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인문학도에게 자연과학의 지식이 필요한 이유

내일 아침 신문들을 검색해보다가 '서울대 2008 논술 예시문항'이라는 타이틀이 눈에 띄었다. 예시문항 중 "인문과학을 공부하는 학생에게도 자연과학의 지식이 필요한가에 대해 그 이유를 들어 논술하시오"란 문제가 그래도 흥미를 끌어서 잠시 생각해보려고 한다. 제시문의 출처자 진 캐리의 <지식의 원전>이라고. 개인적으론 박사과정 수료 후에 몇 년간 중고생들에게 논술을 지도해본 경험이 있는데, 아직도 '가락'이 남아있는지 확인도 해볼 겸.

 

 

 

 

-과학이 무신론이고 윤리와는 거리가 멀다는 견해는 스페인의 철학자 오르테가 이 가세트가 말하는 ‘문화인’들 사이에서 과학에 대한 반감을 더욱 부채질하곤 했다. 이 두 가지 반감의 원인이 타당한 것인지는 좀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실 과학자도 신의 존재를 믿을 수 있고, 더 나아가 신의 존재에 대한 과학적 증거를 찾으려 할 수도 있다. 무신론자들에게는 이것이 지루한 과학과 극단적 기독교의 만남 정도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같이 저명한 과학자가 분자구조를 이용해서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했던 것을 비웃을 수는 없다.

-물론 과학자들 중에는 무신론자도 많이 있다. 동물학자인 도킨스는, 모든 종교는 무한히 복제되는 정신적 바이러스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확고한 유신론자들의 관점에서는 이 모든 과학적 발견 역시 신에 의해 계획된 것을 발견한 것이므로 종교적 지식이라고 할 수도 있다. 따라서 과학의 본질을 무조건 비종교적이라고 간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과학자나 종교학자가 모두 진리를 찾으려고 한다는 점에서 과학과 신학은 동일한 목적을 추구한다고도 할 수 있다. 과학이 물리적 우주에 관한 진리를 찾는 것이라면, 신학은 신에 관한 진리를 찾는 것이다. 그러나 신학자들이나 혹은 어느 정도 신학적인 관점을 가진 사람들은 신이 우주를 창조했다고 믿고 우주를 통해 신과 만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신과 우주가 근본적으로는 뚜렷이 구분되는 대상이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실 많은 과학자들이 과학과 종교는 서로 대립되는 개념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신경심리학자인 리처드 그레고리는 ‘과학이 전통적인 믿음을 받아들이기보다는 모든 것에 질문을 던지기 때문에 과학과 종교는 근본적으로 다른 반대의 자세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 바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종교가 가지고 있는 변화의 능력을 과소평가한 것이다. 유럽에서 일어난 모든 종교개혁운동은 전통적 믿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시도였다.

-과학은 증거에 의존하는 반면 종교는 계시된 사실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이들 간에 극복할 수 없는 차이점이 존재한다는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종교인들에게는 계시된 사실이 바로 증거이다. 지속적으로 신에 관한 증거들에 대해 회의하고 재해석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신학을 과학이라고 간주하더라도 결코 모순은 아니다. 사실 그것을 신학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신의 존재를 전제로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본 바와 같이 과학적 연구가 몇몇 과학자를 신에게 인도했던 것처럼, 신학연구가 그 신학자를 무신론자로 만들지 않을 이유는 없다.

-과학의 정반대에 서 있는 것은 신학이 아니라 오히려 정치이다. 과학은 지식의 범주에 있지만, 정치는 견해의 범주에 속한다. 정치는 좋아하느냐 마느냐를 문제 삼는 분야로, 단지 말잔치를 통해 진리의 위치로 상승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정치는 인물과 웅변술에 의존하고, 사회계층과 인종, 그리고 민족을 핵심적인 요소로 하고 있다. 이런 모든 것들은 과학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리고 정치는 갈등을 기반으로 존재하고 적대세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대립구도가 와해된다면 정치는 더 이상 존재할 수가 없다. 즉 완벽한 의견일치를 보이는 세상에서는 정치가 존재할 수 없다.

-반면에 과학은 대립이 아닌 상호 협조의 운명을 지니고 있다. 물론 과학사는 지독한 논쟁과 고뇌, 그리고 반대이론의 파괴로 점철되어 있다. 하지만 의견일치에 도달하면 과학은 붕괴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발전한다. 또 다른 핵심적인 차이로 정치는 인간을 구속하려 든다는 점이다. 정치의 주된 관심은 권력의 집행에 있다. 이러한 점 때문에 정치는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폭력(전쟁, 학살, 테러 등)을 사용할 수도 있으며, 가끔 실제로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과학은 전혀 그렇지 않다. 열역학 제2법칙과 같은 진리를 규명하기 위해 전쟁을 한다면 얼마나 우스운 일이겠는가? 물론 위에서 말한 것처럼 정치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고 정반대 의미의 과학이 존재하는 이상적인 상태가 실제 세상에서는 있을 수 없다. 실제로는 다른 모든 것처럼 과학도 정치에 의해 유린되고 왜곡되는 것이 기정사실이 되고 있다. 그러나 과학이 호전적이고 파괴적인 도구로 사용되는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은 본질적으로 과학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는 정치의 책임이다. 우리는 이러한 과학의 비정치성을 강조할 필요가 있는데, 이는 과학이 초윤리적(超倫理的)이라는 비난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과학의 초윤리성을 과학의 문제점이 아니라 오히려 강점과 순수성으로 인식해야 한다. 한편, 정치는 윤리로부터 절대 분리될 수 없다. 정치는 창자 속의 촌충처럼 윤리성 혹은 개념의 선악을 규정함으로써 발전해간다. 따라서 과학이 초윤리적이지 않고는 정치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는 것이다.

-윤리적인 용어로 냉정하고 논리적이며 비인간적인 인생의 접근방식을 종종 ‘과학적’이라고 표현하는데, 이는 과학적 방법을 윤리적 관점으로 단순히 연결시키는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과학은 그것이 냉정한 것이든 아니든 윤리적 관점과의 연결을 결코 용인하지 않는다. 사람에 따라서는 동일한 과학적 명제들이 매우 상반되는 윤리적 평가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가령 인간을 원숭이와 관련짓는 다윈의 진화론은 인간을 격하시키는 것처럼 비추어졌고 지금도 어느 정도는 그렇지만, 브루스 프레데릭 커밍스는 이 진화론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있다.

-나로서는 내가 다른 동물들과 가까운 친족관계라는 것이 자랑스럽다. 나는 나의 유인원 조상들을 선망하며, 그들이 자랑스럽다. 내가 한때는 숲 속에 사는 무수히 많은 털을 가진 유인원이었으며, 바다의 한천류로부터 활유어, 물고기, 공룡, 그리고 원숭이를 거치는 지질학적 시간대를 통해 지금의 내 틀이 완성되었다는 생각은 언제나 나를 즐겁게 한다. 누가 이런 생각을 에덴동산에서 어슬렁대는 한 쌍의 남녀와 바꾸려 들까?

-과학자 개개인은 연구를 추구하는 윤리적 혹은 초윤리적 이유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들이 그들의 발견에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으며, 그 발견이 발견자의 동기와는 전혀 무관하게 옳은 것이 될 수도 혹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데이비드 보다니스처럼 파스퇴르의 대중을 혐오하는 성향과 그가 밝혀낸 질병과 박테리아 사이에 어떤 관련성을 찾으려고 시도할 수도 있다. 그러나 파스퇴르가 밝혀낸 사실의 과학적 신뢰성은 인간을 불신하는 그의 성향으로 인해 강화되지도 혹은 약화되지도 않는다.

-이처럼 과학이 윤리나 종교적 문제에 대한 해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왜 독자들이 구태여 과학을 알아야 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좋은 답은 과학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지식)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반대는 무지일 뿐이다. 콜리지는 이러한 점을 명확히 알고 있었다.

-최초의 과학자는 관찰대상이 그에게 식량이나 피신처, 무기, 도구, 장신구, 또는 장난감을 제공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안다는 것의 희열을 찾기 위해 사물을 관찰하는 사람이었다.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필연적으로 과학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가지게 된 무지의 크기도 커졌다. 문학이나 예술분야에서만 교육 받아온 사람들에게는 20세기 후반의 현대적 지식 대부분에서 몽매한 암흑의 영역이 크게 확대되었다. 무지의 추방을 목적으로 하는 교육의 역사상 처음으로 새로운 형태의 무지한 지식층이 생겨난 것이다. 이러한 지식층 중에서 그래도 나은 사람들은 자신의 무지를 통렬히 후회하는 사람들이다. 20세기 미국의 뛰어난 문학비평가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라이오넬 트릴링은 ‘근대사의 특징적 성취라고 불리는 상상적 형태로부터 배제됨으로써 지적 자기만족에 큰 상처를 입게 되었다’고 탄식했다.

