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릴케 현상 > [퍼온글] 한국시, 문사마의 시대

 

 

 

 

요즘 시단의 화제는 단연 문태준 시인이다. 최근에 소월시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기 때문인데(수상작은 '그맘때에는'), 이런 수상이 처음이 아니다. 이전에 2000년대 한국시단이 '문태준과 아이들', 혹은 '문태준과 바퀴벌레들'로 요약될 수 있다고 적은 바 있는데, '바퀴벌레 시인들'의 근황도 계속 소개한 김에 문시인, 혹은 문사마의 족적도 확인해두도록 한다. 아래는 시 '그맘때에는'과 문화일보(06. 04. 13)의 기사이다. "문태준 시인, 서른여섯살의 ‘詩壇 돌풍’"이란 타이틀이고 작성자는 장재선 기자이다(*신작 시집 <가재미> 등의 이미지를 추가한다). 

그맘때에는

하늘에 잠자리가 사라졌다

빈손이다

하루를 만지작만지작 하였다

두 눈을 살며시 또 떠보았다

빈손이로다

완고한 비석 옆을 지나가보았다

무른 나는 金剛이라는 말을 모른다

그맘때가 올 것이다, 잠자리가 하늘에서 사라지듯

그맘때에는 나도 이곳서 사르르 풀려날 것이니

어디로 갔을까

여름 우레를 따라갔을까

여름 우레를 따라갔을까

후두둑 후두둑 풀잎에 내려앉던 그들은  

 

 

-70년 개띠, 만 서른여섯살의 문태준 시인이 권위있는 각종 시문학상을 휩쓸고 있다(*동갑네기 소설가 김연수가 경북 김천 출신이 그의 동향 친구라고). 2004년 말 동서문학상을 시작으로 노작, 유심, 미당문학상을 거머쥔 데 이어 지난 10일엔 소월시문학상 대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이제 겨우 두권의 시집을 펴낸 그가 시단의 중진, 원로들의 전폭적 지지를 받으며 스타 시인으로 급부상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문단 일각에서 제기하는 ‘문태준 안티론’의 정체는 또 무엇이며 문 시인 자신은 이에 대해 어떻게 대응해나갈 것인가.

“대표주자가 될 만하다”=소월시문학상 심사위원인 문학사상사가 주관하는 소월시문학상 심사위원회(오세영, 김명인, 최동호, 권영민, 문정희)는 문 시인의 시 작품 ‘그맘때에는’ 외 15편을 대상작으로 발표하며 “삶에 대한 깊이있는 천착에서 우러나오는 빼어난 시적 언어를 건져올렸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오세영 시인은 “생에 대한 철학적 깨달음을 미학적 형상성과 잘 결합시킬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문태준 시인의 탁월한 시적 재능”이라고 말했고, 최동호 시인은 “새로운 시대의 서정시의 한 방향성을 제시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로써 보면, 문 시인이 문학상을 많이 받게 된 이유는 진지한 철학적 사유와 언어미학을 건축하는 특별한 재능에 있다. 무엇보다 울림이 깊은 서정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것이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것.


-곽효환(대산문화재단 사무국장) 시인은 “찰나의 깨달음을 표현해내는 선적(禪的) 직관이 전문 독자, 즉 선배 시인들에게 좋은 느낌을 줬을 것”이라고 말했다. 시의 실험, 해체를 통한 난해시 경향을 우려해온 중진, 원로들이 문 시인을 통해 한국 현대시에서 서정성 회복의 가능성을 본다는 것이다(*쉽게 말하면, 문시인은 '어르신'들이 딱 좋아할 만한 시들을 쓴다). 문 시인 자신도 “시가 독자로부터 멀어진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선 서정성의 부활이 필요한 시점”이라며 “좋은 서정시는 독자들이 이해하기 쉬운 메시지를 갖고도 쓸쓸하고 아름다운 느낌을 주는 것”이라는 의견을 밝혔다.


◈“과도한 스타 만들기”↔“시로 말하겠다”=문 시인이 아름다운 서정시를 쓰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렇게 상을 몰아주는 것은 지나친 스타 만들기라는 지적이 있다. 지난해 말 존재의 소통 문제를 주로 다룬 첫 시집을 펴낸 한 젊은 시인(32)은 “문 시인이 상을 휩쓰는 것은 시단의 주류인 심사위원들의 연령, 성향이 큰 영향을 미친 듯하다”며 “우리 시의 미래를 위해선 서정시뿐만 아니라 다양하고 개성적인 실험도 소중히 여겼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피력했다(*바퀴벌레 시인들에게도 주목을!).

 

-문학평론가인 김수이 경희대 교수는 문태준 시의 일정한 성과를 인정하면서도 “그의 작품이 현실에 눈감은 ‘자연의 매트릭스(가상공간)’에 의지하고 있다”며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타나는 인간을 포함한 자연물들의 갈등과 악전고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그런데, 그게 한국시의 주류 아니었나?) 


-문 시인은 이에 대해 “당대의 현실을 시 작품에 드러내는 것은 다른 시인들이 더 잘 할 수 있을 것”이라며 “내 존재의 성찰에 당분간 몰두해 내 안의 갈등, 욕망, 비겁함, 추레함을 표현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어렸을 때 어머니를 따라 사찰에 다녔다든지, 중학교 때 크게 아팠다든지 하는 경험이 자신의 시적 성향에 큰 영향을 미치는 듯싶다고 말했다.


-어렸을 때부터 불교의 세계에 천착해온 그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부분이 존재의 고민이라는 것(*그는 불교방송의 PD로 일하고 있다). 그는 앞으로의 시세계에 대해 “사람 마음이 계속 바뀌며 자아가 분열하는 모습을 악동(惡童)의 마음으로 그려내고 싶다”고 털어놓은 뒤 곧 “시인이 자신의 시쓰기 전략을 직접 말로 하면 안되는데…”라고 중얼거렸다.(*해탈의 경지를 보여주기에는 그는 아직 젊은 시인이다. '악동의 마음'에 더 많은 기대를 걸어보기로 한다.) 

 

06. 04. 14./ 06. 07.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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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딸기 > 불쌍한 레바논

이스라엘의 레바논 공격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고질적으로 반복됐던 갈등에서 촉발됐지만 미국의 이라크 침공 이후 격변을 맞고 있는 중동 전체의 세력구도와 연관돼 있다.

