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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의 그리스도인 - 신학선서 8
심상태 지음 / 바오로딸(성바오로딸) / 2001년 3월
평점 :
절판
익명의 그리스도인
문 : 몇 년 전에 무명(無名)의 그리스도교(anonymes Christentum) 또는 무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교수님의 정의(定義)가 많은 열띤 토론을 불러일으킨 일이 있는데요. 이 무명의 그리스도인이란 무슨 뜻인가요?
답 : 그걸 그렇게 이름할 것이냐 아니냐, 거기에 논란이 있을 수도 있지만, 내용이야 아주 쉽고도 간단하지요. 말하자면, 자기 자신의 양심을 따르고 있는 사람이라면 바야흐로 굳이 자기가 그리스도인이다 혹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라고 생각하든 말든, 굳이 무신론자라고 생각하든 혹은 그 반대로 생각하든 상관없이, 그런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에 의하여 받아들여져 있는 사람이요, 우리가 모든 그리스도교 신안의 목표로 고백하고 있는 영생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이다 - 그런 얘깁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은총과 성의(成義), 하느님과의 일치와 결합, 영생에의 도달 가능성이란 오로지 한 인간의 나쁜 양심에 그 한계선이 있을 따름이다 - 이것이 정작 '무명의 그리스도교'라는 말이 말해주자는 내용이지요.
문 : 그건 가톨릭 신자로서는 매우 자유주의적이라는 인상을 주는 명제가 아닐까요?
답 : 아니지요, 그렇게 말할 수 없어요. 보십시오, 이미 트렌토(Trento)공의회에도, 그러니까 수백 년 전에도 예를 들어 이른바 열망의 세례(Begierde-Taufe)라는 교리가 있었습니다. 즉, 아직 물로 세례를 받지는 않았지만 자기 나름으로 윤리적인 방향에서 적극적으로 하느님을 지향하고 있는 사람은, 암브로시우스(Ambrosius)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 오랜 가톨릭 교리에 따라서도 이미 성의된 인간인 것입니다.
<칼 라너 - 그는 누구였나>(대담 : 마이놀트 크라우스), 분도출판사 98~99쪽
복지카드 포인트로 책을 대량구매 했는데 주로 신학관련된 책을 샀다. 그중 분도소책 시리즈가 대략 2,000~3,000원 사이로 값싸고 제대로 유용한 정보가 담긴 책이라 우선순위로 클릭했다. 그 가운데 '분도소책24'는 20세기의 신학자 칼 라너가 죽기 얼마 전 인터뷰한 대담 내용이었다.
그는 단연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통해 활동한 신학자였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처음 공의회 소집이 되었을 때 누구도 교회가 세상을 향해 뛰쳐나오는 진보적 성과를 거둘 줄 몰랐다고 한 것으로 기억한다. 라너는 주교도 대주교도 추기경도 아니었지만 신학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모두가 그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
이 책자에서는 '무명의 그리스도인'이라고 번역되어있지만 보통 '익명의 그리스도인'이 그의 대표적 저서로 알고 있다. 누군가 가톨릭 신자에게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는가' 라는 질문을 한다면 '물론 그렇다' 라고 기꺼이 대답할 수 있는 것은 라너 신학의 덕분이다. 하느님을 모른채 죽어갔거나 하느님이 아닌 다른 신을 섬기다 죽었다 해도 그들에게도 구원의 길을 마련해 주셨을 것이다. 그들이 살아서 선한 일을 하고 하느님 뜻대로 살았다면 분명 구원의 문은 대문처럼 활짝 열려 있을 것이다. 그들을 일컬어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 한다.
익명의 그리스도인. 보편교회는 이러한 넉넉함으로 21세기를 살고 있다. 하지만 한국교회에서는 아직도 보수적인 교리와 신학이 실현되고 있거나 아니면 악화되고 있다. 죽은 칼 라너가 환생하여 한국의 교회를 방문하여 본다면 뭐라고 할까. 이제민 신부나 서공석 신부나 정양모 신부와 같은 분들을 신학교에서 쫓아낸 쪼잔함을 목도한다면 한숨 크게 내쉬지 않을까? 하지만 털털하게 웃으며 그럴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누구나 죽지 않겠소? 나도 죽었소. 아주 편협된 신학적 견지를 가진 사람들도 언젠가는 죽을 것이고.... 그러니 그런 걱정 말고 열심히 오늘을 사시오. 익명의 그리스도인들이고 뭐고 그런 구별이 어딨소? 어떻게 보면 이제 그런 표현 자체가 소용없는 시대인데 그런 말은 이제 폐기해도 좋소. 그냥 평화롭게 열심히 살면 되는거지. 그러니 홧팅하소."
2006. 12. 8 이용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