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저널리스트의 죽음 - 한국 공론장의 위기와 전망
손석춘 지음 / 후마니타스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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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이 '대화'를 강조하면서 '사용자'와 정부의 잘못은 모르쇠하고 노조에만 화살을 쏘아대는 것은, 단 한 가지 가정 위에서만 정당성을 갖는다. 노사정 3자 가운데 도덕이나 준법 의무는 노동자에게만 있다는 전제가 그것이다. 이러한 가정에 사용자와 정부가 동의할 수는 없을 터이고 동의해서는 안된다.

손석춘 <어느 저널리스트의 죽음> 2006년 후마니타스 刊 107쪽

 

손 선생의 이 지적은 너무도 당연하다. 언론이라는 것이 심판의 위치에 서 있는양 열심히 표정관리하지만 실은 한쪽 편만 들어주는 아주 고약한 군상들이다. 아쉽게도 준법 의무가 노동자들에게만 있다고 사용자와 정부는 인정하고 있다. 물론 비공식적으론 말이다. 나라의 모든 근심 걱정은 다 짊어진 자들의 눈으론 그저 노동자들이란 투정부리지 말고 일만 잘해주길 바랄 뿐이다. 이것이 국민소득 2만불을 목전에 두었다고 열광하는 이들의 '선진적(?)' 외침이라면 그 선진이라는 것 상당히 저열하다. 천민자본주의. 그 단어로도 부족한 것이 오늘의 정치 경제 언론의 자화상임을 본인들은 알고 있을까? 분명 똑똑한 분들이라 알고 있을게다.

 

2006. 12. 15 이용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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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의 그리스도인 - 신학선서 8
심상태 지음 / 바오로딸(성바오로딸)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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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의 그리스도인


문 : 몇 년 전에 무명(無名)의 그리스도교(anonymes Christentum) 또는 무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교수님의 정의(定義)가 많은 열띤 토론을 불러일으킨 일이 있는데요. 이 무명의 그리스도인이란 무슨 뜻인가요?

답 : 그걸 그렇게 이름할 것이냐 아니냐, 거기에 논란이 있을 수도 있지만, 내용이야 아주 쉽고도 간단하지요. 말하자면, 자기 자신의 양심을 따르고 있는 사람이라면 바야흐로 굳이 자기가 그리스도인이다 혹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라고 생각하든 말든, 굳이 무신론자라고 생각하든 혹은 그 반대로 생각하든 상관없이, 그런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에 의하여 받아들여져 있는 사람이요, 우리가 모든 그리스도교 신안의 목표로 고백하고 있는 영생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이다 - 그런 얘깁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은총과 성의(成義), 하느님과의 일치와 결합, 영생에의 도달 가능성이란 오로지 한 인간의 나쁜 양심에 그 한계선이 있을 따름이다 - 이것이 정작 '무명의 그리스도교'라는 말이 말해주자는 내용이지요.


문 : 그건 가톨릭 신자로서는 매우 자유주의적이라는 인상을 주는 명제가 아닐까요?

답 : 아니지요, 그렇게 말할 수 없어요. 보십시오, 이미 트렌토(Trento)공의회에도, 그러니까 수백 년 전에도 예를 들어 이른바 열망의 세례(Begierde-Taufe)라는 교리가 있었습니다. 즉, 아직 물로 세례를 받지는 않았지만 자기 나름으로 윤리적인 방향에서 적극적으로 하느님을 지향하고 있는 사람은, 암브로시우스(Ambrosius)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 오랜 가톨릭 교리에 따라서도 이미 성의된 인간인 것입니다.


<칼 라너 - 그는 누구였나>(대담 : 마이놀트 크라우스),  분도출판사 98~99쪽


복지카드 포인트로 책을 대량구매 했는데 주로 신학관련된 책을 샀다. 그중 분도소책 시리즈가 대략 2,000~3,000원 사이로 값싸고 제대로 유용한 정보가 담긴 책이라 우선순위로 클릭했다. 그 가운데 '분도소책24'는 20세기의 신학자 칼 라너가 죽기 얼마 전 인터뷰한 대담 내용이었다.