이라크 사담 후세인 정권의 몰락 뒤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집트를 중심으로 한 기존 `친미 연대' 대신 중동에 이란을 중심으로 한 반미 `시아 벨트'라 형성되면서 일어난 분쟁이라는 것이다. 이스라엘과 레바논을 대리로 내세워 미국과 이란이 힘겨루기를 벌이고 있는 가운데, 이번 사건이 중동의 질서재편 계기로 작용할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미국과 이란의 `대리전'


분쟁의 시작은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습이었다. 팔레스타인 하마스 정권을 치기 위한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습은 하마스가 아닌 레바논 헤즈볼라의 반격을 샀다. 이스라엘은 1980년대 말부터 레바논 남부에서 반이스라엘 투쟁을 벌인 헤즈볼라를 매년 정기적으로 공습, 무력화하는 작전을 벌여왔다. 명분은 헤즈볼라가 이-팔 분쟁에 개입하고 있다는 것. 이번에는 명분이 조금 달라졌다. 이스라엘은 미국에 `악의 축'으로 찍힌 이란과 시리아를 거론하며 헤즈볼라가 그들과 연계돼 있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이런 주장이 처음 제기된 것은 아니지만, 미국이 이라크전 뒤 이란과 시리아를 강도 높게 압박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스라엘이 `테러 연계'를 들고 나온 것은 눈에 띄는 대목이다. 레바논 전 총리 암살사건에 개입한 것으로 조사되면서 국제사회에서 따돌림 받고 있는 시리아는 "이란이 국경을 넘어서면 분쟁에 뛰어들 수밖에 없다"고 항전을 선언했다.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 집권 이래 번번이 미국과 맞대결하고 있는 이란은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공격할 경우 보복하겠다고 미리부터 경고했었다. 이란이 이스라엘을 공습할 가능성은 높지 않지만 이번 분쟁이 이스라엘과 헤즈볼라를 내세운 미국과 이란의 대리전임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후세인 대신 이란'?


2003년 이라크의 후세인 정권이 무너진 뒤 중동 정치분석가들은 `이란의 시대'가 올 것임을 예고하며 미국의 지나치게 대담한 행보에 우려 섞인 시선들을 보냈다. 걸프전 이전까지 중동에서 미국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며 이란 시아파 근본주의의 중동지역 확산을 막아주는 방패 노릇을 했던 후세인 정권이 무너지면서 이란이 오랜 침묵을 깨고 일어날 계기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라크에는 `민주 선거'를 통해 친이란계 시아파 정권이 들어섰고, 이란의 영향력은 계속 확대되고 있다. 전세계 무슬림의 대다수는 수니파이지만 이란과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에서는 시아파가 우세하다. 미들이스트타임스 등 중동 언론들은 이란을 필두로 이라크-시리아-레바논을 잇는 시아파 벨트가 형성돼 아랍의 친미 왕국들과 전선을 그을 것으로 내다봤었다. 이는 곧 현실화됐다. 중동에서 반미국가들의 연대가 형성된 것은 역설적이지만 미국의 이라크 침공 등 강도 높은 중동 질서재편 전략 때문이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기존 `맹주'들의 약화


또 하나의 역설은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이른바 `중동민주화 구상'에서 생겨났다. 미국은 이라크 후세인 정권 뿐 아니라 중동의 `비민주적인 정권들'을 민주화시키고 시장경제를 도입하게끔 압력을 가해왔다. 민주선거의 결과는 미국 입장에서는 참담한 것이었다. 레바논에서는 백향목 혁명으로 시리아가 철군하는 효과를 거뒀으나 팔레스타인에서는 하마스가 집권했다. 이라크는 시아파 손에 떨어졌다. 가장 큰 후폭풍을 예고하는 것은 사우디와 이집트의 상황이다. 사우디의 압둘라 국왕과 이집트의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이 각각 정권의 생명을 연장시키려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중동 민주화'에 가장 역행한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반미·민주화 여론에 부딪친 두 나라의 정권은 미국의 민주화 압력과 국민 정서 사이에 샌드위치 신세가 됐다. 이란이 치고 올라오는 사이 역내 영향력도 떨어졌다. 전통적으로 `중동 분쟁 중재자' 역할을 자임했던 무바라크 대통령은 지난달 이돥팔 정상을 휴양지로 불러 회담을 열었으나 성과 없이 끝났다. 사우디는 이스라엘의 레바논 공습을 놓고 양비론을 내세우다가 23일 "휴전을 위해 미국이 나서라"고 떠넘겼다.


중동 질서 바뀌나

미국 뉴욕타임스는 레바논을 무대로 벌어지고 있는 이스라엘과 헤즈볼라의 무력충돌은 중동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세력 재편 과정을 보여주는 것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스라엘의 레바논 공습 이래 이란을 비롯한 이슬람권 곳곳에는 헤즈볼라 지도자 하산 나스랄라의 사진이 거리에 깔렸고, 반미·반이스라엘 파도가 다시 일고 있다. 이번 사건이 이란의 영향력 확대로 귀결될지, 미국의 의도대로 `헤즈볼라 붕괴-시리아 영향력 축소-이란의 고립'으로 이어질지는 알 수 없다.

미국은 직접대화를 피하면서 우선 시리아와 레바논을 분리해내는 데에 집중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이 노리는 것은 결국 이란이다. 뉴욕타임스는 "시리아를 이란으로부터 떼어놓는 것이 미국의 목표"라면서, 이를 위해 사우디와 이집트를 끌어들여 시리아를 설득하려 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미국의 의도가 관철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며, 오히려 사우디와 이집트의 독재정권에 `반 민주화' 면죄부만 주는 꼴이 될 수 있다고 신문은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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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죽은 지식인의 사회

한국일보의 '메아리'란에서 이준희 논설위원의 칼럼을 옮겨온다. 제목은 '지식인들에 대한 반감'인데, '지식인의 종언'론도 그 사실 유무와 무관하게 하나의 트렌드를 이룬 지 오래됐다. 때문에 새삼스러울 건 없지만, 한번 더 생각해볼 거리는 되겠다. 칼럼과 함께 두어 달쯤 전에 읽어본 소설가 김연수의 칼럼도 옮겨온다. '이 시대 최고의 지식인'이 그 제목인데 예상할 수 있는 바대로 반어적인 내용의 글이다.  

 

 

 

 

한국일보(06. 07. 22) 지식인들에 대한 반감

-5공 출범 전 전두환씨가 국보위원장으로 있던 때니까, 그가 12·12 군사쿠데타와 광주항쟁 무력진압 등을 거치면서 집권행보를 구체화해 가던 시절이다. 당시 신군부 인사들에게 숱한 학자, 교수들의 자천타천 인사청탁이 줄을 이었고, 심지어 주위의 눈을 피해 밤이면 연희동 전씨 집을 찾아드는 이들도 많았다.

 

 

 



-개중에는 뜻밖에 양심적 지식인으로 널리 알려진 이들도 적지 않았다. 이 일은 내심 '배운 사람'들에 대한 외경과 두려움을 갖고 있던 전씨 등 군 출신 인사들이 콤플렉스를 털어버리고 도리어 지식인집단을 우습게 여기는 계기가 됐다. 오래 전 5공 인사의 전언이어서 어느 정도 사실인지 확인할 도리는 없으나 이후 선거 때마다 줄 좀 대보겠다고 몰려 다니는 지식인들의 볼썽사나운 행태로 볼진대 크게 과장된 얘기는 아니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진부하고도 번번이 추상적 논의에 그칠 수밖에 없는 지식인론을 새삼 꺼내는 이유는 요즘 우리 사회 지식인들에 대한 비판적 문제 제기가 부쩍 잦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서울대 정운찬 전 총장은 퇴임사에서 우리 사회에서 더 이상 존경 받지 못하는 존재로 전락한 지식인들의 통렬한 자기성찰과 자각을 호소했다. 앞서 서울대 전상인 교수는 올해 초 펴낸 책 <우리 시대 지식인을 말한다>를 통해 한국을 아예 '죽은 지식인의 사회'로 단정지었다(*최근 출간된 <한국사회 권력이동>에도 한국 사회 지식권력의 이동에 관한 전상인 교수의 글이 실려 있다).


