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화가 김홍도 - 붓으로 세상을 흔들다
이충렬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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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화가 김홍도 이충렬

 

김홍도의 행적

 

p448)성포리에서 아버지와 함께 강세황 집에 가서 제자로 받아달라고 부탁.

강세황은 김홍도에게 <개자원화원>을 열심히 모사하라고 가르침.

노들나루까지 걸어가 나룻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 심사정의 집으로 가서 제자가 됨.

이인문의 도움으로 함께 도화서 화원이 됨. 영조의 수작연을 그림.

어용 화사가 되어 수로지은으로 사재감의 종 6품 주부직을 제수받음.

삼책불통으로 파직되는 수모를 겪음.

장원서와 사포서 별제가 되어 그곳에서 62세의 나이에 사포서 별제가 된 강세황을 만남.

속화를 그리러 화구통을 메고 삼청동 계곡과 광통교를 다니며 평민들의 삶을 그림.

울산 목장 감목관이 되어 목자와 어부의 비참한 삶을 만나고 그들을 그림.

영조가 승하하자 보불 화원이 되어 다시 한양으로 돌아옴.

강희언 집에서 주문 그림을 그리며 중인 묵객들을 만나 향유를 즐김.

강세황으로부터 속화가 대단한 그림이라고 칭찬받음.

백운동천 위에 집을 마련하고 당호를 단원이라 부르며 기뻐함.

정조의 어진을 그리면서 두 번째로 어용 화사가 됨.

동빙고 별제로 일하면서 추운 한강에서 고생하며 해수병을 얻음.

안기 찰방에 제수됨.

임기를 마치고 한양에 올라와 김응환과 함께 영동 9군과 금강산으로 봉명사행을 떠남

세 번째 어용화가가 되어 연풍현감에 제수됨.

상암사에 올라가 열심히 불공을 드려 아들 양기를 얻음.

연풍현감을 자리를 파직당해 의금부 관원들의 처분을 기다리지만 혜경궁의 축하연으로 사면령이 반포됨.

방외화사가 되어 김한태의 집에 얹혀서 살면서 그림을 그림.

다시 도화서로 돌아가 <주부자시의도>를 그려 정조의 칭찬을 받음.

정조의 갑작스런 승하 소식에 슬퍼함.

순조의 수두 완쾌를 기념해서 <삼공환불도>를 그림.

전주에 내려와 <추성부도> 를 그림. 아들에게 마지막 편지를 씀.

고질병인 천식으로 숨을 거둠.

 

 

초서

p18 김홍도는 시대와 인간의 모습을 쉬지않고 화폭에 담아냈다. 아무도 가지 않았던 길이었고 자신만의 그림 세계를 위해 예술혼을 불태우지 않으면 이룰 수 없는 성취였다.

 

p19 전기작가는 독자들이 평가할 수 있도록 삶의 행적을 하나의 행로로 만들어야 한다. 빈 공간을 최소화하기 위해 주인공이 남긴 것뿐 아니라 남기지 않을 것까지 구석구석 들여다보며 조그만 흔적이라도 찾아야 한다.

 

p22 도화원 화원으로서 김홍도를 생동감 있게 재현하기 위해 함께 활동한 동료 화원들을 불러내야 했다. 이를 위해 수많은 참고자료를 찾고 또 찾았다. 아무리 열심히 찾아도 메울 수 없는 빈 공간이 생기기 마련이다.

 

p69 사능아, 이제부터 전해오는 옛 그림을 좇아서 배우고 익혀 힘을 쌓아야 한다. 그러나 그건 그림의 기본을 익히기 위한 공부일 뿐이다. 네가 명심햐야 할 건, 보이는 대로 그리면 붓장난이 되고 만다는 사실이다. 좋은 그림을 방 할 때는 그 그림이 보여주려고 한 정신을 찾아서 그려야 한다.

 

정신이라는 단어가 홍도의 가슴속에 박혔다. 화의(그림의 뜻)를 이해하고 그 뜻을 자신의 방법으로 새롭게 표현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p77 그림만 그리다보면 그림의 정신을 놓치고 재주에만 빠질 수 있다. 홍도는 사람의 마음과 통할 수 있는 그림으로 가는 길에는 손과 눈뿐 아니라 귀까지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p81 남들이 다 그리는 그림으로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 사람들이 어떤 그림을 좋아하는지 생각하고 궁구할 때라야 가능한 일이다. 사능아, 나는 네가 사람의 마음과 통할 수 있는 너만의 그림을 그리는 화사가 되기를 바란다.

