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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세 편의 우중시(雨中詩)

우중행(雨中行)


박용래



비가 오고 있다
안개 속에서
가고 있다
비, 안개, 하루살이가
뒤범벅되어
이내가 되어
덫이 되어

(며칠째)
내 목양말은
젖고 있다.

출처 : 박용래, 먼바다-박용래 시전집, 창비, 1984



추야우중(秋夜雨中)

최치원


秋風唯苦吟(추풍유고음)
世路少知音(세로소지음)
窓外三更雨(창외삼경우)
燈前萬里心(등전만리심)

가을 바람에 오직 괴로운 마음으로 시를 읊으니
세상에 나의 시를 아는 사람이 적구나.
창밖에 밤 깊도록 비가 내리고
등불 앞에는 만 리 고향을 향한 마음만이 서성이네.


----------------------------------------------
박용래 시인의 "우중행(雨中行)"에는 최치원의 한시 "추야우중(秋夜雨中)"의 심상이나 정조와는 다른 느낌이 있습니다. 최치원의 雨中이 창 밖의 광경이고, 시인은 등불 앞에 있어 젖지 않는 것에 비해 박용래의 雨中은 며칠째 목양말을 젖게 하는 비입니다. 그럼에도 박용래의 비는 최치원의 비보다 훨씬 멀리서 내리는 비처럼 느껴집니다. 목양말이 젖는 빗 속에 있는 시인의 비보다 최치원의 비가 더 가까이에서 내리는 비로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까닭은 박용래 시인이 최치원처럼 내리는 비에 마음을 싣지 않고, 관조하는 시적 태도를 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최치원보다 박용래가 빗 속에서 더 외로와 보이는 이유는 또 무엇일까?

혹시 어렸을 때 미래의 나에게 편지를 띄워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알지도 모르겠습니다. 10년 전의 나는 분명 나인데, 현재의 내가 10년 전의 내가 보낸 편지를 읽는 동안 과거의 나란 사람이 과연 어떤 사람이었는지 도통 알 수 없거나 낯설게 느껴질 때...

박용래 시인의 시가 내가 나에게 말을 거는 독백과 같다면, 최치원의 시는 한탄(恨嘆)이기 때문입니다. 최치원은 비록 "세상에 나의 시를 아는 사람이 적구나."라고 노래하지만, 이것은 대상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박용래 시인의 시에서 시인은 그런 대상조차 상정하지 않습니다. 스스로에게 말을 거는 사람은 슬픕니다, 아니 슬프다는 감정조차 맑게 정제된 평온함입니다.

비가 옵니다, 안개 속에서 비는 오는 듯, 가는 듯 합니다.
마음이 실리지 않은 비를 시인은 멍하게 바라봅니다.
비와 안개와 하루살이가 범벅이 됩니다.
어쩌면 시인은 보안등이 매달린 남의 집 처마 끝에 서 있는지도 모릅니다.
갈 곳이 없는 건지, 어디로 가야할 지조차 생각하지 않으며...

슬픔도, 절망도, 비탄도 느끼지 못하는 슬픔이, 절망이, 비탄이 그리고 외로운 평온함이 덫이 되어 (며칠째) 오도가도 못하며 목양말이 젖습니다. 최치원의 시에서 시인의 물리적 위치는 등불 앞에 고정되어 있는 대신 마음이 서성인다면, 박용래 시인의 시에서 시인은 어디론가 가고자 하지만 가지 못한 채 정지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 기형도는 시 "雨中의 나이 - 모든 슬픔은 논리적으로 규명되어질 필요가 있다."에서 "정지해 있는 것은 언제나 독을 품고 있는 법"이라고 이야기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

雨中의 나이
- 모든 슬픔은 논리적으로 규명되어질 필요가 있다.


기형도

  

1
미스 한, 여태껏 여기에 혼자 앉아 있었어? 대단한 폭우라구.
알고 있어요. 여기서도 선명한 빗소리가 들려요. 다행이군. 비 오는 밤은 눅눅해요. 늘 샤워를 하곤 하죠. 샤워. 물이 떨어져 요. 우산을 접으세요. 나프타린처럼 조그맣게 접히는 정열? 커 피 드세요. 고맙군. 그런데 지금까지 내 생을 스푼질해 온 것은 무엇이었을까. 시시한 소리예요. 기형도 씨 무얼했죠? 집을 지 으려 했어. 누구의 집? 글쎄 그걸 모르겠어. 그래서 허물었어 요? 아예 짓지를 않았지. 예? 아니, 뭐. 그저…… 치사한 감정 이나 무상 정도로, 껌 씹을 때처럼.


2
등사 잉크 가득 찬 밤이다. 나는 근래 들어 예전에 안 꾸던 악 몽에 시달리곤 한다. 시간의 간유리. 안개. 이렇게 빗소리 속에 앉아 눈을 감으면 내 흘러온 짧은 거리 여기저기서 출렁거리는 습습한 생의 경사들이 피난민들처럼 아우성치며 떠내려가는 것 이 보인다. 간혹씩 모래사장 위에서 발견되기도 하는 건조한 물 고기 알들.
봄이 가고 여름이 가면 그런 식으로 또 나의 일년은 마취약처럼 은밀히 지나가리라. 술래를 피해 숨죽여 지나가듯. 보인다. 내 남은 일생 곳곳에 미리 숨어 기다리고 있을 숱한 폭우들과 나무 들의 짧은 부르짖음이여.
  

3
고양일 한 마리 들여놨어요. 발톱이 앙증맞죠? 봐요. 이렇게 신 기하게 휘어져요. 파스텔같이. 힘없이 털이 빠지는 꼴이란……
앗, 아파요. 할퀴었어요. 조심해야지. 정지해 있는 것은 언제나 독을 품고 있는 법이야.
  

4
시험지가 다 젖었을 것이다. 위험 수위. 항상 준비해야 한다.
충분한 숙면. 물보다 더욱 가볍게 떠오르기. 하얗게 씻겨 더욱 찬란히 빛나는 삽날의 꿈. 당신의 꿈은?