 

 

 

-지식인들에 대한 일반의 인식이 이처럼 크게 떨어지게 된 데는 여러 시대적 요인들이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대중교육의 확산과 정보의 무제한 유통으로 인해 대중이 특정집단의 독점적 지식을 인정하지 않게 된 탓이 크다(*이 문제는 김연수의 칼럼에서 다루어진다). 누구든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필요한 정보나 지식을 얻을 수 있으므로 굳이 지식인들의 판단과 견해에 의지할 필요가 적어진 것이다.

-철학적으로도 현대의 포스트모더니즘적 입장은 사회가치를 창출하고 방향을 제시하는 전통적 지식인의 역할을 인정하지 않는다. 헤겔, 마르크스 등이 만든 것과 같은 큰 틀의 담론이 도리어 다양한 소수견해의 억압기제로 받아들여지는 상황에서 지식인은 그저 대중을 좇거나 그 속의 무력한 일원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나아가 피터 드러커 같은 이는 지식의 정의 자체를 바꿔 버렸다. 지식이란 정보를 특정 업무에 응용하는 능력이므로 실용성을 지닌,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성과를 얻을 수 있는 수단으로서의 지식이 진짜 지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정 전 총장의 말처럼 우리 지식인들이 존중 받지 못하는 정도를 넘어 사회적 반감을 사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 데는 시대상황보다 지식인들 스스로의 문제가 더 크다.

-이 대목에서 정 전 총장이나 전상인 교수는 지식의 도구화와 상품화, 이념적 편향성과 지성의 결핍 등을 공통적 원인으로 지목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소위 지식인들이라는 사람들이 제대로 공부는 하지 않으면서 제 개인적인 이득을 노리고 여기저기 헛된 이름을 파는 데나 여념이 없다는 얘기다.

-그러고 보면 이 정권 들어 유난한 이념적 쏠림 현상도 어떻게든 시류를 타고 권력과 대중의 주목을 끌어 한 자리쯤 얻어 걸치려는 얄팍한 의도가 깔린 것으로 비친다. 지식인들의 말과 글에서 깊은 공부와 성찰이 깔린 아카데믹한 분위기가 점차 사라지는 대신, 경박하고 자극적인 표현과 선동적이고 천박한 공격성이 날로 두드러지는 것도 이런 저의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동전의 앞뒤 면만 바뀌었을 뿐 앞의 전두환씨 집 주변을 얼쩡거리던 지식인들의 처신과 본질적으로 다를 게 없는 행태다.

-아무리 시대가 변해 일반이 기대를 접는다 해도 지식인 스스로는 사회적 보편가치의 수호자로서, 또 올바른 방향 제시자로서의 책임의식과 자부심을 포기해서는 안될 일이다(*더불어 필요한 것은 '사라지는 매개자'로서의 각오이다. 자기 역할을 수행했다면 떡고물이나 기다릴 게 아니라 알아서들 사라져줘야 한다. 지식인의 역할을 필요로 하는 사회는 여전히 불행한 사회이다. 하지만 지식인들이 그러한 역할마저 떠안지 않는 사회는 불운한 사회이며 더없이 초라한 사회이다). 독립적 사고와 자유로운 정신의 회복으로 현재의 반감을 다시 관심과 애정으로 돌리는 것 또한 그들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지성인은 자신의 내부를 끊임없이 동요시키는 현세적 유혹과, 자신의 선언을 줄기차게 회의시키는 타인의 무관심과 싸워야 한다.…' 지식인 사회의 변화를 기대하면서 일찍이 30여년 전 회자됐던 김병익의 경구 '지성과 반지성'을 다시 읽어보길 권한다(*평론가 김병익은 '지성'과 '지식인됨'의 의미를 주요한 화두로 삼은 드문 경우이다. 관련서들의 이미지가 제공되지 않아 주로 그의 산문집들의 이미지를 띄워놓는다).

중앙일보(06. 05. 13) 이 시대 최고의 지식인

-대학에서 강의하는 사람 몇몇과 어울려 저녁을 먹었다. 그 자리에서 우리 시대 최고의 지식인은 모 포털사이트의 지식검색이라는 말이 나왔다. 요즘 대학생은 보고서의 자료 출처를 책 이름 대신에 사이트 주소를 적는다고 했다. 블로그 페이지까지 검색한 경우는 그나마 성의가 넘치는(?) 학생이라고. 궁금해서 나도 지식검색 사이트에 들어가 "인문학은 위기인가"라고 물어봤다. 물론 우리 시대 최고의 지식인은 인문학이 왜 위기인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극복할 수 있는지 다 알고 있었다. 다만 그걸 읽으려면 1200원을 내야만 했다.


 

 

 


-하지만 이 주제를 놓고 다운로드한 숫자를 보니 두 번에 불과했다. '인문학의 위기'라는 건 별로 경제성이 없기 때문에 조만간 우리 시대 최고의 지식인께서는 이에 대해 곧 입을 다물 것 같다. 대신에 그분은 이력서나 자기소개서 작성법에 관심이 많은 것 같았다. 이력서 쓰는 방법에 대해서는 210건이 넘는 답변이 있었고 대부분 100번 이상씩 팔려나갔다. 아연실색한 내게 우리 시대 최고의 지식인은 "문제는 경제인 거야, 이 멍청이야"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그런 점에서 우리 시대 최고의 지식인은 정직하다. 취업과 성장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면 지식 따위는 헛된 것에 불과하며 도태되는 게 옳다고 암시한다.

-물론 나는 멍청이가 아니므로 경제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안다. 쫄쫄 굶어죽는 한이 있어도 책을 끼고 살겠다는 각오 따위는 내게 없다. 나는 풍요롭게 살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풍요와 경제성장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해 우리 시대 최고 지식인은 "경제성장이 꼭 풍요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친절하기도 하여라. 그분의 말씀대로 풍요롭게 살고 싶다는 내 소망이 반드시 국가 경제를 발전시켜야만 이뤄질 수 있는 건 아니다.

 

 

 



-타이타닉 현실주의라는 말이 있다. C 더글러스 러미스가 <경제성장이 아니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라는 책에서 쓴 말이다. 풍요롭게 살기 위해서는 경제를 발전시켜야만 한다는 주장을 그는 빙산을 향해 돌진하는 타이타닉호에 비유한다. 타이타닉 현실주의에 따르면 곧 빙산에 부딪치므로 타이타닉호를 당장 멈춰야만 한다고 말하는 건 요리를 만드는 요리사나 엔진에 연료를 주입하는 선원에게는 비현실적이고 비상식적이다. 타이타닉호가 멈추게 되면 요리사나 선원은 더 이상 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도 중요한 건 경제가 아니라 당신의 삶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이런 딜레마에 대해 러미스는 삶에서 경제라는 요소를 조금씩 줄여나가자고 주장한다. 시장 바깥에서 즐거움을 찾자는 소리다. 그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문화적이고 정신적인 즐거움을 누리자고 주장한다. 아무도 다운로드하지 않을 이런 답변을 러미스가 서슴지 않는 까닭은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얼굴을 한 경제가 아니라면, 그게 우리의 중요한 문제가 될 수는 없는 법이다.

