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좀 본다는 사람치고 팀버튼을 모르기는 어려울 것이다.
팀버튼 감독의 영화는 한결같이
어디 한군데 장애를 겪거나 특이한 기능을 지닌 존재가
보통 사람들의 세계로 편입해 들어가려 애쓰는 과정을 보여준다.
천편일률적이라 해도 과언 아닌 그의 영화를
기를 쓰고 찾아보는 마니아가 적지 않은 이유는
살인과 폭행과 범죄와 음모가 판을 치는 역겨운 세상에서 펼쳐지는
정말 재수없이 인생에 금간 인물들의 역경이
그것이 애니든 실사든, 팀버튼이라는 감독과 만나면서는
동화처럼 환상적인 세계로 재구성되고
가슴 저미는 로맨스로 새롭게 피어난다는 데 있다.
거기에 더해 팀버튼이 창조해내는 인물들 또한 가만 보면
얘들 혹시 감독의 분신이 아닌가, 싶게 묘한 매력을 발산한다.
기괴하고 끔찍하고 혐오스러운 장애를 지녔거나 치명적인 약점을 가진
‘팀버튼적 상황’에 던져진 주인공들은
따뜻한 감성을 지녔을 뿐 아니라 동정의 여지가 차고 넘친다
특히 그들이 관객들로부터 공감의 지평을 확보하는 건
타자, 혹은 삶의 조건인 상황에 의해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고
그 때문에 정상적인 삶의 경계 밖으로 밀려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축출하고 그들에게 다시 위해를 가할지 모르는
정상인들과 어울려 살 수 있는 세상을 소망하며
그로 인해 다시 상처를 받는 인물로 그려진다는 점 때문이다.


가슴 저미도록 애틋한,
그러나 결국 좌절되는 소망이 야기하는 존재론적 비극이
영화의 설정이 되면서
전편을 채우는 환상과 동화적 색채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으로 비극적인 세계가 그려질 수밖에 없는
팀버튼의 영화문법은 ‘유령신부’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거울을 경계로 대치해 놓은 듯 상반된 두 세계를 배경으로 삼는
그의 다른 영화에서처럼 '유령신부' 역시
눈알이 튀어나오고 뼈다귀와 텅빈 내장을 드러내는 해골의 꼴을 하고 있지만
솔직하고 거침없이 자유로운 감정을 발산하는 유령신부의 저승세계와
장사로 떼돈 번 부모의 재산과 귀족가문의 영예를 정략결혼으로 누리며 살 수 있으나
강압적인 권위와 단조롭고 무미건조한 겉치레의 형식속에 갇힌 빅토리아의 현실세계가
흑과 백처럼 대비되어 보여진다.
과연 빅터가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빅토리아,라고 답했다면 팀버튼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리라.
물론 이 영화에서 빅터는 빅토리아와 결혼해 정상적인 삶의 경계안으로 들어가지만
애니 산업의 상업적 측면을 고려한 해피엔딩을 한꺼풀 벗겨보면
팀버튼의 시선이 머무는 곳이 유령신부가 속한 세계임을 눈치채는 건 어렵지 않다.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거기다 인간적으로 건강한 욕구를 지니고서
지극히 정상적인 지적 활동과 감성표현을 하며 살고있다고 확고히 믿는 이들의
이른바 정상적인 삶이란 것이 얼마나 위선적이며 황당무계한지
또한 가공하리만큼 잔혹하고 기괴한 것인지를
팀버튼은 유령신부에서도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다.
빌려온 테이프로 영화를 다시 보니 새삼 알 거 같다.
팀버튼 하면 왜 자꾸 피터팬과 후크를 섞어놓은 인물이 연상되는지,
심술궂고 유머러스하고 기괴하고 독특하고 대책없이 늙어버린
어린아이의 슬픈 얼굴이 떠오르고 마는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