 

홍도는 너만의 그림이라는 말과 가야할 궁극의 길이라는 말이 박혔다.

 

네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릴 기회는 많지 않다. 너 스스로 기회를 만들어 그려야 한다. 꼭 후세에 이름을 남길 너의 그림을 그려야 한다.

 

p143 양반의 행복은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의 품계에 올라가는 입신양명이지만 벼슬과 태어날 때부터 거리가 먼 평민의 행복은 이처럼 다양하고 생생했다.

 

p148 소재가 다를뿐 그림을 그리는 자의 정신은 매한가지다. 세상에 속된 그림과 속되지 않은 그림이 있는 게 아니라 속된 화가와 속되지 않은 화가가 있을 따름이다.

 

p156 진경산수는 그곳을 가보지 못한 사람들도 그 속에 있는 것처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p168 나는 자네 덕분에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여기까지 온 거야.

 

p215 저잣거리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그대로 그려야겠다는 깨달음이 있었기에 이런 독창적인 그림이 나온 것이다. 새로운 경지다. 스스로 터득하여 독창적인 경지에 이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p241 양반이라도 3대 안에 과거에 급제하거나 음서로 벼슬에 제수되지 못할 경우 양반 족보에서 퇴출되어 중인을 전락하기 때문에 아들은 없는 살림이라도 과거에 급제할 수 있도록 공부를 해야 했다. 양반 세계는 중인과 평민에게만 굴레를 씌우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몰락한 양반은 그들대로 체면에 얽히어 저렇게 숨어서 겨우 생활의 방편을 이어가야 했다.

 

p271 강 건너 압구정 인근 별서에 사는 양반 사대부들은 겨울에 얼음이 언 한강을 빙호라 부르며 시를 읊었지만, 부역 나온 백성들에게 한강은 눈물과 고통의 강이었다.

 

p311 세상을 보는 눈이 좁으면 정신이 막히고 속이 답답해진다.

 

p326 무엇을 어떻게 그려야겠다는 생각마저 사라졌다. 생각조차 깃들지 않은 절대고독 속에서 김홍도는 부지런히 유탄을 움직였다.

 

p368 충청감영은 현감들에게 사비를 털어서라도 진휼하라며 아사자가 많이 나오는 고을의 현감은 중죄로 다스리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백운동천 집을 판 돈을 풀어 조를 14(2) 구입했다. 조정에서는 단 한차례 구휼미를 보내고 끝이었다. 나머지는 현감이 알아서 조달해야 했다. 김홍도는 사비로 총 400섬의 조를 구입해 구휼했다. p381 연풍에서 얻은 건 아들이요, 잃은 건 명예와 재산이었다.

 

p398 나이가 들어서 그런 것인가? 이제는 편안한 그림이 그리고 싶구나. 양반이든 평민이든 누구에게나 마음의 위안을 줄 그런 그림을 그리고 싶다.

 

p402 잡는 방법은 다 같으나 묘한 솜씨는 스스로 깨달아야 하오. 아침이나 저녁이나 이 낚시를 물속에 던져놓고 정신을 집중해보시오.

 

p407 김홍도는 종이가 펼쳐진 서안 앞에 앉기 전에 세수(손을 씻다)를 했다. 그리고 시종이 마당에서 달여온 차를 마시며 정신을 맑게 했다. 마음에 조금이라도 불편한 기색이 있으면 붓을 들지 않고 기다렸다. 마음을 비우고 머릿속도 비우고 심지어는 여행에서 그려온 초본까지 버리고 모든 것이 고요해지기를 기다렸다. 그런 다음에 천천히 붓을 들었다. 붓이 마음을 따라 움직였고 마음은 화폭 위에 물들어 갔다.

 

p408 혼신의 힘이란 내가 마음먹는다고 나오는 힘이 아니다.

