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balmas > [퍼온글] 아직도 한미FTA와 FTA의 차이를 모르십니까

[하재근] 아직도 한미FTA와 FTA의 차이를 모르십니까
하재근 (학벌없는사회 사무처장)    메일보내기

  


 한미FTA는 FTA와 달리 미국과의 FTA다. 그것이 양자의 결정적인 차이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강도 높게 시장화를 추구하는 나라고 투자자를 보호하는 나라다. 그리고 그것을 다른 나라에게 강요하는 나라다.
  
  미국과의 FTA는 미국식 시스템을 다른 나라에 관철시키는 통로다. 미국에서 공들여 교육한 후진국의 엘리트들이 자기 나라에 돌아가서 시장주의와 미국과의 FTA 필요성을 선동한다. 미국이 강요하지 않아도 작은 나라가 먼저 미국에게 FTA를 요구하는 것은 미국의 세심한 이데올로기 전략의 개가다.
  
  원래 FTA는 보호무역 장치다. 다자적 자유무역틀을 짜려던 미국이 각 지역의 반발로 뜻을 이루기 힘들자 만만한 나라들을 1대1로 해치우기 위해 FTA를 동원하는 것이다. 후발주자들끼리 FTA를 할 때는 상품교역이 중심이 된다. 일반인들이 흔히 생각하는 FTA에 대한 막연한 상식은 후발주자들끼리의 FTA에 해당된다.
  
  산업화 선발주자들, 즉 선진국들의 FTA로 가면 서비스부문 등이 포함된다. 그러나 여기서도 미국과 미국 아닌 나라들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유럽식은 포지티브 방식이다. 포지티브 방식은 개방, 시장화할 부문만 열거하는 것을 말한다. 개방, 시장화가 되지 않는 상태를 전제로 해서 열 부문만 하나하나 찍는 것이다. 미국식은 이것보다 훨씬 적극적인 시장화 정책이다.
  
  미국은 네거티브 방식을 고집한다. 네거티브 방식이란 원칙적으로 완전히 개방, 시장화하는 것을 전제로 시장화하지 않거나, 잠시 유예할 부문만 하나하나 열거하는 것을 말한다. 열거되지 않은 것은 전면 시장화다. 난 이 말만 들어도 소름이 돋는다. 어떻게 시장화를 전제로 할 수 있단 말인가. 시장실패 보정을 고민해야 하는 시점에 전면 시장화라니.
  
  한미FTA를 추진하는 우리 정부가 무서운 것은 때때로 보이는 그들의 거의 원리주의 수준의 시장주의적 사고방식 때문이다. 지난번에 소개한 김종훈 수석대표의 한국영화 경쟁력 향상 방안(우리도 미국인이 볼 만한 영화 만들면 된다)도 그런 사고방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1차 협상이 끝나고 나서 양재동 농수산물유통센터에서 있었던 한미FTA 토론회에서 정부의 한 연구원은 마지막 발언에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이번 한미FTA협상이 네거티브 방식을 원칙으로 진행된다는 느낌의 발언을 했다. 너무나 엄청난 말이라 난 순간 긴장했는데 정부 측 연구원은 태연작약했다. 토론회 마지막 발언이어서 정확한 내용을 확인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 범국민운동본부쪽에서 한미FTA 1차 협상에서 서비스부문은 네거티브 방식으로 합의했다는 얘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확인이 필요한 부분이다.
  
  네거티브 방식으로 가면 향후 해당 국민국가의 국민들이 어떤 사회적 합의를 하든, 어떤 법안들을 만들든, 어떤 정당에게 투표를 하든 그 나라 시스템은 시장화 한 방향으로 고정되는 것이다. 미국만 고집하는 이런 강도 높은 시장화 협정을 정부는 마치 전 세계가 추구하는 대세인 것처럼 국민을 속이고 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1차 협상이 시작되기 전 우리 정부가 국회 보고자료로 내놓은 한미 FTA 우리 측 초안 주요 내용이라는 문건의 챕터8 투자 항목을 보면, 협상 목표로 투자 자유화와 투자보호 강화가 잡혀있고, 초안 개요 말미에 “투자자와 투자유치국 정부 사이에 투자관련 분쟁이 발생할 경우, 국내 사법절차 또는 국제중재를 이용한 적법 분쟁해결절차 보장”이라는 문구가 있다.
  
  일개 투자자가 한 국가를 상대로 제3의 지역에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투자자와 국가를 동급으로 인정하는 가장 극단적인 시장화 정책이다. 우리 정부는 협상도 하기 전에 이미 우리 측 초안에 이런 문구를 넣었다. 그리고 국민들에게는 마치 이것이, 즉 한미FTA가 세계적인 대세인 것처럼 홍보를 했다.
  
  그러나 세계은행 보고서에 의하면 이것도 역시 미국식 FTA의 특징에 불과하다. 국민에게 거짓말까지 해가며 우리 사회를 미국식 시장사회로 재편하려는 정부의 행태를 이해해줄 길이 없다.
  
  또, 일단 개방, 시장화한 부분은 다시는 돌이킬 수 없다는 역진방지(톱니바퀴) 조항 역시 미국식 FTA의 특징이라고 한다. 결국 일부 예외, 유예는 있으나 본질적으로 완전 시장화를 목표로 하는 조약이며, 그 경우 투자자가 국가와 동급의 권능을 갖게 되고, 지금은 물론 다음 정권, 다다음 정권에도 돌이킬 수 없는 조약을 임기가 다된 정권이 강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정부는 투자자가 국가를 제소할 수 있는 조항을 아주 우습게 생각하고 있다. 이 부분을 문제 삼자 미국 기업뿐만이 아니라 우리 기업도 미국 정부를 제소할 수 있다며 얼빠진 소리를 늘어놓고 있다. 과연 우리 기업이 미국 정부를 제소할 수 있을지, 제소하고 이길 수 있을지도 의심스럽거니와 문제의 본질은 그런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해서 투자자 따위가 국가와 동급일 수 있느냐는 것이 문제의 본질이다. 국가 뒤엔 수천만, 수억의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민주적으로 합의하고 정치적으로 조정해서 국가의 정책이 이루어진다. 그런데 투자자가 제3의 장소에서 특정 국가를 제소한다는 것은 특정 투자자가 수천, 수억의 사람 전체와 동급이 된다는 걸 의미한다. 그리고 해당 국가의 정책 결정권이 해당 국가 국민의 손을 떠나 제3의 장소에 있는 익명의 재판관 손으로 옮겨간다는 걸 뜻한다. 근본적으로 반역적인 발상이다.
  
