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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술 1902-1950 -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
안재성 지음 / 사회평론 / 2006년 8월
평점 :
절판
“광주학생 사건이 일어나서 경향이 물 끓듯 하고 학생 가운데서는 계속 희생자가 나오며 그래도 뒤를 이어 운동은 요원의 불처럼 확대되어 갈 때 나에게는 두 가지 깊이 감명된 바가 있었다. 첫째는 학생들이 일본제국주의에 대하여 불같이들 열렬한 데 비하여 교사들은 일반으로 냉담하고 비겁하다는 것, 둘째는 그 때 학교 내나 사회를 막론하고 소위 민족주의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도무지 반일 투쟁적이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 사실은 반일적이 아닌 민족주의라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가를 깨닫게 했으며 또 대부분 일제와 타협해야만 이익을 보장할 수 있는 유산자층이 반일적이지 못하다는 것도 당연한 일이라는 것을 명백히 알게 되었다. 동시에 민족주의자란 결국 이러한 층이 자기 위장을 하기 위한 정치사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일찍이 내가 전공하던 역사 연구의 한 방법론에 지나지 않던 유물사관(唯物史觀)이 조선에 있어서는 민족해방에 있어서 유일한 지침으로 내 앞에 실천노선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안재성 2006, <이관숧 1902~1950> 사회평론, 60~61쪽 ; 이관술이 해방 직후 신문에 게재한 회상기 재인용
해방 후 한 우익신문은 중요 지도자 5명을 조사하여 발표하는데 그 안에는 익히 우리가 알고 있는 이승만, 김구, 여운형이 포함되어 있다. 물론 박헌영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이관술이라는 인물에 이르러서는 누구인지 궁금할 것이다. 그 조사를 보더라도 해방 즈음의 우리 시민들은 우파보다는 좌파에 대한 기대가 컸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경성트로이카 일원으로서 일제하 조선공산당 재건과 독립운동에 힘 쏟고 해방 후 당의 재정부장을 맡으며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 일했던 그는 ‘정판사 사건’으로 불리는 위조지폐 발행의 수괴로 지목되어 복역하던 중 6.25 발발과 함께 대전형무소에서 처형된다.
위의 이관술의 회상기를 그의 전기를 통해 읽는 동안 제2차대전을 겪은 프랑스가 떠올랐다. 나치 독일의 점령하에서 굴복하여 부역한 지식인들과 지배층이 있었던 것은 우리와 마찬가지였지만 국외의 우파 망명정부와 국내의 좌파 레지스탕스의 협공은 그들에게 전승을 거두고 국토를 되찾는 결과를 갖게 하였다.
우리의 망명정부가 큰 역할을 잘했던 못했건 공부가 일천하고 더구나 근대사를 공부하는 말석에 앉은 입장에서 평가를 하기 주저할 수밖에 없지만 타협하지 않고 고문을 견디며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좌파 인물들을 애써 지우려한 근년까지의 우리 태도는 너무도 자명히 알고 있다. 물론 남북 분단이라는 역사적 단절이 있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그들에 대한 평가가 전무해서야 반쪽의 역사밖에 되지 않겠는가.
꽃을 바치고 싶다. 붉은 꽃을 바치고 싶다. 남도 잊고 북에서도 숙청이라는 명목으로 죽어간 일제하 사회주의 운동가들의 이름 앞에 꽃을 바치고 싶다. 그들은 유물론자로서 종교를 믿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저승의 그분들이 편안히 영면하길 기원할 뿐이다.
2006. 10. 30 이용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