 

 

느낀 점

 

책을 읽으면서 한 인간의 삶, 한 위인의 삶 전체를 조용히 따라갔다. 한 개인의 혼신의 노력과 그에게 주어진 환경, 그를 둘러싼 관계 그 모든 걸 지켜볼 수 있다는 것이 내겐 기쁨이고 행복이고 또 행운이었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묵직한 것들이 가슴에 다가왔다. 이 감동들은 과연 어떤 것일까? 하나씩 차근차근 찾아가 보고 싶었다.

 

1. 친구와의 우정

 

[이인문]너무도 고마운 친구였다. 먼저 도화서 화원이 된 이인문은 친구 김홍도가 도화서에 들어올 수 있도록 돕는다. 둘은 도화서에 들어가 평생 문경지교의 우정을 나누는 사이가 된다. 김홍도는 이인문에게 고마움을 표현하고 신세를 갚고 싶어 하지만 이인문은 이렇게 말한다. p168 나는 자네 덕분에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여기까지 온 거야. 그들의 서로를 향한 애정 어린 순수한 우정에 감동했다.

 

2. 존경하는 스승님 [강세황, 심사정] & 김홍도의 제자 박유성

 

강세황은 중인인 김홍도를 10살부터 제자로 받아준다. 또 김홍도의 재능을 알아보고 자신의 지인 심사정과도 만나게 해주어 김홍도는 또한 심사정의 제자가 되었다. 김홍도는 강세황과 심사정에게 많은 가르침을 받고 도화서 화원이 될 수 있었다. 김홍도도 박유성이라는 제자를 두어 애정으로 열심히 가르쳐서 박유성도 도화서 화원이 된다. 그렇게 그들은 세대를 물려 스승에게 충실히 배우고 또 그 배움을 제자에게 가르치며 세대를 이어간다.

 

3. 풍류를 주선하고 함께 나누던 예술가들 & 예술가를 지원해주던 부자 상인들

 

김홍도가 회상하는 가장 행복하던 시절이다. 강희언은 자신의 집에 화원들을 초대해 함께 풍류를 즐기고 그림을 그렸다. (신한평, 김홍도, 이인문, 김응환, 한종일, 김득신 등) 공동체 안에서 예술을 향유하고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서로에게 위로와 힘이 되어준 사람들, 그들은 서로를 돕고 도왔다. 성공한 상인들은 김홍도의 예술성을 알아봐 주었고 이인문의 주선으로 엄행수는 김홍도의 병풍 그림에 집 한채 값을 지불했다. 말년에 김홍도가 모든 재산을 잃고 연풍 현감에 파직되어 한양으로 돌아왔을 때 김한태라는 부호 상인은 기꺼이 자신의 집을 내어 주기도 하였다.

 

4. 김홍도의 평생에 걸쳐 끝없이 그려내는 수많은 작품들

 

김홍도는 어려서부터 강세황 스승님 아래서 을 열심히 그리고 심사정 스승님께서 주신 를 끝없이 연습하고 도화원에 들어가 영조의 수작연도와 영조의 어진을 그려 어용 화사가 된다. 그는 도화원에서 수많은 그림을 그려야했고 또 궁궐에서 그린 그림들을 양반들이 주문하면 같은 그림을 여러번 반복해서 그리고 또 그렸다. 또한 평민들의 삶과 저잣거리의 풍경들을 그려냈고 왕의 명으로 봉명사행을 다녀오며 금강산과 영동 9군 등 한국의 자연을 끝없이 그려냈다.

 

5. 울산 목장 감목관, 동빙고 별제, 연풍 현감 시절의 고달픈 시련들

 

3번의 임금님의 어진을 그린 포상으로 종6품 사재감, 감목관, 찰방, 현감 등에 임명되지만 명예와는 달리 대부분이 무록직이었고 일은 고되고 힘들었다. 김홍도는 직책 유지를 위해 치르는 수령강 시험에서 삼책 불통을 받아 파직되는 수모를 겪는다. 울산 감목관 시절은 가족과 떨어져 외로움을 더했고 동빙고 별제의 시절은 추운 겨울 새벽에 한강에 나가 얼음을 잘라내어 저장하고 여름 내내 그 얼음을 깨끗이 보관하는 일을 하느라 죽을 때까지 고질병인 천식으로 기침을 달고 살았다. 연풍 현감의 재직시절도 만만치 않았다. 충청감영은 현감들에게 사비를 털어서라도 진휼하라며 아사자가 많이 나오는 고을의 현감은 중죄로 다스리겠다고 엄포를 놓았고 백운동천 집을 판 돈을 풀어 조를 14(2) 구입했다. 조정에서는 단 한차례 구휼미를 보내고 끝이었다. 나머지는 현감이 알아서 조달해야 했다. 김홍도는 사비로 총 400섬의 조를 구입해 구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유사로 제수된 홍대엽은 연풍 현감 김홍도가 임무를 다하지 못했다고 고발하고 결국 파직되고 만다.

