시하며 내 말을 무시했다.


“말리는 말리고 쭈쭈는 쭈쭈야.”


맞는 말이었다. 친구가 이미 시츄를, 아니 쭈쭈를 키우고 있다는 걸 내가 깜박했던 것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못드는밤 2006-10-09 1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아지도 모두 개성이 있어서 다 다르지요.
그래도 단점을 다 알지만 정말 '내 아이'는 이뻐요. 그렇죠? 후훗~
강아지가 연습용이나 대체용이 아니라는데 공감 100%!

누미 2006-10-11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 아이'를 기르시는 분이군요^^
집에 있는 시간을 낼 수 없는 형편이라 불가능하지만
길거리에서 개를 볼 때마다 걸음이 멈춰진답니다^^;;
 

천불천탑에 담긴 소망을 만나다
천년 세월을 여는 화순 운주사

 
  도선국사가 가람조성을 감독하며 앉아있었다는 공사바위.
왜 떠나는가. 몸에 잘 맞는 옷처럼 편안한 일상을 훌쩍 벗어던지고, 탈 것에 감금된 채 군것질과 졸음으로 지루한 시간을 때워야 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면서 왜 때마다 철마다 기어이 떠나려 하는가.

9월 중순, 주말을 기해 집을 나서며 불현듯 자문했던 건 찾아간 곳이 하필 운주사여서일까. 사는 이유만큼이나 다양할 듯한, 왜 떠나는가에 대한 답변은 툭 던져진 물음만큼이나 단순하게 되돌아온다.

모든 여행자로 하여금 첫발을 떼게 하는 건 결국 그리움일 터. 이곳이 아닌 저곳에 대한 그리움을 몸살로 앓는 행위라고 여행자의 발길을 규정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떡을 포개놓은 것 같은 원형다층석탑.  
새로운 세상을 꿈꾸다 좌절하는, 운주사에 얽힌 이야기는 여행자의 등을 떼미는 그리움의 다른 얼굴일지 모른다.

순리와 조화의 땅인 화순(和順)에 자리한 운주사는 골짜기에 줄지어 늘어선 불상과 불탑뿐만 아니라 갖가지 전설로 신비감을 더하는 사찰이다.

사찰이라고는 하지만 일주문도 사천왕상도 없는 운주사에 들어서면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저편 끝 영귀산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도선국사가 가람조성을 감독하며 앉아있었다는 공사바위가 보인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운주사는 천불산에 있으며 절 좌우 산에 석불과 석탑이 각 1000기씩 있고 두 석불이 서로 등을 대고 앉아있다’고 적혀있다. 또한 여러 가지 유래가 전해오는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게 부부와불에 얽힌 전설이다.

도선국사가 천불천탑을 세워 천년 동안의 태평성대를 열고자 석수들을 불러들여 대공사를 했다.

불심 깊은 석공들이 도선의 지시 아래 새 세상에 대한 염원을 담아 하룻날 하룻밤 동안 천불천탑을 거의 다 세워가는데 일하기 싫어한 한 동자승이 “꼬끼오” 소리를 냈다.

 
  발우를 닮은 원구형 석탑.
이에 놀라고 실망한 석공들이 날이 샌 거라 착각해 그만 손을 놓는 바람에 마지막으로 일으켜 세우려던 부부불상이 와불로 남게 되었다 한다.

좌절된 꿈의 허전함을 잠시라도 유보하고 싶어서겠다. 이 부부불상은 평지에 흩어진 탑과 석불을 거치고 석벽에 새겨진 마애여래좌상을 만난 뒤 마지막으로 찾게 된다.

대웅전 왼쪽의 산을 올라가면 시위불이 나타나는데 거기서 몇 걸음만 더 올라가면 좌불과 입상으로 누워있는 부부불상을 만날 수 있다.

자연석 암반에 조각된 채로 누운 불상을 떼어내려 애쓴 자취에는 불가항력 앞에서 무너지는 석공의 탄식이 고스란히 배어있다.

그래서일 거다. 접근금지를 경고하는 석탑이 아니라 떡을 포개놓은 것 같은 원반형 다층석탑과 정겹게 쌓아놓은 거지탑과 발우모양의 원구형석탑을 들여다보노라면 땀을 쏟으며 정을 휘두르는 석공들이 떠오른다.

 
대웅전 북쪽의 거대한 바위벼랑에 새겨진 마이여래 좌상.  
위엄을 부리는 불상이 아니라 벼랑에 기댄 채 비스듬하게 앉은 석불과 코가 닳고 눈과 입이 뭉개진 돌부처를 들여다보노라면 그들의 아내와 노모가,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자식이 떠오르고.

그리고 마침내는 흐릿한 형상의 불상들에 눈과 코와 입을, 가슴 한켠에 접어넣었던 이상향을 그려놓고 있는 자신을 들여다보게 된다.

하여, 발길을 돌려나올 즘이면 그런 생각이 든다. 무작정하고 떠난 발길이 어디를 향하든 이상향에 대한 그리움을 잃지 않는 한 새로운 세상은 여전히 열려있을 거라는.

 
  절 서쪽 산비탈 숲속에 길이가 12m인 남편불과 10m인 아내불이 사이좋게 누워 있다.
 
