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불천탑에 담긴 소망을 만나다
천년 세월을 여는 화순 운주사

 
  도선국사가 가람조성을 감독하며 앉아있었다는 공사바위.
왜 떠나는가. 몸에 잘 맞는 옷처럼 편안한 일상을 훌쩍 벗어던지고, 탈 것에 감금된 채 군것질과 졸음으로 지루한 시간을 때워야 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면서 왜 때마다 철마다 기어이 떠나려 하는가.

9월 중순, 주말을 기해 집을 나서며 불현듯 자문했던 건 찾아간 곳이 하필 운주사여서일까. 사는 이유만큼이나 다양할 듯한, 왜 떠나는가에 대한 답변은 툭 던져진 물음만큼이나 단순하게 되돌아온다.

모든 여행자로 하여금 첫발을 떼게 하는 건 결국 그리움일 터. 이곳이 아닌 저곳에 대한 그리움을 몸살로 앓는 행위라고 여행자의 발길을 규정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떡을 포개놓은 것 같은 원형다층석탑.  
새로운 세상을 꿈꾸다 좌절하는, 운주사에 얽힌 이야기는 여행자의 등을 떼미는 그리움의 다른 얼굴일지 모른다.

순리와 조화의 땅인 화순(和順)에 자리한 운주사는 골짜기에 줄지어 늘어선 불상과 불탑뿐만 아니라 갖가지 전설로 신비감을 더하는 사찰이다.

사찰이라고는 하지만 일주문도 사천왕상도 없는 운주사에 들어서면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저편 끝 영귀산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도선국사가 가람조성을 감독하며 앉아있었다는 공사바위가 보인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운주사는 천불산에 있으며 절 좌우 산에 석불과 석탑이 각 1000기씩 있고 두 석불이 서로 등을 대고 앉아있다’고 적혀있다. 또한 여러 가지 유래가 전해오는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게 부부와불에 얽힌 전설이다.

도선국사가 천불천탑을 세워 천년 동안의 태평성대를 열고자 석수들을 불러들여 대공사를 했다.

불심 깊은 석공들이 도선의 지시 아래 새 세상에 대한 염원을 담아 하룻날 하룻밤 동안 천불천탑을 거의 다 세워가는데 일하기 싫어한 한 동자승이 “꼬끼오” 소리를 냈다.

 
  발우를 닮은 원구형 석탑.
이에 놀라고 실망한 석공들이 날이 샌 거라 착각해 그만 손을 놓는 바람에 마지막으로 일으켜 세우려던 부부불상이 와불로 남게 되었다 한다.

좌절된 꿈의 허전함을 잠시라도 유보하고 싶어서겠다. 이 부부불상은 평지에 흩어진 탑과 석불을 거치고 석벽에 새겨진 마애여래좌상을 만난 뒤 마지막으로 찾게 된다.

대웅전 왼쪽의 산을 올라가면 시위불이 나타나는데 거기서 몇 걸음만 더 올라가면 좌불과 입상으로 누워있는 부부불상을 만날 수 있다.

자연석 암반에 조각된 채로 누운 불상을 떼어내려 애쓴 자취에는 불가항력 앞에서 무너지는 석공의 탄식이 고스란히 배어있다.

그래서일 거다. 접근금지를 경고하는 석탑이 아니라 떡을 포개놓은 것 같은 원반형 다층석탑과 정겹게 쌓아놓은 거지탑과 발우모양의 원구형석탑을 들여다보노라면 땀을 쏟으며 정을 휘두르는 석공들이 떠오른다.

 
대웅전 북쪽의 거대한 바위벼랑에 새겨진 마이여래 좌상.  
위엄을 부리는 불상이 아니라 벼랑에 기댄 채 비스듬하게 앉은 석불과 코가 닳고 눈과 입이 뭉개진 돌부처를 들여다보노라면 그들의 아내와 노모가,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자식이 떠오르고.

그리고 마침내는 흐릿한 형상의 불상들에 눈과 코와 입을, 가슴 한켠에 접어넣었던 이상향을 그려놓고 있는 자신을 들여다보게 된다.

하여, 발길을 돌려나올 즘이면 그런 생각이 든다. 무작정하고 떠난 발길이 어디를 향하든 이상향에 대한 그리움을 잃지 않는 한 새로운 세상은 여전히 열려있을 거라는.

 
  절 서쪽 산비탈 숲속에 길이가 12m인 남편불과 10m인 아내불이 사이좋게 누워 있다.
 