-그러나 좀더 최근에는 과학에 대한 무지가 어느 정도의 정치적 정당성을 부여받기도 했는데, 과학을 지구 오염의 주범으로 몰아세운 녹색운동이 이러한 부분에 기여하였다. 또한 과학을 남성중심적 권력의지의 발현으로 몰아세우는 페미니즘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비난을 제기하는 것 자체는 정당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과학을 포기해야 하는 정당한 이유를 제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일 것이다. 과학이 정치에 의해 잘못 사용되어졌기 때문에 발생한 공해문제의 해결은 과학적 수단을 통해서만 해결이 가능하다. 가장 기본적 레벨에서조차 위험에 처한 식물이나 동물을 조사하고 보호하며 보존하는 일은 필연적으로 과학적 노력에 의해서 달성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과학이 남성의 목적이나 태도에 의해 지배된다고 불평하는 페미니스트들도 여성의 과학에 대한 무지와 배타적 성향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오히려 과학교육과 연구 분야에 여성의 참여를 확대하는 것이 더욱 시급한 일일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가장 강경한 여권운동가 중 한 사람인 에블린 팍스 켈러의 저서 『성과 과학에 관한 고찰』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그녀는 수리생체물리학자였고, 노벨상을 수상한 유전학자인 바버라 맥클린톡의 자서전을 집필하기도 했다. 켈러는 과학적 지식이 ‘남성적 발현의 결과’라는 식의 파괴적인 표현을 쓰기 보다는 오히려 이상적인 ‘공동의 목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페미니스트 등 과학에 비판적인 사람들에게 힘을 더해준 책은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이다. 이 책으로 인해 이성적이어야 할 과학자들이 실제로는 이성적인 사람들이 아니며 문화적 조류에 따라 흔들리고 객관적 진리와는 전혀 관계없는 이유에 의해 한 패러다임에서 다른 패러다임으로 생각을 바꾸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유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떤 개념이 확신을 얻게 되는 과정에 관한 쿤의 설명은 그 개념에 대한 진위 여부를 규명하려는 노력이 충분히 검토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과학자들의 비판을 받기도 한다.

-과학을 평가절하하는 이러한 다양한 움직임들은 무지를 정당화하고 나아가 미화하기까지 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영국의 대학교수들은 대부분의 문학이나 예술계 학생들이 그들의 학창시절에 배운 미미한 과학적 지식마저도 쉽사리 잊어버린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최근 옥스퍼드 대학의 한 문학 세미나에서 나는 존 던의 시 한 구절을 인용하였는데, 그가 이 시를 쓴 1612년에는 아무도 피가 어떻게 심실에서 다른 심실로 이동하는지 모른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이 세미나에서 학생들이게 실제로 피가 어떻게 이동하는지 아느냐고 물어보았다. 그곳에는 학위과정의 막바지에 와 있는 30여명의 매우 지적인 학생들이 앉아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바른 대답을 하지 못했다. 한 학생만이 머뭇거리며 일어나 삼투현상 때문일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들은 피가 몸속을 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는 것 같았다.

-매년 영국의 대학에서 문예 분야의 강좌를 듣기 위해 몰려드는 엄청난 수의 수강신청자에 비해 미미한 숫자의 과학계 강의 수강신청자들을 보면서 젊은이들 사이에서 과학을 포기하는 경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학자들이 이러한 점은 고쳐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문예 분야가 쉽기 때문에 더 인기가 있으며 문예계열의 학생들은 과학계 강좌에서 요구하는 지적 수준을 충족시킬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더 일반적이다. 우리는 이러한 견해에 대해 반대하는 피터 메다워 경의 생각을 한번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메더워는 1953년 크릭, 윌킨스, 프랭클린과 함께 DNA의 분자구조를 발견하여 노벨상을 수상한 미국의 유명한 젊은 과학자 제임스 D. 왓슨의 경력을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영국에서는 왓슨과 같은 재능 있고 천재성을 가진 학생들이 문예계열의 연구에 치중되어 있었던 것 같다. 분자생물학의 첫 세대가 활동하던 1950년대에 영국의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 대학의 영문학부에서는 뛰어난 능력을 가진 졸업생들을 배출하였다. 그들은 왓슨 수준에 버금가는 젊은 과학자들보다 훨씬 더 총명하고 창조적이며 똑똑하고 논리적이었다. 그러나 왓슨은 그들이 가지지 못한 뛰어난 장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는 매우 똑똑하면서도 어떤 대상에 관심을 가질 것인가를 아는 현명함을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점은 지식을 탐구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지 못한 과학자들만의 장점이며, 그들은 이러한 장점을 능력에 관계없이 향유하고 있다."

-똑똑하다는 것이 최고의 과학자가 되기 위한 필요조건은 아니다. 또한 이것이 최고의 과학자가 되기 위한 충분조건은 더더욱 아니다. 과학적 연구에 의해 일어난 위대한 사회적 혁명 중의 하나는 배움의 민주화였다. 어느 누구나 통상의 상식과 보통수준의 상상력을 복합시킬 수만 있으면 창조적인 과학자가 될 수 있다. 또한 사람이 가진 능력의 한계를 넓힐 수 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행복이 결정된다면, 그는 적어도 행복한 과학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메더워의 주장, 특히 과학자들은 현명한 어떤 것을 가지고 있는 데 반해 문예계열의 학생들은 그렇지 않다는 주장은 상당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당연히 셰익스피어나 톨스토이가 전혀 현명한 사람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냐는 항의를 들어야만 했다. 한편 과학이 천재들뿐만 아니라 보통의 능력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은 별로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의 핵심적 메시지는 바로 이 부분이다. 영국이 경제난국에 처하지 않기 위해 과학을 계속하여야 한다는 식의 얘기는 젊은이들을 과학 분야로 끌어들이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과학자들의 글을 통해 메더워가 말하는 기쁨과 자기만족이 사실이라는 점을 보여준다면, 많은 젊은이들이 과학계통의 일에 종사하게 될 것이다.

-만약 독자들이 문학교수인 내가 무슨 생각으로 각종 지식 원전들을 한데 모으게 되었냐고 묻는다면, 기쁨과 자기만족을 위해, 그리고 콜리지의 말처럼 ‘알게 된다는 것의 희열’을 느끼기 위해 만들었다고 대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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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릴케 현상 > 원 나잇 스탠드, 산책을 동반한 하룻밤 사랑

원 나잇 스탠드, 산책을 동반한 하룻밤 사랑

관련 영화관련 영화정보가 없습니다. 날짜2006-06-13    조회수330



작년 이맘때쯤 여성학자 정희진 씨는 모 신문에 '여관의 정치학'이라는 흥미로운 칼럼을 기고한 바 있다.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여관과 러브 모텔이 도처에 널린 이 희한한 현상의 이면을 성찰하는 재미있는 글.

“한국에서 여관업이 번창하는 실제 이유는, 가정이 사랑의 공간이 아니라는 점과 늦은 성년과 관련 있는 것 같다(자녀들이 나이 들어서도 부모랑 같이 살기 때문에, 자식도 부모도 마땅히 성생활을 할 ‘룸’이 없다). 한국인들은 ‘집’보다 ‘길 위의 섹스’를 즐기는 것 같다.”

정희진은 한국 여관 문화가 대변하는 '길 위의 사랑'이 가족주의를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족주의에 순기능 역할을 한다고 보고 있다. 필자도 이 주장에 동의한다. 한국인들은 너나 없이 여관이나 모텔에서 '길 위의 사랑'을 하면서도 이것을 천박한 것이라고 단죄하며, 사랑이 끝난 후 제각기 집으로 돌아가 또다시 도구화된 각자의 일상적 삶을 살아간다.

기혼자들은 '혼외정사'를 통해 가족이 구현하지 못하는 보살핌과 사랑의 관계를 대체하려 하고, 젊은이들은 '원 나잇 스탠드'를 하나의 성 문화로 구축하면서도 못내 그것을 도덕적으로 단죄하는 기묘한 역설에 처해 있다. 집과 여관의 분리가 보여주듯, 이렇듯 분열적인 성 모럴은 궁극적으로 사랑과 친밀성에 적대적이다. 집에 들어가는 순간에 소멸되는, 여관 문이 닫히는 순간에 부재하게 되는.

