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 - 중요한 것들에 대한 사색
어슐러 K. 르 귄 지음, 진서희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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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좋게도 남보다 조금 길게 설 연휴를 즐기게 되어, 연휴 동안 활자를 즐길 여유가 되었다. 솔직히 말해, 약간은 양심없는 짓이기도 하다. 업무와 현생에 대한 현타때문에 십대와 대학 시절의 방학과 같은 긴 여가를 즐기고 싶은 마음에 사로잡혀서 눈 딱 감고 회사 프로젝트 초반인데도 연차를 써버렸다. 그 탓(덕)에 선배와 동기와 후배들이 고통받는 이 시점에 나는 따뜻한 거실에 푹신한 소파에 부드러운 담요를 덮고 레몬차를 마시며 책을 읽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연초에 계획했던 2019 나의 목표-자기개발새발 등의 이것저것 등등-도 모조리 놔두고 넷플릭스와 독서만을 즐기려고 책 두 묶음과 크롬캐스트만 들고 고향으로 냅다 튀었다. 그리고 약 10일간의 '남는 시간=연휴=휴가=모방 방학'을 즐기게 되었다며 어깻춤을 추었다.

입사하고부터 그토록 갈망하던 '남는 시간'말이다.


남는 시간의 반대말은 아마도 바쁜 시간일 것이다. 나는 아직도 남는 시간이 뭔지 잘 모르겠다. 내 시간은 전부 할 일로 바쁘기 때문이다. 항상 그래왔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내 시간은 삶에 점령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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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남겨둘 시간이 없다.


전 직장의 상사와 점심 식사를 하고 들어가는 길에 이런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있다. 정확히 어떤 주제로 이야기가 시작되었는 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마 시간과 노력에 대한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때 SNS에서 주어들은 문장이 기억나서 나는 이렇게 말했었다, 계산이나 기억력처럼 노력과 집중하는 것도 일종의 능력이래요.

요컨대 르 귄은 나에게 없는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인 것이다. 나는 언제나 내게는 부족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흠모해왔고, 단 십여장을 넘기자마자 남겨둘 시간이 없는 이의 이야기에 빠져들 준비가 되었다.



노년은 누구든 거기까지 이르는 자의 것이다. 전사들도 늙는다. 나약한 이들도 늙는다. 사실상 개연성으로 따지면 전사들보다 더 많은 나약한 이들이 늙어가게 된다. 노년은 건강하고, 강인하고, 거칠고, 용감무쌍하고, 병들고, 허약하고, 겁이 많고, 무능한 사람들 모두의 것이다. 


 이 에세이에 대한 프리뷰를 읽다가 가장 눈에 들어온 글이 바로 위의 노년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약한 이들도 늙는다. 사실상 개연성으로 따지면 전사들보다 더 많은 나약한 이들이 늙어가게 된다. 작가는 자신의 나약한 노년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 부분은 공감할 데도 없이 공감할 수밖에 없는 내용이었다. 육체적인 노화에 대한 것은 언제나 미지의 공포에 쌓여 있다. 자타칭 인생 선배들이 어쩌다 가끔 노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곤 하는데, 풀리지 않는 피로와 체력에 대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인간의 몸은 반백년을 넘기면 하나둘씩 기능에 부하가 걸리게 된다. 여러 매체들은 의료기술이 발달해서 백세시대라고 소리높혀 이야기하는데, 말하자면 평균적인 인간은 기능이 저하하기 시작하는 장기와 눈, 귀 등의 감각기관과 삭아가는 뼈와 이빨 그리고 어떤 식으로 노화가 진행할 지 짐작하기도 힘든 뇌를 데리고 어떻게는 평균 50년을 더 굴려가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도 평균적인 것으로, 예상하기 힘든 질병이나 도움도 안되는 가족력, 생활 습관으로 인한 기능 저하의 가속화 등등이 옵션으로 붙는다면 조금 더 험난한 평균 50년을 보낼 수도 있겠다. 

따라서, 노년은 신체 단련이나 용기의 문제라기보다 장수라는 운의 문제인 것이다. 나는 언젠가 내 일과 생활 습관으로 인해 장기 중 일부-특히 간이 문제다. 맥주를 향한 내 열렬한 사랑이 지방간으로 돌아오다니 슬프기 그지 없다.-나 눈은 내 예상 수명 이전에 교체가 필요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 때가 오면 내 의료보험과 얼마간의 돈으로 해결이 되기만을 바랄 뿐으로, 앞으로 남아 있는 '내 스러질 시간'에 대해서는 최대한 담담하려고 노력한다.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를 처음 SNS에서 보고 눈에 들어온 것은 우선 고양이-당연하게도-와 저자의 이름이었다. 아마 이 책을 선택한 많은 사람들 중에서 내가 가장 작가와의 문학적인 만남이 적을 것이다. 얼마 전에야 겨우 어스시의 마법사를 다 읽고, 이어서 헤인 시리즈와 라비니아를 구매한 상태이다. 이미 파드가 누구인지를 알고 있는 사람도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일단 파드에 대해서는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르 귄은 이 에세이에서 노화, 문학, 페미니즘, 식물 등등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있고, 이 사이에 르 귄의 고양이 파드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딱정벌레에 대한 오타쿠적 관심이 있는 턱시도냥이다. 이 오타쿠적 관심이라는 것은 르 귄이 직접 한 말은 아니다. 단지 르 귄은 딱정벌레에 대한 파드의 관심도를 아래와 같이 묘사했을 뿐이지만, 오타쿠의 눈에는 오타쿠가 보이는 법이다.