마치 이곳 운주사가 천불천탑에 실패함으로써 천년 세월을 뛰어넘는 상상의 공간으로 자리해 왔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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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벌레  


                           
        복효근



     오체투지, 일보일배다

     걸음걸음이 절명의 순간일러니

     세상에 경전 아닌 것은 없다



     제가 걸어온 만큼만 제 일생이어서

     몸으로 읽는 경전



     한 자도 건너뛸 수 없다




 

나는 옳지 않았다.

내 말이나 내 생각이나 내 판단이 옳지않았을 수도 있고,
내 말이나 내 생각이나 내 판단이 옳았다 하더라도

내 말이나 내 생각이나 내 판단을 드러냈다는 사실이 옳지않았을 수도 있고,
내 말이나 내 생각이나 내 판단의 옳고그름을 떠나

내 말이나 내 생각이나 내 판단을 드러내는 방식이 옳지않았을 수도 있다.


나를 전적으로 믿는 게 미련한 짓이듯
내가 취한 태도를 전적으로 반성하는 것 또한 그만큼 미련한 짓이며

나 아닌 타인을 전적으로 믿거나
전적으로 비난하는 것 또한 그만큼 미련하고 어리석은 짓이리라.
 

모욕이든 비난이든, 혹은 아전인수의 욕심에서든
그것이 정당한지 아닌지 따지는 건 차후의 일이고, 일단은
흔드는 만큼만 흔들릴 일이다.

그 이상을 사양하는 한,
누구든 무엇에 대해서든 어떤 상황에 처하든

여전히 괜찮다. 


잊지말아야 할 건
사람들을 움직이는 게 당위나 공평무사나 합리적인 판단이 아니라는 것.

사람들의 사고와 태도를 결정짓게 하는 건 각자에게 주어진 상황,

각자가 지닌 조건, 그들 각자에게 가해질 유불리 따위다. 

오직 그들 각자의 입장과 이해만이
각자를 대변하며 각자의 마음을 움직이며 각자의 행동을 좌우한다.


명심하자.

사람들을 향한 시선을 그들 뒤편으로 밀어내야 한다는 것.
방향을 틀 것, 잣대를 상황 쪽에 둘 것,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설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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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좀 본다는 사람치고 팀버튼을 모르기는 어려울 것이다.

팀버튼 감독의 영화는 한결같이

어디 한군데 장애를 겪거나 특이한 기능을 지닌 존재가

보통 사람들의 세계로 편입해 들어가려 애쓰는 과정을 보여준다.

천편일률적이라 해도 과언 아닌 그의 영화를

기를 쓰고 찾아보는 마니아가 적지 않은 이유는

살인과 폭행과 범죄와 음모가 판을 치는 역겨운 세상에서 펼쳐지는

정말 재수없이 인생에 금간 인물들의 역경이

그것이 애니든 실사든, 팀버튼이라는 감독과 만나면서는

동화처럼 환상적인 세계로 재구성되고

가슴 저미는 로맨스로 새롭게 피어난다는 데 있다.

거기에 더해 팀버튼이 창조해내는 인물들 또한 가만 보면

얘들 혹시 감독의 분신이 아닌가, 싶게 묘한 매력을 발산한다.

기괴하고 끔찍하고 혐오스러운 장애를 지녔거나 치명적인 약점을 가진

‘팀버튼적 상황’에 던져진 주인공들은

따뜻한 감성을 지녔을 뿐 아니라 동정의 여지가 차고 넘친다

특히 그들이 관객들로부터 공감의 지평을 확보하는 건

타자, 혹은 삶의 조건인 상황에 의해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고

그 때문에 정상적인 삶의 경계 밖으로 밀려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축출하고 그들에게 다시 위해를 가할지 모르는

정상인들과 어울려 살 수 있는 세상을 소망하며

그로 인해 다시 상처를 받는 인물로 그려진다는 점 때문이다.

 





 

가슴 저미도록 애틋한,

그러나 결국 좌절되는 소망이 야기하는 존재론적 비극이

영화의 설정이 되면서

전편을 채우는 환상과 동화적 색채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으로 비극적인 세계가 그려질 수밖에 없는

팀버튼의 영화문법은 ‘유령신부’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거울을 경계로 대치해 놓은 듯 상반된 두 세계를 배경으로 삼는

그의 다른 영화에서처럼 '유령신부' 역시

눈알이 튀어나오고 뼈다귀와 텅빈 내장을 드러내는 해골의 꼴을 하고 있지만

솔직하고 거침없이 자유로운 감정을 발산하는 유령신부의 저승세계와

장사로 떼돈 번 부모의 재산과 귀족가문의 영예를 정략결혼으로 누리며 살 수 있으나

강압적인 권위와 단조롭고 무미건조한 겉치레의 형식속에 갇힌 빅토리아의 현실세계가

흑과 백처럼 대비되어 보여진다.