그는 단연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통해 활동한 신학자였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처음 공의회 소집이 되었을 때 누구도 교회가 세상을 향해 뛰쳐나오는 진보적 성과를 거둘 줄 몰랐다고 한 것으로 기억한다. 라너는 주교도 대주교도 추기경도 아니었지만 신학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모두가 그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


이 책자에서는 '무명의 그리스도인'이라고 번역되어있지만 보통 '익명의 그리스도인'이 그의 대표적 저서로 알고 있다. 누군가 가톨릭 신자에게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는가' 라는 질문을 한다면 '물론 그렇다' 라고 기꺼이 대답할 수 있는 것은 라너 신학의 덕분이다. 하느님을 모른채 죽어갔거나 하느님이 아닌 다른 신을 섬기다 죽었다 해도 그들에게도 구원의 길을 마련해 주셨을 것이다. 그들이 살아서 선한 일을 하고 하느님 뜻대로 살았다면 분명 구원의 문은 대문처럼 활짝 열려 있을 것이다. 그들을 일컬어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 한다.

익명의 그리스도인. 보편교회는 이러한 넉넉함으로 21세기를 살고 있다. 하지만 한국교회에서는 아직도 보수적인 교리와 신학이 실현되고 있거나 아니면 악화되고 있다. 죽은 칼 라너가 환생하여 한국의 교회를 방문하여 본다면 뭐라고 할까. 이제민 신부나 서공석 신부나 정양모 신부와 같은 분들을 신학교에서 쫓아낸 쪼잔함을 목도한다면 한숨 크게 내쉬지 않을까? 하지만 털털하게 웃으며 그럴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누구나 죽지 않겠소? 나도 죽었소. 아주 편협된 신학적 견지를 가진 사람들도 언젠가는 죽을 것이고.... 그러니 그런 걱정 말고 열심히 오늘을 사시오. 익명의 그리스도인들이고 뭐고 그런 구별이 어딨소? 어떻게 보면 이제 그런 표현 자체가 소용없는 시대인데 그런 말은 이제 폐기해도 좋소. 그냥 평화롭게 열심히 살면 되는거지. 그러니 홧팅하소."

2006. 12. 8 이용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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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 평전
조성기 지음 / 작은씨앗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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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가와 교육자의 모범, 유일한 회장

오늘자 한겨레신문에는 유한킴벌리 문국현 사장의 인터뷰가 실려 있었습니다. 요지는 대기업 경영자인 그가 왜 중소기업 혁신 전도사로 자타가 공인하고 있느냐는 것이지요. 그는 “평생학습체제 구축을 통한 중소기업의 혁신이 국가적 과제”라고 말하며 “대기업이 상생경영을 내세우면서 수천 개 협력업체 중 고작 몇 개만 지원하고, 경쟁력을 이유로 하도급비리 같은 불법행위를 버젓이 하면 되겠느냐”고 대기업을 질타했습니다. 저는 이 인터뷰를 보면서 문 사장같은 경영자가 있다는 것이 이 땅의 천민자본주의 안아서 한줌의 소금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래서입니다. 내가 유한양행을 주목하는 이유는 말입니다.

언제도 벗에게 그런 말을 했습니다. 자본주의는 기독교 국가에서 비롯되었지만 우리에게는 전혀 비윤리적인 방식으로 기업경영이 이뤄지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한권의 책을 권했습니다. 유한양행의 창업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유일한 박사를 이야기한 <유일한 평전>을 말입니다. 이 시대 우리의 기업가의 모범을 보여준 분입니다. 그 뿐인가요. 그분은 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고 땀흘려 번 돈으로 학교를 세웠습니다. 그것이 유한공고(유한학원)였고 지금의 유한대학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는 같은 시대를 산 현대의 정주영이나 삼성의 이병철 회장과 어떻게 달랐을까요? 존경할 기업인이 없다는 당신에게 굳이 이분을 소개하는 이유는 바로 가진 자의 나눔을 어떻게 실천하느냐를 생생히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가 일찍 전해진 평양에서 1885년에 태어난 유일한은 신식문물을 일찍부터 경험한 아버지의 권유로 9살 나이에 미국으로 유학길에 오릅니다. 21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올 때까지 그는 독립운동에 관여하기도 하고 미시건대 상대를 졸업하여 숙주나물 통조림을 생산하는 회사를 설립하는 등 일찍부터 사업에 귀재를 보였던 것 같습니다. 가난한 고국을 돕기위해 미국의 지인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귀국하여 익히 우리가 아는 유한양행을 설립하였습니다. 그는 비싼 약값으로 치료를 못받는 민중들을 위해 제약회사를 차려 공급하였습니다. 일반 기업인들처럼 역시 그도 사업가는 이윤추구가 목적임을 밝히면서도 ‘기업은 개인의 것이 아니며 사회와 종업은의 것이다’라는 기업이념을 추구하며 다음과 같은 실천을 하였습니다. “정성껏 좋은 상품을 만들어 국가와 동포에 봉사하고 정직 성실하고 양심적인 인재를 양성 배출하며 기업 이익은 첫째 기업을 키워 일자리를 만들고, 둘째는 정직하게 납세하며, 셋째는 그리고 남은 것을 기업을 키워 준 사회에 환원한다.”

