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앰버 연대기 1 - 앰버의 아홉 왕자
로저 젤라즈니 지음, 김상훈 옮김 / 예문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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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젤라즈니의 소설은 신화적이면서 과학적이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 있다면 언제나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휴머니티. 그의 작품이 품고 있는 휴머니티는 무조건적으로 희망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매력적이다. 젤라즈니의 소설은 인생과 세계곳곳에서 발견되고 누구나 이야기하는 '허무'를 보다 세련된 방식으로 우리에게 보여준다. 허덧함에 대하여.

앰버 연대기은 철학적이지만 이해하기 쉽다. 표현은 난해하지 않으며, 다소 현학적이긴 하나 익살스럽다. 앰버 연대기는 논리적으로 치밀하다. 하지만 앰버에는 삼류 하드보일드이나 추리 소설에서는 느낄 수 없는 왠지 모를 느긋함과 편안함이 있다. 흥미진진한 사건들은 우리로 하여금 한시도 눈을 뗄 수 없게 한다. 그리고 화자의 서술에 배어있는 관조적 쓸쓸함은 마지막까지 우리의 가슴을 흔들어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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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르니에 선집 1
장 그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199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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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어느 공강시간, 학교서점에서 시간을 때우다 <섬>을 발견한 것이 사실 일년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섬>은, 이른 봄날 뿌연 창을 통해 바라보는 아침풍광 만큼이나 아련하다. '공의매혹'과 '고양이물루'를 제외하고는 내용은 고사하고 글의 제목들조차 기억나지 않는 것이다. 언어가 있어야할 자리엔 아쉬움이. 그건 마치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돌아오는 전철 칸에서 너무나 아름다운 여인을 발견하고 넋을 잃고 있었다가, 집에 돌아와 그녀의 얼굴을 떠올려보려고 무진 애를 쓰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그 얼굴을 기억할 수 없을 때 느끼는 아쉬움과도 같다. 하지만 으레 여인의 향기만은 한동안 우리 눈가에 남아 미소를 머금게 해 주듯, <섬>의 분위기 또한 잘 지워지지 않는 키스마크와 같아 한번이라도 그 따사로운 마법의 언어들에게 애무를 받아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결코 그 사실을 숨길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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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옷
아멜리 노통브 지음, 함유선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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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러스 제로와 마이너스 제로의 차이뿐 아무런 차이가 없다 --마르닉스

아멜리 노통의 신작 '시간의 옷'을 어제 읽었다. 이 책은 SF이면서 동시에 추리소설이며, 흥미진진한 대화편이자 철학서이며, 탁월한 블랙 유머집이면서 동시에 묵시록적 공포소설이기도 하다. 노통은 스스로의 소설에 등장하여 IQ 199의 천재 셀시우스와 대화를 나눔으로써, 근대적 합리성 혹은 도덕이 결여된(광인의=순수한=진정한) 지성에 내재한 잔인성을 경쾌한 필치로 그려내고 있다.

모든 추리소설 혹은 철학서가 그렇듯이, 이야기는 하나의 의문으로부터 시작된다. '폼페이를 멸망시킨 베수비오 화산 폭발은 누군가에 의해 저질러진 테러가 아닐까?' 그렇다면 누가? '폼페이의 문명을 있는 그대로 보존하고 싶어했던 미래의 어느...' 노통은 이 사실을 직관하게 되는 바람에 미래로 납치된다. 우리의 노통에겐 아무런 희망도 없어보이지만 노통은 포기하지 않고 '귀환'을 위한 끈질긴 대화를 이어나간다.

하지만 대화는 지루하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한판의 검투라고나 할까. 압도적인 힘의 차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통은 용감히 맞서 싸운다. 셀시우스는 소름끼칠만치 지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이며 또 그러므로 강한 사람이지만, 모든 강함의 이면엔 약함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예이기도 하다. 셀시우스가 제아무리 천재라 하더라도 합리성 그 자체의 필요조건이 되는 불합리한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던 것이다

바로 거기에 빈틈이 있다. 노통은 그 빈틈을 간과하지 않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다. 이런 측면에서, 이 책을 정신분석학적 텍스트로도 읽을 수 있다. 셀시우스는 자신의 심리적 외상이 된 '그 발견'을 억압하기 위해 '테러'를 자행한다. 자신의 시간선에서 본다면, '테러'는 분명 '구원' 행위이다. 그것은 논리적으로 옳다. 따라서 셀시우스는 테러에 대해 어떤 죄책감도 느낄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서기 79년 폼페이의 시간선에서 본다면 그것은 분명 폭력행위이다. 그러므로 셀시우스는 새디스틱한 성적쾌감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그의 폼페이에 대한 사랑이 페티시즘적이라는 것 역시 그 사실을 반증한다. 마조히스틱한 페티시스트는 새디스트의 다른 얼굴일 수 있으므로. 셀시우스는 폭력행위를 통해, 자신으로 향하던 죄책감(그가 22세기 인류의 후손이라는 사실과 결부된 죄의식)을 벗어버릴 수 있다. 자기자신으로 향하던 폭력성이 79년의 폼페이로 그 대상영역을 전환시키는 것이다. 그렇기에 셀시우스는 그토록 떳떳할 수 있다.

이 논리는 완전무결하다. 그것은 마르닉스의 잠언처럼, 셀시우스의 논리가 모순된 전제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태의 모순성은 실재의 본질이다. 즉 실재는 모순된 기표들의 연쇄로만 언표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남는다. 그것은 바로 셀시우스 자신이 분열되어 있으며, 실재를 언표하는 기표들로부터 소외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이다. 셀시우스는 자신의 편집증적(그 자신의 시대에선 편집증조차 아니지만) 증상을 유지하기 위해 노통을 그런 식으로 '처리'할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이 소설은 복잡하고 어려운 소설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싶다. 쓰다보니 리뷰가 좀 현학적이되었는데, 사실 시간의 옷은 치밀한 논리를 전개하면서도 매우 경쾌하고 재미있는 대화체의 소설이다. 한 마디로 일단 잡으면 번개 같이 읽어내리게 되는 그런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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