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노우 헌터스
폴 윤 지음, 황은덕 옮김 / 산지니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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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졸업석사 논문 제목이 '최인훈 문학의 삐리리리적 연구'다. 학구적인 머리가 아닌 걸 일찌감치 깨닫고 이왕 시작한 거 졸업이라도 하자 싶어 삐리리릭한 내용을 써서 제출한 거다. 의미없는 결과물을 내면서 지금도 기억나는 건 한 가지 가설이랄까, 아쉬움을 마음에 간직했다는 것이다.
주인공 이명준이 남도 북도 아닌 중립국을 택해 항해하던 중 투신자살로 삶을 마감하게 하는 소설 '광장'을 읽어본 독자라면 거의 다 가졌을 의문이고 가설일 텐데, '이명준은 왜'라는 의문과 '이명준이 만약'이라는 가설이 그것이다.
내가 학구적인 열정이 있거나 늦깎이로 등단했을지언정 제대로 된 소설가였다면 '이명준은 왜 제3국을 선택했는지'와 '이명준이 만약 죽지않고 살아남았다면' 중 하나라도 붙잡아 논문을 쓰거나 소설을 썼을 것인데 어느 하나 근처 스치지도 못했구나, 하는 사실을 오늘 느닷없이 깨달은 것은 바로 이 책 때문이다.
스토우 헌터스.
한국계 미국인 작가 폴 윤(44)의 장편소설 '스노우 헌터스'는 북한군 포로 요한이 제3국인 브라질을 선택해 그곳에서 살아가며 전쟁의 상흔을 지워나가는 이야기다. '광장'을 잇는 소설은 아니지만, 광장세대(?)의 상실감을 메워주는 소설로 독자를 찾아온 책이라고 해도 무방한 줄거리 아닌가.
"그 겨울, 비가 내릴 때, 그는 브라질에 도착했다. 그는 바다를 건너왔다. 화물선에 탑승한 유일한 승객이었다."
소설의 서두를 여는 문장으로, (이명준이 아닌) 요한이 브라질 항구에 도착하는 장면이다. 생애 처음 바다를 보는 스물다섯의 청년 요한이 낯선 나라에서 환대를 받으며 상처를 극복해 가는 소설을 구상할 수 있었던 건 작가의 할아버지가 모아둔 6.25 관련 자료와 사진 덕분이라고 한다.
'영 라이언스 픽션 어워드'(Young Lions Fiction Award) 수상작인 이 소설에 꽂혀 한동안 연락두절 상태로 번역에 몰두한 황은덕 소설가의 노고와 애정 덕분일까. 번역서가 아니라 원작이 한국어로 쓰여진 소설이라 해도 무방할 만큼 편안하게 읽힌다. 아참, 번역자인 황은덕 샘과 함께 지하철을 타고 오면서 우리는 왜 이명준을 살려낼 생각을 못했을까, 한탄을 주고받았다는 TMI도 살짝 덧붙여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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