  물론 정부는 실제로 이런 사례가 많지 않을 거라고 주장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조항을 넣은 사고방식 자체가 문제다. 그리고 투자자의 국가제소사건이 단 한 건만 있어도 세력지형에서 국가가 밀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 다음부터는 국가가 알아서 기게 된다. 아예 제소 사건이 없어도 협박만으로도 투자자는 국가를 위협할 수 있다.
  
  스크린쿼터가 문제의 또 다른 측면을 정확히 보여준다. 미국이 아닌 세계 어느 나라와 FTA를 해도 스크린쿼터는 문제될 수 없는 부문이다. 왜냐하면 국제적으로 문화가 상품교역의 범주만은 아니라는 합의가 있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도 스크린쿼터를 무역협상 테이블로 끌고 나올 수 없다. 오직 미국과 한국만이 스크린쿼터조차도 무역 협상의 범주로 간주한다.(물론 대놓고 협상은 못하니까 물밑에서 해치웠다.) 그것이 인간 생활의 모든 부분을 상품화하려는 미국식 막가파 FTA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아직도 한미FTA를 옹호하면서 개방은 세계적 대세라는 둥, FTA는 대세라는 둥, 무역하지 않고 어떻게 사냐는 둥 정부의 선동구호를 반복하는 국민들과 언론이 있다. 우리나라는 이미 세계적으로 높은 수준의 개방된 나라고, FTA도 차근차근 하면 되는 것이며, 무역은 기왕에도 해왔고, 앞으로도 할 것이다.
  
  한미FTA의 문제는 왜 이 나라를 돌이킬 수 없이 시장화하냐는 것이다. 그리고 미국이 먼저 달려들어서 애걸복걸하게 만들 수도 있는 FTA를 왜 우리가 먼저 속옷 바람으로 달려들어 자식들 밑천까지 다 빼주냐는 것이다.
  
  누누이 말했지만 지금은 90년대 이후 시작된 시장화 개혁을 총결산하고 국가의 좌표를 재설정해야 할 때다. 그런데 한미FTA는 미국식 시장사회로 좌표를 고정시키자는 것이다. 그것도 미국의 강압이 아닌 우리 정부 스스로의 의지로 말이다. 임기도 다 된 정부가! 무조건 지금의 협상 스케줄은 정지시키고 봐야 한다.


2006년07월17일 ⓒ민중의 소리

퍼온 주소 : http://www.vop.co.kr/new/news_view.html?serial=47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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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지적재산권 협상에 대한 출판계의 입장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지적재산권 협상에 대한

출판계 성명서 발표

 대한출판문화협회(회장 박맹호)를 비롯한 총 9개 출판단체는 지난 7월 5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지적재산권 협상과 관련하여 출판계의 입장을 공식 표명한 성명서를 발표했습니다.

성명서는 ‘지적재산권 문제는 국제 조약에서 정한 원칙을 벗어나지 않는 한 해당국가의 법 정책에 따라야 할 문제이지 무역 거래의 조건이 될 수 없으며, 미국문화자본의 로열티 회수 기간 확대를 위한 저작권 보호기간 연장은 한국의 출판 및 학문 발전을 저해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습니다.

출판을 비롯한 이 땅의 문화산업 발전과 진정한 문화적 주권 수호를 위해 출판계의 입장을 밝힌 성명서를 아래 붙이오니 많은 관심 바랍니다. 

※ 서명 단체 명단

대한출판문화협회, 한국출판인회의, 불교출판문화협회, 학습자료협회,  한국과학기술출판협회, 한국기독교출판협회, 한국청소년도서출판협의회, 한국출판경영자협회, 한국학술도서출판협의회 이상 9개 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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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지적재산권 협상에 대한 출판계의 입장

- 지적재산권에 대한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중단하고, 정부는 미국과의 협의 내용을 전면 공개하라

한미 양국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을 선언한 후, 협상의 근본 성격과 그것이 몰고 올 사회적 파장, 추진 과정의 투명성과 절차를 둘러싸고 사회적 우려와 반대의 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에 대한 이같은 우려와 반대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한미 자유무역협정이 상품의 자유로운 거래를 위한 단순한 무역협정을 넘어, 근본적으로 경제 통합, 사회문화 통합을 일방적 힘의 논리로 강제하는 ‘경제통합협정’의 성격을 가지기 때문이다.

모든 국가와 사회에는 자기 나름의 사회 문화적 질서가 있다. 그런데 한 사회의 고유한 문화적 질서가 무역 자유화란 이름으로 일방적 자본의 논리에 의해 획일적으로 강제될 땐, 이는 한 사회의 경제적 기반은 물론, 문화적 정체성을 해체시키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이는 단순한 기우가 아니라, 이미 미국과 자유무역협정을 맺은 여러 나라에서 드러나고 있는 현실이다.

더구나 현재의 한미 자유무역협정 진행과정 및 협상 의제도 무엇 하나 제대로 공개되거나 알려지지 않은 채 진행되고 있다. 최근 한국 정부의 강력한 부인에도 불구하고 스크린 쿼터 문제, 수입차의 배기가스 기준 완화 등을 미국이 협상의 선결조건으로 걸었고, 이를 한국 측이 협상에 들어가기도 전에 모두 수용했다는 것이 밝혀짐으로써, 이번 협상의 절차와 진행 과정은 전혀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 다시 한 번 드러나게 되었다. 이는 또한 자유무역협정 추진이 미국의 압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발적이고 주도적인 판단에 따른 것이라는 정부의 주장 역시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정부가 한미 자유무역협정 추진과 관련해 가장 강조해온 것은 경제 파급효과이다. 정부는 한미 자유무역협정 추진이 “수출증가와 성장, 생산, 고용, 투자 등 거시경제의 여타 부문과의 선순환 구조, 다시 말해 수출이 생산을 증가시키고 고용을 확대하고 성장을 촉진하고 투자를 유인”한다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정부가 이런 주장을 하며 제시한 몇몇 자료들은 급조된 것으로, 전혀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 많은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오히려 사실상 가장 체계적인 한미 자유무역협정 경제효과 보고서라 할 미국제무역위(USITC) 보고서는, 협정 체결 4년 후면 미국이 대한 무역 적자국에서 흑자국으로 전환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또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의 미발표 보고서에서는 “한미 FTA로 인한 대미 무역수지 감소폭이 72억 7,000만 달러로 추정됐는데, KIEP의 공식보고서는 이런 사실이 누락”된 채 발표됐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 미국의 경제적 이익이 훨씬 크다는 것이다. 많은 전문가들 역시 한미 자유무역협정이 신자유주의를 강화시켜 한국 사회의 양극화를 심화시킬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더구나 한미 자유무역협정은, 무엇보다도 무역자유화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지적재산권 문제를 미국의 일방적 요구에 의해 주요 협상 의제로 삼고 있다. 우리는 지적재산권을 존중하며 창작(자)의 권리가 존중되어야 하고 법률적으로 보호받아야 한다는 점에서 어떠한 이견도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한 사회가 지적재산권을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 하는 것은 그 사회의 문화와 방식에 맞게 결정하고 선택할 문제지, 무역거래의 전제 조건이거나 협상의 대상일 수는 없다.