 

6. 몰락한 양반들과 평민이나 천민의 처절하고 힘든 삶

 

김홍도는 관직의 책무를 수행하며 마을 곳곳의 사람들을 챙기며 그들의 고달픔과 어려움을 보았다. 모든 계층들은 그들의 신분 속박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김홍도가 중인으로서 최대의 성공이 도화서 화원의 어진화사였고 관직은 종6품의 무록직이었듯이 양반이라도 3대 안에 과거에 급제하거나 음서로 벼슬에 제수돠지 못할 경우 양반 족보에서 퇴출되어 중인으로 전락한다. 몰락한 양반들은 체면에 얽매여 숨어서 자리를 짜거나 물레를 돌리며 생활을 이어갔다. 평민이나 천민의 삶들도 처참하고 고달팠다. 얼음을 채빙하고 운송 저장하는 일은 최악의 고역으로 부역나온 백성들에게 한강은 고통과 눈물의 강이었다. 연풍현감에 제수되었을 때에도 김홍도는 자신의 전 재산을 팔아서 조400섬으로 굶어 죽어가는 백성들을 도왔다. 백성들은 자신이 굶더라도 소와 말을 살리기 위해 구휼미를 조로 바꾸어 먹이로 사용하기도 했다. 각자의 자리에서 모두 힘들고 처절한 삶을 살아내었다.

 

7. 봉명사행 영동 9군과 금강산을 그리다.

 

김홍도의 산수화는 편안히 지역을 유람하며 여유롭고 한가하게 그린 그림이 아니었다. 강원도 동쪽에 있는 9군 중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형을 그리고 봉명사행을 수행하는 중에 금강산의 비경도 함께 담아오라는 명을 받았다. 김홍도는 산수화에 능한 김응환과 함께 국가 대사에 중요한 그림을 그린다는 막중한 책임감을 안고 길을 떠난다. 각각의 풍광들을 열심히 사진 찍듯 그리고 또 그렸다. 두 달 가까운 봉명사행을 마치고 백여 점의 초본을 그리고 잘된 70점을 가려내어 비단 위에 그렸다. 그리고 정조가 보기에 편하게 다섯 권의 화첩으로 만들어 진상했다.

 

8. 강세황의 일생

 

강세황은 전주 강씨로 1713년 한양의 남소문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소북으로 조부 강백년은 좌참찬 부친 강현은 대제학과 예조판서를 지낸 명문가였다. 그러나 이인좌의 난 때 맏형 강세윤이 반적과 내통했다는 누명을 쓰고 체포되어 가문에 역적공모죄의 굴레가 쒸워져 과거를 급제해도 제수받을 수없어 강세황은 과거를 포기한 채 그림과 글씨를 쓰며 세월을 보냈다. 32세 때 가난 때문에 안산(安山)으로 이주한 뒤에도 오랫동안 학문과 서화에만 전념하였다. 처음 벼슬을 한 것은 61세로, 영조의 배려에 힘입어 관계에 진출하게 되었다. 이후 64세 때 기구과(耆耉科), 66세 때 문신정시에 장원급제하였으며, 영릉참봉·사포별제(司圃別提병조참의·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하였다. 72세 때 북경사행(北京使行), 76세 때 금강산 유람을 하고, 기행문과 실경사생 등을 남겼다. 강세황의 큰아들이 강인이 암행어사 서영보에 의해 파직당하고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결국 유배되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자 강세황도 78세로 아들의 비극적인 죽음의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눈을 감는다. (p351)

 

9. 이충렬의 작가정신

p19 전기작가는 독자들이 평가할 수 있도록 삶의 행적을 하나의 행로로 만들어야 한다. 빈 공간을 최소화하기 위해 주인공이 남긴 것뿐 아니라 남기지 않을 것까지 구석구석 들여다보며 조그만 흔적이라도 찾아야 한다.

