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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나잇 스탠드, 산책을 동반한 하룻밤 사랑

관련 영화관련 영화정보가 없습니다. 날짜2006-06-13    조회수330



작년 이맘때쯤 여성학자 정희진 씨는 모 신문에 '여관의 정치학'이라는 흥미로운 칼럼을 기고한 바 있다.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여관과 러브 모텔이 도처에 널린 이 희한한 현상의 이면을 성찰하는 재미있는 글.

“한국에서 여관업이 번창하는 실제 이유는, 가정이 사랑의 공간이 아니라는 점과 늦은 성년과 관련 있는 것 같다(자녀들이 나이 들어서도 부모랑 같이 살기 때문에, 자식도 부모도 마땅히 성생활을 할 ‘룸’이 없다). 한국인들은 ‘집’보다 ‘길 위의 섹스’를 즐기는 것 같다.”

정희진은 한국 여관 문화가 대변하는 '길 위의 사랑'이 가족주의를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족주의에 순기능 역할을 한다고 보고 있다. 필자도 이 주장에 동의한다. 한국인들은 너나 없이 여관이나 모텔에서 '길 위의 사랑'을 하면서도 이것을 천박한 것이라고 단죄하며, 사랑이 끝난 후 제각기 집으로 돌아가 또다시 도구화된 각자의 일상적 삶을 살아간다.

기혼자들은 '혼외정사'를 통해 가족이 구현하지 못하는 보살핌과 사랑의 관계를 대체하려 하고, 젊은이들은 '원 나잇 스탠드'를 하나의 성 문화로 구축하면서도 못내 그것을 도덕적으로 단죄하는 기묘한 역설에 처해 있다. 집과 여관의 분리가 보여주듯, 이렇듯 분열적인 성 모럴은 궁극적으로 사랑과 친밀성에 적대적이다. 집에 들어가는 순간에 소멸되는, 여관 문이 닫히는 순간에 부재하게 되는.

이러다 보니 그 잘 나간다는 한국영화에 '원 나잇 스탠드', 즉 하룻밤 사랑에 관한 제대로 된 영화가 거의 없다. 포장마차에 뒤이어 칙칙한 여관 장면이 나오면 곧 ‘리얼리즘 영화’가 되고, 붉은 조명과 여관 침대만 나오면 곧장 ‘에로 영화’가 된다. 제작자든, 관객이든 평자든 다같이 분열적이다.

순전히 개인적인 취향이긴 하지만 필자는 '원 나잇 스탠드' 영화라면 환장을 하는 편이다. 이 거대한 메트로폴리스 안에서 완전히 고립된 개인들이 우연하게 만나서 이루는, 예컨대 처음의 사랑이 될 수도 있고 마지막 사랑이 될 수도 있는 단 하룻밤의 사랑에 대한 관심과 성찰은 우리에게 보다 더 넓은 삶의 선택지를 제공할 거라 믿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사회는, ‘로맨스’는 시작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개인적으로 최고의 멜로영화 중 한 편으로 꼽는 낸시 사보카 감독의 <샌프란시스코에서의 하룻밤>(Dogfight, 1991) 은 몇 년의 세월이 빚어내는 연애보다 단 하룻밤의 연애 감정이 얼마나 응축적인 힘을 갖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다음 날 베트남 전쟁터로 떠나야 하는 리버 피닉스와 못 생긴 여자 릴리 테일러가 '가장 못 생긴 여자 데려오기'라는 Dogfight 게임을 통해 우연하게 만나 하룻밤 동안 샌프란시스코를 쏘다닌다는 내용이다. 여자의 집으로 함께 숨어 들어갔지만 결국 잠자리도 갖지 못할 정도로 순진하기 그지 없는 리버 피닉스와 릴리 테일러. 결국에 밖으로 나와 거리를 실컷 쏘다니다가 쥬크박스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추며 설렘으로 가득 찬 시선으로 서로를 응시하는 이 순간, 우리에게 익숙한 제도의 시간들은 모두 산화되고 만다.

감히 도식을 넣자면, 내공 깊게 잘 세공된 '원 나잇 스탠드' 영화란 무릇 주인공들이 함께 자든 안 자든, 산책을 동반한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길 위의 사랑'이며, 대화를 통해 서로 배려와 친밀성을 확보하는 순간이다. 산책은 로맨스를 위한 여정이기도 하지만, 단 일회의 순간으로 영원의 시간을 확보하려는 투쟁이기도 하다.