우리나라는 현재 국제적인 저작권 조약인 베른협약이나 세계무역기구(WTO)의 무역관련지적소유권협정(TRIPs)의 보호규정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 저작권 모범 국가이다. 현재의 베른협약이나 세계무역기구의 무역관련지적소유권 협정은 지적재산권의 보호를 통한 창작의 장려와 인류의 공동 재산으로서의 저작물의 공공성이 서로 공존하고 상생하는 틀로 만들어낸 국제적 규약이고 약속이다.

이런 국제적 규범을 충분히 존중하는 한, 각 개별국의 지적재산권 보호와 장려 조치는 그 사회의 발달 정도와 문화적 토양에 맞게 적용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지금의 한미 자유무역협정은 이런 문화적 토양과 한 사회의 사회 문제적 제도와 규범마저 모든 것을 일방적인 자본의 논리로 환치시키고 강제하고 있다.

이는 미국이 지적재산권 협상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드러난다. 2002년 기준으로 대한민국의 무역수지는 54억 달러 흑자인 반면 서비스 수지는 82억 달러 적자였고, 그 중 약 30억 달러가 지적재산권에 대한 로열티였다. 세계은행은 지적재산권을 미국 기준으로 강화했을 때 가장 피해가 큰 나라로 대한민국을 지목했다. 연간 약 153억 달러 적자를 보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 보전하기 위해서는 산술적으로만 계산해도 미국 시장에 100억 달러 이상의 상품 수출을 추가로 이루어야 하는데, 상품 수출액 가운데는 7, 80% 이상의 재료비가 포함되어 있는 반면 지적재산권에는 아무런 재료비가 포함되어 있지 않은 점을 감안한다면 500억 달러 이상의 상품 수출이 추가로 이루어져야 지적재산권으로부터 야기된 적자를 보전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처럼 미국이 한미 자유무역협정에서 지적재산권을 중심의제로 설정해 밀어붙이는 것은, 소위 디즈니 사를 비롯한 미국 자본의 로비에 의해 만들어져 지금도 ‘미키마우스법’이라고 미국 내에서조차 비판받고 있는 ‘소노보노법’을 한국에 관철시켜 자국 자본의 이해에 충실하겠다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결국 미국이 저작권 보호기간을 저작자 사후 50년에서 사후 70년으로 연장하려는 목적은, 소수의 미국 문화자본이 지배하고 있는 독점적 문화 상품으로부터 거둬들이는 로열티의 회수기간을 연장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이런 몇몇 초국적 문화자본의 이익을 위하여 한 사회의 문화정책이 희생될 수는 없는 것이다. 몇 가지 예외적인 저작물의 보호를 위하여 대부분의 저작물에 보호기간을 연장하는 것은 창작자에게도 문화 수용자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며 결국 한 사회의 문화발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다. 

때문에 미국의 지적 재산권 협상은 우리 출판계로서는 받아들일 수도 양보할 수도 없는 문제이다. 지적재산권 문제는 국제 조약에서 정한 원칙을 벗어나지 않는 한 해당국가의 법 정책 판단에 따라야 할 문제이지 무역 거래의 조건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미 우리 출판계는 지난 1995년 국제적 수준의 저작권 소급보호를 위해 한 해 수백 억 원의 로열티 추가부담을 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제작비용이 평균 7% 이상 늘어나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추가로 보호기간 소급보호 시점을 미국 측의 의도대로 연장한다면 가뜩이나 어려운 학술서적의 출판은 고사상태에 직면할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학문 및 출판문화의 발전이 없이 산업의 발전이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더구나 그것이 문화에 대한 것이고, 한 사회의 발달에 따른 자율적 선택이 아니라 강요된 선택일 때는 그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강요하는 자가 누구이든 강력하게 저항하는 것이 진정한 문화적 주권을 지키고 보호하는 길이라고 우리는 굳게 믿고 있다.

이에 우리 대한민국 출판계는 다음과 같이 강력히 주장한다.

1. 지적재산권에 대한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중단하라. 
  - 대한민국은 세계가 요구하는 표준 계약을 이미 수용하고 있다. 따라서 더 이상의 개별국가와의 협상은 국제협약을 무시하는 처사이므로 받아들일 수 없다.

2. 정부는 지적재산권 문제에 대한 미국과의 협의 내용을 투명하게 공개하라.  

3. 지적재산권은 문화적 주권의 문제다. 미국은 지적재산권의 국제 규범을 넘어서는 강요행위를 중단하라.

4. 저작권 보호기간은 현행대로 50년으로 유지되어야 한다. 
  - 국제조약에서 정한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우리의 저작권 역사 및 특수성을 고려하여 저작권 보호기간은 현행 50년으로 유지되어야 한다.

2006. 7.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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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balmas > 베버의 문화과학, 한계효용학파의 영향 결정적

 

 

베버의 문화과학, 한계효용학파의 영향 결정적…10년만에 주류학계 수용
해외동향_ 베버 연구의 새로운 테제

2006년 07월 17일   김덕영 카셀대 이메일 보내기

베버는 문화과학자와 사회과학자들에게 영원한 ‘화두’다. 그들은 베버에게 끊임없이 회귀하고, 묻고, 시비 걸고, 도전하며 그를 더욱 발전시키거나 넘어서려 한다. 심지어 ‘베버 패러다임’이란 말을 쓰기도 한다.


수많은 학자들이 베버를 연구하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작고한 프리드리히 텐브룩을 비롯해 볼프강 슐룩터, 빌헬름 헤니스, 요한네스 바이스 등의 명성이 높다. 헤니스만 정치학자고, 나머지는 모두 사회학자다.