 

p22 도화원 화원으로서 김홍도를 생동감있게 재현하기 위해 함께 활동한 동료 화원들을 불러내야 했다. 이를 위해 수많은 참고자료를 찾고 또 찾았다. 아무리 열심히 찾아도 메울 수 없는 빈 공간이 생기기 마련이다.

 

도화원에서 왕의 명을 받은 그림부터 평민을 삶을 그려낸 풍속도까지 김홍도의 그림을 통해 조선 시대의 상들을 속속들이 보고 느낄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김홍도는 후대에 이름을 남긴 위인이 되었지만 당대에 그는 자신의 주어진 삶을 최선을 다해 살아갔다. 그것이 전부였다. 이 메시지는 나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내게 주어진 삶을 그저 열심히 최선을 다해 꿋꿋이 살아가련다. 그것이 내가 해야 할 전부이다.

 

 

두산백과 ==> 천년의 화가 김홍도

 

1.강세황의 추천으로 이른 나이에 도화서의 화원이 되었다.

 

===> 이인문의 추천으로 이른 나이에 도화서 화원이 되었다.

 

2. 명나라 문인화가 이유방(李流芳)의 호를 따서 단원(檀園)이라 스스로 칭했다. 이는 이유방이 지닌 문사로서의 고상하고 맑은 정신과 기묘하고 아취가 있는 그의 그림을 사모한 데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

 

===> 고향 마을 노적봉 중턱에 박달나무 숲 단원이 떠올랐다. 표암 선생과 여주이씨 가문 형제들이 야회를 열던 곳이네. (p253)

 

3. 정조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서 그는 당대 최고의 화가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 정조는 현풍연감 김홍도를 파직하고 의금부로 압송하라는 명령. 행행에 참여하지도 않음.

 

4. 단원 화풍이라고 불리는 명작들을 그려내기 시작했다. 정조가 사도세자의 능으로 행차하는 광경을 그린 원행을묘정리의궤는 조선시대 기록화의 기념비적 대작이고,

 

===> 김홍도는 행행에 참여하지 않았고 다른 화원들이 그린 초본을 인쇄용 밑그림으로 옮기는 작업을 맡음 (p385)

 

김홍도는 왕의 어진에서 촌부의 얼굴까지, 궁중의 권위가 담긴 기록화에서 서민의 삶의 애환이 녹아 있는 속화까지 신분과 장르를 아우르며 그림을 그렸다. 화가 신분으로 종6품에까지 오르는 세속적 출세를 맛보았고, 비록 말년에는 가난과 고독 속에 생을 마감했으나 일생동안 시를 읊고 고졸한 멋을 즐길 줄 아는 진정 위대한 화인이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홍도 [金弘道] (두산백과)

 

단원은 어릴 적부터 그림을 공부하여 못 하는 것이 없었다. 인물, 산수, 신선, 불화, 꽃과 과일, 새와 벌레, 물고기와 게 등에 이르기까지 모두 묘품(妙品)에 해당되어 옛사람과 비교할지라도 그와 대항할 사람이 거의 없었다. 특히 신선과 화조를 잘하여 그것만 가지고도 한 세대를 울리며 후대에까지 전하기에 충분했다. 또 우리나라 인물과 풍속을 잘 그려내어 공부하는 선비, 시장에 가는 장사꾼, 나그네, 규방, 농부, 누에 치는 여자, 이중으로 된 가옥, 겹으로 난 문, 거친 산, 들의 나무 등에 이르기까지 그 형태를 꼭 닮게 그려서 모양이 틀리는 것이 없으니 옛적에는 이런 솜씨는 없었다. 그림 그리는 사람은 대체로 천과 종이에 그려진 것을 보고 배우고 익혀서 공력을 쌓아야 비로소 비슷하게 할 수 있는데, 단원은 독창적으로 스스로 알아내어 교묘하게 자연의 조화를 빼앗을 수 있는 데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천부적인 소질이 보통 사람보다 훨씬 뛰어나지 않고서는 될 수 없는 일이다.”

 

단원 김홍도의 스승이었던 강세황의 글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홍도 [金弘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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