이러다 보니 그 잘 나간다는 한국영화에 '원 나잇 스탠드', 즉 하룻밤 사랑에 관한 제대로 된 영화가 거의 없다. 포장마차에 뒤이어 칙칙한 여관 장면이 나오면 곧 ‘리얼리즘 영화’가 되고, 붉은 조명과 여관 침대만 나오면 곧장 ‘에로 영화’가 된다. 제작자든, 관객이든 평자든 다같이 분열적이다.

순전히 개인적인 취향이긴 하지만 필자는 '원 나잇 스탠드' 영화라면 환장을 하는 편이다. 이 거대한 메트로폴리스 안에서 완전히 고립된 개인들이 우연하게 만나서 이루는, 예컨대 처음의 사랑이 될 수도 있고 마지막 사랑이 될 수도 있는 단 하룻밤의 사랑에 대한 관심과 성찰은 우리에게 보다 더 넓은 삶의 선택지를 제공할 거라 믿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사회는, ‘로맨스’는 시작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개인적으로 최고의 멜로영화 중 한 편으로 꼽는 낸시 사보카 감독의 <샌프란시스코에서의 하룻밤>(Dogfight, 1991) 은 몇 년의 세월이 빚어내는 연애보다 단 하룻밤의 연애 감정이 얼마나 응축적인 힘을 갖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다음 날 베트남 전쟁터로 떠나야 하는 리버 피닉스와 못 생긴 여자 릴리 테일러가 '가장 못 생긴 여자 데려오기'라는 Dogfight 게임을 통해 우연하게 만나 하룻밤 동안 샌프란시스코를 쏘다닌다는 내용이다. 여자의 집으로 함께 숨어 들어갔지만 결국 잠자리도 갖지 못할 정도로 순진하기 그지 없는 리버 피닉스와 릴리 테일러. 결국에 밖으로 나와 거리를 실컷 쏘다니다가 쥬크박스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추며 설렘으로 가득 찬 시선으로 서로를 응시하는 이 순간, 우리에게 익숙한 제도의 시간들은 모두 산화되고 만다.

감히 도식을 넣자면, 내공 깊게 잘 세공된 '원 나잇 스탠드' 영화란 무릇 주인공들이 함께 자든 안 자든, 산책을 동반한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길 위의 사랑'이며, 대화를 통해 서로 배려와 친밀성을 확보하는 순간이다. 산책은 로맨스를 위한 여정이기도 하지만, 단 일회의 순간으로 영원의 시간을 확보하려는 투쟁이기도 하다.

이를 테면 마이크 피기스 감독의 <원 나잇 스탠드>(1997)는 말 그대로 하룻밤 사랑에 관한 영화지만, 산책이 없다. 산책이 없는 하룻밤 이야기는 대부분 고루한 불륜 영화로 그칠 공산이 크다. 이 영화의 미덕이라면, 하룻밤 불륜으로 가족을 망치지 말라, 는 식의 <위험한 정사>(1987) 류의 조잡한 가족영화보다 낫다는 것이다.

열차에서 우연히 만난 청춘 남녀의 하루 동안의 이야기를 다룬 리차드 링클레이터의 <비포 선라이즈>(1995)는 산책의 영화다. 비엔나 거리를 밤새껏 활보하며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가 쏟아내는 엄청난 말, 말, 그 수다들은 '사랑은 수다'라는 매우 훌륭한 정의를 산출해낸다. 달빛과 나뭇잎 그림자가 희롱하는 공원에서의 달콤쌉싸름한 하룻밤 정사는 정확히 10년 후 <비포 선셋>(2005)의 엔딩 씬과 조우하게 된다. 10년 후에 다시 만나게 된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는 서로 헤어져야 할 시간을 앞둔 채 니나 시몬의 노래를 틀어놓고 춤을 춘다. 10년 전의 하룻밤 사랑이 결국 각자의 결혼 생활보다 더 의미가 깊은 순간일 수 있음을 증언하는 장면이다.

산책을 동반한 원 나잇 스탠드는 또한, 자아를 찾는 순간이기도 하다. 클레르 드니 감독의 <금요일 밤>(2002)은 한 젊은 여자가 이사 가기 전날인 금요일 밤, 우연하게 만난 남자와 하룻밤을 함께 보내는 이야기다. 도시를 배회하다가 들어간 여관에서 잠자리를 한 후, 잠들어 있는 남자를 가만히 지켜보는 여자 주인공. 순간적으로 이삿짐을 다 싸놓은 자기 집으로 이 낯선 남자를 데려갈까 속으로 상상하지만, 결국 상쾌한 아침이 시작된 토요일의 파리 거리를 가방을 흔들며 경쾌하게 뛰어가는 것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쿨하게 자신의 욕망을 직시하는 맹랑함이 가득한 영화다.

처음 만난 낯선 사람과 산책을 하는 일은 또한 계급적이기도 하다. 부자들은 잘 걷지 않는다. 퀴어 시네마의 히로인 그렉 애러키의 <리빙 엔드>(The Living End, 1992) 이후 최고의 게이 무비로 치부되는 짐 펄의 <하룻밤 상대>(Trick, 1998)은 가난한 고고보이와 예술가가 지하철에서 우연히 눈이 맞아 하룻밤을 함께 보낸다는 내용이다. 이 둘은 단지 하룻밤을 함께 보낼 방을 찾기 위해 온 도시를 헤매지만 이들이 거처할 곳은 아무 곳에도 없다. 결국 아침이 되어 헤어질 무렵, 서로를 웃으며 바라보는 표정은 어떤 묘한 감동을 안겨준다. 단지 원 나잇을 위해 밤을 허물며 도시를 돌아다녔지만, 도시의 태양이 밝아버린 그 시간 그들에게 헤어짐은 곧 다른 시작을 의미하기 시작한 것.

필자가 산책을 동반한 하룻밤 사랑과 이런 내용을 담은 영화에 열광하게 된 것은 어느 날 겨울 어떤 근사한 녀석에게 '같이 자자'는 말을 못하고 쑥스러움과 설렘으로 가득 찬 채 밤새 눈 쌓인 서울 도시를 빙빙 돌아다닌 개인적 추억이 발화된 이유도 있겠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사랑 방식이 여관의 휴지와 집에서의 침묵에 둘러싸인 채 혹여 감금되지는 않았을까 싶은, 또는 수많은 로맨스 이야기가 도처에 유령처럼 배회하지만 결혼 제도에 붙박인 웨딩 카탈로그 같은 전형적인 이미지들만 양산되는 건 아닐까 싶은, 하여 낯선 사람과의 그 영원할 것 같은 수다와 산책에 대한 욕망이 존재하지만 정작 스스로 그것을 부정하거나 단순히 몇몇 마초들의 성적 판타지로 치부한 채 자신의 삶으로 끌어들이지는 못하는 것 아닐까 하는 노파심 때문일 것이다.

산책을 동반한 하룻밤 사랑, 왜 그것이 단지 영화에 지나지 않겠는가. 단지 그것은 영화일 뿐이야, 라고 말하는 것은 인생의 패배자를 자처하는 일이지 않겠는가.

영화감독 이송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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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민주주의와 그 너머

월드컵 축구 '한국:토고'전을 보고(이 게임은 호주:일본 전 다음으로 재미있었다) '프랑스:스위스'전을 기다리는 막간에 재작년 가을 모스크바에서 지젝의 <이라크>의 제2장 '민주주의와 그 너머'를 읽으며 정리했던 내용을 옮겨놓는다.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이야 새삼스러울 게 없지만, 최근에 최장집 교수의 논문집 <민주주의의 민주화>(후마니타스, 2006)가 출간된 것도 민주주의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보도록 유인한다.

 

 

 

 

한데, 나는 <민주주의의 민주화>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 이어지는 것으로 생각하고 주문했지만, 막상 책이 온 걸 보니 그건 아니었다. '민주주의' 전문출판사(?)로 나선 후마니타스 편집진의 '작품'이었던 것. 내가 기대했던 건 <민주주의와 민주주의가 아닌 것>이란 근간인데, 마저 출간되어야 최장집 교수의 '한국민주주의' 3부작이 될 듯하다. 물론 그 원조로 꼽을 수 있는 책은 10년 전에 출간된 <한국 민주주의의 이론>(한길사, 1996)이 되어야겠지만.  