역사학자들 가운데에도 베버연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이들이 많다. 그 가운데 볼프강 몸젠(1930~2004)을 첫 번째로 거론하는데 이의를 제기할 이는 없을 것이다. 몸젠은 ‘막스 베버와 1890~1920년대의 독일정치’와 ‘막스 베버. 사회, 정치 그리고 역사’라는 저서를 남겼으며, 볼프강 슈벤트커와 함께 ‘막스 베버와 그의 동시대인들’이란 책을 편집했다. 또한 ‘막스 베버 전집’의 편집위원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는 2004년에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런 그가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 ‘Sociologia Internationalis’라는 저널에 ‘경제학자로서의 막스 베버. 이론경제학에서 문화과학으로’라는 논문을 기고했다(그의 사후에 게재됐음). 몸젠은 이 논문에서 베버를 오스트리아의 칼 멩거에 의해 창시된 한계효용학파와 연결시키고 있다. 베버가 방법론적 개인주의, 행위, 이념형 등에 기초하는 문화과학 연구 프로그램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한계효용학파의 이론경제학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게 몸젠의 테제다. 그에 따르면 오스트리아학파의 이론경제학은 문화과학의 “한 특수한 경우”(26쪽)다. 그리고 한계효용학파가 개인의 합리적 경제행위에 대해 제시한 엄밀한 이론과 유형 및 설명모델은 전형적인 이념형적 방법이라고 몸젠은 해석한다. 비록 멩거를 위시한 이론경제학자들이 그렇게 명명하지는 않았지만.


물론 베버가 한계효용학파의 이론경제학에서 문화과학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을 발견했다고 주장할 정도로 몸젠의 논의는 거칠지 않다. 그는 당대의 다양한 철학, 문화과학, 사회과학 등이 베버의 지적 세계를 발전시키는 데 영향을 끼쳤음을 알고 있다. 가령 몸젠은 베버가 문화과학 및 사회과학의 논리와 방법론을 구축함에 있어 어떻게 신칸트주의 철학자 하인리히 리케르트의 가치론을 받아들였으며, 또한 베버가 이론적-역사적 문화과학 연구 프로그램을 제시함에 있어 어떻게 독일 역사학파 경제학을 받아들였는가를 논증하고 있다.


베버의 문화과학과 한계효용학파의 이론경제학을 연결시키려는 몸젠의 시도는 베버연구의 새로운 방향으로 받아들여진다. 여태껏 베버의 문화과학의 발달과정에 대한 연구는 주로 리케르트의 신칸트학파나 독일역사학파 경제학에 초점을 뒀다. 당대 최고의 베버연구가로 자타가 공인하는 슐룩터가 전자라면, 정치학자로서 탁월한 베버연구가인 헤니스가 후자를 대변한다.


이에 반해 한계효용학파는 단순히 심리학주의적이고 접근방법은 자연주의적이라며 간과, 무시돼왔다. 더불어 한계효용학파는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멀리하는, 이른바 공리주의적 인간유형에 기초한다고 보는 게 일반적인 견해다. 사실 베버는 바로 이런 오해와 편견에 맞서 한계효용학파 경제학은 합리적 경제행위라는 근대적 문화과정과 시장이라는 근대적 문화제도에 대한 전형적인 이론임을 논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볼프강 몸젠 ©
그런데 연구사적으로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으니, 이 같은 몸젠의 시도와 테제가 실상 독일어권에서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미 1996년에 몸젠이 논문을 게재한 바로 그 저널에 ‘막스 베버와 칼 멩거 중심의 한계효용학파. 사회학 발달과정에서 이론경제학이 지니는 의미에 대하여’(졸고)라는 글이 게재된 바 있다. 이 논문은 몸젠과 마찬가지로 베버는 한계효용학파의 이론경제학을 문화과학의 “한 특수한 경우”(48쪽)로 받아들인다고 해석하고 있다. 더불어 베버와 멩거와의 관계를 가치론, 이해와 이념형 등의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 (이 외에도 여러 논문에서 한계효용학파의 이론경제학이 베버에게 끼친 영향에 대해 연구했음). 물론 몸젠은 이들 글이 지니는 연구사적 의미를 잘 인지하며 인용하고 있다. 졸고가 좀더 이론적인 것이었다면, 몸젠의 논문은 역사적 접근방식을 구사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이미 1990년대 초반부터 강조돼온 지성사적 사실이 왜 10년이 넘어 주목받게 됐을까. 그건 정형화된 베버 해석 때문이다. 베버 하면, 으레 리케르트의 신칸트학파를 연상하는 게 공식이 됐다. 더구나 최고의 베버연구가인 슐룩터는 베버를 칸트에까지 소급시킨다. 이런 지적 풍토에서 한계효용학파의 영향은 그저 공허한 외침으로만 여겨졌다.


그러다가 베버가 학생들에게 나눠준 강의원고나 편지 등 다양한 자료가 편집되면서 베버의 지적 성숙과정의 또 다른 면모가 드러나게 된 것이다. 특히 몸젠의 섬세한 역사학적 분석은 한계효용학파와 베버의 관계가 단순히 이론적 차원에서나 논의할 문제가 아니라 엄연한 역사적 사실임을 명백히 보여준다. 참고로 슐룩터도 최근의 연구에서 이전보다 강하게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베버는 당시의 수많은 지적 조류를 검토, 비판, 수용하면서 자신의 독특한 문화과학 연구 프로그램을 구축했다. 이제 오랜 동안 간과되어온 한계효용학파의 이론경제학과 베버의 연구프로그램 사이의 관계가 새로운 연구테제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이는 과연 ‘제3 역사적-이론적 요소’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선 향후 수많은 책과 논문이 나와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 수많은 반론과 비판이 제기돼야 할 것이다.

김덕영 / 독일 카셀대·사회학


©2006 Kyosu.net
Updated: 2006-07-18 0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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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시를 향한 가없는 애정

최근에 문학평론가 김수이 교수의 세번째 평론집이 출간됐다. 두께에 비해 비싼 책이어서 서점에서 들었다가 놓은 적이 있는데(구입은 좀더 짬을 봐야겠다), 중앙일보의 '손민호 기자의 문학터치'란에서 다루고 있기에 겸사겸사 옮겨온다. 김교수는 시 전문 비평가로서 가장 부지런하다는 평을 듣고 있고, 지난 계절부터는 <문예중앙>의 편집위원으로 가세했다(중앙일보에서 거들 만하군). 아무튼 같은 세대 비평가가 활발한 활동으로 주목받는다는 게 기분이 나쁘진 않다. 같이 늙어갈 터이지만 대가급 비평가들이 되어주길 기대한다.

중앙일보(06. 07. 15) 시를 향한 가없는 애정

-글을 보면 사람을 알 수 있다. 글을 읽으면 글쓴이의 면모가 보인다. 가령 누구를 좋아하고 누구하곤 사이가 안 좋고, 무엇을 지향하고 무엇에 대해선 경기를 일으키는 것쯤 이내 알아챌 수 있다. 비평가일수록 더 하다. 비평이란 게 참견하고 가타부타 따지는 일이라서 그렇다. 가치가 배제된 비평은 세상에 없다. 해설에도 가치는 개입한다.