5
지난 봄엔 애인이 하나 있었지. 떠났어요? 없어졌을 뿐이야. 빛 의 명멸. 멀미 일으키며 침입해오던 여름 노을의 기억뿐이야. 사랑해보라구? 사랑해봐. 비가 안 오는 여름을 상상할 수 있겠 어? 비 때문은 아녜요. 그렇군. 그런데 뭐 먹을 것이 없을까?


6
그리하여 내가 이렇게 묻는다면. 미스 한. 혼자 앉아서 이젠 무 엇을 할래? 집을 짓죠. 누구의 집? 그건 비밀. 그래. 우리에게 어떤 운명적인 과제가 있다면. 그것은 애초에 품었던 우리들 꿈 의 방정식을 각자의 공식대로 풀어가는 것일 터이니. 빗소리. 속의 빗소리. 밖은 여전히 폭우겠죠? 언제나 폭우. 아. 그러면 모든 슬픔은 논리적으로 논리적으로, 논리…… 300원의 논리. 여름엔 여름 옷을 입고 겨울엔 겨울 옷을 입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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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동아일보 - 2030女, 프라이드를 입다

[커버스토리]2030女, 프라이드를 입다
[동아일보 2006-07-21 08:13]

[동아일보]

“어떻게 나를 40분이나 기다리게 할 수 있어요?”

그녀는 아름다웠다. 화가 나 동그랗게 치뜬 눈망울, 그런데도 물기를 머금은 듯 반짝인다. 긴 생머리에 균형 잡힌 몸매. 코가 어색하게 높았더라면 ‘성형했겠지’라고 위안(?)이라도 삼았을 텐데.

“세상에 청담동 ‘하루에’를 몰랐다고요?”

이름만 듣고 일식집인 줄 알았다. 화려한 금색 주물 테두리에 짙은 붉은색 커튼이 달린 우아한 파스타 전문점인 줄은 몰랐다.

그녀는 정말 세련됐다. 가슴 부분이 살짝 파인 검정 레이스 톱과 몸에 붙는 스키니 진은 섹시했다. 단정한 진주 귀고리와 생머리는 절묘하게 청순했다.

스타일리스트 서은영(37) 씨. 자타가 공인하는 청담동 패션 피플이다.

거리에는 그녀를 향한 두 가지 시선이 존재한다. 동경하거나 혀를 차거나. 그래서 서 씨는 청담동이 좋다. ‘동지’들을 만날 수 있으므로.

‘쇼퍼홀릭’, ‘섹스 앤드 더 시티’,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그녀들의 필독서다. 영미 소설로 ‘칙 릿(Chick lit)’이라 불린다.

패션과 소비에 탐닉하면서도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2030 여성을 주로 다룬다. 청담동 그녀들의 이야기이자 그녀들처럼 되려는 사회 초년생의 ‘고군분투기’다.

소설과 드라마에서 방금 걸어 나온 듯한 그녀들. ‘허영과 사치’로 질투와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겉모습이 전부는 아니다. 그녀들은 백조 같다. 우아한 자태를 뽐내지만 속으로는 쉼 없이 물갈퀴질을 한다.

‘한국판 칙 릿’ 속 그녀들의 일상을 엿봤다.

#1. 패션 피플(Fashion people)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고들 하지. 그래도 결국은 겉모습으로 판단하잖아. 무조건 명품으로 치장하는 ‘사치’와 나를 표현하는 ‘스타일’은 달라. 스타일은 노력해서 자기 것으로 만드는 거야.”(서은영)

“이태원 동대문을 뒤지다가도 이거다 싶은 명품엔 투자를 하는 거지. 결국 자기만족의 문제니까.”(강주연 엘르 패션 에디터·34)

“패션은 내가 얼마나 감각적이고 창조적인지 보여 주는 거야. 촌스러운 사람에게 예술 사진 맡기고 싶겠니?”(사진작가 보리·33-그녀는 평범한 흰 티셔츠를 뒤집어 입는 센스를 보였다)

브랜드 컨설팅회사 ‘브레인 파이’의 피현정(35) 대표. 손으로 만든 천연비누 ‘핸드메이드by파이’ 사업도 한다. “뉴욕 출장 마치고 새벽에 왔다”며 반긴다.

미키마우스 그림이 그려진 민소매 티셔츠와 헐렁한 청바지. 자연스레 드러난 군살 없는 팔은 미국 뉴욕 시 센트럴 파크를 달리고 온 뉴요커처럼 산뜻하다.

소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주인공 앤드리아는 에버크롬비(미국의 중저가 캐주얼 브랜드) 티셔츠를 입고 수많은 프라다 패션 앞에서 기가 죽는다.

피현정은 그런 의미에서 프라다다. 앤드리아의 기분을 알 것 같았다.

그녀들의 패션 사랑은 아무도 못 말린다.

‘미래에셋 3억 만들기 펀드’보다 ‘마놀로블라닉 100켤레 돌파’에 관심이 더 가고, ‘정상가보다 얼마나 싸게 샀는지’가 ‘얼마나 돈을 절약한 건지’로 통하는 세계다.

현정 씨는 아무리 야근해도 다음 날 화장은 완벽하다. 흐트러진 옷차림은 절대 금지. 오늘 입은 옷은 2주 후에나 입는다.

“첫 직장 면접에 탱크톱을 입었으니 말 다 했죠. 햇빛 좋은 날엔 빨간 원피스에 챙이 넓은 우아한 모자를 썼어요. 모자를 쓰고 앉아 일하는 제 모습에 다들 아연실색했죠.”

그녀는 독하게 일했다. ‘회사에 놀러 왔느냐’는 비아냥이 싫었기 때문이다. 남보다 두세 배로 일해야 ‘잘 한다’ 소리 한 번 겨우 들을 수 있었다.

“옷을 튀게 입다 보면 남의 입에 오르락내리락하고 이상한 스캔들도 끊이질 않아요. 그래도 어쩌겠어요. 남들 따라 살면 내가 사라지는데.”

최소한 그녀 주위에서 챙 넓은 모자는 이제 ‘일벌레’의 상징이 됐다.

