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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슬픔의 원더랜드
정미경 지음 / 현대문학 / 2005년 6월
평점 :
품절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자체로 삶에 형식을 부여한다고 한다. 그러나 어디 사랑뿐이겠는가. 정미경의 <이상한 슬픔의 원더랜드>는 사랑의 변주와도 같은 욕망을 다룬 소설로 ‘욕망한다는 것은, 욕망한다는 그 자체로 삶에 형식을 부여한다’는 결론을 도출해 낸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욕망을 다른 사건을 추동케하는 원동력으로 깔아놓는 게 아니라, 욕망 그 자체를 주제로 다룬다. 좀 웃기는 추측이지만, 나는 (이 소설뿐 아니라) 욕망을 다룬 소설들의 원조가 ‘세 가지 소원’이라는 동화이고, 욕망은 소원 모티브의 변용이 아닐까 싶다.
욕망의 이면을 의뭉스럽게 들춰내는 ‘세 가지 소원’ 이야기가 동서고금을 아우르며 다양한 버전으로 나왔다는 건 ‘욕망’이야말로 식욕이나 성욕이나 에고와 동급인 인간조건임을 확인케 한다. 재밌는 건 소원이 항상 세 가지로 한정된다는 점이다. 왜 하필 세 가지일까, 내심 묻고 답해놓고 보면 감이 잡힌다. 금력, 권력, 매력(매력발산의 조건인 아름다운 외모, 젊음을 포괄하는). 이 세 가지 답변이 욕망의 우선순위로 열거된 데 의아해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이상한 슬픔의 원더랜드>는 무소불위의 산신령에 상응하는 돈과 권력이 사랑을 얻기위한 포석으로 장치된 가운데 권력을 좇는 최한석과 돈을 좇는 이중호, 사랑을 좇는 오윤희, 유지원, 김동주 등 다섯 인물이 소설을 끌고나간다.
동화속 무지한 부부가 허영과 과욕과 질투와 성급함과 이기와 같은 성격적 결함으로 세 가지 소원을 말아먹고 마는 것처럼, 돈과 권력과 사랑이라는 세 범주의 자본주의적 욕망을 체현하며 사는 인물들 가운데 누구도 행복하지 못하다.
카리스마 넘치는 운동권 리더였던 최한석은 학우의 투신사건에 관련돼 도피하는 과정에서 야학 제자인 오윤희와 관계를 맺으며 유지원과 김동주에게도 상처를 남긴다. 그리고 20년 후 정치권의 핵심부에 들어서는데, 권력의 정점에서 표출되는 최한석의 상승욕망은 낡은 동아줄을 거머쥔 곡예사처럼 아슬아슬하고 불안하다.
서로를 살벌하게 미워하는 부모 밑에서 자란 이중호는 투기와 투자, 거기에 따라오는 긴장과 희열을 통해서만 자기존재를 느낀다. 인간적 감정에 관한한 백지상태로 여자에 대한 욕정조차 느끼지 못하는 이중호는 최한석을 끌어들인 '보물선 사업'에 한탕을 건다. 이 투기사업이 정치권의 '게이트'에 연루되면서 이중호는 최한석의 사주에 의해 총을 맞고 죽는다.
빈민층 출신의 오윤희는 도피 중이던 야학선생 최한석을 숨겨주고 그의 아이를 가졌다가 낙태한다. 그가 떠난 후 예쁜 얼굴과 잘빠진 몸매를 밑천삼아 고급 매춘을 하면서 대외적으로는 연예인으로 활동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순정을 바쳤던 최한석을 다시 만나 그의 사랑을 얻으려 하지만 최한석의 마음이 유지원에게 가있는 걸 알고 총을 들어 최한석을 겨눈다.
이들 세 인물과 달리, 돈과 권력과 사랑에 대한 소유욕망에 있어 비교적 거리를 둔 유지원과 김동주의 삶은 작가의 직접조명에서 비켜난 듯 흐릿하다. 욕망의 함량이 세 가지 소원을 비는 기회로 작용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타적 순정을 간직해온 두 사람이 제 삶의 테두리에 갇힌 채 이 사회의 주변인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사실은 묘한 역설을 느끼게도 한다.
작가가 의도했든 안했든 저 다섯 명의 삶이 얽히고설키는 난마의 굿판은 자본사회에 발을 디딘 이상 그 누구도 욕망의 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폭로하면서 동시에 질문을 던져온다.
“자, 그러니 어쩔래? 너는 위험수당을 크게 지불하며 빛나는 정상의 삶을 추구할래, 아니면 그냥 결정적인 파국을 모면하는 대가로 무명의 주변부 삶에 머물래?”
욕망의 변주로 던져오는 이 질문에 맞닥뜨렸다 해도 당황할 필요는 없다. 세 가지 소원 앞에 황감해 하는 동화속 부부와 달리 우리는 이미 대상을 욕망하는 것에서 나아가 욕망 그 자체를 욕망하며 채워지지 않는 갈증과 허기로 괴로워하는 욕망의 속성을 꿰뚫어보았고, 돈과 권력과 사랑이라는 대상을 단념한 무채색의 삶이 가져다주는 마음의 쓸쓸한 평정을 눈치챌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알다시피 욕망의 허와 실, 어느 쪽에 배팅할지는 어디까지나 자유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