그 정신은 일제시대 때부터 지금까지 유한양행이 이어온 전통입니다. 그 시절에도 그는 회사 노동자들에게 재교육의 기회를 주고 값싸고 질 좋은 상품을 시장에 내놓으려 했습니다. 더구나 이익이 남으면 그것을 반드시 사회에 환원하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았죠. 가족들을 기업에 등용하기도 했지만 특혜를 두지는 않았습니다. 동생과 아들이 있었지만 사장 자리를 다른 일반 임원에게 맡기기도 해 오히려 그들이 섭섭함을 느낄정도 였지요. 더구나 자식이 사업에 재능이 없다고 여겨지고 또 다른 직원들과 화합하지 못하다고 여겼을 경우에는 다시 미국으로 돌려보낼 정도였습니다. 가족의 기업이 아닌 사회의 기업이었기에 자신이 가진 모든 지분을 재단을 설립하여 기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박정희 정권 때 많은 기업들이 돈을 헌납했습니다. 그것으로 공화당을 차리고 더러운 정치자금으로 사용한 것을 우리는 역사에서 배웁니다. 그것을 안냈을 때 세무사찰로 보복하는 것은 불문가지구요. 하지만 유일한은 한 푼도 내놓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불법을 자행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괘씸죄로 세무조사가 나왔지만 그들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고 돌아갔을 뿐입니다. 세금포탈이 전혀 이뤄지지 않고 깨끗한 경영을 했기에 오히려 국세청으로부터 모범납세자로 선정되어 동탑산업훈장을 받을 정도였습니다.

부동산에 대한 인식도 남달랐습니다. 그는 원효로에 건물을 샀는데 예기치 않게 차익이 많이 남자 그것을 사원들에게 골고루 나눠주며 “본래 그 건물은 차익을 남기려고 사둔 것이 아닙니다. 또 내가 열심히 일해서 번 돈도 아니고 여러분들이 관리를 잘해서 번 돈이므로 나눠주는 것입니다”라고 할 정도로 불로소득에 대한 사회환원 의지가 올곧았다고 볼 수 있지요.

그의 삶 속에서 가장 행복한 것은 학교를 설립하고 지원한 일입니다. 물론 자기가 세운 학교만 지원한 것이 아닌 많은 학교에 적지 않은 돈을 기부하기도 했습니다. 그 이유를 그는 단순명쾌하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자신이 세운 학교는 아무 때나 지원할 수 있지만 다른 학교들은 지금밖에 지원할 수 없지 않은가, 라고 말이지요. 세상을 떠날 때 그는 세상을 한 번 더 놀라게 하였습니다. 유언장에 자식에게 재산을 남겨준다는 말은 없고(딸에게 자신의 묘소와 땅 5천평을 준다는 것과 손녀에게 학자금 1만불을 준다는 것만 있을 정도임) 모든 재산을 학교 재단에 기부하며 오히려 아들에게는 ‘대학까지 졸업시켰으니 자립하라’는 유언을 남겼을 뿐입니다.