<민주주의의 민주화>와 함께 내가 주문했던 책은 정치이념(이데올로기) 사전용으로 적합한 <현대 정치사상의 파노라마>(아카넷, 2006)이며, 샹탈 무페의 <민주주의의 역설>(인간사랑, 2006)과 미국 민주주의론의 권위자 로버트 달의 <미국헌법과 민주주의>(후마니타스, 2004) 등을 같이 읽어둘 만한 책으로 꼽아두고 있다. 언제나 그렇듯이 이게 실현가능한 기획인지는 의문이지만... 

그럼, 이 정도에서 마이크를 2004년 9월 22일 모스크바대학의 본관 강당으로 넘긴다. 그날 모스크바대 학생들을 대상으로 당시 방러 중이었던 노무현 대통령의 '초청강연'이 있었고(노무현 정부는 최장집 교수의 신랄한 비판대상이기도 하다), 나도 그 현장에 있었다. 자세한 현장 중계는 시효가 많이 지난 관계로 생략하고 한러 관계의 우호적 전망에 대한 대통령의 강연이 끝난 이후부터 따라가 보기로 한다(참고로 푸틴의 지지율은 줄곧 70%를 넘어서고 있다. 노대통령의 지지율과 합하면 얼추 100%가 되겠다. '노빠 파시즘'이나 '대중독재'란 표현은 누구를 겨냥한 것인지?).

강연에 이어서는 노대통령에 대한 명예박사학위 수여와 (학교를 대표하여) 총장의 기념품(나무로 조각한 수공예품 백조였다) 증정이 있었고, 끝으로 한 한국인 성악가(여기 유학생인가?)와 모스크바대학 합창단이 우리 가곡 ‘선구자’를 불렀다(이 노래가 3절까지 있는 줄은 새삼/처음 알았다).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 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생각나는 대로 가사를 적어놓고 보니(다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지막 구절은 모호하다. “거친 꿈이 깊었나?” 왜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가란 뜻인가?(선구자는 이미 어딘가에 묻혀 있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불러서 될 일이 아니고 발굴해야 될 일 아닌가?)

‘선구자(先驅者)’란 말 그대로, ‘먼저 말을 달린 자’란 뜻이다(왜 ‘강가’에서 달렸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은 어떤 일에 앞장 선 사람을 말한다. 무엇인가를 기획하는, 프로젝트(project)하는, 즉 앞으로(pro) 내던지는(ject) 사람. 기업가이기도 하고 혁명가이기도 한 사람. 지젝의 표현에 따르면, 그것은 ‘레닌주의’이다. 지젝이 <이라크>(도서출판b, 2004)의 두 번째 장 ‘민주주의와 그 너머’의 결론에서 하고 있는 얘기를 잠시 들어보자. 러시아의 (생각하면 눈물나는) 현대사와도 무관하지 않은 내용이다.

 

 

 



“1990년은, 즉 공산주의의 붕괴는, 통상 정치적 유토피아의 붕괴로서 지각된다. 고귀한 정치적 유토피아가 어떻게 전체주의적 공포로 끝나고 마는가에 대한 혹독한 교훈을 배운 오늘날 후-유토피아적 실용주의적 행정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우선 주목할 것은 이른바 유토피아의 붕괴라는 것에 뒤이어서 최후의 거대한 유토피아, 즉 ‘역사의 종말’인 세계적 자본주의의 자유민주주의라는 유토피아가 10년간 지배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9.11은 바로 이 유토피아의 종말을 가리킨다.”(159쪽)

즉, (지젝에 따르면) 우리는 지난 세기에 두 가지 유토피아의 종말을 경험했다. 하나는 70여 년을 버티던 ‘정치적 유토피아’로서의 공산주의의 붕괴(=종말)이고, 다른 하나는 그 이후 10여 년을 기고만장했던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자유민주주의 유토피아의 종말이었다. 전자의 종언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 89년의 베를린 장벽 붕괴였다면(그때 나는 군복무중이었다), 후자의 종언을 보여주는 ‘실재적’ 사건이 바로 9.11이다.

그러니까, 1차 유토피아(1917-1991), 2차 유토피아(1991-2002)가 모두 끝장난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종말 이후에, “베를린 장벽의 붕괴에 뒤이어 새로운 갈등의 장벽들이 실재적 역사(=역사의 현실)로 회귀”했다. 궁극적 유토피아는, 그러니까 ‘있지도 않은 것’에 대한 환상은 “유토피아의 종말 이후에 우리가 ‘역사의 종말’에 접어들었다고 하는 바로 그 관념이다.”

“우선적으로 우리는 여기서 유토피아란 말의 의미를 특화해야만 한다. 가장 내밀한 곳에서 유토피아는 불가능한 이상적 사회를 상상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유토피아를 특징짓는 것은 문자 그대로 자리가 없는(u-topic) 공간의 건설이다. 즉 기존의 매개변항들 – 기존의 사회 세계에서 무엇인 ‘가능한’ 것으로 나타나는가를 규정하는 매개변항들 – 바깥에 있는 사회적 공간의 건설이다. ‘유토피아적인’ 것은 가능한 것의 좌표를 바꾸는 제스처이다.”(159쪽)

여기서 지젝이 제안하는 것은 유토피아에 대한 새로운 정의, 아니 올바른 정의이다. 그에 따르면, 유토피아는 ‘불가능한 이상적 사회’란 관념과는 어떠한 관련도 없다. 유토피아는 말 그대로, ‘자리가 없는’ 공간의 건설이다. 왜 자리가 없는가? 기존의 사회 세계에서, 즉 사회적 좌표계 내에서는 자리가 할당되지 않기 때문이다(‘매개변항’이란 건 ‘parameter’의 번역 같은데, 여기선 그냥 ‘변수’나 ‘한계’(혹은 울타리)라고 옮기는 것이 더 읽기에 편하겠다).



지젝이 유토피아적인 제스처의 사례로 들고 있는 것은 레닌이다: “제2인터내셔널의 정통을 청산하는 과정에서, 1914년 재앙(러시아어 번역은 ‘비극’)의 잿더미로부터 등장한 레닌주의적 ‘유토피아’의 핵심은 바로 거기에 있다. 국가 그 자체를 뜻하는 부르주아 국가를 분쇄하고, 상설적인 군대나 경찰이나 관료가 없이 만인이 사회적 문제들의 관리에 참여할 수 있는 새로운 코뮨적 사회 형태를 발명하라는 근본적 명령. 레닌에게 그것은 어떤 머나먼 미래를 위한 이론적 기획이 결코 아니었다. 1917년 10월에 레닌은 '이천만 인민이 아니라면, 열명으로 구성되는 국가기구를 즉시 작동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그 순간의 절박함이 진정한 유토피아다.”(160쪽)


 

 

 

레닌주의의 핵심으로서의 근본적인, 즉 래디컬한 명령(=요구)는 무엇인가? 그것은 (1)부르주아 국가, 즉 국가라는 것 자체를 분쇄하고 (2)새로운 코뮨적 사회형태를 창출하는 것이었다. 이 새로운 코뮨에서는 만인이, 즉 모두가 사회적 문제들의 결정(‘관리’?)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레닌에게 단지 ‘이론적인’ 기획이 아니었다는 것. 이어지는 레닌의 발언은 레닌주의를 집약하는 것으로 지젝이 자주 인용하는 것인데, 따라서 그만큼 중요한 것인데, 유감스럽게도 잘못 번역돼 있다. “이천만 인민이 아니라면, 열명으로 구성되는 국가기구를 즉시 작동시킬 수 있다”는 건 굳이 레닌이 아니더라도 만인이 떠들 수 있는 말이다. 이게 레닌주의와 무슨 관계가 있으며, 그가 구상했던 코뮨과는 무슨 관계가 있는가?

지젝은 이 발언을 닐 하딩(N. Harding)의 <레닌주의>(Duke University Press, 1996), 309쪽에서 인용하고 있는데(지젝이 레닌과 관련하여 자주 참조하는 책이다), 내 생각엔 하딩이 잘못 번역했거나 (그보다 확률이 높은 건) 우리말 역자가 잘못 번역했다(설마 지젝이 잘못 인용했을까?). 아마도 <국가와 혁명>에 나오는 구절인 듯하므로, 국역본 <국가와 혁명>을 참조해볼 수 있을 것이다. 러시아어로는 <레닌전집> 34권, 316쪽에 나오는 말인데(요즘 러시아에선 <레닌전집>을 좀처럼 구하기 어렵다), 레닌이 실제로 한 발언은 이렇다. “우리는 20명이 아니더라도, 천만 명으로 구성된 국가기구를 즉각 도입할 수 있다.”