#2. 쇼퍼홀릭 (Shopahoilc)

“4시에 촬영 끝나고 5시까지 공항에 가야 했어. 그렇다고 비비안웨스트우드 샘플 세일에 안 갈 수 없잖아? 눈이 뒤집혀서 옷을 뒤지고 있는데 누가 옆에서 나만큼 전투적으로 쇼핑 중이더군. 알고 지내던 잡지사 기자였어. 회사에서 몰래 나왔다나. 서로 쳐다보고 원 없이 웃었다, 정말.”(보리)

“‘이번 출장은 자라, H&M(중저가 여성의류)만 가자’고 매번 결심해. 근데 한국에서의 정가보다 30% 싼 걸 보고 어떻게 안 사겠어? 결국 신발 4, 5켤레는 기본, 옷 20∼30벌까지!!”(피현정)

“청담동 ‘화류계(우리끼리 이렇게 불러요)’ 생활 끝에 남는 건 옷밖에 없다는 말이 있잖아.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이지만 월세 사는 사람도 있어. 이곳에 온갖 드라마가 있으니 ‘섹스 앤드 더 시티’ 외에는 TV를 안 보지.”(서은영)

드라마 ‘섹스 앤드 더 시티’에서 주인공 캐리는 월세 원룸에서 쫓겨날 처지에 놓인다. 그녀가 가진 거라곤 통장 잔액 500달러와 마놀로블라닉 수백 켤레뿐.

캐리보다는 재테크 수준이 뛰어난 은영 씨. 그런 그녀도 구두만 300켤레가 있다.

올봄 전세로 이사한 그녀를 놓고 이삿짐센터 직원들은 격렬한 토론을 벌였다.

“뭐하는 여자 같아?”

“이 이상야릇한 파티복을 봐선 유흥가?”

“맞아. 구두도 300켤레나 되더라.”

“그럼 한 트럭도 넘는 이 책들은?”

“…. 일이나 하자.”

은영 씨는 “독서가 취미인 게 다행”이라며 웃었다.

남들이 뭐라 해도 벽장 속 구두를 보면 뿌듯하다. 언젠가 자신을 좋은 곳으로 이끌 것만 같다.

그런 그녀도 현장의 모습은 180도 다르다. 머리카락 한 올 흘러내리지 않게 묶고 두꺼운 안경을 쓴다. 소설 속의 ‘B사감’이 따로 없다. 어시스턴트의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다. 아무리 늦게 자도 오전 6시면 일어난다. 완벽해야 한다는 중압감. 그녀는 스스로 ‘부지런함의 저주’라고 부른다.

70% 아웃렛 세일에 무너지는 현정 씨도 일할 땐 다르다.

전화 받을 때 절대 ‘여보세요’라고 대답하지 않는다. 일부러 짧고 무겁게 ‘네’라고 말한다. 용건만 간단히 하란 뜻이다. 귀엽고 착하다는 말은 질색이다.

#3. 사랑을 꿈꾸다

“서른다섯, 막막했어. 호주의 사막에서 산도르 마라이의 ‘유언’을 읽다 펑펑 울었지. ‘인정이 없는 여자도 아닌데 나는 왜 죽도록 사랑하지 못했을까’란 구절 때문에. 내가 무섭게 일만 했구나, 사랑을 해야겠구나.”(서은영)

“남자들은 버겁다고들 해. ‘내가 아픈데 너는 파티에 놀러 가냐’, ‘저 가방 매번 사주기 힘들겠다’고. 파티는 비즈니스고, 가방은 내가 사면 되는데 말야.”(피현정)

“너무 예쁜 비비안웨스트우드 블라우스가 있어. 근데 몸에 너무 껴서 숨조차 쉴 수 없는 거야. 두 번 다시 못 입었지. 아무리 좋아도 나에게 맞고 편하지 않으면 소용없어.”(서은영)

그녀들은 대부분 싱글이다. 한국적 관점에서라면 ‘노처녀’다. 강주연 씨만 결혼했다. “다행히 어릴 때 만난 덕택에 남편이 이 세계를 이해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소설이자 영화 ‘브리짓 존스의 다이어리’. 브리짓의 선택은 잘생긴 왕자 같은 휴 그랜트가 아니었다. 있는 그대로의 브리짓을 사랑한 ‘미스터 라이트(Mr. Right)’ 콜린 퍼스였다.

그녀들 역시 찾고 있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해줄 짝을. 아무도 망사스타킹이 뭔지 모를 때 색깔별 무늬별로 신고 다녔던 자신들을 말이다.

한때는 결혼이 하고 싶어 구미에 맞지도 않는 패션에 도전했다. 현정 씨는 생머리에 다소곳한 정장, 이른바 ‘심은하 룩’을 해봤다. 은영 씨도 귀여운 공주 패션으로 남자들을 만나봤다.

그렇게 연애를 시작한 적도 있지만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온전한 나로 살 수 없다면 행복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일도 사랑도 스스로 만족하고 즐길 수 있어야죠.”(서은영, 피현정)

수많은 칙 릿 중에서도 손꼽히는 인기작 ‘섹스 앤드 더 시티’. 그녀들 모두가 열광했던 시리즈를 끝맺으며 주인공 캐리가 했던 마지막 대사. 그녀들이 찾은 인생의 정답이다.

“가장 흥분되고 도전적이며 중요한 관계는 바로 나 자신과 맺는 관계다. 그리고 만약 ‘내가 사랑하는 나’를 사랑해 줄 사람을 찾게 된다면 그건 정말 멋진 일이다.(That's just fabulous)”

글=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

사진=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디자인=김성훈 기자 ksh97@donga.com

▼ 성공파 2030女, 일-패션-소비에 열정적▼

최근 교보문고 소설부문 베스트셀러 1위에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라는 책이 올랐다.

20대 초반 여성이 패션 잡지사에서 겪는 좌충우돌 사회생활 체험기를 가벼운 구어체로 풀어낸 미국 소설이다. 교보문고에 따르면 최근 3주 동안 이 책을 구입한 사람 중 20, 30대 여성이 73.2%에 이른다.

미국에서도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로 꼽혔으며 메릴 스트립, 앤 해서웨이 주연의 영화로 개봉돼 인기를 얻고 있다.

2030 젊은 여성들의 일과 사랑을 가벼운 구어체로 풀어낸 ‘악마는…’과 같은 소설을 칙 릿(Chick-lit)이라고 한다. 젊은 아가씨를 뜻하는 속어인 칙(Chick)과 문학(literature)의 합성어다.