-기업의 돈을 빼돌린 사주가 구속되는 순간에도 사람들은 경제를 걱정한다. 인간이 마땅히 지켜야만 하는 규범이나 가치도 그 순간만은 우선순위에서 밀려난다. 그건 국가 경제와 삶의 풍요로움을 혼동하기 때문이다. 내게는 의문이 하나 있다. 이 몇 년 동안 우리 경제가 난파 지경에 이르렀다는 소리를 수없이 들었다. 하지만 외국에 나가면 몇 년 전에 비해 한국을 바라보는 시선이 많이 달라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인정한다. 이 모든 것이 밤낮없이 경제활동에 매달린 기업인 덕분이다. 그렇다면 난파된 것은 무엇일까? 그건 우리가 소망했던 풍요로운 삶이 아닐까? 이 물음에 대해 우리 시대 최고 지식인께서는 묵묵부답이다.

06. 07.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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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민주주의와 다수지배의 원리

미국의 정치학자 로버트 달의 두툼한 책(은 아니군!) <미국 헌법과 민주주의>(후마니타스, 2004)에 대한 서평을 옮겨온다. 필자는 박찬표 교수이며 타이틀은 '훼손되는 ‘다수지배의 원리’. '21세기, 고전 읽기'로 다루어져 비교적 자세하다(그러니 유익하다).  

 

경향신문(06. 07. 22) 우리에게 헌법은 무엇인가. 대선을 앞둔 정치권의 권력구조 개편논쟁이 한국 민주주의에서 헌법이 가지는 의미의 전부인가. 문제가 간단치 않음은 약간의 역사적 비교를 통해 확인된다.

 

미국 국회의사당에 걸려 있는 하워드 챈들러 크리스티의 1940년 작품 ‘미합중국 헌법에 서명하는 장면’

-군부세력이 헌정질서를 유린했던 시절에 헌법은 민주주의의 상징이었다. 입헌주의는 민주주의의 기초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와 헌법의 관계는 복잡하게 변하고 있다. 예컨대 보수세력은 민주적으로 구성된 정부나 입법부가 개혁입법을 통해 헌법의 근간을 흔든다고 비판하면서 헌법재판소를 통해 이를 저지하려 한다. 행정수도 이전 위헌결정은 그 단적인 예이다.

-개혁진영에서는 ‘1987년 헌법이 민주주의 발전을 가로막는다’는 인식 아래 개헌을 통한 민주화의 진전을 주장한다. 보수세력에 있어서는 민주주의가 헌법 질서를 위협한다면, 개혁세력에 있어서는 현행 헌법이 민주주의를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와 헌법을 둘러싼 이러한 상반된 인식은 장식물에 불과했던 헌법이 민주주의 작동의 실질적 변수로 등장했음을 의미하는 동시에, 헌법과 민주주의의 관계에 대한 보다 진지한 고민을 요구하고 있다.

 

 

 



-2001년 출간된 이 책은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는 우리 시대의 고전이라 할 수 있다. ‘미국 헌법은 얼마나 민주적인가?’라는 원제에서 알 수 있듯이, 민주주의 관점에서 미국 헌법에 대해, 그리고 헌법과 민주주의의 관계에 대해 뛰어난 통찰력을 제시해준다. 로버트 달에 의하면 민주주의란 자신이 복종해야 하는 법률을 작성하거나 자신을 통치할 대표를 선출하는 데 있어 시민 대중이 발언하는 체제이다. 이는 현실적으로 다수에 의한 통치를 의미한다.

-미국 헌법은 이 기준에서 볼 때 많은 비민주적 요소를 안고 출범했다. 나아가 달은, 헌법이 미국 민주주의의 기초를 닦았다는 통념과 달리, 헌법의 제약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민주공화국으로 발전한 것은 제헌 이후의 ‘민주혁명’을 통해 새로운 민주제도와 관행을 창출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하지만 미국의 헌정체제는 여전히 많은 결함을 안고 있다. 그 중에서 특히 강조되는 것은 상원 및 대통령선거에서 나타나는 대표성의 결함이다. 의회가 통과시킨 법률에 대해 9명의 판사들이 위헌 여부를 결정하는 사법부의 법률심사권 역시 심각한 대표의 문제를 야기한다. 이러한 미국 헌법의 결함은, 헌법제정자들이 가졌던 다수 지배에 대한 두려움에 기인하는 것으로서, 민주주의의 기초인 정치적 평등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비판된다.

-달이 제기하는 보다 중요한 문제의식은 헌법에 대한 사고방식을 바꾸자는 것이다. 헌법의 정당성은 ‘헌법이 민주정부의 수단으로 유용한가’라는 관점에서 평가되어야 하며 헌법이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단언한다. 갈등적 이해가 충돌하는 민주주의 정치과정을 초월하여 공동체의 이익을 표징하는 규범으로 헌법을 신성시하는, 헌법 신화에 대한 날카로운 공박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은 오늘의 한국 민주주의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가. 이 점에서 주목할 것이 최장집 교수의 한국어판 서문이다. 최교수는 달의 문제의식을 보다 확장시켜 헌정주의와 민주주의의 관계를 전면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그는 민주주의를 인민주권과 다수지배 및 평등한 정치참여의 원리에 기초하는 ‘민중적 민주주의’와 다수지배를 견제하려는 ‘메디슨적 민주주의’의 두 모델로 구분하고, 한국 헌법 역시 메디슨적 민주주의를 원리로 하는 것으로서,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가 본격화되면서 미국이 경험했던 모순에 직면하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분할정부로 인한 정치교착과 정부마비, 사법적 정책결정 및 사법적 입법기능을 수행하는 제왕적 헌법재판소의 등장이 그것이다. 최교수는 특히 후자를 후견주의적 발상에 기초한, 다수지배의 민주주의 원리에 대한 중대한 제약으로 간주한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최교수는 정치의 기능을 바로세우는 ‘민주화’의 경로와 헌법을 바로세우는 ‘헌법화’의 길 중 전자를 제시한다. 한국 민주주의의 한계를 헌법에 기대어 해결하려는 자세는 엘리트 역할의 강화를 가져올 뿐이라는 것이다. 헌정주의는 민주화 초기 민주주의의 기초로 작동했지만, 시민권이 사회경제적 영역으로 확대되고 정치적 민주화가 사회경제적 민주화로 심화되는 시점에서 민주주의와의 갈등적 관계에 직면하게 됨을 각국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이 점에서 이 책이 촉구하는 민주주의와 헌정주의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 재인식은, 한국 민주주의의 현 단계에서 깊이 음미할 필요가 있다.

06. 07.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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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신세용 - 인터넷 문화비평

* "마뉴엘 카스텔"에 대해 좀더 알아보려고 정보를 검색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글인데 읽어볼만한 글인듯 싶어 퍼온다. 밑줄 강조는 내가 공감하는 부분이거나 다소 이견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부분이다. 물론 이견이 있다고 해서 별도의 반론을 제기할 형편은 못 된다. 