과연 빅터가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빅토리아,라고 답했다면 팀버튼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리라.

물론 이 영화에서 빅터는 빅토리아와 결혼해 정상적인 삶의 경계안으로 들어가지만

애니 산업의 상업적 측면을 고려한 해피엔딩을 한꺼풀 벗겨보면

팀버튼의 시선이 머무는 곳이 유령신부가 속한 세계임을 눈치채는 건 어렵지 않다.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거기다 인간적으로 건강한 욕구를 지니고서

지극히 정상적인 지적 활동과 감성표현을 하며 살고있다고 확고히 믿는 이들의

이른바 정상적인 삶이란 것이 얼마나 위선적이며 황당무계한지

또한 가공하리만큼 잔혹하고 기괴한 것인지를

팀버튼은 유령신부에서도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다.

빌려온 테이프로 영화를 다시 보니 새삼 알 거 같다.

팀버튼 하면 왜 자꾸 피터팬과 후크를 섞어놓은 인물이 연상되는지,

심술궂고 유머러스하고 기괴하고 독특하고 대책없이 늙어버린

어린아이의 슬픈 얼굴이 떠오르고 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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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다시 보는 필화사] 장정일의 『내게 거짓말을 해봐』

대한민국의 문화적 소양과 예술가의 운명
  장정일의 『내게 거짓말을 해봐』 [위지혜] 2005-12-26 오전 11:12:57 
 
『내게 거짓말을 해봐』의 작가 장정일 /사진제공 <데일리서프라이즈>
▲ 『내게 거짓말을 해봐』의 작가 장정일 /사진제공 <데일리서프라이즈>

안타깝게도 지금 내 손에는 『내게 거짓말을 해봐』가 없다. 구입하려고 해도 구입할 수가 없고, 학교 도서관의 자료를 검색해도 도대체 나오지가 않는다. 공권력의 가공할 위력이다. 그러니 새롭게 읽지 못한 상태에서 기억에 의존하여 글을 써 내려갈 도리밖에 없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1996년 『내게 거짓말을 해봐』가 출판되었을 때 재빨리 책을 사서 읽었다는 사실이다. 『아담이 눈뜰 때』를 접한 직후부터 장정일은 관심이 많이 가는 작가였기에 『내게 거짓말을 해봐』를 읽으며 이런저런 생각을 넓게 펼쳐 나갔던 기억이 새롭다.

내가 샀던 『내게 거짓말을 해봐』는 아마 강준만 교수가 소장하고 있을 것이다. 음란성 여부로 『내게 거짓말을 해봐』의 작가 장정일이 재판을 받을 무렵 강준만 교수는 장정일에 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그 글에서 강 교수는 『내게 거짓말을 해봐』에 대한 논의를 제대로 펼칠 수 없다고 적어 두었다. 책을 구할 수 없었던 까닭에 읽지 못했다는 것이다. 당시 내 생각은 이러했다. ‘왕성한 필력을 자랑하는 강준만 교수가 이 문제를 사회적 의제로 부각시키면 좋겠군. 法典과 예술의 거리를 자리매김하는 데 도움이 될 거야. 그렇다면 『내게 거짓말을 해봐』가 내 수중에 있는 것보다 강준만 교수에게 넘어가는 게 낫지 않을까.’ 『내게 거짓말을 해봐』를 우편으로 강 교수에게 부쳤던 이유다.

먼저 『내게 거짓말을 해봐』의 재판 관련 일지를 보자. 이 일지는 『장정일: 화두, 혹은 코드』(행복한 책읽기, 2001)의 「변론기: 장정일을 위한 변론」이라는 글 뒤에 붙어 있다. 「변론기」를 쓴 사람은 훗날 법무부장관을 역임하게 된 강금실 변호사다. 당시 강금실 변호사가 장정일의 변호를 맡았다는 사실이 새삼 흥미를 끄는 바 있다.

1996. 10. 10 김영사에서 출간
1996. 10. 31. 간행물윤리위원회에서 관계당국에 제재권고 결정
1996. 11. 14. 김영사 상무이사 김영범 씨, 음란물판매죄로 구속
1996. 12. 30. 벌금 700만원 선고
1996. 12. 31. 장정일 씨, 프랑스에서 귀국하여 자진출두
1997. 1. 7. 검찰은 장정일 씨에 대하여 구속영장을 청구하였으나 신형근 판사는 도주의 우려가 없다는 이유로 기각
1997. 1. 13. 장정일 씨, 음란문서제조죄 등으로 불구속 기소
1997. 5.30. 서울지방법원 김형진 판사는 작가 장정일 씨의 1심 재판(97고단172호) 선고기일에 실형 10월을 선고하고, 반성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법정구속
1997. 7. 23. 항소심재판부(97노4055호, 재판장 한정덕 부장판사)는 장정일 씨에 대한 보석결정하여 석방
1998. 2. 18. 항소심에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1년의 선고를 받고 상고
2000. 7. 상고심(대법원 98도679호)에서 상고기각 확정