1996년 영국 서점가를 휩쓴 ‘브리짓 존스의 일기’가 칙 릿의 원조 격.

이후 여주인공의 색다른 직업, 패션, 쇼핑중독 등 흥미로운 소재가 가미되면서 일종의 문학 장르로 자리 잡았다. ‘하이힐’, ‘초보자들을 위한 스시’, ‘쇼퍼홀릭’, ‘워커홀릭’, ‘섹스 앤드 더 시티’ 등이 있다.

미국 칼럼니스트 캔디스 부시넬의 섹스 앤드 더 시티는 드라마로 제작돼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국내에서는 패션계 인물들이 수필 형식으로 책을 내 2030 여성들에게 화제다. 올해 5월 패션모델 송경아가 ‘뉴욕을 훔치다’를 냈으며 스타일리스트 서은영과 모델 장윤주가 ‘스타일북’ 출간을 앞두고 있다.

출판평론가 한미화 씨는 “젊은 여성들을 위한 읽을거리는 18세기부터 있었다. 한때는 결혼, 한때는 직업여성이 되는 게 화두였다면 최근에는 일, 사랑, 성(性), 패션 등 다양한 관심사를 담은 게 특징이다. 이는 현재 젊은 여성들의 삶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세상을 보는 맑은 창이 되겠습니다."

ⓒ 동아일보 & 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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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퍼온글] 키보드를 마우스처럼 쓰는 법

알아두면 편리한 자판 사용법 입니다.

1. 인터넷을 검색하다 앞화면으로 가고 싶다면, 마우스 대신 ◀━를 사용(back키).
-마우스로 뒤로가기... 이제 그만...

2. F1 = 인터넷 도움말.

3. F3 = 파일찾기.
찾고 싶은 파일...이제 쉽게 찾을 수 있음.

4. F4 = 주소창.
주소를 고를 때도 자판의 화살표를 이용하면 무척 편함.
아래로 위로 잘 골라서 엔터키를 치고, 이동하고 싶은 주소로 이동.

5. F5 = 새로고침.
검색하다 빨리 새로 고치고 싶을 때 마우스 필요 없음.

6. F6 = 주소창 블럭 설정.
이 기능은 주소창에 저장되어 있지 않는 새로운 주소로 이동 할때 사용하는데, F6키를 누르면 블럭이 설정되고 이때 Delete키를 치면 주소창이 지워짐.

7. F11 = 화면을 넓게 보고 싶을때 사용.
위, 아래에 메뉴창이 사라지면서 화면이 아주 넓어짐.

8. Ctrl + N = 현재 페이지가 하나 더 생김.
로그인까지 되어서....

9. Ctrl + W = 화면 순간 삭제.
야한거 보고 있을 때 갑자기 누가 오더라도 보던 페이지가 사라지니까 뭐했는지 절대 알 수 없음.

**Alt 키와 Ctrl키의 사용**

1. Alt 키 + 왼쪽/오른쪽 화살표 키.
웹 페이지의 앞,뒤 전환.
-바로 앞에 보았던 페이지나 다음 페이지로 쉽게 전환이 가능.

2. Ctrl'키 + R키.
지금보고 있는 페이지의 내용을 다시 읽어 줌.

3. Ctrl + D.
여러 홈페이지를 돌아다니다 마음에 드는 홈페이지가 있으면 북마크 (Book-mark) 기능을 사용하지만, 'Ctrl + D'키를 누르면 더욱 쉽게 해결됨.

4. Ctrl 키 + B 키
북마크를(즐겨찾기 편집창) 편집하거나 정리할 때 사용.
바로 북마크 폴더로 이동.

5. Ctrl 키 + N 키.
현재의 창을 그대로 나두고 또 하나의 새로운 창을 만들 때 사용.
- 파일을 다운 받거나 서버로 부터 응답이 늦어질 때, 이 단축키를 열어 다른 링크 사이트로 접근이 가능.

6. Alt 키 + F4 키.
현재 열려있는 창을 닫을 때 사용.

7. Ctrl 키 + O 키.
웹 사이트의 주소창만 띄워 새로운 사이트를 열려고 할때 사용.

위에서 설명한 것 중 많이 사용하는 것.
Alt + <- (왼쪽 화살표) ▶ 이전 페이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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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우스 볼과 같은 기능◁
↑ ↓ 키는 볼을 굴리지 않아도 현재창을 위, 아래로 쉽게 움직일 수 있음.

 

 

마우스 고장시 키보드를 마우스처럼 사용하는 방법

 

키보드를 이용해서도 마우스 포인터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평상시 마우스와 동시에 쓸 수도 있지만, 마우스가 고장나서 작동하지 않을 때는 정말 유용하게 쓸 수 있겠죠? 윈도우의 마우스키 기능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 마우스키 설정 방법 ★

평상시 마우스를 이용해 설정해 두면 쉽게 되지만, 미리 설정해두지 않고 마우스가 작동 불능 상태가 된 경우 키보드를 이용해 설정하는 방법을 소개합니다.

[Tip]아래 각 항목의 이동요령은 방향키와 엔터로 창을 열고, 열려진 윈도우창 내에서 필요한 아이콘으로 이동하는 방법은 Tab키를 몇 번 눌러 어느 아이콘 이름에 점선이 생기면 방향키로 해당아이콘으로 이동하고 엔터를 하면 열립니다.

1. 키보드의 윈도우키를 눌러 [시작] -> [설정] -> [제어판] -> '내게 필요한 옵션' 열기
2. '내게 필요한 옵션' 창에서 Tab키를 몇 번 눌러 위의 '키보드'탶에 점선이 생기도록 한 후 오른쪽 방향키로 마우스탶으로 이동 -> 다시 Tab키를 눌러 '마우스키 사용'이라는 아래 체크옵션 글씨항목에 점선이 생기도록함 ->여기서 '스페이스바키'를 한 번 눌러 '마우스키 사용'옆 □에 ∨표시가 되도록 함 ->다시 Tab키를 눌러 '확인'으로 이동 후 엔터하여 설정

이렇게 하면 화면 오른쪽 하단 작업표시줄[트레이]부분에 마우스 모양이 생기고 지금부터 키보드
오른쪽 숫자패드를 눌러 마우스 포인터를 움직일 수 있습니다.