마치 이곳 운주사가 천불천탑에 실패함으로써 천년 세월을 뛰어넘는 상상의 공간으로 자리해 왔듯이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이상한 슬픔의 원더랜드
정미경 지음 / 현대문학 / 2005년 6월
평점 :
품절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자체로 삶에 형식을 부여한다고 한다. 그러나 어디 사랑뿐이겠는가. 정미경의 <이상한 슬픔의 원더랜드>는 사랑의 변주와도 같은 욕망을 다룬 소설로 ‘욕망한다는 것은, 욕망한다는 그 자체로 삶에 형식을 부여한다’는 결론을 도출해 낸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욕망을 다른 사건을 추동케하는 원동력으로 깔아놓는 게 아니라, 욕망 그 자체를 주제로 다룬다. 좀 웃기는 추측이지만, 나는 (이 소설뿐 아니라) 욕망을 다룬 소설들의 원조가  ‘세 가지 소원’이라는 동화이고, 욕망은 소원 모티브의 변용이 아닐까 싶다.


욕망의 이면을 의뭉스럽게 들춰내는 ‘세 가지 소원’ 이야기가 동서고금을 아우르며 다양한 버전으로 나왔다는 건 ‘욕망’이야말로 식욕이나 성욕이나 에고와 동급인 인간조건임을 확인케 한다. 재밌는 건 소원이 항상 세 가지로 한정된다는 점이다. 왜 하필 세 가지일까, 내심 묻고 답해놓고 보면 감이 잡힌다. 금력, 권력, 매력(매력발산의 조건인 아름다운 외모, 젊음을 포괄하는). 이 세 가지 답변이 욕망의 우선순위로 열거된 데 의아해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이상한 슬픔의 원더랜드>는 무소불위의 산신령에 상응하는 돈과 권력이 사랑을 얻기위한 포석으로 장치된 가운데 권력을 좇는 최한석과 돈을 좇는 이중호, 사랑을 좇는 오윤희, 유지원, 김동주 등 다섯 인물이 소설을 끌고나간다.


동화속 무지한 부부가 허영과 과욕과 질투와 성급함과 이기와 같은 성격적 결함으로 세 가지 소원을 말아먹고 마는 것처럼, 돈과 권력과 사랑이라는 세 범주의 자본주의적 욕망을 체현하며 사는 인물들 가운데 누구도 행복하지 못하다.


카리스마 넘치는 운동권 리더였던 최한석은 학우의 투신사건에 관련돼 도피하는 과정에서 야학 제자인 오윤희와 관계를 맺으며 유지원과 김동주에게도 상처를 남긴다. 그리고 20년 후 정치권의 핵심부에 들어서는데, 권력의 정점에서 표출되는 최한석의 상승욕망은 낡은 동아줄을 거머쥔 곡예사처럼 아슬아슬하고 불안하다.


서로를 살벌하게 미워하는 부모 밑에서 자란 이중호는 투기와 투자, 거기에 따라오는 긴장과 희열을 통해서만 자기존재를 느낀다. 인간적 감정에 관한한 백지상태로 여자에 대한 욕정조차 느끼지 못하는 이중호는 최한석을 끌어들인 '보물선 사업'에 한탕을 건다. 이 투기사업이 정치권의 '게이트'에 연루되면서 이중호는 최한석의 사주에 의해 총을 맞고 죽는다.


빈민층 출신의 오윤희는 도피 중이던 야학선생 최한석을 숨겨주고 그의 아이를 가졌다가 낙태한다. 그가 떠난 후 예쁜 얼굴과 잘빠진 몸매를 밑천삼아 고급 매춘을 하면서 대외적으로는 연예인으로 활동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순정을 바쳤던 최한석을 다시 만나 그의 사랑을 얻으려 하지만 최한석의 마음이 유지원에게 가있는 걸 알고 총을 들어 최한석을 겨눈다.


이들 세 인물과 달리, 돈과 권력과 사랑에 대한 소유욕망에 있어 비교적 거리를 둔 유지원과 김동주의 삶은 작가의 직접조명에서 비켜난 듯 흐릿하다. 욕망의 함량이 세 가지 소원을 비는 기회로 작용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타적 순정을 간직해온 두 사람이 제 삶의 테두리에 갇힌 채 이 사회의 주변인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사실은 묘한 역설을 느끼게도 한다. 


작가가 의도했든 안했든 저 다섯 명의 삶이 얽히고설키는 난마의 굿판은 자본사회에 발을 디딘 이상 그 누구도 욕망의 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폭로하면서 동시에 질문을 던져온다.


“자, 그러니 어쩔래? 너는 위험수당을 크게 지불하며 빛나는 정상의 삶을 추구할래, 아니면 그냥 결정적인 파국을 모면하는 대가로 무명의 주변부 삶에 머물래?”


욕망의 변주로 던져오는 이 질문에 맞닥뜨렸다 해도 당황할 필요는 없다. 세 가지 소원 앞에 황감해 하는 동화속 부부와 달리 우리는 이미 대상을 욕망하는 것에서 나아가 욕망 그 자체를 욕망하며 채워지지 않는 갈증과 허기로 괴로워하는 욕망의 속성을 꿰뚫어보았고, 돈과 권력과 사랑이라는 대상을 단념한 무채색의 삶이 가져다주는 마음의 쓸쓸한 평정을 눈치챌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알다시피 욕망의 허와 실, 어느 쪽에 배팅할지는 어디까지나 자유니까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