인터넷 문화 비평 (上)

바야흐로 컨텐츠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원래 ''컨텐츠(contents)''라는 것은 형식에 대응하는 내용을 일컫는 말이지만, 요즘은 흔히 인터넷 상에서 주고 받는 정보의 묶음을 뜻한다. 단순히 글자만 나열하던 텍스트 위주의 컨텐츠조차 ''만들어 본 사람이나 만들 수 있었던'' 시절이 엇그제같은데, 이제는 거의 대부분의 컨텐츠들이 예쁜 배경에 다양한 글씨, 삽입된 그림과 음악, 혹은 동영상까지. 불과 몇 년 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야말로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이런 작업들이 가능해진 요즈음, 세계 최고의 인터넷 보급율과 최고 수준의 초고속 인터넷 환경을 자랑하는 우리 나라에서 각종 정보 포탈들이 활성화되고 있는 것은 그리 놀랍거나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처음에야 신기하고 재미있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조금만 돌아다녀 보면 무언가 지루하고 따분해짐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항상 새로운 이야기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마치 중독 증세처럼 접속하는 횟수가 늘어나긴 했어도 감흥은 갈수록 줄어들기 일쑤이다. 아주 특별히 가치있는 내용이라고 생각되지 않으면 구태여 잊거나 잃어 버릴까봐 애태우지도 않는다. 쉽게 접하기 힘든 컨텐츠들을 언제 어디서든 누구라도 편리하게 구할 수 있으리라던 처음의 취지와는 다르게, 그다지 중요치 않은 것은 그냥 어디엔가 있을 포탈 서비스 서버 컴퓨터의 하드 디스크에 버려 두고 정말 대단히 중요한 것들은 다시 종이 매체로 옮겨 모아 두거나 아니면 대개 그냥 잊어 버린다. 한 마디로 ''중요하지 않은 컨텐츠만 모여 있는 인터넷''의 시대가 되어가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우리가 보는 ''컨텐츠의 시대''에는, 중요하지 않다고 느껴지는 컨텐츠가 넘쳐나는 것 말고도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이 있다. 그것은 바로 ''실제로 무가치한 컨텐츠''가 너무나 많아졌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실제의 무가치함''이란 금전적인 가치, 혹은 구하는 사람이 댓가를 지불할 만한 가치를 말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돈을 내고 구해 볼만한'' 컨텐츠의 양은 ''공짜로 볼 수 있는'' 양에 비해 대단히 적다는 뜻이다. 앞서 설명한 내용이 이용자들의 ''느낌''을 말하는 것이라면, 이 특징은 컨텐츠 그 자체의 특징에 해당된다. 그만큼 ''공짜''가 많아서, 혹은 인터넷의 본래 속성이 그래서라고 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이러한 설명은 우리 자신의 어떤 면과 그것이 야기하는 인터넷 문화의 어떤 특성을 너무 쉽게 감추는 것일수도 있다.


잘못된 출발

우리가 만들어내는 ''컨텐츠''들이 대부분 공짜이기 쉽다는 사실은, 우리가 쉽게 말하지 않는 중요한 현실과 직결되는 문제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인터넷 이용 행위 대부분이 일방적인 소비 행위라는 점이다. 모두가 어떤 ''컨텐츠''의 생산을 하는 듯 하지만 기실 그것은 소비를 대상으로 하는 시장 형성의 첫 걸음이 아니라 그 자체가 그냥 일방적인 소비 행위라는 점이다. 보다 쉽게 말한다면, 컨텐츠를 올리는 행위들 중 그 행위로 ''돈을 벌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뜻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이것은 바로 우리는 인터넷을 우리의 잉여 시간에 이용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 혹은 우리가 인터넷에서 만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잉여 시간을 소비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생계를 위해 일해야 하는 시간이 인터넷의 이용과 직결되어 있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건설 현장의 노동자, 소매점의 관리 직원, 공장의 기술자, 혹은 들판의 농부들도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하지만 우리가 인터넷을 통해 보는 사람들은 그들의 ''남는 시간''을 인터넷 이용에 할애하는 것이다. 만약 그 시간이 충분히 많지 않다면 우리가 그들을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바꾸어 말하자면 우리가 인터넷의 어떤 곳에서 제법 자주 만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인터넷에서의 컨텐츠 생산으로 돈벌이를 하는 사람이 아닌 이상 잉여 시간이 아주 많은 사람이기 쉽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 사람을 직접 만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생산''한 ''컨텐츠''를 통해 만난다면, 그리고 그 컨텐츠를 ''공짜로'' 접할 수 있었다면 그 사람은 ''돈이 되지 않는 컨텐츠를 만들 만한 시간이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의 인터넷에는 학생과 주부들이 넘쳐 난다. 그리고 컴퓨터와 밀접한 직종의 사람들, 프로그래머, 그래픽 디자이너, 혹은 사무실에서 개인용 컴퓨터를 지급받아 업무를 수행하는 사무직 인력들이 인터넷 컨텐츠를 공급하는 주축이 된다. 그런데 이들 중에서도 자신의 일이 너무나 바쁜 나머지 컨텐츠를 자주 가공해서 올리기 어려운 사람들은 애시당초 우리의 눈에 보이기도 어렵다. 어떤 정보 포탈에서든 그곳에서 보는 정보들은 대체로 ''댓가를 요구하기 어려운'' 정보들이며, 그런 정보들을 제공하는 데 들인 시간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의 것이다.

이들의 의견, 그러니까 이들이 만든 컨텐츠들의 내용이 서로 공감을 이루면 ''인터넷 문화'', ''인터넷 여론''이 되어 버린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끼리 인터넷의 컨텐츠들을 서로 서로 평가하며 좋고 나쁨을 가려낸다. 일례를 들어보자. 어떤 사람이 특정한 법률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어서 인터넷을 이용한다고 가정할 때, 그는 어떤 곳을 찾아보게 될까. 법률 자체가 있는 사이트, 혹은 그 법률을 쉽게 설명해 놓은 사람들의 사이트를 방문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인터넷의 효용 가치''가 가장 잘 드러나는 사례이다. 그런데 만약 어떤 사람이 특정한 법률의 문제점을 제기하고 이것이 적용되는 다양한 사례들을 검토하여 보다 나은 법률로 개정할 수 있도록 대안을 마련하고자 한다면, 그래서 인터넷에서 사람들과 의견을 교환하고자 한다면 어떨까.

언뜻 생각해 보면 멀리 있고 쉽게 접하기 어려운 사람들과 하나의 주제에 관해 손쉽게 의견을 교환할 수 있을 테니 시간적, 공간적인 거리감을 해소해 주는 도구로서의 인터넷은 이미 충분한 부가가치를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현실이 과연 그럴까. 그 사람이 만나는 대부분의 컨텐츠들은 학생이나 주부들, 혹은 생계와 무관하게 그런 주제의 컨텐츠를 만들 수 있는 사람들의 작품들이기 쉽다. 이렇게 해서 어떤 법률이 검토되고 재구성될 수 있을까. 대부분의 법률들은 첨예한 이해 당사자들 간의 관계를 설정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관계자들 중 ''인터넷 소비 행위''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들의 여론만을 모으게 되어 버린다. 이렇게 모인 의견이 갖는 실효성은 또 얼마나 될까.


