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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여행자
한스 크루파 지음, 서경홍 옮김 / 조화로운삶(위즈덤하우스) / 2006년 6월
평점 :
품절
유물론자는 아니지만, 나는 종교나 학문이나 예술에서 다루는 마음 정신 영혼 같은 아이템에 홀딱 넘어가는 사람들을 보면 순진무구하다기보다 참 멍청해 보인다. 버스 기다리는 사람 등뒤로 슬며시 다가와 ‘도에 관심 있으세요’ 속살거리는 길거리 도인을 따라가서 거금 30만원을 털리고 왔던 내 남동생한테나 선물하면 적당할 ‘마음의 여행자’ 같은 책도 그닥 안좋아한다. 안좋아하면서도 나는 이 책을 도서자료실에서 빌려와서 마지막 장까지 다 읽었다.
취향이 아닌 책을 대출해서 끝까지 다 읽은 건 저자인 한스 그루파가 헤르만 헤세 이후 독일 최고의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고 해서다.(영혼 아이템에는 강한데 평단의 평가에는 쫌 약해서리 ㅡㅡ;;) 70년대에 중고등학교 다닌 사람들 대다수가 그렇듯 나 역시 ‘악마에 홀린 것’이라는 뜻에서 유래했다는 ‘데미안’의 카리스마에 꽂힌 바 있으니, 헤세의 전작에 깔려있는 영혼의 구도자니 마음의 길이니 하는 도닦는 소리에 감염된 탓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읽게된 이 책 ‘마음의 여행자’가 ‘유리알 유희’나 ‘마음의 소로’에서 헤세가 그려보인 본질적이고도 근원적인 세계의 그림 비스무리한 걸 드러내느냐 하면, 아니었다. 이 책, 솔직히 지루했다. 꽁트 내지 우화에 가까운 단편소설 열한 편이 하나같이 상투적이고 천편일률적이었다. 매 소설마다 지혜로운 ‘데미안들’이 느닷없이 등장해서는 싹수가 있는 ‘싱클레어들’에게 내가 저 아득한 십대와 이십대의 들녘 어디에선가 누군가에게서 질리게 듣고 감동 먹었던,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를 잔뜩 폼 잡고 되풀이해 들려준다. 대충 이런 구절들이다.
“네 마음속에는 다른 사람들과 다른 무언가가 있어. 어쩌면 그것은 늘 깨어있으려는 의식 같은 걸거야. 다른 사람들은 그저 일상에 이끌려 무덤덤하게 살아가고 있는데 넌 그렇지 않아."
"그들은 이미 꿈을 접은 사람들이야. 그런 사람들은 더 이상 이룰 꿈이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꿈조차 앗아 가고 싶어하지. 네 꿈을 잘 간직해야 해. 그렇지 않으면 네 꿈도 날아가버리고 말아. 그 꿈과 함께 나비의 날개도 부서져 버리고... 페터, 너에게 아주 깊은 열망이 있다는 걸 눈빛을 보면 알 수 있어. 넌 너의 삶을 살고 싶어해. 넌 날고 싶은 거야. 그리고 넌 틀림없이 그렇게 할 수 있을 거야."
좀 살아본 사람들이라면 대충 눈치 채셨겠지만, 읽고 들을 땐 엄청 멋있고 영양가 있고 그럴싸한데 현실이라는 필드에서는 전혀 힘을 발휘 못하는 말들이다.
하고보니 말이 좀 심하게 나온 듯한데 이건 어디까지나 삐딱선을 탄 내 경우에 그랬다는 거고, 마음의 여행을 할 자세가 돼있는 사람들한테라면 몹시 매력적인 책일 수도 있겠거니 싶기도 하다. 이 책에 나오는 열한 명의 주인공들이 별 갈등 안하고 마음의 가이드에게 덥석 넘어간 것처럼, 가령 영혼의 목마름을 느껴 길거리 도인의 말에도 귀 기울이는 내 남동생이 읽었다면 울림 깊은 메시지의 성찬에 감격하여 눈길을 조용히 깔 거라는 건 안봐도 비디오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