1971년 3월 11일 영면한 유일한 선생의 소원은 단 한가지였습니다. 자신이 손자처럼 사랑한 유한공고 학생들 곁에 함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흘 후 열린 장례식에서 학생들은 “할아버지 고이 잠드소서”라는 프랭카드로 맞이했다고 하죠. 이 평전에는 나오지 않지만 연전에 KBS 개혁프로그램으로 방송되었던 <인물현대사> ‘유일한’편에서는 그 장례식과 그의 학교사랑에 대한 부분이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유일한 회장은 자신이 이사장이지만 학교운영에 대해서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경영은 교장과 선생님들이 알아서 해줄 것이므로 자신은 그 뒷받침을 하는 것이 이사장의 몫이라는 것이 그의 철학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끔 학생들이 보고 싶어 들르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공식적인 학교방문은 졸업식이 전부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학생들도 그를 그냥 자신들의 할아버지로 여겼고 그리 호칭하였다고 합니다. 작금의 사립학교 이사장들은 공익적인 재단으로 설립된 학원을 사유화하고 개인적 사업으로 여기는데 비하여 이 얼마나 선각자적인 인식과 행위입니까? 이런 분이 특별하게 보이는 세상이 비정상이겠죠.

어떻습니까? 여기서 당신에게 그분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 풀어놓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대략 이 편지에서 이야기한 것만으로도 우리의 기업가와 교육자들이 지표로 삼아야할 위인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유일한 선생의 그런 인식은 왜 달랐을까요? 그것은 일찍이 미국에 유학하여 합리적인 사회의 틀을 경험했기 때문이겠죠. 또 자신이 기독교인으로서 기독교윤리에 바탕하여 경영한 결과겠지요. 그 결과 기업도 교육도 공익을 위한 것일 뿐 어느 개인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는 단순한 사실을 그는 실천했을 뿐일 것입니다. 벗도 알겠지만 정말 착잡하게도 그러한 분들이 우리에게는 잘 눈에 띄지 않습니다. 기업가는 주식회사라는 것이 자신만의 능력만이 아닌 경영자들과 주주들, 그리고 사원들이 함께 이끌어 가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자기만의 능력으로만 생각합니다. 그 독선이 족벌로 이어지고 경영불합리로 나타납니다. 교육계는 어떻구요. 정부는 공교육을 지향하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사립을 양산하여 족벌화와 사유화를 조장하고 있습니다.

살아서 자신을 기념하는 기업가와 교육자는 얼마나 슬픈 존재일까요?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그가 이 세상을 떠난 직후 살아남은 자들의 몫이 아닐까요? 자신이 어떻게 평가될까를 걱정했다면 유일한은 지금 우리가 아는 유일한이 아닐 것입니다. 복음대로 살고 가난하게 살고 나누며 살고 가짐없이 사는 자유를 누린 그분을 우리는 존경합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이 사회에는 스스로 높이려는 분들을 자주 목도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런 얼간이들에게 무엇을 배우고 기념하게 될까요? 뒤에 남겨질 후배들이 자신을 긍정하지 않을 줄 알고 스스로 기념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유일한 선생이 지금까지 살아서 백수를 누리셨다면 한심한 사람들이라 호통을 치셨을 것입니다.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유일한 회장님, 아니 유일한 선생님이 우리 사회에서 '유일'한 분이 아니길 바랍니다. 그런 분들이 일반화된 사회를 꿈꾸렵니다. 너무 허황된 꿈일까요? 그런 꿈이 현실이 되기에는 방해하는 얼간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도 절망할 일은 아니겠죠. 문국현 사장처럼 창업자인 유일한 선생의 기업정신을 잇고 있는 이들이 있는 한 한국사회는 흐림에서 맑음으로 예상됩니다.


2006. 11. 23 밤 이용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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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술 1902-1950 -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
안재성 지음 / 사회평론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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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생 사건이 일어나서 경향이 물 끓듯 하고 학생 가운데서는 계속 희생자가 나오며 그래도 뒤를 이어 운동은 요원의 불처럼 확대되어 갈 때 나에게는 두 가지 깊이 감명된 바가 있었다. 첫째는 학생들이 일본제국주의에 대하여 불같이들 열렬한 데 비하여 교사들은 일반으로 냉담하고 비겁하다는 것, 둘째는 그 때 학교 내나 사회를 막론하고 소위 민족주의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도무지 반일 투쟁적이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 사실은 반일적이 아닌 민족주의라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가를 깨닫게 했으며 또 대부분 일제와 타협해야만 이익을 보장할 수 있는 유산자층이 반일적이지 못하다는 것도 당연한 일이라는 것을 명백히 알게 되었다. 동시에 민족주의자란 결국 이러한 층이 자기 위장을 하기 위한 정치사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일찍이 내가 전공하던 역사 연구의 한 방법론에 지나지 않던 유물사관(唯物史觀)이 조선에 있어서는 민족해방에 있어서 유일한 지침으로 내 앞에 실천노선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안재성 2006, <이관숧 1902~1950> 사회평론, 60~61쪽 ; 이관술이 해방 직후 신문에 게재한 회상기 재인용