내가 읽은 러시아어 원문(레닌은 러시아어로 말했으므로, 이 경우는 영어본의 번역이 중역이다)은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분명 그런 내용이며(지젝이 쓴 <레닌의 13가지 경험>이란 책까지 뒤졌는데, 거기도 같은 문장이었다), 영어본의 문장도 특별히 난해할 것 같지 않은데, ‘20명-천만’조차 ‘이천만-열명’으로 탈바꿈한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일반적으로 내각은 20명 정도의 각료로 구성되는 것 아닌가?). 바로 앞에서 만인이 사회적 문제들의 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 새로운 코뮨이라고 했으므로, 20명만이 아닌 (수)천만 명이 내각의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것이 문맥상 ‘논리적’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방식이야말로 레닌주의에 값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 “이와 같은 그 순간의 절박함이 진정한 유토피아다.”는 러시아어본에서 “이러한 어떤 순간의 절박한 요구(=명령)가 진정한 유토피아이다.”라고 옮겨지고 있다. 어쨌든, “우리는 바로 이러한 레닌주의적 유토피아의 (엄밀히 키에르케고르적 의미에서의) ‘광기’를 고수해야 한다. 그리고 스탈린주의는, 어느 쪽인가를 따져본다면, 현실주의적 ‘상식’으로의 회귀를 나타낸다.” 즉 여기서의 대비적 구도는 ‘레닌=유토피아주의=광기’ 대 ‘스탈린=현실주의=상식’이다. 그러니까 역설적으로 스탈린식의 ‘현실 사회주의’가 잃어버린 것은 레닌주의의 ‘유토피아적 광기’이다(그런 ‘광기’를 계승했던 이는 내 생각에 영구혁명론을 주장한 트로츠키였다).

 

 

 

 

(*)최근에 읽은 <공산주의>(을유문화사, 2006)에서 저명한 러시아사학자 리처드 파이프스가 전해주는 바에 따르면, "바체슬라브(*뱌체슬라프) 몰로토프는 고위의 비밀직책들을 갖고 어떤 볼셰비키보다도 더 오랫동안 레닌과 스탈린 두 사람을 섬겼다. 노년에 두 사람 가운데 누가 더 '엄격했느냐'는 질문에 그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물론 레닌이지. 레닌이 스탈린에게 너무 부드럽고 진보적이라고 꾸짖던 일이 생각나네.'" 파이프스의 결론: "이것으로 스탈린주의가 레닌주의의 거부를 뜻한다는 신화(처음에는 트로츠키가, 다음에는 흐루시초프가 유행시킨 신화)는 당연히 사라져야 한다." 즉, 스탈린주의가 광기였다면, 그것은 레닌주의 충실한 계승이라는 것(이 경우 스탈린의 '상식'은 광기의 일상화가 낳은 상식이다).  아래는 1917년의 스탈린과 레닌.



이런 대목의 지젝은 ‘페레스트로이카’의 기치를 높이 들고서 스탈린주의의 청산과 레닌주의에로의 복귀를 주창했던 고르바초프를 연상시킨다. 현실 사회주의가 더 강력한 (유토피아적) 사회주의로 재건/재구축될 수 있다고 믿었다는 점에서 고르바초프는 유토피아적이었다(즉 제정신이 아니었다).

하지만, 역사가, 그리고 러시아 국민이 선택한 것은 (쿠데타군의 탱크 위에 올라가서 열변을 토한) 옐친이었고(그 옐친은 ‘욕조=스탈린주의’와 함께 ‘아이=레닌주의’도 과감하게 내다버리는 걸로 이에 화답했다), ‘현실 자본주의’였다. 그건 상식적인 것이었을까? 91년 이후 몇 년간의 러시아사(=역사적 혼돈)는 남의 나라 역사임에도 나를 눈물나게 한다.

계속 지젝을 따라가본다. “다시금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유토피아가 실제 삶을 추상한 이상적 사회에 관한 꿈꾸기와 아무 상관도 없다는 것이다. ‘유토피아’는 가장 내밀한 곳에 있는 절박함의 문제이며, ‘가능한 것’의 매개변항들 내에서는 더 이상 지속할 수 없을 때 생존의 문제로서 우리가 떠밀려 들어가게 되는 어떤 것이다. 이 유토피아는 정치적 유토피아들에 대한 표준적 개념, 즉 실현되어야 한다는 의도조차 기본적으로 없었던 기획들을 포함하는 책들에도 분명하게 대립되는 것이며 우리가 자본주의 자체의 유토피아적 실천으로 통상 언급하는 것에도 분명 대립되는 것이다.”(160-1쪽)

즉 유토피아는 실제의 삶으로부터 유리된 이상적 사회에 대한 몽상과는 무관하다. 유토피아는 우리가 더 이상 ‘가능한 것’의 한계(=울타리) 내에서 살아갈 수 없을 때 제기되는 생존의 문제이며, 가장 심층적인 차원에서의 어떤 불가피성(=필연성)의 문제이다. 그리고 이건 우리의 상식적인/표준적인 유토피아 개념과는 다른 것이다(그런 의미에서 지젝은 ‘유토피아’란 개념을 발명하고 있다)

이제 남은 건 디저트 같은 언급인바, 유토피아 전략의 심미적 차원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유토피아 전략들 가운데 하나는 심미적 차원에 놓여있다. 종종 제기되는 주장에 따르면, 자크 랑시에르는, 심미적 차원을 정치에 내재한 것으로서 열정적으로 지지하는 가운데, 이미 그 시대가 확실히 가버린 19세기의 포퓰리즘적 반란들을 회향적으로 동경하고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정말로 그런가?” 디저트니까 중요한 건 아니지만, 여기에도 사소한 오역이 있다. 일단 우리말로, “자크 랑시에르는 무엇을 동경하고 있다”는 게 종종 주장으로 제기될 만큼 중요한 일인가? 정말로 그런가, 즉 랑시에르는 그런 걸 동경하고 있는가?

물론 그건 넌센스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건 랑시에르가 무얼 어쨌다는 게 아니라 어떤 시대가 완전히 지나가버렸다는 것이고, 지젝이 반문으로 제기하는 건 정말로 그런가, 정말로 (그런 시대는) 지나가 버렸는가, 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시대인가? 랑시에르 얘기는 그 시대를 수식하기 위해 삽입된 것이다. 즉 19세기 민중 반란의 시대이다. 랑시에르가 주장하는 건 그러한 정치적인 사건에 내재한 심미적 차원인 것이고. 지젝은 그러한 심미적 차원의 정치성을 포스트모던적 정치상황에서도 읽어내고자 한다. 즉, “피어싱이나 옷바꿔입기에서 공개적 스펙터클에 이르기까지 ‘후근대적인’ 저항의 정치야말로 심미적 현상들로 물들어 있지 않은가?”(161쪽) 하는 것.



‘공개적 스펙터클’이란 말이 나오는데, ‘포스트모던적’ 저항으로서의 ‘공개적 스펙터클’ 사례로 지젝이 들고 있는 것은 ‘플래시 몹’이다. “플래시 몹이라는 진기한 현상은, 최소한의 뼈대로 환원된 가장 순수한 심미-정치적 항의를 나타내지 않는가? 사람들은 정해진 시각에 지정된 장소에 나타나서 어떤 짧은 행위를 수행하고 그런 다음에 다시 흩어진다. 플래시 몹이 아무런 실제 목적도 없는 도시의 시(詩)로서 묘사되는 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 이 플래시 몹은 일종의 ‘정치의 말레비치’가 아닌가? 그것은 최소한의 차이의 표식인 그 유명한 ‘흰 표면 위의 검은 사각형’에 대한 정치적 대응물 아닌가?”