증폭되는 연쇄 반응 - 더욱, 더더욱 무가치하게

이런 상황이 반복되고 지속될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더 많은 곳을 돌아 다니고 더 많은 정보들을 흡수하여 그 중에 비교적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컨텐츠의 양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획득하려고 할까. 물론 그런 경우도 없지는 않겠지만 대개의 경우 그렇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대부분의 정보 포탈이 비슷하다는 인식을 하고 특별히 여러 곳을 돌아다니지 않은 채 자신이 선호하는 특정한 몇 곳 만을 주로 이용하게 된다. 그리고 정말 중요한 정보는 오프라인에서 얻거나 최소한 확인만이라도 바깥 세상에서 하려는 관성이 생기게 된다. 이렇게 되면 인터넷 상에서 개별적으로 생산된 컨텐츠들의 생명력은 그만큼 감소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 자체가 이미 바깥 세상의 어떤 자료로부터 기인한 것이기 쉬우며 다시 한 번 바깥 세상에서 검증받지 않는 이상은 ''미확인 정보''에 지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정보 포탈들의 경우, 컨텐츠 조회수의 평균치는 대략 100 에서 1000 사이를 오가게 되며 일만 단위의 조회수를 기록하는 것은 흔치 않은 인기도의 기준이 된다. 비록 포탈 자체, 사이트 자체의 방문수는 몇십만이나 몇백만이 되기도 하지만, 컨텐츠의 확산을 생각해 볼 때 포탈이나 사이트의 방문 횟수 누적치는 별 의미가 없다. 정작 그러한 방문 각각의 경우에 대해서 전달된 컨텐츠의 양을 평가한다면 대동소이하게 되는 것이다. 당신은 어떤 포탈을 방문했을 때 그곳의 모든 서비스를 매일 골고루 빠짐없이 한 번씩 이용하며 모든 분야의 모든 정보들을 일일이 둘러 보는가.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될 것으로 기대할 수 있는가. 잉여 시간이 무척 많지 않고서는 실제로 불가능한 이런 이용 활동에 참여하기란 쉽지 않다. 게다가 우리는 하루에도 수없이 어떤 정보 포탈을 방문하더라도 눌러 본 링크를 다시 눌러 보며, 보았던 컨텐츠를 다시 보게 된다. 그 이상의 노력을 투자하여 다양한 정보를 소화할 필요를 느끼기에 컨텐츠는 이미 너무 ''무용''한 것이기 쉽기 때문이다.

컨텐츠를 생산하는 행위가 재화의 생산과 이어지지 않으며 이런 환경 안에서 컨텐츠를 소비하는 행위, 즉 그 컨텐츠를 조회하고 정보를 습득하는 행위가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금 재화의 생산과 무관한 컨텐츠를 만들어 내는 행위와 연결되어 버린다. 이런 환경에 대한 반응은 대체로 다음의 두 가지 형태로 드러난다.

첫째, 컨텐츠 생산에 필요한 시간을 줄이려고 한다. 이것은 다시 두 가지 경우로 나뉘는데, 무성의하고 다듬지 않은 컨텐츠를 무턱대고 생산하는 행위와 다른 사람의 컨텐츠를 옮기는 행위이다. 여기에서 컨텐츠 생산에 소요되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다른 사람의 컨텐츠를 옮기는 행위는 다시금 보다 적극적인 반응으로 쉽게 연결되는데, 이것이 바로 두번째 반응이다. 컨텐츠들의 허브, 즉 교차로 역할을 자임하는 것이다.

우리가 어느 정보 포탈에서든 보게 되는 컨텐츠들의 거의 대부분은 바로 이 두 가지 반응에 의해 만들어진 것에 속한다. 짧게 쓰고, 쉽게 쓰고, 간단하게 쓴다. 많은 그림들, 예쁜 글씨들, 컨텐츠 본래의 의미인 ''형식에 대응하는 내용''이 아니라 ''내용이 사소하더라도 두각을 나타낼 수 있는 형식''에 치중하게 된다. 그리고 약간의 기술을 습득한 이후에는 자신을 더욱 부각시키기 위해 매우 많은 양의 컨텐츠들을 ''매우 효율적으로'' 퍼 옮긴다.

이러한 행위 각각에 대해 무슨 문제가 있다느니 시비를 가린다는 것은 불필요하다. 이것은 모두 우리가 즐길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하나의 지적 유희에 속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행위들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인터넷 컨텐츠 문화란 어떤 의미를 내포하는가에 있다. 이제는 이러한 컨텐츠들이 하나의 주된 흐름이자 문화 코드의 중심으로 자리 잡는다는 것, 그것은 새로운 컨텐츠의 생산 행위를 급기야 ''주류와 다른'',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없는''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움직임이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새로운 컨텐츠의 생산은 더욱 무가치하고 힘들어지며 우리가 보는 컨텐츠들은 점점 자기 만족을 위한 소도구들로 가득차게 된다. 이제 누구도 인터넷을 통한 생산 행위에 기대를 걸지 않는다. 인터넷은 놀이 기구이며 여가 선용의 장이다. 그리하여 인터넷은 ''생산하지 않는'', ''쉽고 간편한 것을 즐기는'', ''잉여 시간이 많은'' 소비자들의 천국이 되어 버린다. 이제 누가 눈독을 들일 것인가. 불특정 다수의 고객들을 향해 달려드는 상인들에게 인터넷은 엄청난 홍보의 장으로 기능한다. 그럼 인터넷은 과연 홍보의 장, 마케팅의 도구일 뿐인가.


왕성한 지적 활동을 위해 창조된 세계 - 그러나.

본래의 인터넷은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정보원들로부터 수집된 국가의 기밀을 한 곳에서 집중 관리하기 위해 연구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것은 원격지에 위치한 동료 학자들과 연구 결과를 주고 받기 위해 무엇보다 유용한 도구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국가의 정보 관리를 위해 만들어진 부분들은 일반에 공개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학자들의 왕성한 지식 창조 활동을 위해 성장해 온 인터넷이 기실 우리에게 다가오기 시작한 최초의 인터넷이었던 셈이다. 어떻게 하면 보다 많은 종류의 지식을 더욱 유용하게 전달할 것인가 하는 물음에 답하기 위해 더 많은 기술이 개발되었고 도구들이 만들어졌다.

그래서 미국이나 유럽 등 초기의 인터넷을 충분히 경험해 온 사회일수록 유용한 자료들이 풍부하고 실제로 그런 자료, 컨텐츠들을 인터넷에 제공하는 행위로 자신의 생계를 유지하는 경우가 많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것은 인터넷 이용 기술이 달라서가 아니라 인터넷 이용 계층이 다르기 때문이다. 수많은 학자와 연구자들, 지식인들이 인터넷의 주 이용 계층이다. 기업체에서도 물론 사무 직원의 잉여 시간에 인터넷을 이용하는 경우도 있겠으나 그 효과를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고부가가치의 컨텐츠를 창출하는 집단, 경영 컨설턴트들과 회계 전문가들, 시장 분석가들이 많이 참여하고 있다.