포인터의 상하좌우 대각선 이동은 1,2,3,4,6,7,8,9키
클릭하려면 숫자키 5
더블클릭은 +키
드래그는 0키를 한 번 누른 후 숫자패드 방향키로 이동
(드래그를 끝내려면 Del키를 누름)


만약, 마우스키가 작동하지 않으면 키보드 오른쪽 위에 있는 NumLock키를 눌러 램프에 불이 들어온 상태에서 작동해 보세요.

 

원문보기 : http://blog.daum.net/oldkp/9444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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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물만두 > 호박방 1 중에서

예카테리나궁 [Ekaterina]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남쪽 교외의 푸슈킨에 있는 18세기 바로크 양식의 궁전.
구분 궁전
소재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남쪽 교외의 푸슈킨
건립연도 1756년
건립자 B.F.라스트렐리
설계자 B.F.라스트렐리
건축양식 바로크
규모 길이 306m, 방 55개

1756년 건축가 B.F.라스트렐리에 의해 건설되었다. 일명 여름궁전으로 불린다. 18세기 러시아의 바로크 양식을 대표하는 건축물로, 당시의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 남쪽 교외의 푸슈킨에 있다. 명칭은 표트르 1세의 황후인 예카테리나 1세의 이름을 그대로 딴 것이다.
궁전 길이는 306m이며, 방이 55개가 있다. 궁전은 프랑스식(式) 정원으로 둘러싸여 있고, 각 방마다 색깔에 따라 '녹색 기둥의 방', '붉은 기둥의 방', '호박(琥珀)방' 등의 이름이 붙어 있다. 궁 안에는 총 2만여 점에 달하는 소장품이 있었는데,
1941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러시아를 침략한 독일군이 6톤에 달하는 호박방의 호박을 약탈해 감으로써 이 방은 빈 채로 남아 있었다.
약탈당하기 전까지 호박방은 정교한 장식과 화려함으로 인해 세계 8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로 꼽혔다. 그러나 독일군의 폭격으로 인해 많은 건물이 파괴되고, 호박도 약탈당하였다. 뒤에 건물이 복원된 뒤, 소련 정부는 1979년부터 호박방의 복원을 위해 종적이 묘연해진 호박을 찾았으나 모자이크 일부만을 찾았을 뿐 나머지는 찾지 못하였다.
그 뒤 800만 달러의 예산과 30명의 전문가를 동원해 11년에 걸친 복원작업을 했으나, 1991년 소련이 해체되면서 작업은 중단되었다. 그후 1999년부터 다시 복원작업을 시작해 2003년 6월 호박방이 재현되었는데, 칼리닌그라드산(産) 호박과 꿀벌색 석재만도 7톤이나 들었다. 사방 14m, 높이 5m의 방으로, 원래 이 방은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표트르 1세에게 선물한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이전의 호박방

코사크 족

러시아어인 ‘카작(Kasak, Kazak)’이 바뀐 말로 스스로를 카작으로 불렀는데 이 말은 터키어의 ‘자유인’을 뜻하는 말을 기원으로 삼고 있다. 또한 집단으로서의 카자크를 가리키는 러시아어는 카자체스트보이다.
전사집단으로 특화된 슬라브계 민족 으로 남부 스텝 러시아 국경지대 살던 슬라브 민족이 이 지역의 투르크계 민족들과 혈통적-문화적으로 융합되면서 형성된 민족 이다. 이색적으로 러시아어를 쓰며, 러시아 정교를 믿는 특이한 민족이다. 코사크 정신의 핵심은 승무와 의리 그리고 애국심과 충성심인데 이는 종교가 다른 이민족들과의 접경지대에서 생존해야만 했던 탓이다.

이들은 16세기 이반 대제 이후, 러시아 황실로부터 봉급을 받으면서 군역에 종사하는'특수민족'으로 발전했다. 무사집단이지만 농도제를 기반으로 성장한 서구의 기사와는 다르며 코사크는 '무장한 자유인'을 뜻한다. 그래서 아직도 러시아 정부의 관료나 지도자와는 별도롤 전통적인 통치제도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선거에 의해 수장을 선출하여 모든 중요한 문제를 합의로 결정하는 민주적인 자치를 행하고 공동으로 러시아·폴란드·리투아니아의 봉건제후, 그리고이웃한 투르크 타타르계 유목부족 등과 싸워 자기의 토지를 확대하였다.
16∼17세기의 타타르 및 투르크의 침입에 위협을 느낀 러시아와 폴란드 ·리투아니아는 카자크에게 무기 ·탄약 ·식량 ·자금을 주어 그들로 하여금 국경을방비케 하였다. 러시아 제정의 강화와 더불어 위정자는 카자크 상층부에 갖가지 특권을 주어 회유하면서 카자크 자치의 축소를 기도했으나 17세기 후반의 S.라진, 18세기 후반의 푸가초프를 지도자로 한 농민전쟁은 이에 대한 하층 카자크의 반항이었다.
 18세기에 이르러 유력수장(首長)들은 정부의 관등(官等)을 얻어 지주귀족화하였고 카자크는 광대한 토지와의 교환조건으로 제정 러시아의 비정규군으로서 전투집단에 재편성되었다.
20세기 초기에는 전국에 걸쳐 11개의 카자크 군단이 각 지방 군관구에 소속되어 있었다. 1912년 카자크 총인구는 약 400만, 그 중 약 45만이 군사요원이었는데 그 주력은 기병 150연대였다. 10월혁명 후 국내전에서는 대다수의 카자크는 중립을 지켰으나 극빈층은 새로운 소련정권을 지지하였고 부농층은 백위군 측으로 돌았다.
소련체제의 확립과 더불어 특권계층으로서의 카자크 집단은 해체되었고 부농박멸운동과 농업집단화가 진행되었다. 1936년 카자크의 적군 참가 제한이 폐지되었고, 새로 편성된 카자크 사단은 독 ·소전쟁에서 용명을 떨쳤다.