말레비치는 물론 ‘절대주의’를 주창한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화가이다. 그리고 그의 대표작은 '흰 바탕 위의 검은 사각형'이다(‘흰 표면 위의 검은 사각형’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라크>에서 말레비치는 한번 더 언급되는데, 라캉의 네 가지 담론을 설명하는 절에서이다. “(네 가지 담론의) 전체적인 구성은 상징적 재배가라는 사실에, 즉 하나의 존재자를 그것 자체와 그것이 구조에서 차지하는 자리로 재배가하는 것에 기초해 있다. 그 자리는 말라르메의 ‘자리만이 발생한다’나 말레비치의 흰 표면상의 검은 사각형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다. 둘 모두는 자리 그 자체를 공식화하려는 노력을, 혹은 차라리 요소들간의 차이에 선행하는, 하나의 요소와 그것의 자리 사이의 최소한의 차이를 공식화하려는 노력을 보여준다.”(173쪽)

인용문에서 재배가는 reduplicatio(=reduplication)를 옮긴 것인데, 이건 ‘배가’라고 해야 맞다(<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의 역자도 그렇게 옮기고 있다). 뜻은 하나를 둘로 만드는 것, 즉 두 배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걸 우리말로 ‘배가(倍加)’라고 한다. ‘재배가’는 배가된 걸 다시 배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산술적으론 네 배가 된다(영어에서 duplication이나 reduplication은 거의 같은 뜻이다). ‘존재자’로 옮긴 entity(‘실체’로도 많이 번역된다)는 being과 함께 하이데거의 용어인 ‘존재자’의 영어 역어로 사용되지만, 그렇다고 모든 경우에 entity가 우리말 ‘존재자’로 옮겨지는 것은 아니다(우리말에서 ‘존재자’란 말은 극히 제한적으로 사용된다). 영어의 소문자 being처럼, 그냥 우리말 일상어의 ‘존재’로 충분하다.



말레르메의 시구 ‘자리만이 발생한다(rien n’aura eu lieu que le lieu)’는 어느 시에 나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주사위 던지기>에 나오는 시구이다), 뒤에 붙은 설명으로 봐서 불충분한 번역이다(러시아어본에서는 불어를 따로 옮겨주고 있지 않기 때문에 나로선 확정적으로 말할 수 없지만). 그렇다면, 말라르메와 말레비치와 나란히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즉, <흰 바탕 위의 검은 사각형>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자리(=장소)가 이미 하나의 요소로서 다른 요소들간의 차이에 선행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러한 자리 자체를 분리/규정해내고자 한 것(*한 말라르메 전공자는 "장소 이외에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옮기고 있다. 이해하기 편하다).

즉 말레비치의 그림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검은 사각형’이란 요소만이 아니다. 거기엔 ‘흰 바탕’이란 요소가 이미 선행해 있는 것이다. ‘검은 사각형’이 드러내고 있는 것은 오히려 ‘흰 바탕’이라고 할 만하다. 그리고, 라캉의 네 가지 담론에서 이 ‘흰 바탕’ 즉 ‘자리’에 해당하는 것이 작인(agent), 타자(other), 진리(truth), 산물(production)이다(나로선 ‘작인’이란 역어가 내키지 않지만,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의 역자부터 ‘작인’이란 역어를 선택하고 있다).

‘정치의 말레비치’란 표현을 사용하고는 있지만, 정말로 지젝 자신이 플레시 몹 같은 같은 ‘포스트모던적’ 저항의 정치에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인지는 불확실하다. 거기에 대해선 보다 본격적인 분석과 제안이 뒷받침되어야 하리라. 다만, 이 자리에서는 지젝이 새롭게 규정/제안하고 있는 유토피아적 제스처와 전망을 우리가 이해하고 공유하는 것이 필요할 따름이다. 지젝은 3장 ‘지배와 그 너머’의 끝부분에서도 다시 유토피아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이 대목을 확인하면서 나는 ‘공식적인’ <이라크> 읽기를 마무리짓도록 하겠다.

“보다 일반적 수준에서, 이른바 금지된 지식의 실정적, 구성적 지위 개념은, 즉 우리의 욕망이 만족에 도달하기 위해 직접적 충족은 지연되어야 하며 심지어는 포기되어야 한다는 발상은 보기보다 더 복잡하다.”(226쪽) 왜인가? “핵심적인 사실은 금지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그것은 반성적으로 재배가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반성적이란 역어는 reflective(ly) 정도를 옮긴 것일 텐데, 우리말이 너무 ‘조밀하기’ 때문에 번역이 까다로운 경우이다. 즉, 영어의 reflection은 우리말의 반성, 반영, 반사, 성찰이란 뜻을 모두 포괄하며 reflective나 reflexive는 ‘재귀적’이란 뜻도 갖는다. 바로 앞에서 인용한 문장은 “중요한 것은 금지가 작동하기 위해선 그것이 재귀적으로 배가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용이하다. 재귀적인 배가? “금지 자체가 금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227쪽)



“즉 금지는 그 실정적인 차원 속에서 금지처럼 보여서는 안되고 욕망의 대상에 대한 우리의 접근을 가로막는 단순한 외적 장애물처럼 보여야 한다. 다시 말해 나는 내가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여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혼잣말할 수는 없다. '그건 진정으로 그녀는 아니야, 그녀는 평범한 여자에 불과해. 그녀를 그토록 매력적이게 만드는 것은 위반의 아우라, 금지된 영역에 들어가는 것의 아우라야. 그것은 그녀의 현실을 넘어서는 나의 상상력의 힘과 과잉이야!' 그런 직접적인 통찰은 분명 ‘실용주의의 모순’인데, 그것은 실상 가정되면 나의 욕망을 망쳐놓는다.”

실용주의의 모순? 물론 오역이다. ‘Pragmatic contradiction’ 정도의 역어일 듯싶은데, ‘화용론적 모순’이라고 옮겨야 한다. 이 ‘화용론(話用論)’을 일어에서는(일본사전을 베낀 영한사전에서도) ‘어용론(語用論)’이라고 옮기는 듯하다(우리말에서 왜 어용론이란 역어가 기피되는지는 쉽게 알 수 있다. 그건 ‘어용(御用)’이란 말과 혼동되기 때문이다). 약간 변칙이지만, 더 이해하기 쉽게 옮기려면, ‘수행론적 모순’이라고 해도 무방하다고 본다. 즉, 그런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남자는 어떤 여자를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남자가 아니다. 거기서 그런 류의 혼잣말(=통찰)과 열정은 양립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으로 금지된 지식은 사랑하는 사람의 현실에 대한 완전한 지식이 아니라 대상의 현실에 관해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대상을 나의 욕망의 원인으로 만드는 것은 그것이 차지하는 금지된 자리라는 정황에 관한 바로 그 지식이다.”

<이라크>를 두 번 통독하면서 가장 난해했던 문장인데(그래서 여러 번 반복해 읽어야 했다), 평범한 듯한 번역문이 잘 안 읽혔던 것은 뭔가 논리적으로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번역문은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하여, 이 부분을 ‘능력’에 관한 걸로 옮겼지만, 전후 문맥상 ‘금지’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다시 옮기면, “따라서 진정으로 금지된 지식은 사랑하는 사람의 실상에 대한 완전한 지식이 아니라, 대상(=사랑하는 사람)의 ‘아무것도 아님’이라는 실상에 관해서 결코 알아서는 안 된다는, 대상을 나의 욕망의 원인으로 만들어주는 것(에 대한 앎)이 금지돼 있다는 바로 그 지식이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무엇에 대한 금지가 아니라, 무엇이 금지돼 있다는 앎 혹은 언표 자체의 금지이다. 해서, 스탈린 시대의 허식재판(show trial)에서도 결정적이었던 것은 공산주의 지배체제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공식적으론 보증/허용되었지만 은밀하게는 금지돼 있던, 자유발언(=비판) 권리 자체의 ‘실행’이었다.

따라서, “사랑하는 대상의 마력을 깨지 않기 위해 그것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자세가 가짜 사랑의 확실한 징표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진정한 사랑은 ‘너무 가까워지는 것을 겁내’지 않는다. 그것은 사랑하는 대상을 그것의 일체의 통속적 현실 속에서 떠맡는 것과 동시에 그것의 숭고한 지위를 유지할 각오가 되어 있다. 즉 마르틴 루터에 대한 헤겔의 주해를 말바꿔(=바꿔 말해) 보자면 진정한 사랑은 일상적 저속함의 십자가에서 숭고함의 장미를 알아볼 각오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228쪽) 나라면 ‘저속함’이란 역어는 ‘비속함’으로 바꾸고 싶다(나의 취향이 비속한가?). 여기서 지젝이 말하는 사랑은 욕망에서 해방된, 아니 욕망을 초과하는 사랑이 아닐까 싶다. 이어지는 ‘정치적 교훈’은 러시아어본에는 빠져 있는 내용이다.