 

 

 



-그러나 꼭 그런 건 아닌가 보다. 예외가 있다. 비평가 김수이(37)다. 말하자면 그는, 좀체 정체를 파악할 수 없는 평론가다. 최근 출간된 세 번째 비평집 <서정은 진화한다>(창비)를 보자. 젊은 비평가이니만큼 김근.황병승.김언 등 젊은 시인에 대한 관심은 쉬이 짐작했던 터다. 한데 정현종.최하림.정호승 등 시단의 중진을 정성껏 호명하고선 김혜순.김언희.김선우 등 여성시 계보를 죽 훑는다. 그러더니 불쑥 '지게꾼 시인' 김신용을 칭찬한다. 그렇다고 민중시 계열을 옹호하는 것도 아니다. 과거 민중시 계열이 대거 몰린 요즘의 생태시를 그는 혹독하게 비판한다.

-그를 좀더 알아보기로 했다. 석사논문 주제가 김수영과 김춘수였다. 흥미로운 조합이다. 시대와 문학의 거리를 묻는 듯 보였다. 1997년 등단할 땐 기형도와 남진우를 파헤쳤다. 독한 죽음의 냄새가 풍기는 시인들이다. 80년대라는 시대적 고민도 읽혔다. 그러나 박사학위 주제는 서정주였다. 미당의 미학, 욕망의 변화 양상을 분석했다. '도대체 정체가 뭐냐'고 물을 만한 시적 편력이다(*머 그래봐야 다 시인들(!)이지만, 다방면으로 두루 훑었다는 얘기는 되겠다. 즉, 기본기가 튼튼하다는 것).

-오히려 김수이의 정체는 바로 여기에 있다. 한국 현대시를 다 끌어안으려는 것이다. 그래서 계파와 경향, 진영과 계보 따위는 상관없는 것이다. 진실한 문학이라면, 온몸으로 앓은 시라면 모두 보듬으려는 것이다. 하여 사방에 대고 잔소리만 해댄다는 소리도 듣는 것이다. 만인의 편이라는 건, 만인이 적이라는 얘기도 된다.

-평론집 제목에서 '진화'는 두 가지 의미다. 진화(進化)와 진화(鎭火)를 동시에 뜻한다. 내일의 서정으로 나아가고 어제의 서정은 꺼트려야 진정한 서정이란 의미다. 부단히 움직이라는 다그침으로도 읽힌다. 그러나 이 단호한 몸가짐에서 시를 향한 가없는 애정을 읽는다.



-김수이에 따르면, 시인들은 '그리고'나 '그러므로'가 아닌, '그러나'와 '그럼에도'에서 시작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와 '그럼에도'에 존재해야 시다. 설명되거나 부연되어선 시가 아니다. 그래서 다시 김수이에 따르면, 시는 요약되지 않는다. 우리의 삶이 요약될 수 없는 것처럼. 아니 요약되어선 아니 되는 것처럼.

06. 07. 16.

P.S. 저자를 평론가로 '호명'해준 문학비평가 황종연 교수는 추천사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현재 평단에는 김수이만큼 부지런하게 시를 읽고 정확하게 시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는 평론가도 드물다. 그에게는 국내의 어떤 유수한 시인의 언어도 낯설지 않으며 어떤 새로운 유행도 당혹스럽지 않은 듯하다. 김수이의 평론을 읽어보면 작품의 유형이 아무리 달라도 비슷한 높이에서 검토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한 대상 작품이나 시인에게 잠복된 의식의 행로가 정연하게 검출되는 한편, 동시대 시의 역동적인 구도 속에 수려하게 배치되는 광경을 접하게 된다." 하니, 동시대 시의 지리부도 같은 걸 그에게서 기대할 수 있을 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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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라주미힌 > 미국에서 사회주의는 왜 실패했나

 

미국에서 사회주의는 왜 실패했나
[서평]미국 예외주의: 미국에는 왜 사회주의 정당이 없는가

미국 정치, 미국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꼭 참조해야 할 책이 번역, 출간되었다. S. M. 립셋이 쓴 <미국 예외주의: 미국에는 왜 사회주의 정당이 없는가> (문지영외 옮김, 후마니타스, 2006)가 그것이다.

대학에서 사회과학을 전공했거나 아니면 정치학 개론이라도 수강했던 사람에게 립셋은 매우 익숙한 이름이다. 20대에 <농업사회주의>와 <유니언사회주의>라는 책으로 주목받은 그는 30대에 쓴 <정치적 인간>이란 책을 통해 세계 정치학계의 대표적인 인물이 되고 정치학 교과서에 등장하는 이론가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1960년대 말 슈타인 로칸과 함께 쓴 논문은 정당과 사회갈등 분야의 한 패러다임을 개척한 것이기도 했다.

민주주의란 무엇이고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다뤘던 2004년의 책 <민주주의의 세기>의 완성을 못보고 쓰러질 때까지(이 책은 그의 마지막 제자 래킨에 의해 완성되었다), 그가 쓰거나 편집한 100권 가까운 책 대부분은 학자로서의 그의 역량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것들이었다.

미국의 정치학회와 사회학회 회장을 모두 역임한 유일한 사람일 정도로 그는 미국 사회과학의 역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 꼽힐 수 있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 학자로서의 그의 업적 때문이었다.

   
 
립셋의 평생 연구는 크게 두 주제 분야를 갖는다. 하나는 민주주의의 사회경제적 조건을 탐색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마르크스의 논거를 적절히 활용한 1959년의 논문(“민주주의를 위한 몇 가지 사회적 조건”)이 대표적으로, 이 논문을 통해 그는 이른바 ‘근대화론’을 대표하는 정치학자가 되었다. 이 분야의 연구는 주로 제3세계 후발국가들을 대상으로 했다.

또 다른 연구 분야는 선진 민주주의 국가들을 대상으로 했는데, 그 핵심은 민주주의가 왜 여러 다른 유형과 경로로 발전하게 되는가를 분석하는 것이다. 미국의 민주주의는 왜 다르고 유럽의 민주주의는 또 왜 다르며 일본과 캐나다의 민주주의는 왜 다른가를 묻는 것이다. 이 주제를 집약하는 주제가 바로 ‘미국 예외주의’이다.

사회주의 없는 민주주의의 모델, 미국

미국 민주주의의 예외성은 여러 내용을 갖지만, 그 중에서도 핵심은 왜 미국만이 사회주의 없는 모델을 갖게 되었나 하는 데 있다. 따라서 미국 예외주의라고 하면 대체로 사회주의 없는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문제로 이해되곤 했다. 하지만 이 책에서 립셋은 미국 예외주의를 훨씬 넓게 다루고 있다.