파드가 딱정벌레 소리를 듣거나, 냄새를 맡거나, 보기라도 한다면 그 딱정벌레가 순식간에 파드의 우주를 점령할 것이다. 파드는 그 무엇에도 개의치 않는다.


이런 파드의 열정적인 관심사에 빗대는 것이 르 귄 본인이 가지고 있는 말, 언어, 글에 대한 애정이다.


나는 종종 글쓰기를 직물 짜기, 도자기 만들기, 목공일 같은 공예에 비교한다. 말에 대한 나의 열정은 흔히 조각가, 목수, 소목장들이 오래되고 질 좋은 밤나무를 기쁜 마음으로 찾아내서 그것을 연구하고 파악한 후에 감각적 쾌락을 느끼며 다루는 과정과 매우 흡사하다. 밤나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걸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이 뭔지 파악하여 오직 물질로서 나무 그 자체, 공예의 대상인 나무를 사랑하는 일이다.


신은 사소해보이는 바로 그곳에 계신다, 라고 하듯이 잘 짜여진 이야기의 기반에는 한 문장 안에 쓰일 단어와 문구에 대한 애정이 있는 것이다. 이 에세이를 읽기 전에 가장 기대하고 있던 부분이 르 귄의 문학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었는데, 2장 문학 산업에서 기대를 충족할 수 있었다. 2장에서 가장 좋았던 챕터는 내 케이크 지키기, 아버지 H였다. 지금 일리아드를 읽고 있는 중인데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아버지 H에 대한 내용과 함께 리뷰를 적어 보고 싶다.



 평소 타인의 생각이나 의견에 대해 흥미가 적은 편이라 에세이 장르를 제대로 읽은 것은 솔직히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남자 작가들의 에세이 한편도 읽은 적이 없는데, 르 귄의 에세이는 꼭 한번 읽어보고 싶었다. 특히, 문학과 페미니즘에 대한 생각이 궁금했는데, 읽고나니 그동안 내가 에세이 장르를 너무 폄하하고 있었던게 아닌가 싶다. 이번 기회를 통해 다른 여성 작가들의 에세이도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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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리커버 특별판) - 조선인 혁명가 김산의 불꽃 같은 삶
님 웨일즈.김산 지음, 송영인 옮김 / 동녘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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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민주주의 국가이기 때문에 어떤 책이든 출간할 수 있는 거예요. 책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도 독자에게 있구요. 개탄하기 전에 그렇게 좋아하시는 자유민주주의부터 제대로 배워보시는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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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라이즈
J. G. 밸러드 지음, 공보경 옮김 / 문학수첩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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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부의 긴장감에 별 다섯개, 후반부의 타락에 별 세개. 후반부를 읽고있으면 글에서 오줌냄새가 난다. 이성의 끈을 놓아버린 사람들에게서는 짐승의 냄새가 난다. 폭력, 근친, 성폭력, 불륜, 살인 등등 자극적인 소재를 배려없이 보여준다. 고층아파트를 소재로 한 특이점과 소설 속 분위기를 살려주는 문장들을 제외하면 큰 매력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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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펜타메로네
잠바티스타 바실레 지음, 정진영 옮김 / 책세상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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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라고 해서 어린아이나 청소년에게 읽히지 마세요. 테일오브테일즈의 원작이라고해서 기대하면서 읽었는데 후회중입니다. 책 내용 중에는 인종차별, 여성혐오, 장애인혐오로 여길 요소가 많으니, 영화는 영화 자체로만 즐기는게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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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 입이 트이는 페미니즘
이민경 지음 / 봄알람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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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말만 옳다는 듯이 지껄이는 사람들때문에 고통받으면서도, 계속되는 헛소리에 지쳐서 입을 다물면 항상 제가 진 게 되었거든요. 입트페 저에게 꼭 필요한 책이네요. 그 외에도 책을 구매하지도않고 별점테러를 자행하며 부끄러운줄 알라는 남성들의 리뷰만 봐도 이 책을 사야하는 이유가 생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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