이를 테면 마이크 피기스 감독의 <원 나잇 스탠드>(1997)는 말 그대로 하룻밤 사랑에 관한 영화지만, 산책이 없다. 산책이 없는 하룻밤 이야기는 대부분 고루한 불륜 영화로 그칠 공산이 크다. 이 영화의 미덕이라면, 하룻밤 불륜으로 가족을 망치지 말라, 는 식의 <위험한 정사>(1987) 류의 조잡한 가족영화보다 낫다는 것이다.

열차에서 우연히 만난 청춘 남녀의 하루 동안의 이야기를 다룬 리차드 링클레이터의 <비포 선라이즈>(1995)는 산책의 영화다. 비엔나 거리를 밤새껏 활보하며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가 쏟아내는 엄청난 말, 말, 그 수다들은 '사랑은 수다'라는 매우 훌륭한 정의를 산출해낸다. 달빛과 나뭇잎 그림자가 희롱하는 공원에서의 달콤쌉싸름한 하룻밤 정사는 정확히 10년 후 <비포 선셋>(2005)의 엔딩 씬과 조우하게 된다. 10년 후에 다시 만나게 된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는 서로 헤어져야 할 시간을 앞둔 채 니나 시몬의 노래를 틀어놓고 춤을 춘다. 10년 전의 하룻밤 사랑이 결국 각자의 결혼 생활보다 더 의미가 깊은 순간일 수 있음을 증언하는 장면이다.

산책을 동반한 원 나잇 스탠드는 또한, 자아를 찾는 순간이기도 하다. 클레르 드니 감독의 <금요일 밤>(2002)은 한 젊은 여자가 이사 가기 전날인 금요일 밤, 우연하게 만난 남자와 하룻밤을 함께 보내는 이야기다. 도시를 배회하다가 들어간 여관에서 잠자리를 한 후, 잠들어 있는 남자를 가만히 지켜보는 여자 주인공. 순간적으로 이삿짐을 다 싸놓은 자기 집으로 이 낯선 남자를 데려갈까 속으로 상상하지만, 결국 상쾌한 아침이 시작된 토요일의 파리 거리를 가방을 흔들며 경쾌하게 뛰어가는 것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쿨하게 자신의 욕망을 직시하는 맹랑함이 가득한 영화다.

처음 만난 낯선 사람과 산책을 하는 일은 또한 계급적이기도 하다. 부자들은 잘 걷지 않는다. 퀴어 시네마의 히로인 그렉 애러키의 <리빙 엔드>(The Living End, 1992) 이후 최고의 게이 무비로 치부되는 짐 펄의 <하룻밤 상대>(Trick, 1998)은 가난한 고고보이와 예술가가 지하철에서 우연히 눈이 맞아 하룻밤을 함께 보낸다는 내용이다. 이 둘은 단지 하룻밤을 함께 보낼 방을 찾기 위해 온 도시를 헤매지만 이들이 거처할 곳은 아무 곳에도 없다. 결국 아침이 되어 헤어질 무렵, 서로를 웃으며 바라보는 표정은 어떤 묘한 감동을 안겨준다. 단지 원 나잇을 위해 밤을 허물며 도시를 돌아다녔지만, 도시의 태양이 밝아버린 그 시간 그들에게 헤어짐은 곧 다른 시작을 의미하기 시작한 것.

필자가 산책을 동반한 하룻밤 사랑과 이런 내용을 담은 영화에 열광하게 된 것은 어느 날 겨울 어떤 근사한 녀석에게 '같이 자자'는 말을 못하고 쑥스러움과 설렘으로 가득 찬 채 밤새 눈 쌓인 서울 도시를 빙빙 돌아다닌 개인적 추억이 발화된 이유도 있겠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사랑 방식이 여관의 휴지와 집에서의 침묵에 둘러싸인 채 혹여 감금되지는 않았을까 싶은, 또는 수많은 로맨스 이야기가 도처에 유령처럼 배회하지만 결혼 제도에 붙박인 웨딩 카탈로그 같은 전형적인 이미지들만 양산되는 건 아닐까 싶은, 하여 낯선 사람과의 그 영원할 것 같은 수다와 산책에 대한 욕망이 존재하지만 정작 스스로 그것을 부정하거나 단순히 몇몇 마초들의 성적 판타지로 치부한 채 자신의 삶으로 끌어들이지는 못하는 것 아닐까 하는 노파심 때문일 것이다.

산책을 동반한 하룻밤 사랑, 왜 그것이 단지 영화에 지나지 않겠는가. 단지 그것은 영화일 뿐이야, 라고 말하는 것은 인생의 패배자를 자처하는 일이지 않겠는가.

영화감독 이송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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