호박 [, amber]

지질시대의 수지()가 석화한 것.
굳기 2.0∼2.5
비중 1.0∼1.1
색깔 밀황색·납황색·적갈색

화학성분은 C40H64O4이다. 단괴상·역상(礫狀)을 나타내며 밀황색·납황색·적갈색으로 투명 또는 반투명하다. 지방광택을 가지며 패각상의 단구는 무르다. 굳기 2.0∼2.5, 비중 1.0∼1.1이다. 287℃에서 녹고 불꽃을 내고 타며 특유한 냄새가 난다. 또 알코올·에테르·벤졸로 다소 침식된다. 퇴적암 속에서 발견되며 특히 탄층(炭層)에 수반되는 경우가 많다. 발트해에서 투명하고 아름다운 것이 산출되며 오래 전부터 파이프나 장신구 등으로 귀하게 쓰이고, 특히 속에 벌레가 들어 있는 것은 값이 비싸다. 호박은 해수보다 가볍기 때문에 해안에 있는 모암(母岩)으로부터 바다에 떨어져 파도에 밀려 기슭으로 밀려와 이전에 발트해에서는 바닷속에 들어가 그물로 건져냈다고 한다.

폼페이의 날



Karl Brulloff. The Last Day of Pompeii. 1830-1833. Oil on canvas. The Russian Museum, St-Petersburg, Russia.

구이차르디니(Francesco Guicciardini)

1483. 3. 6 피렌체~1540. 5. 22. 피렌체 근처 산타마프게리타아몬티치.
피렌체의 정치가·외교관·역사가.
그가 쓴 〈이탈리아사 Storia d’Italia〉는 당대의 역사를 다룬 매우 중요한 저서이다.

로렌초 데 메디치 지배 때 피렌체의 저명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1498~1505년에 피렌체·페라라·파도바 등지에서 로마법을 공부했으며, 그뒤 피렌체에서 법률 실무에 종사했다. 1508년 알라만노 살비아티의 딸인 마리아와 결혼했으며 같은 해 자신의 가족 회고록과 1378~1509년의 〈피렌체사 Storie fiorentine〉를 쓰기 시작했다. 〈피렌체사〉는 1494년 이후의 이탈리아 공화제 연구에 중요한 사료이고 구이차르디니의 역사 분석·서술 재능을 보여주는 저서이다. 그가 1511년 피렌체 대사가 되어 아라곤의 페르난도 국왕에게 파견되어 있었을 때, 1494년부터 계속 망명생활을 해온 메디치 가문은 당시 스페인 군대의 압력을 받고 있던 피렌체로 돌아와 권력을 회복했다. 1514년에 피렌체로 돌아온 구이차르디니는 다시 법률실무에 종사했으며 오토 디 발리아라는 치안위원회의 위원이 되었고 1515년에는 시뇨리아(최고행정관) 정부의 한 사람이 되었다. 1513년 교황 레오 10세로 즉위한 조반니 데 메디치 추기경은 1516년에 구이차르디니를 모데나 총독으로 임명했고, 이듬해에는 레조 총독까지 겸하게 했다. 그는 1534년까지 계속 교황을 위해 일했다.
새로 교황령이 된 이 지역들은 외부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었고 내부에서도 혼란이 있었지만 그는 그곳을 통치하는 데 뛰어난 수완을 보였다. 엄격하고 때로는 가혹하기조차 한 그의 정책은 질서회복에는 효과적이였지만 결과적으로는 그에 대한 인기를 떨어뜨리는 요인이 되었다. 레오 교황과 동맹관계에 있던 신성 로마황제 카를 5세와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 사이에 이탈리아 북부에서 전쟁이 일어나자 레조는 교황령의 전초기지가 되었으며, 1521년 7월 구이차르디니는 교황군의 전권대리로 임명되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종종 자신의 직무와 관련되는 당시의 정치문제에 대해 논의하는 형태로 많은 비망록과 논문을 썼는데, 1521~25년에 쓴 〈피렌체 정부론 Dialogo del reggimento di Firenze〉은 그 가운데 하나이다. 이책에서 그는 피렌체의 가장 이상적인 정치체제는 베네치아식의 귀족정치체제라고 주장했다. 교황군의 전권대리로서 그는 용기와 결단력을 발휘하여 1521년 12월 파르마가 프랑스에게 함락당하는 것을 막아냈다. 그러나 같은 달 교황 레오 10세가 죽고 아드리아누스 6세가 즉위한 뒤 모데나와 레조 총독직을 박탈당했으나 1522년말 다시 복직되었다. 1523년 아드리아누스 6세가 죽자 그는 자신이 총독으로 있던 두 도시를 원래 그곳을 지배했던 페라라 공작의 공격으로부터 지켜야 했다. 비록 페라라 공작과의 싸움에서 레조는 빼앗겼지만 모데나를 지킬 수 있었다. 줄리오 데 메디치 추기경은 클레멘스 7세로 즉위한 뒤 구이차르디니의 공적을 인정해 그를 1524년 교황령의 최북단 도시 로마냐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파비아 전투 뒤 카를 5세의 군대가 남하하려 하던 위험한 상황에서 구이차르디니는 교황에게 많은 조언을 했으며, 1526년 1월에는 교황으로부터 부름을 받고 로마에 갔다. 그는 카를 5세에 대항해 프랑스와 동맹을 맺기를 주장하며 교황 자문회의에서 뛰어난 역할을 했다. 1526년 5월에 이루어진 코냐크 동맹은 어느 정도 그가 노력한 결과였으며 그해 6월 교황군의 지휘관으로 동맹군에 참여했다. 그러나 부르봉 공작이 이끄는 황제군이 피렌체와 로마로 들어오는 것을 막지 못하자 그는 다시 한번 자신이 태어난 도시와 운명을 같이하게 되었다.
클레멘스 교황의 정책 결과 피렌체가 위기에 처하자 메디치 정권에 대한 반대의 소리가 높아졌다. 우르비노 공작이 그의 군대를 이끌고 피렌체 가까이에 도착하고 메디치가 그를 마중하러 도시를 떠나자(1527. 4. 26) 피렌체에 반란이 일어났다. 도시 방어를 돕기 위해 그곳에 막 도착한 구이차르디니는 처벌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반란자들의 항복을 받아내 부르봉 공작군의 공격으로부터 시(市) 행정부 건물을 보호할 수 있었다. 며칠 뒤 부르봉 공작군은 로마를 장악했고 피렌체에서는 메디치가가 축출되고 공화정부가 다시 들어서게 되었다.
로마에서 클레멘스 교황의 권위가 무너지게 되자 구이차르디니는 교황 전권대리로서의 자리를 지키기 어렵게 되었고, 한편으로는 그가 맺어왔던 메디치가와의 오랜 관계로 인해 공화제가 다시 들어선 피렌체에서 의심을 받게 되었다. 피렌체에서는 강경 공화파가 승리해 교황과 타협하려 했던 니콜로 카포니 장관이 물러났으며(1529. 4), 뒤이어 황제군이 들어왔다. 이 때문에 어려움에 빠진 구이차르디니는 1529년 9월 피렌체를 떠나 교황청으로 갔다. 그뒤 메디치가를 피렌체에 다시 들어서게 하려는 교황의 노력을 전적으로 지지하는 한편, 피렌체 시민을 위해 유리한 조건을 얻어내려고 애썼지만 1530년 3월 피렌체에서는 그를 반역자로 선고했다. 1528~30년 구이차르디니는 피렌체의 역사에 관한 2번째 저서를 집필하기 시작해 그의 정치관과 사회관을 가장 간결하고 다채롭게 표현한 격언과 성찰(省察)의 묶음인 〈회상록 Ricordi〉을 펴냈다. 그의 정치사상은 친구인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사상과 유사한 점이 많지만 때로는 더 급진적이다. 그는 오랫동안 교황을 위해 일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마키아벨리와 마찬가지로 당시의 교회를 비판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의 '논의'에 관한 고찰 Considerazioni intorno ai 'Discorse' del Machiavelli〉에서 로마역사를 과학적인 정치의 한 전형으로 본 마키아벨리의 의견에는 반대했다. 구이차르니나는 피렌체에서 공화정부가 무너진 뒤 교황 대표자격으로 돌아와 공화당원 추방에 앞장섰다. 1531년 클레멘스 교황은 그를 볼로냐 총독에 임명했으나 1534년 파울루스 3세가 즉위하면서 총독직에서 물러났다. 피렌체로 돌아온 그는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 공작의 법률 고문으로 활동하는 한편, 자신이 교황의 참모로 있었던 시기의 이탈리아 역사를 쓰기 시작했다. 그뒤 몇 년 동안 수정을 거친 이 책은 1494~1534년 사이의 이탈리아 역사를 다룬 그의 더 큰 야심작 〈이탈리아사〉의 줄기를 이루었다. 그가 이 책을 쓰기 시작한 것은 1536년으로 추측되는데 죽을 때까지 계속 수정했다. 그는 책에 기술한 많은 사건들과 직접 관련이 있었던 정치가였고 사료를 비판적으로 사용하는 데 있어 앞선 인문주의자들을 본받으면서도 또한 그들을 능가한 역사가였기 때문에, 〈이탈리아사〉는 격동과 침략의 시기인 16세기초 근대 이탈리아에 관한 가장 중요한 역사책이 되고 있다.
1537년 알레산드로가 살해당한 뒤 구이차르디니는 코시모 공작이 그 뒤를 이을 수 있도록 도왔는데, 아마도 공작의 권력이 지나치다고 생각해 이것을 제한시키고자 하는 희망이 있었던 것 같다. 새 통치자 아래서도 여전히 고위직책을 맡기는 했으나 자신의 희망과 개인적 야망이 만족되지 않자 말년에는 산타마가리타아몬티치에 있는 그의 별장에서 자신의 최고 걸작이라 할 수 있는 〈이탈리아사〉의 완성에 몰두했다.