사회당, 노동당, 사회민주당, 공산당 등 명칭은 다르더라도 진보적 이념이나 노동운동에 기반을 둔 정당이 해당 국가들의 정치, 경제, 사회체제를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 중심적인 역할을 해왔던 선진 민주주의 국가들 가운데 유독 미국만이 매우 다른 정치체제를 발전시켜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선진 민주주의 국가 중에서 시장의 절대적 역할을 숭배하고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국가의 적극적 역할에 부정적이며 개인의 거의 무제한적 권리에 기반을 둔 물신화된 법치주의가 지배하는 정도에 있어서도 미국은 독보적인 나라이다.

저자인 립셋도 예를 들고 있듯이, 유럽의 기준에서 보면 지극히 기초적인 수준에 불과한 클린턴의 복지정책조차 결국 좌절될 수밖에 없는 나라이다. 대체 왜 미국은 다른 것인가? 어떻게 이런 체제가 만들어질 수 있었고 존립할 수 있었을까?

마르크스와 엥겔스 시대부터 사회주의자들은 유럽의 다른 나라들보다 더 강한 노동운동을 가진 미국이 사회주의로의 이행에서 맨 선두에 설 것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메이데이’가 1886년 5월 1일 미국 노동자들의 투쟁에서 비롯되었듯이 19세기 후반까지 미국의 노동운동은 매우 강력했다. 당시 내로라하는 사회주의자들에게서 미국의 사회주의로의 발전 경로에 대한 확신에 찬 언급을 찾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 메이데이의 기원이 된 헤이마켓 시위를 묘사한 당시 그림
 
마르크스는 미국에서 계급의식의 징후들을 지속적으로 탐색하였으며, 엥겔스는 생애의 마지막 10년을 이 문제에 답하고자 했다. 베른슈타인은 “우리는 곧 미국에서 사회주의가 시작되어 뿌리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 했고, 카우츠키 역시 “미국은 우리의 미래”라고 말했으며, 영국의 마르크스주의자 힌드만은 “미국은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독일 사회민주주의 지도자 베벨 역시 “미국은 사회주의 공화국을 선도하는 첫 번째 국가가 될 것”이라고 단언했고, 마르크스의 사위이자 프랑스 대표적 사회주의자였던 라파르그 역시 “가장 선진적 산업발전 수준을 가진 미국이 역사발전의 사다리를 맨 먼저 오를 것”이라 말했다. 레닌과 트로츠키 역시 미국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적어도 미국에서 사회주의의 실패가 누구의 눈에도 명백하게 된 20세기 초까지 그랬다.

그러나 이러한 예상이 빗나가면서,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 깊은 회의가 뒤따르게 되었으며, 연구자들에게는 매우 도전적인 문제로 등장했다. 미국에서는 왜 사회주의가 실패했는가? 미국은 왜 예외적 경로를 발전시키게 되었나? 미국에는 왜 사회주의 정당이 없는가에 대해 알고 싶거나, 그 역사적 경험을 반추하면서 21세기 오늘 척박한 역사적·지적 풍토를 지닌 이 땅에서 새로운 진보정치와 진보정당 실현의 꿈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 책을 통해 깊고 넓은 사색을 위한 좋은 소재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사회주의는 왜 실패했나, 립셋의 설명

사회주의 없는 미국의 발전경로에는 과연 어떤 힘들이 작동하고 있었을까? 1851년 엥겔스가 강조하고 그 이후 40년간 반복적으로 지적된 조건, 즉 노동운동의 등장을 방해하는 미국의 특수한 조건은, “부르주아적 조건을 마치 자신의 멋진 이상인 양 생각하게 만드는, 이 나라의 필연적으로 급속한 그리고 빠르게 증가하게 있는 번영”(106쪽)이며, “미국적 신조로서의 (개인적) 성취와 기회 균등 및 능력주의에 대한 강조”(109-110쪽) 등이 그 배경에 작동해 왔다는 것이다. 즉 상대적 풍요로움의 효과가 부르주아 계급의 자산 증대를 넘어 노동자들에게까지 미쳤다는 것이다.

립셋은 미국에서 사회주의 정당의 실패에 대한 기존 설명들을 차례로 검토하면서, 이를 상호배제적이지 않은 두 범주, 즉 사회적인 변수와 관련된 것과 정치체계의 내재적인 변수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그가 지적하는 사회적 요인은 다음 여덟 가지이다:

① 새로운 사회로서의 미국, 즉 계급 구분에 따라 정치를 구조화하는 봉건적 전통의 계급 관계 부재(‘봉건주의 없이는 사회주의도 없다’ /No feudalism, no socialism ), ② 사회주의의 대용물로서 미국주의 그리고/또는 지배적인 공공철학으로서의 자유주의 전통, ③ 미국 프로테스탄트의 종파주의적 과거와 혁명적 가치로부터 파생된 개인주의와 반국가주의 가치에 대한 강조 ④ 생활수준, 특히 노동자 계층이 영위하는 생활수준의 꾸준한 향상이 미친 영향―좀바르트의 표현에 따르면 “모든 사회주의적인 유토피아는 구운 쇠고기와 애플파이 앞에서 수포로 돌아갔다”는 것 ⑤ 주변화된 집단의 정치적 고립화와 낮은 투표율, ⑥ 생산성이 증가하고 교육기회가 확대됨에 따라 계층 상승의 기회가 증대, ⑦ 계급의식 형성의 방해 요인으로서 지리적 이동 성향과 안정된 공동체적 기반의 결여, ⑧ 다민족·다인종·다문화적 이주민 사회 형성에 따른 결과 등이다.

이에 덧붙여 정치적 요인으로 다음 네 가지를 지적한다: ① 거저 얻은 선물로서의 투표권―이와 관련해 레닌은 “사회주의는 선거 민주주의를 향한 투쟁을 통해 성장한다”고 언급한다 ② 행정권력이 대통령 1인에게만 부여되고 그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가 연합적인 양당 구도로 전개되도록 만든 헌정 및 선거체계, ③ 대체로 대중운동 그리고/또는 제3의 정당 형태로 명백하게 표출되는 만연된 불만을 흡수하거나 그에 대응할 수 있는 연합적인 야당체계의 유연성, ④ 급진적 운동에 대한 정치적 탄압 등이다.

미국 예외주의의 실체는 무엇인가

19세기 말 이래로 사회주의자들을 괴롭혔던 이 수수께끼,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회의와 곤혹스러움은 ‘미국의 특이성’과 그 차이의 속성이라는 문제영역으로 자연스럽게 우리를 인도한다. 이 영역은 미국이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으로 자리 잡을 수 있게 한 이른바 ‘예외주의 미국’의 실체와 관련된 것이다.