논란은 『내게 거짓말을 해봐』의 외설을 형법에서 규정하는 ‘음란’으로 규정할 수 있는가를 두고 벌어졌다. 38세의 유부남과 18세의 여고생이 벌이는 가학/피학적인 성행위라든가 폰섹스, 구강성교, 항문성교 따위를 어떻게 볼 것인가가 문제였다는 것이다. “익숙한 사고방식과 기성논리를 통렬하게 넘어서고 있다. 그러므로 예술의 범주에서 이해해야 한다.”라거나 “성을 통한 자기모멸을 시도함으로써 경쟁사회로부터 면책과 휴식을 꿈꾸는 한 인간의 심리적 정황을 핍진하게 묘사하고 있으므로 예술 장르 속에서 접근해야 한다.”라는 것이 당시 문학계의 입장이었다. 물론 완고한 법원이 이를 제대로 이해했을 리 만무하다.

나의 경우라면 『내게 거짓말을 해봐』를 읽으며 장정일 식의 강렬한 사회성을 느낄 수 있었다. 가부장적인 체제가 어떻게 재생산되는가가 파악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한다면 가부장적인 우리 사회의 면모를 장정일 식으로 드러내는 데 필요했던 방식이 포르노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정신분석학적인 방법을 도입해서 접근한다면 『내게 거짓말을 해봐』의 이런 측면이 흥미롭게 느껴지기도 한다. 라캉을 공부하면서 내내 『내게 거짓말을 해봐』를 새삼스럽게 떠올렸던 까닭도 여기서 기인한다. 혹 관심이 있으시다면 과도한 훈육(체벌)과 가학/피학적인 인간의 생산 관계에 대해 공부를 해 보시라. 그리고 『내게 거짓말을 해봐』를 읽으시라. 짚이는 바가 분명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측면이 제대로 이야기되었더라면 조금 더 나아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장정일도 이런 측면을 의도했던 듯하다. 『장정일의 독서일기』(하늘연못, 1997)의 187쪽부터 193쪽까지는 “「『내게 거짓말을 해봐』에 대해 바로 말함」이란 쓸데없는 글”인데, 거기에는 자신의 “소설이 끈질기게 천착했던 두 개의 사항”이 소개되어 있다. “하나는 이번 소설에서처럼 나라는 개체를 낳아 준 아버지를 씹새끼로 만드는 것으로 다른 또 하나는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에서 시험된 ‘그는 성냥으로 담뱃불을 붙이고 라이터를 탁자에 놓았다’ 식의 구문은 물론이고 이야기가 지탱해야 하는 최소한의 개연을 파괴함으로써 나의 실존과 호구의 근거가 되는 소설의 모든 형식을 부정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나는 작가의 이 말에 동의한다. 또한, “한 마디로 이 소설은 성을 주제로 하지 않는다”라면서 “소설 속에 가장 많이 언급된 묘사가 곧바로 그 소설의 주제를 이루지는 않는다”라는 발언에도 동의한다.

그런데, 준엄하신 법관 나리들이 나와 같을 리 없다. 가부장의 자리에 올라서고 싶은 그들이 어떻게 가부장적인 사회를 부정하겠는가. 그들이 ‘체제/아버지/선생님’의 질서와 맞대면하여 그 질서를 균열시키는 데 동의하리라고 상상할 수 있는가. 그들이 어느 세월에 정신분석학을 공부하여 한 인간의 상처와 내면을 이해하려 들 것이며, 만에 하나 그러한 방법론을 공부했다고 한들 무리 없이 작품에 적용할 수 있겠는가. 그저 법의 이름으로 ‘심판’하고 ‘단죄’하면 간단할 것을!

우리 사회엔 문화적으로 소양이 부족한 이들이 너무도 많다. 이것도 심각한 문제인데, 더 심각한 일은 이를 부끄러워 할 줄 모르는 인간들이 꼴사납게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현실을 가끔 목도하곤 하는데, 『내게 거짓말을 해봐』 필화 사건도 여기에 해당한다. 그래서 생각하게 된다. ‘이 나라가 나름의 세련을 구가하려면 오랫동안 지긋지긋한 시간을 기다려야겠군. 이게 정신 박힌 예술가의 운명이군.’ 아마 운명이란 단어는 이럴 때 쓰는 게 맞을 거다.   

홍기돈 (문학평론가)

출처 : 컬쳐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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