“그리고 ‘일상적 저속함의 십자가에서 숭고함의 장미를 알아본다’는 이런 자세가 갖는 정치적 교훈(혹은 차라리 함축)은 기존 현실을 신비화하는, 그것에 가짜 색깔을 칠하는 일이 아니라, 완전히 그 반대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숭고한(유토피아적) 전망을 힘껏 일상적 실천으로 번역해내는 일, 요컨대 유토피아를 힘껏 실천하는 일이다.” 마치 무슨 강령이나 구호처럼 돼 있어서 피부에 와 닿지 않지만, 유토피아적 전망과 일상적 실천이 서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만은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지젝의 결론을 우리의 문맥에서 조금 일상적인 용어로 번역하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 “진정한 사랑은 일상적인 ‘비속한’ 한국 여자들에게서 ‘숭고한’ 러시아 여자들을 알아볼 각오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자세가 갖는 일상-정치적 교훈은 기존의 한국 여성들을 (러시아 여성들처럼) 신비화하는, 그것에 분칠하고 떡칠하는 일이 아니라, 완전히 그 반대이다(*이 통신문의 원제목은 '크레믈린-보드카-러시아여성'이었다). 말하자면, 그것은 러시아 여성의 이미지(=비전)를 힘껏 한국 여성의 일상으로 번역해내는(=옮겨오는) 일, 요컨대 이상적 여성이란 유토피아를 먼 나라에서 구할 게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힘껏 찾아보는 일이다. 너무 가깝다고 주저하지 말고 말이다…”

04. 09. 23./ 06. 0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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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릴케 현상 > 백낙청 “통일 노력없는 평화 주장은 공허”

백낙청 “통일 노력없는 평화 주장은 공허”
입력: 2006년 06월 12일 18:30:25 : 5 : 8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는 12일 오전 서둘러 서울 용산역에서 KTX 열차에 올랐다. 광주에서 6·15 남북공동선언 6주년 기념 민족통일대축전 행사가 열리기 때문이다. 요즘 그는 6·15 민족통일대축전 남측위원회 상임대표로서 남북화해를 위한 사업에 적극 나서고 있다. 통일담론을 주도해온 그로서는 당연한 과업으로 보인다. 그에게는 남과 북, 해외동포들이 만나는 이 행사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 그를 만나기 위해 기자는 KTX 열차에 동승해 통일, 한반도 평화 문제뿐 아니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등 현안에 대해 물었다.

12일 서울 용산역 광주행 KTX플랫폼에 선 백낙청 교수. 강윤중 기자
대화가 무르익어갈 즈음 열차는 유월의 햇살 아래 녹색이 만개한 김제평야를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드디어 광주역. 그는 곧장 망월동으로 향했다. 전남도청이 떠나버린 광주 금남로에는 민족통일대축전 맞이 현수막이 뒤덮고 있었다.

-2000년 6·15공동선언 이후 남북간 공동행사를 여러번 치르셨지만 북행 비행기 대신에 남행 열차는 처음 타시는 것 같습니다.

“광주에서 하자는 데 남측 내부에서 쉽게 공감대가 형성됐습니다. 아무래도 광주가 민주화운동이나 통일운동에서 특별한 곳이어서 그런 곳에서 민족공동행사가 열린다는 데 큰 의미가 있고요.”

-방북을 앞둔 김대중 전 대통령께 개막식 특별연설을 부탁하셨는데요.

“6·15행사가 마침 광주에서 열리고, 또 광주에서 노벨평화상 수상자회의가 열리기 때문에 김전대통령께서 어차피 광주에 오시거든요. 그분 건강상으로는 하루 앞당겨 오시는 게 상당히 부담이 되는 게 사실입니다. 그래도 개막식에 나와서 대중앞에서 한 말씀 하시는 게 광주시민을 위해서도, 행사에 참석하는 전세계 동포를 위해서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서 부탁드렸습니다. 방북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협상결과를 기대하기보다 남쪽의 누군가가 북의 최고지도자와 격의없이 대화하는 것이라면 김전대통령이 적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대등한 위치에서 상호 신뢰가 이미 구축된 상태에서 대화를 한다면 다른 누가 가는 것보다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4년 전 월드컵에 가려서 효순·미선양의 안타까운 죽음이 뒤늦게 여론의 관심을 받았는데 올해도 월드컵 열기에 6·15 광주행사의 의미가 빛바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있습니다. 월드컵 축구 중계방송을 보시는 편입니까.

“더러 방송을 봅니다. 뭐 날밤 새워서 볼 정도는 아니고요. 월드컵과 겹쳐 아무래도 행사가 국민들의 관심을 끄는 데는 불리한 게 틀림없습니다. 우리 언론에서 월드컵 부각시키는 것을 보면, 나도 물론 대한민국팀의 승리를 기원하지만 우리 언론이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번에 오는 안경호 6·15 북측 위원장은 지난 10일 조국평화통일위 서기국장 자격으로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6·15가 날아가고, 평양~서울로 가는 길과 금강산 관광길이 막힐 것이며, 개성공업지구 건설도 정면 중단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내정간섭은 물론이고 ‘서울 불바다’ 발언을 연상시키는 대목도 있었습니다.

“첫째는 상호체제 존중의 원칙에 어긋납니다. 한나라당도 남측 체제의 일부이고 한나라당 의원 가운데 남측 위원회에서 활약하는 분들도 있는데 그런 점에서 맞지 않고. 또 현실적으로 그런 건 역효과밖에 날 게 없잖아요. 이번에 (그런 발언이)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졌으면 한나라당에 유리하면 유리했지 정부·여당에 유리할 게 하나도 없잖아요. 남쪽 실정에 대해서 북측의 일꾼들이 이해를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한나라당이 싹쓸이 승리를 거둔 5·31 지방선거를 계기로 한국사회가 보수화되는 뚜렷한 징표가 아닌가 하는 우려가 나오고 있습니다. 통일운동 차원에서 이번 선거가 중장기적으로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하십니까.

“한나라당이 압승을 하기는 했지만 북측에서 걱정한 것처럼 쟁점이 6·15정신은 아니었습니다. 한나라당이 내세우는 무능하고 오만한 정권에 대한 심판이었는데 실제로 얼마나 무능하고 얼마나 오만하냐를 떠나서 국민들이 큰 틀에서 맞다고 판단을 내린 거고요. 통일운동을 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도 꼭 남의 일로만 생각할 건 아닙니다. 우리가 그동안 해온 통일운동이나 통일사업이 과연 얼마나 민심을 의식하고 존중하면서 해왔는가, 이런 걸 한번 반성할 때라고 봅니다.”

-백대표께선 또 진보진영 내 ‘반미 자주통일 대 남한내 노동해방’ ‘진보세력 대 개혁세력’ 등의 이분법을 지적하시면서 진보개혁세력의 여러 갈래가 스스로를 쇄신하면서 새롭게 결합하거나 연대하는 곱셈의 이치를 찾아보자고 제안하셨는데요.

“흔히 이 정권이 뺄셈의 정치를 해왔다는 말들을 하는데, 이번 선거결과는 뺄셈 정도가 아니라 나눗셈까지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열린우리당, 민노당, 민주당 표를 합쳐도 한나라당 표를 못따르잖아요. 그러니까 지금 이 시점에서 단순히 덧셈해서는 소위 개혁세력에게 해법이 없다, 새로운 곱셈의 정치를 해서 늘리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이런 뜻입니다. 소위 자주파와 평등파, 이런 경우에 덧셈해봐도 사람들이 얼마나 돼요. 덧셈하자고 해도 말만 그렇지 실제 융합이 안됩니다. 나는 그런 급진적인 진보세력과 온건한 개혁세력이 다 합칠 수 있는 새로운 원리를 찾아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걸 ‘변혁적 중도주의’라는 표현을 썼잖아요. 좀더 중도적이고 실용적인 노선을 택하는데 그 목표를 분단체제 극복에 두는 거고, 우리 시대에는 어쨌든 한반도에서 분단체제 극복이 최대의 변혁과제라는 뜻에서 변혁적 중도주의입니다. 그런 인식을 공유하면서 합쳐야 한다고 본 것이지요.”

-최근 최장집 교수의 선(先) 평화론을 실명 비판하신 것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겠습니까. 최장집 교수의 새책 ‘민주주의의 민주화’에서 편집자는 백대표의 비판에 대해 ‘평화를 곧 남북한의 통일로 환원하는 접근에 비판적이다. 한반도 평화의 핵심은 남북의 합침이 아니라 공존하는 데 있다’면서 최교수의 강한 현실주의적 관점을 대변했는데요.