‘미국 예외주의’는 그동안 두 가지 코드로 읽혀왔다. 앞서 본 사회주의 운동의 부재와 관련된 것이 그 하나라면, 다른 하나는 미국이 그 독특한 기원과 국가적 신조, 역사 발전과정, 정치 및 종교 제도로 인해 다른 서구 선진국들과 질적으로 다르다는 관념으로서의 미국 예외주의이다.

립셋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부분도 이 후자의 영역이며, 그것은 바로 사회주의 운동의 부재를 설명하는 배경이 되기도 한다.

립셋은 미국 예외주의를 정치, 경제, 사회, 종교 등 다양한 측면을 통해 소개한다. 그에 따르면 미국의 거의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보다 훨씬 덜 복지 지향적이고, 덜 국가주의적이며, 더 방임주의적이고, 더 권리지향적이고 더 애국적이며, 더 도덕주의적이고 종교적이라는 점에서 ‘예외적’이다. 그는 이러한 특성이 ‘미국적 신조’라고 불리는 미국인의 가치체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본다.

그가 말하는 미국적 신조란 자유, 평등주의, 개인주의, 포퓰리즘, 자유방임주의 등 다섯 개념으로 압축되며, 이러한 미국인의 가치체계는 미국의 독특한 기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즉 미국은 무엇보다 “혁명적 사건으로 출발한, 그리하여 독립에 성공한 최초의 식민지, 최초의 신생국가”라는 점에서 ‘예외적’인 나라이며, 결국 미국 예외주의는 새로운 사회로서 미국이 봉건적 구조, 군주제 및 귀족주의 문화, 사회적 위계를 유산으로 물려받지 않았다는 사실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 미국 예외주의와 관련해 흥미로운 사실 하나는, 미국적 가치는 매우 복합적이라는 진단과 함께 립셋이 그것을 ‘양날의 칼’과 같다고 거듭 강조한다는 것이다. 미국이 ‘예외적’이라고 할 때, 그것은 미국이 다른 나라보다 낫다거나 우월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며, 단지 다른 나라들과 질적으로 ‘다르게’ 발전해왔음을 의미할 뿐이라는 것이다(4부 8장 결론).

그에 따르면 미국 예외주의는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을 동전의 양면처럼 모두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어떤 특성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미국은 최선이 되기도 하고 최악이 되기도 한다.

미국 사회에서 나타나는 바로 이 다양한 가치관들, 최선과 최악의 공존과 갈등을 통해 오늘의 미국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립셋은 미국적 가치의 다양하고 이중적인 측면을 부정하고 오히려 국민적 ․ 국가적 합의를 강조하는 것은 갈등을 강조하는 것에 대한 대안이 되지 못한다고 말한다.

가령 소득불평등, 높은 범죄율, 낮은 수준의 선거참여, 모든 것을 도덕적인 관점에서 보려는 강력한 경향들, 그리하여 때로 정치적 · 윤리적 소수자들에게 거의 관용적이지 않은 태도를 보이는 경향과 같이 오늘날 미국사회를 특징짓는 부정적인 요소들이 개방적인 민주사회의 규범 및 행태와 내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7쪽)이며,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정치적 분위기와 자유로운 시장질서에 기반한 경제적 풍요는 미국적 신조를 기반으로 성취된 미국적 예외주의의 가장 밝은 면모라는 것이다.

아울러 미국 예외주의는 높은 수준의 개인적 책임감, 독립적인 진취성, 자원봉사 문화를 함양하는 반면에, 이기적인 행동과 원자론적 분열, 공동선에 대한 경시와 전통적인 형식의 공동체적 도덕에 대한 위협 역시 조장한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립셋의 신보수주의

미국 예외주의에 대한 그의 이러한 이중적 접근은 그것이, “미국인의 강한 자민족 중심주의의 표현이자 미국이 다른 나라보다도 우월하다는 노골적인 정치선전에 다름 아니”라는 비판을 다분히 의식한 결과이다.

미국 예외주의에 대한 강조가 미국 엘리트들뿐만 아니라 보통의 미국인들 사이에서도 미국 우월주의로 나타나 미국 패권주의와 긴밀히 연결되곤 했기 때문이다. 즉 세계 최초의 순수한 민주주의 혁명을 거쳐 탄생한 국가이자 자유세계의 수호자로서 미국은 ‘민주주의의 전파’라는 세계적 사명을 갖고 있다는 우월적 의식 등을 가진 존재로 나타났던 것이다.

   
 ▲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
 
이와 관련해 이 책에서 눈길을 끄는 대목은, 1980년대 초 레이건 행정부 이래 미국 공화당의 대내외 정책 기조로 알려진 신보수주의에 대한 그의 진단이다. 저자는 신보수주의가 신자유주의와는 다른 실체라는 것을 특히 강조한다.

립셋은 이른바 미국 ‘네오콘’(신보수주의)의 제1세대 지식인으로 알려져 있다. 신보수주의 지식인으로서 립셋은 급진적인 트로츠키주의자에서 반공적 자유주의자로 전향한 이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 책에는 이러한 그의 지적 편력이 잘 반영되어 있다. (네오콘의 사상적 대부라고 불리는 어빙 크리스톨도 한때는 극좌파 지식인이었다가 1960년대 베트남전 반대운동의 과정에서 공개적으로 전향한다. 네오콘의 1세대라고할 수 있는 네이던 글래이저, 다니엘 벨 등도 모두 트로츠키주의에서 우파로 전향한 인물들이다.)

“야만인들로부터 민주주의를 지키는 것은 자연의 권리이자 책임”이라고 주장한 미국의 정치철학자 스트라우스를 사상의 기원으로 삼는 신보수주의라는 용어는, 흔히 “국내 쟁점에서는 고전 자유주의적 반국가주의를, 외교정책에서는 강경노선을 견지하는 미국 내외의 광범위한 범위의 전통적 보수주의”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립셋은 이러한 용어 사용이 오류라고 말한다. 즉 “하이에크, 프리드만, 레이건, 대처는 고전적 자유주의자, 자유지상주의자들이지 신보수주의자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프로테스탄트 종파주의에 기반을 둔 신보수주의의 기본 입장은, 정치적인 쟁점에서 개인주의와 능력주의의 가치를 우선시하고, 경제적으로는 사회보장 및 복지정책의 확대를 지지하며, 사회․문화 분야에서 전통과 권위를 존중하고, 미국식 민주주의의 보존과 전파를 위해 외교·군사적으로는 개입주의를 지향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프리드만적인 자유시장경제를 계속 거부하는 것이며(297쪽), 공화당 내 전통적 보수주의자들과 구별된다는 것이 립셋의 설명이다.