해방 후 한 우익신문은 중요 지도자 5명을 조사하여 발표하는데 그 안에는 익히 우리가 알고 있는 이승만, 김구, 여운형이 포함되어 있다. 물론 박헌영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이관술이라는 인물에 이르러서는 누구인지 궁금할 것이다. 그 조사를 보더라도 해방 즈음의 우리 시민들은 우파보다는 좌파에 대한 기대가 컸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경성트로이카 일원으로서 일제하 조선공산당 재건과 독립운동에 힘 쏟고 해방 후 당의 재정부장을 맡으며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 일했던 그는 ‘정판사 사건’으로 불리는 위조지폐 발행의 수괴로 지목되어 복역하던 중 6.25 발발과 함께 대전형무소에서 처형된다.

위의 이관술의 회상기를 그의 전기를 통해 읽는 동안 제2차대전을 겪은 프랑스가 떠올랐다. 나치 독일의 점령하에서 굴복하여 부역한 지식인들과 지배층이 있었던 것은 우리와 마찬가지였지만 국외의 우파 망명정부와 국내의 좌파 레지스탕스의 협공은 그들에게 전승을 거두고 국토를 되찾는 결과를 갖게 하였다.

우리의 망명정부가 큰 역할을 잘했던 못했건 공부가 일천하고 더구나 근대사를 공부하는 말석에 앉은 입장에서 평가를 하기 주저할 수밖에 없지만 타협하지 않고 고문을 견디며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좌파 인물들을 애써 지우려한 근년까지의 우리 태도는 너무도 자명히 알고 있다. 물론 남북 분단이라는 역사적 단절이 있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그들에 대한 평가가 전무해서야 반쪽의 역사밖에 되지 않겠는가.

꽃을 바치고 싶다. 붉은 꽃을 바치고 싶다. 남도 잊고 북에서도 숙청이라는 명목으로 죽어간 일제하 사회주의 운동가들의 이름 앞에 꽃을 바치고 싶다. 그들은 유물론자로서 종교를 믿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저승의 그분들이 편안히 영면하길 기원할 뿐이다.

2006. 10. 30 이용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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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소설
가네시로 카즈키 지음, 김난주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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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책에 이런 말이 씌어 있던데, 가을은 ‘후회와 기억의 계절’이라고 말이야.”

“어떤 뜻일까요?”

“겨울, 봄, 여름을 지내면서 저지른 실수를 후회하고, 그것을 기억한다. 그럼 다음 실수를 예방할 수 있고, 그리고 그때까지의 실수도 어떤 형태로든 메울 수 있다. 그리고 그 기억을 안고 다가올 추운 겨울을 맞는다, 뭐 이런 뜻일까?”

가네시로 가즈키 소설집 <연애소설> 단편 ‘꽃’ 224쪽에서

가을은 후회의 계절이 맞다. 어제 가네시로의 이 책을 읽으며 새삼 그 말에 밑줄긋고 싶어졌다. 색연필이 없어서 한참이나 가방을 뒤지고 빨란색 연필 하나만 있었는데 그나마 부러진 것이었다. 과도칼로 깍고 줄을 그었다.

이 계절에 떳떳한 사람은 농부밖에 없을 것이다. 농부는 일년의 노고를 추수로 마무리 할 것이고 그 나름대로 고뇌는 있겠지만 일년 농사의 기쁨을 만끽하는 최고의 직업이다.

난 이 계절에 무엇을 해야할까. 손익계산서를 펴보지만 역시나 손해가 많고 그 보상을 내년에 만회하도록 해야할지 아니면 남아 있는 올해안에 승부를 보도록 할지를 고민하고 있다. 정말 바보다.

또 이 책의 이런 마지막 구절도 좋았다.

“차는 아주 상태가 좋다.
이 세상 끝까지 갈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
이세상은 멋지다.
나는 아무 상처 없이 돌아오리라.”
(위의 책 236쪽)

그렇다. 아무 상처 없이 내일을 꿈꾼다.
역시 희망을 남겨둘 필요는 있다.

2006. 10. 24 이용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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