카보숑컷 [cabochon cut]

구형(球形)이나 타원체의 산 모양으로 연마한 것을 말한다. 스타루비 ·묘안석 또는 오팔과 같이 특수한 색채효과를 지닌 보석이라도 그 효과를 내기 위해서 실시된다. 비취나 터키석과 같은 불투명 또는 반투명한 보석이나 장식석에 널리 응용된다.

드가 - 콩코드 광장



Edgar Degas. Place de la Concorde. 1876. Oil on canvas. Collection of Margarete Scharf, Berlin. Now in the Hermitage, St. Petersburg, Russia.

고갱 - 두 자매



Paul Gauguin. Piti Teina. (Two Sisters). 1892. Oil on canvas. Collection of Otto Krebs, Holzdorf. Now in the Hermitage, St. Petersburg, Russia.

반 고흐 - 밤의 하얀집



Vincent van Gogh. The White House at Night (La maison blanche au nuit). 1890. Oil on canvas. Collection of Otto Krebs, Holzdorf. Now in the Hermitage, St. Petersburg, Russia.

코레지오 - 성가족



Correggio. Madonna and Child with St. John. c.1515. Oil on wood. Museo del Prado, Madrid, Spain.

보티첼리 - 여인의 초상

Alessandro Botticelli. Portrait of a Lady (Smeralda Brandini?). c.1470-1475. Tempera on panel. Victoria and Albert Museum, London, UK.

Alessandro Botticelli. Portrait of a Woman. c.1475. Tempera on panel. Palazzo Pitti, Galleria Palatina, Florence, Italy.

뒤러 - 막시밀리언 1세의 초상



Albrecht Durer. Portrait of Maximilian I. 1519. Oil on panel. 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 Austria.

벨리니 - 마돈나와 아이



Jacopo Bellini. Madonna and Child. Tempera on panel. Galleria degli Uffizi, Florence, Italy.

쿱카 [1871.9.22~1957.6.21]

체코슬로바키아의 화가로 기하학적 추상회화의 선구자로 활약했다. 주요 작품에 《예술가와 그 부인의 추상》, 《뉴턴의 위반》 등이 있다.
원어명 František Kupka
국적 체코슬로바키아
활동분야 예술
출생지 체코슬로바키아 오포티노
주요작품 《예술가와 그 부인의 추상》《뉴턴의 위반》

오포티노 출생. 1888년 프라하의 미술학교에서 배우고 베네치아를 거쳐 1895년 파리로 나왔다. 1906년부터 새로운 회화의 탐구를 시작, R.들로네의 오르피즘의 영향을 받고 1912∼1913년 비대칭적 ·기하학적 추상회화를 발표하는 등 기하학적 추상회화의 선구자로 활약하였다. 1936년 파리, 1946년 체코에서 회고전이 열리기까지는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았었다. 살롱 데 레알리테 누벨의 리더였으며, 1958년 파리의 근대미술전에서도 회고전이 열렸다. 주요작품에 《예술가와 그 부인의 추상》《뉴턴의 위반》 등이 있다.