신보수주의에 대한 립셋의 이러한 설명은 그 타당성 여부에 대해 따지는 것을 잠시 멈춘다면, 광적인 냉전반공주의와 개발독재의 향수에 깊게 물든 사이비 보수만 판을 칠 뿐 진정한 보수주의가 실종된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민주주의의 민주화’를 추진하는 것이 시대적 과제인 상황에서, 보수의 실체가 여전히 모호한 것이 걸림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뉴라이트 역시도 예외일 수는 없다.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신보수주의의 출현 배경과 의미, 그 갈등과 타협의 궤적을 미국의 역사적 맥락에서 추적하는 립셋의 시도는 우리 사회에서 보수주의의 제자리 찾기가 어떻게 진행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고 할 것이다.

미국 중심적 사고의 문제

한편 립셋의 글 내용 가운데는 헌팅턴과 같이 노골적으로 미국을 편드는 식의 오만함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헌팅턴에 따르면 1970년대와 80년대 미국은 민주화의 중요한 촉진자였는데, 민주화에 대한 미국의 기여는 미국의 힘과 영향력의 의식적이고 직접적인 행사 이상의 것을 포함하고 있다고 한다.

즉 “전세계 민주주의 운동들은 미국이라는 사례에서 영감을 받았고 이를 모범으로 삼았다”는 것이며, 미국이 앞으로도 이러한 역할을 계속 수행할 지 여부는 미국의 의지와 능력, 그리고 다른 나라들에 대한 모델로서 매력을 미국이 가지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Samuel P. Huntington의 The Third Wave: Democratization in The Late Twentieth Century, Norman and London: University of Oklahoma Press. 1991).

   
 ▲ <자유의 여신상> 너머로 보이는 화염에 휩싸인 세계무역센터 빌딩
 
그러나 헌팅턴의 생각과는 달리, “미국의 민주주의를 칭송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19세기 혹은 20세기 초반까지의 미국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또끄빌(Tocqueville)이 보았던 미국, ‘제국’으로 등장하기 이전의 미국이다. 그런데 오늘 미국 내의 양심세력과 유럽과 미국 외의 대다수의 지식인들이 보는 미국은 그런 미국이 아니다”(김동춘 <미국의 엔진, 전쟁과 시장> 2004). 이런 점에서 헌팅턴이 보여주는 것은 세계적 명망성과 학자로서의 양심이 비례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 지적 진지함 등에 비춰볼 때, 립셋은 헌팅턴류의 사람들과는 달라 보인다. 그럼에도 ‘미국식 도덕주의’와 ‘교리적 열정’에 근거한 미국적 신조, 이른바 “평등과 자유의 이상에 뿌리박고 있는 미국 사회의 강력한 도덕체계”를 미국 예외주의의 뿌리로 인정하며 미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을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립셋 역시도 미국적 신보수주의로 철저히 무장한 지식인의 면모를 보이는 것 또한 사실이다.

미국식 가치와 질서를 기준으로 ‘악의 축’을 설정하고, 이라크 침공을 하느님과 악마 간의 싸움으로 평가하면서 일종의 ‘성전’으로 정당화하는 미국 행정부의 일방적 태도가 섬뜩한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상황에서 립셋의 결론은 많은 것들을 생각게 한다.

보편성에 대한 성찰이 없는 상태에서 여타 나라들에 미국식 도덕주의의 잣대를 강압적으로 들이밀며 미국의 ‘신성한’ 임무의 범위를 확장할 때, 미국 예외주의는 일방적인 미국 우월주의이자 제국주의적 발상으로 억압적 기능을 행사하는 것은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계속되는 그의 언명에도 불구하고 미국 예외주의에 대한 경계심과 경각심을 늦출 수 없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뭔지 모를 아쉬움이 남는다. 그것은 립셋의 이 책이 비교정치학적 연구를 통해 미국 예외주의를 미국의 특성으로 분석하고 입증할 뿐, 그에 대한 진지한 반성적 성찰은 없다는 데 있다. 미국의 예외적 특성이 갖는 억압성과 배타성, 그로 인한 고통과 피해에 대한 고민이 함께 진행되었더라면 립셋의 노작은 그 의미를 더 할 수 있지 않았을까.

또한 이 책은 미국의 신경제가 그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던 1990년대 중반에 저술되었다는 점에서 미국적 모델을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문제점을 갖고 있기도 하다. 소득양극화, 빈부격차의 확대, 사회적 이동성의 하락 등은 신경제 10년 이후 미국사회의 초라한 목록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세계체제의 정점에 위치하여 ‘게임의 규칙’마저 변경할 수 있는 ‘패권’국가이자, ‘제국’으로서의 미국이 갖고 있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배타적인 특권적 지위와 그로부터 비롯된 ‘오만과 편견’을 분석하지 않음으로써, 미국 예외주의가 작동할 수 있었던 국제정치경제적 이면의 동학을 간과하고 있기도 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미국과 미국인들을 이해하기 위한 출발점이자 훌륭한 참고서인 이 책의 가치와 함의를 떨어뜨리지는 못할 것이다.

이 책을 넘는 문제들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야만의 물결이 미국 주도로 이루어지고 있는 오늘의 시점에서, 한미 FTA의 국가적 추진 등을 통해 미국 사회를 따라가기 위해 질주하는 한편에서 그것을 둘러싼 갈등이 첨예화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미명 아래 미국의 일방적인 패권적 군사주의가 세계를 반(反)평화 분위기로 몰아가고 있는 이 시점에서, 미국이 여전히 한반도 위기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실체라는 점에서 ‘미국 바로 보기’는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과거 로마제국보다도 더 막강한 제국으로 떠오른 미국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어쩌면 미국보다 더 심한 미국병에 걸려 있는지도 모르는 한국사회를 되돌아보고, 전 세계에 확산되는 미국식 자본주의의 위기와 그 대안을 함께 고민하자”는 김동춘 교수의 지적(2004)에 대해 립셋의 이 책은 일정하게 응답하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여전히 이 책의 독해에는 “불완전한 사회가 주도하는 불안정한 세계 속에서 민족과 인류의 미래상을 설계하고 전망하기 위해서는 자기도취된 현실주도세력의 세계인식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그것과 언제나 지적 긴장의 관계를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이삼성 교수의 지적에 귀 기울이는 것이 함께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삼성, <미래의 역사에서 미국은 희망인가> 1995)

2006년 07월 13일 (목) 09:04:34 조현연 / 성공회대 민주주의와 사회운동연구소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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