그런 인터넷 공간에서라면 법률에 대해 토론하려고 할 때 다양한 대학의 법학 교수들, 학자들과 연구자들이 참여할 수 있다. 그곳에서는 20 쪽 분량의 시장 분석 자료가 몇천 달러에 판매될 수도 있고, 하다 못해 음식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면 어느 지역에서 제빵업에 수십년간 종사해 온 전문 요리사가 자신의 비법을 알려 주기도 한다. 그의 홈페이지를 방문해 보면 그는 이미 자신의 제과점을 경영하는 경영자이면서 인근 지역 주민들에게 온라인으로 주문 배달을 해 주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그는 자신의 비법 모두를 가르쳐주지 않으며 그 귀중한 정보를 더 많이 알기 원할 때 비용의 지불이나 자신이 운영하는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를 제안할 수도 있다. 그는 그런 목적으로 자신의 지식을 제공하고 댓가를 획득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그것이 가능할까. 우리에게도 그런 행위는 충분히 가능하다. 그런데 왜 우리는 아직껏 그러한 현실을 충분히 만나고 있지 못할까. 앞서 언급했다시피 우리가 바꾸어야 할 것은 우리의 환경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우리가 그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혹은 ''그것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로 이미 인터넷이 가득차 버렸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니 이제는 그런 단계를 훌쩍 넘어서서 인터넷 자체가 재화와 시간과 사람들의 의지를 끊임없이 일방적으로 소모할 뿐인 거대한 소각장이 되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인터넷 정보 포탈의 주 수입원은 광고, 쇼핑몰, 그리고 아바타와 같은 단순 구매 행위의 소산이며 이것에 성공하지 못하는 곳은 무작정 자본을 쏟아 붓다가 문을 닫게 된다. 참여하는 사람들이 수백만이더라도 그들 스스로 사회의 동력을 만들어내는 인간 본래의 특성은 전혀 공유하지 않는 놀라운 세계로 변질된 셈이다. 그들이 밤이 새도록 열띠게 참여하는 행위들, 컨텐츠의 생산이라는 행위의 본질은 엄청난 규모의 소비 행각으로 전락해 버리는 것이다.


우리의 현 주소

당신은 이런 세계에 만족하는가. 이른바 ''네티즌''이라는 말로 사람들을 현혹하며 마치 하나의 세력이 형성된 것인양 여론을 호도하는 오늘날 정치의 한 켠을 주시할 수 있다면 이 세계가 얼마나 불안하고 위험한 문제를 안고 있는지 외면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이 모였다면 자신들의 생존을 영위하기 위해 무언가 가치있는 것을 생산해 내야 한다''는 인간 사회의 본래적 의무에 귀속하는 과제이며,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애초부터 모이지 말았어야 한다는 점마저 내포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가치있는 것, 그것을 제공하는 행위로부터 자신의 생존이 보장될 수 있는, 우리의 ''생존 가치''를 가질 수 있는 것들이 충분히 생산되지 못한 채 막대한 수의 사람들이 모여서 그저 웅성거리는 마당이 있다는 것은 이들이 어느 때건 보여주게 될 엄청난 규모의 움직임과 그 결과에 대해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의미한다. 심지어 이 사회를 지탱하는 어떠한 지식 체계도 우리의 인터넷에 충분히 접목되지 못한 채 그러한 움직임과 결과에 대해 예측할 수 있는 어떤 방법론도 찾기 어려울 것임을 암시한다.

지금 이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이들 각각은 어디서든 만날 수 있는 친근하고 호감이 가는 사람들일 수 있다. 때로 유용한 소식을 전해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집단 전체를 하나로 보는 시각으로라면 이들은 사회의 정말 특별한 일부분, ''시간이 많고 막연한 소비 행위를 위해 이곳을 찾은 사람들''의 특성을 그대로 표현하게 됨을 알아야 한다. 설령 자기 자신은 없는 시간을 쪼개어 이곳을 찾았더라도 그 자신의 아주 사소하고 작은 일부분만이 이곳에 스며들게 되어 결국 집단 전체는 그런 사람들의 모습만을 보여주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곳의 ''여론''이나 ''다수의 의견''이라는 것이 실제의 사회에서는 매우 소수의 감흥에 지나지 않을 수 있고 심지어 그런 의견에 동참한 자신조차도 생활 대부분에서 전혀 별개의 의사 판단을 내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이곳에 들어오면 어떤 흐름에 순응할 수 밖에 없는 일종의 소외감마저 느끼게 된다.

인터넷 문화 비평 (下)

인터넷은 사람과 사람을 만나게 하는 광장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인터넷을 통해 쉽게, 혹은 자주 만나기 어려운 사람들과 좀더 수월하고 편리한 만남을 영위하려고 한다. 때문에 (上)편에서 바라 보았던 ''컨텐츠 교류''의 관점과는 달리 ''사람들의 만남''이라는 관점은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인터넷의 문화적인 특성을 잘 대변해 주는 듯 하고, 이러한 관점에서라면 우리의 인터넷 문화는 매우 융성하게 성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금까지 써 놓은 윗 문장들은 모두 착각에 불과하다.


익명성의 문제

익명성(匿名性, Anonymity, 혹은 Pseudonymity와도 동일한 의미로 함께 쓰임)은 흔히 ''이름을 감추는 행위'' 정도로 인식된다. 이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실명제(實名制)''라는 말을 쓰는 것에서 그 인식의 근거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번역이 어찌 되었든,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익명성'', 즉 ''어나니머티''란 그보다 좀 더 넓은 뜻의 낱글이다. 이 낱글의 의미 안에는 사회 집단의 거대화, 매스미디어의 발달, 분업의 세분화, 그리고 도시 사회의 거대한 권력 구조를 암시하는 여러 사회적 이슈들이 담겨 있다.

미국 죠지타운 법대의 데이빗 포스트(David G. Post) 교수가 1996년에 발표한 ''모여드는 지적 자산 (원제는 ''Pooling Intellectual Capital: Thoughts on Anonymity, Pseudonymity, and Limited Liability in Cyberspace'')''에서는 이러한 ''익명성(Anonymity)''의 문제를 포함한 인터넷의 여러 사회적 이슈들을 잘 다뤄주고 있다. 그는 이 글을 통해 익명성에 대하여 법적으로 어떠한 접근이 이루어져 왔으며 또한 이루어져야 할 것인지에 대해 매우 면밀하면서도 과감한 결론을 유추해 내고 있다.