파에톤 [Phaethon]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태양신 헬리오스와 클리메네의 아들.
원어명 Phaæthon

파이톤이라고도 하며 그리스어로 ‘빛나는’ 또는 ‘눈부신’이라는 뜻이다. 부모에 대해서는 헬리오스의 아들인 클리메노스와 샘의 님프 가운데 하나인 메로페 사이에서 태어났다고도 한다. 제우스와 이오의 아들인 에파포스에게 자신이 태양신의 아들이라고 했다가 거짓말쟁이라는 모욕을 당한 뒤에 태양신의 아들임을 증명하기 위하여 헬리오스를 찾아갔다. 헬리오스가 성인이 되어 찾아온 아들에게 자신이 아버지임을 인정하고 어떤 소원이든 들어 주겠다고 맹세하자, 태양 마차를 몰게 해 달라고 하였다.
헬리오스는 이른 아침마다 태양 마차를 몰고 큰바다 오케아노스 동쪽 끝에서 세상에 빛을 뿌리며 솟아 올라 낮이 끝날 무렵 오케아노스 속으로 뛰어들었다. 태양 마차를 모는 일은 제우스도 할 수 없는 위험한 일이었으나 이미 맹세를 하였기 때문에 허락할 수 밖에 없었다. 태양 마차를 끄는 네 마리 말은 파에톤이 타자 이전보다 무게가 가볍다는 것을 느끼고는 무섭게 돌진하였다. 파에톤의 통제를 벗어난 말들이 고삐가 풀린 듯 하늘 위로 치솟아 올랐다가 지상으로 접근하는 등 제멋대로 날뛰었으므로 태양의 열기에 강과 바다가 말라 버릴 지경이 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에티오피아인들의 피부가 검은 것은 이 때의 열기로 피가 살갗으로 몰렸기 때문이며, 리비아의 사막도 이 때 생긴 것이라고 한다.
제우스는 더 이상의 피해를 막기 위하여 파에톤에게 번개를 던져 죽게 하였다. 에리다누스강에 떨어진 그의 시신을 흐르는 물의 님프인 나이아스들이 주워 묘지를 만들고 비문을 새겨 주었다고 한다. 파에톤의 누이들은 그의 운명을 슬퍼하여 강가의 포플러 나무로 변하였으며, 이들이 흘린 눈물이 강에 떨어져 호박(琥珀)이 되었다고 한다. 한편 새벽의 여신 에오스가 케팔로스를 납치하여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의 이름도 파에톤이고, 에오스가 타고 다니던 쌍두마차의 말 이름도 파에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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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태우스 > 악의 평범성

 

 

 

 

얼마 전에 검거된 세칭 ‘발바리’의 행각은 무척 충격적이다. 8년 동안 DNA 검사를 통해 확인된 사건만 77건, 추가로 조사 중인 사건을 합친다면 100건을 훌쩍 넘을 것 같다. 그런 파렴치한 놈에게 왜 ‘발바리’라는 호칭을 붙여 줬는지 이해가 안가지만, 그 사건이 충격으로 다가오는 것은 그런 나쁜 놈이 평범한 가장이라는 사실이다. 게다가 그놈이 딸을 가진 아버지라는 얘기까지 듣고나면 그저 한숨만 나올 뿐이다.


한나 아렌트라는 철학자는 피고석에 있는 나치 전범 아이히만을 보고 이렇게 신음했단다.

“악(惡)이 저렇게 평범하다니….”

그는 그 경험을 토대로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발전시키는데, 그런 경우는 도처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잔인한 고문에 시달렸던 김근태의 법정 증언을 보자.

“그들은 고문을 하면서도, 시집간 딸이 잘 사는지 모르겠다, 아들놈이 오늘 체력장을 잘 치렀는지 모르겠다는 말도 했습니다. 자식을 걱정하는 그들이 고문도 하는, 인간의 양면성을 어떻게 해석하면 좋겠습니까?”


꼭 사람을 죽여야만 희대의 범죄인 것은 아니다. 임수경의 아들이 필리핀에서 죽었을 때, 거기 달린 댓글들은 과연 이들이 인간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불쌍하다. 명복을 빈다고 말해야겠지만, 솔직히 쌤통이다" (id:okokha, 하**)

"인간적인 정리로, 또 나의 인격으로 할 말은 아니지만서도 솔직한 소회는 왜 이 정신나간 년의 아들이 하나 밖에 없나 하는 아쉬움이 생긴다!"(id:beqqy, 이**)

"안댔지만 국민의 저주가 하늘을 감동시킨 것 같다!!!"(id:bokean, 김**)

"거참 잘 죽엇다.. 빠알갱이뇬 아들이믄 죽어 싸지~" (id:baginni 박*)

"드디어 임수경이가 천벌을 받는구나!...드디어 천벌을 받았어.죽은 애한테는 안됐지만 에미에게 천벌을 주는 것은 그것 밖에 없다. 살아 생지옥을 봐야지....이 개만도 못한 년아. 십오년 묵은 체증이 이제야 가라 앉는구나."(id:777star 김**) ]

다행히 이 악플러들 중 몇 명은 처벌을 받았지만, 이들은 대개 40-50대의 고학력 인사이며, 그 중에는 대학교수까지 있다고 한다(참고로 이 일로 인해 기소된 사람 중 서모씨는 나와 아무 상관이 없다).


우리는 희대의 범죄자일수록 “평소 우울하고 남과 잘 어울리지 못하며 파괴적인 성향이 강했다.”는 진단을 받아야 안심을 하지만, 원래 악은 이렇듯 평범하고 별 문제 없어 보이는 사람 속에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면 이 사회가 갑자기 소름 끼치는 곳으로 느껴지지만, 남 탓만 할 게 아니라 내 안에도 그런 악의 씨앗이 있는 건 아닌지 잘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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