“나는 뭐 그런 논리가 최교수에게서 나오든, 편집자에게서 나오든 그냥 나와 의견이 다를 때는 내 의견을 말하는 거죠. 최교수가 나에게 답변을 해달라는 그런 게 아니죠. 한마디 덧붙이자면 나는 책이 나오자마자 서명해서 최교수한테 보냈고, 최교수는 잘 받았다고 정중하게 편지 보내왔어요. 평화를 통일로 환원하는 접근에는 나도 비판적이에요. 그런데 실제로 한반도에서 평화를 구축하려면 통일문제로 환원시켜도 안되고, 그렇다고 통일문제를 배제해도 안된다는 게 내 주장이거든요. 사안이 복잡한데 왜 ‘평화냐, 통일이냐’ 양분법으로 가느냐 그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에요. 남측이 제안한 연합제안과 북측의 연방제안의 단계를 낮춰서, 낮은 단계의 연방제에는 비슷한 점이 많으니까 대충 그 방향으로 가자. 그 뒤에 뭘할 거냐를 다투지 말고, 또 이런 단계를 생략하고 통일로 가자는 말도 하지 말자. 그렇게 합의한 게 아닙니까. 그런 원칙을 이행하면서 평화를 구축해야 구체적인 성과를 보는 거지, 평화가 중요하니까 통일 너무 부르짖어서 평화를 위협하지 말자고 하는 건 그냥 공자 말씀이에요. 그걸 누가 틀렸다고 합니까. 틀리진 않았지만 옳은 말씀 하는 걸로 끝나는 거죠.”

-비판의 강도가 강했다는 지적도 일부 있었는데요.

“모르겠어요. 최장집 교수도 아주 장기적으로 아주 먼 장래에 어떤 통일을 구상하고 있는지 그런 거는 뭐 분명하게 드러낸 바가 없으니까 잘 모르겠는데…. 지금 단계에선 급격한 통일론이든, 단계적 통일론이든 통일론하는 건 평화에 위협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고, 그 문제에 대해서 최교수가, 내가 책에 인용하고 있지만 상당히 단정적인 발언을 많이 했습니다. 내 비판이 과하지 않냐고 하는데 내가 인용한 대목들을 보면 최교수도 상당히 과한 얘기를 했다는 게 분명할 거예요.”

-최근 사회적 발언 빈도가 부쩍 잦아지셨는데…. 올해 초 창비 40돌을 맞아 ‘운동성 회복’과 학계의 토론 활성화를 위한 실명비판을 강조하셨던 맥락에서 읽힙니다. 앞으로도 실명비판을 계속 하실 생각이신지요.

“현 시점에서 뭐 다음번에 누굴 비판하겠다는 건 없고요.(웃음) 최장집 교수가 워낙 유명인사이다 보니까 내가 최교수를 비판했다고 언론에 각광을 받아서 그렇지 나는 평생 실명비판을 하면서 살아온 사람입니다. 또 무수히 후배들에게 실명비판을 많이 당한 사람이기도 하고요. 아쉬운 것은 사회과학도들이 자기들끼리도 정작 중요한 논쟁은 좀 덜하는 거 같고요. 또 나에 대해서는 대접을 해주는 건지, 뭔지 모르겠지만 어떻게 보면 사회과학도 완장을 안찬 사람이 지껄이니까 취급을 안하는 거 같기고 하고요. 그래서 앞으로도 계기가 되면 논쟁도 하고, 실명비판도 할 생각입니다. 물론 체력에 한계도 있고, 또 모든, 난 뭐 여러사람에게 비판을 받아온 사람인데…. 일일이 다 답할 수는 없잖아요. 내 나름대로 취사선택을 하긴 해야죠.”

-아무래도 통일운동의 현실에 몸을 담고 계시니까 전통적인 ‘정권과의 거리두기’ 입장이 바뀐 게 아닌가 하는 시각도 있는데요.

“글쎄요. 첫째는 남측위원회 대표 자리를 맡고 있다보면 현실적으로 여러가지 말을 아끼게 되는 점이 있습니다. 남측 정부에 대해서도, 북측 정부에 대해서도 그렇고요. 그러나 정부와 거리를 두고 내가 독립적인 지식인으로서 활동한다는 원칙에는 전혀 변함이 없다는 생각입니다.”

〈김진호기자 jh@kyungh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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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릴케 현상 > [퍼온글] 1954년 독일과 2002년 한국

1954년 독일과 2002년 한국

주한 독일인이 본 월드컵…
독일의 스위스 월드컵 우승과 비슷한 2002년 4강 신화…
2006년 여름 한국인에게 다시 기적이 오길 바라지만, 뭔가 안 좋은 예감이 든다

▣ 한네스 B. 모슬러(강미노) 주한 독일인·서울대 정치학과 박사과정


1954년 독일 축구대표팀은 스위스 베른에서 월드컵 우승을 거머쥐면서 전쟁 패배와 나치 범죄로 완전히 꺾였던 독일인들의 자존심을 조금이나마 달랬다. 특히 독일축구단은 약팀으로 평가됐지만, 결승까지 진출해서 우승 후보인 헝가리와의 전반전에 골 2개나 허용한 상황에서도 결국 3 대 2로 이겼다. 그래서 이 시합을 ‘베른의 기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기적’은 1954년 7월4일에 일어났다. 당시 독일인은 희망을 조금이라도 되찾음으로써 몇십 년 뒤 또 다른 ‘기적’을 이룰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중에 박정희가 <국가와 혁명과 나>라는 저서에서 그렇게 찬양하는 ‘라인강의 기적’ 말이다.

선전되고 조작된 열기

한국과 독일의 인연(?)은 이미 1954년 스위스에서 시작했다. 당시 한국대표팀은 아시아 대륙에서는 처음으로 월드컵에 참여했다. 물론 독일과 붙지도 않았고, 헝가리에 0 대 9, 터키에 0 대 7로 패배했지만 참가 자체가 센세이션이었다. 당시 <조선일보> 6월20일치에 실린 ‘세계축구선수권대회’에 참가한 한국축구단에 대한 보도는 같은 면에 실린 연고전 보도보다 겨우 몇 줄 더 길었을 뿐이지만, 한국 축구의 역사에서 월드컵 첫 출전은 무시할 수 없는 의미가 있다. 당시 정전(停戰)된 지 15개월도 안 된 시점에서 국가대표단을 성공적으로 세계대회에 보낼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다. 그리고 비교가 된다. 2002년 한국과 일본에서 치러진 월드컵의 열기 말이다. 1954년에 뜨거웠던 독일인들, 그리고 2002년 뜨거웠던 한국인들, 그들이 무엇인가를 공유한 것만 같다.

2002년 한국뿐 아니라 외국에 있는 한국인들이 보여준 ‘열광’도 대단했다. 월드컵은 해외 동포들에게도 정체성을 재구성하는 계기가 됐다. 사실 대중의 단순한 열기와 쾌락주의 말고는 이런 엄청난 덩어리의 등장은 공포스러운 면도 없지 않아 있다. 위험한 순진함이랄까? 왜냐하면 그 열정을 눈치 빠른 산업은 상업화하고 정치계는 정치화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2002년에는 시민과 기업들이 자연스러운 열기와 기획으로 반응했지만, 2006년은 선전되고 기획되고 조작된 열기의 성격이 짙다.

스스로에 대한 견제와 책임을

1954년 월드컵을 묘사한 영화 <베른의 기적>의 감독 보르트만은 “세계대회 우승은 당시 독일인에게 새로운 활기와 일체감을 주고, 나치시대와는 다른 의미의 집단적 행복감을 줬다”고 말한다. 역사학자 중에서도 “세계대회 우승은, 당시 독일 사회가 전쟁 뒤에 짓눌려왔던 모든 것에서 일종의 해방감을 주는 것이었다. 어떤 의미에선 서독연방공화국의 시작이었다”는 평가까지 내린다.


△ 1954년 스위스 월드컵 결승전인 독일 대 헝가리 전, 독일이 우승컵을 거머쥐며 '베른의 기적'을 일으켰다. (사진/ 연합)

한국의 입장에서는 2002년 월드컵 때의 업적이 기적에 가까웠다. 2006년의 꿈까지 이루어진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하지만 일반인들의 순수한 행복의 축제가 될지, 아니면 상업주의자들의 잔치가 될지는 모를 일이다. 오히려 좋지 않은 예감이 강하다. 이번 월드컵의 열기가 스포츠의 악몽이 되지 않도록 가장 먼저 아드보카트호가 책임질 일이겠지만, 한국인이 자신의 사회에서 나아가 세계 시민사회에 빨간 신호의 기억을 남기지 않도록 스스로에 대한 견제와 책임을 다해야 한다. 그러려면 일종의 자기 계몽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는 1954년 독일의 기적과 1936년 손기정의 기적을 생각하며, 2006년 여름 한국인에게 다시 한 번 ‘베를린의 기적’이 찾아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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