인터넷에서 익명성의 문제가 대두된 것은 이것이 거대 집단, 특히 정부의 권력에 대항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곧바로 체제의 보안(security)과 사생활 보호(privacy)의 영역에서 첨예하게 다루어졌으며 막대한 비용을 들여 이를 관리하는 중앙 집중식 감시 모델의 성립이 요구되게 했다. 반면, 벤덤의 원형 감옥을 연상케 하는 이러한 인터넷의 변화와 관련하여 1988년 미 연방 법원이 맥클린타이어 여사의 유인물 배포와 관련한 판결(윗 문서 참조)에서 ''정치적 표현의 자유는 그것의 잘못된 적용보다 더 값진 것이다''라고 공표한 판결문은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같은 해 미 연방 대법원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제리 폴웰 목사에 대한 래리 플린트의 명예 훼손 취하 상고심에 대해 원고 승소, 즉 래리 플린트에게 죄가 없음을 선고한 바 있다) 이처럼 인터넷에서의 익명성 논쟁은 표현의 자유와 체제 보안, 혹은 사생활 보호라는 양자의 필요성에 의해 매우 첨예하게 전개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익명성의 문제가 단순히 법적 책임 소지의 한계를 설정하는 것, 다시 말해서 특정 사건에 대한 유무죄 판결 정도에 머무른다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법 제도는 나라와 문화마다 다르고, 또 다르게 적용되는 것인데 반하여 인터넷 상에서 드러나는 인간 사회 집단의 행태는 매우 유사하고 동질적인, 인간 본래의 속성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십수년 전부터 미국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온 익명성 논쟁의 얼개를 파악하는 것은 곧 우리의 인터넷 문화에서 드러나는 중요한 구조를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익명성 논쟁의 본질은 ''어째서 익명성을 추구하는가''라는 질문에 있다. 근본적으로 거대 사회 집단에서 드러나게 되는 ''공공성(publicity)''은 권위적이고 위압적인 특성을 갖는다. 왜냐하면 ''공공(public)'' 스스로가 자신에게 순응하는 개인성은 보호하되 반대하는 개인성은 제거하려는 속성을 어느 정도 가지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거대화한 사회 집단에서 전체가 추구하는, 특별히 배타적인 어떤 논리에 맞서고자 하는 개인은 누구나 자신의 정체성이 제거될 위협에 직면하게 된다. 이것은 비단 반체제 운동가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의 활동 영역이 세분화되고, 발달된 매스 미디어를 통해 이런 영역들이 쉽게 합종 연횡하여 거대 집단을 구성할 수 있게 되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 사회는 여러 구획, 여러 계층의 다분화된 권력 구조를 갖게 되었다. 어떤 구획의 어느 계층에서라도 특정한 개인이 다수의 논리에 맞서고자 하는 경우 그 개인은 다수로 대변되는 ''권력 집단''이 자신의 정체성, 곧 해당 사회 집단에 소속되어 있다는 사실과 이로부터 비롯되는 여러 가지 생존 활동의 요건들을 일부분, 혹은 모두 말소할 수 있다는 위험을 끌어 안아야 하는 것이다. 익명성은 이러한 필요로부터 개인이 그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추구된다.

이처럼 익명성의 필요가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것이 아니라 인간 사회 집단으로부터 발복한 자연 발생적인 것''이라면 이것의 상대어를 ''인터넷 실명제''라고 할 수 있을까. 익명성의 상대 개념은 오히려 ''체제의 보안(system security)''이나 ''사생활의 보호(privacy protection)''가 되어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체제의 보안이나 사생활의 보호에 반하는 그 무엇, 혹은 ''표현의 자유(right of free speech)'', ''중앙 권력의 견제(restraint on central power)''가 익명성(anonymity or pseudonymity)의 본래 의미가 된다.


새로운 개념의 대두 : 사이버 인간(e-person)

앞서 소개한 데이빗 포스트 교수의 글은 ''가상 공간(Cyberspace)''에서 드러나는 익명성의 문제는 인간 사회에 잠재되어 있는 고유한 욕구와 필요들, 나아가서는 법적인 규약의 필요 문제 등에 적절히 연결되어 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또한 그는 이 글에서 기업 이론 분야에서 대두되었던 개념을 제시하면서, 적어도 가상 공간에서라면, 익명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법적 대상의 개념이 필요함을 말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커티스 카르노(Curtis Karnow)가 제안한 바 있는 ''사이버 인간(e-person, electronic persona)''의 개념이다.

사이버 인간의 개념은 생소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이와 유사한 ''변종 인간''의 개념을 익숙하게 받아 들이고 있다. ''법인(corporation)''이라는 것은 경제 활동을 하는 법적 개인을 규정해 놓은 것으로 일반적인 회사를 뜻하지만 법적으로는 한 사람의 개인에 준하는 권리와 의무를 별도로 부여받는다. 사이버 인간은, 마치 경제 활동이 규격화, 거대화되고 인간 사회 전반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발휘하게 된 ''기업''이라는 객체를 인간 사회의 구성원으로 흡수했던 것과 같이 사이버 공간이 인간 사회 전반에 걸쳐 연동하는 환경을 설명하려는 시도이다. ''법인(法人)''과 같이 표현한다면 ''전인(電人)''이라는 다소 낯설은 이름이 되어 봄직한 이 사이버 인간은 가상 공간에서 존재하는 모든 인격체를 대변하는 하나의 규격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이버 인간은 현실 세계의 사람이 바로 드러나지 않으려는 익명성의 욕구를 정당화하는 동시에 체제의 보안이나 사생활 보호를 위해 부과되는 의무를 짊어지게 할 법적 대상이기도 하다. 현실 사회에서는 반체제 게릴라로나 전락할 개인들도 사이버 공간에서라면 어느 정도의 자유도를 확보하고 활동을 전개할 수 있다. 물론 ''법인''과 같이, ''사이버 인간''도 권리와 책임의 어느 정도는 실제의 사람과 연결되어 있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사실이 있다. ''법인''이라는 법적 대상이 규정되기 전에 이미 기업 활동이 있었던 것처럼, ''사이버 인간''이 어떠한 법적 개체로 규정되기 전인 지금 이 순간에도 이미 우리는 그러한 속성의 ''그 무엇인가''를 대하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 ''법인''처럼 ''전인(電人)''이 규정되지 않았다고 해서 앞서 말한 ''사이버 공간에서의 자유도''를 누리지 못하는가? 우리는 이미 스스로 사이버 인간화된 자신의 복제물을 인터넷 상에서 ''부리고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인터넷에서 만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훗날 어느 순간에 ''사이버 인간'', ''e-person'', ''electronic persona'' 등으로 불리게 될 미래형 객체의 원시 모델인 셈이다. 우리는 사람을 만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만나는 것은 사람의 활동에서 야기된 또 하나의 어떤 ''상(象, image)''에 불과하다.


눈속임

우리가 인터넷에서 만나는 것은 사람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의 활동에서 비롯된 복제물들이다. 문자를 통해, 영상이나 음향, 혹은 좀 더 기호화된 음향 신호로서의 음성 정보들을 통해 우리는 그 대상이 말하고자 하는 ''사람''을 유추하려고 노력할 뿐이다. 누구도 완전히 성공할 수 없고 또한 누구라도 대강은 접근할 수 있는 이러한 눈속임의 규칙이 우리의 인터넷을 떠 받치고 있다. 그리고 그 규칙을 지탱하는 거대한 체제는 바로 ''언어''이다.

근대 언어학의 창시자로 불리우는 페르디낭 드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 1857~1913)는 ''언어란 기호의 부분 집합으로서 기표와 기의에 의해 설명되는 명명(naming)의 구조체''라고 말했다. 즉, 언어란 그 언어가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기의)과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기표)으로 나뉘어 구성되었다는 말이다. 가상 공간에서의 인식 대상이 ''사이버 인간''이라는 새로운 개체이며 이 사이버 인간들이 서로 의사를 소통하는 방식은, 영상과 음향 메시지를 넓은 범주의 ''기호성 언어''에 포함시킨다고 했을 때 ''언어''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실제 공간(real world)''에서는 그렇지 않은가? 답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관조적으로 고찰해 보는 것만으로 충분히 드러난다. 우리는 실제의 사람들을 만날 때 어느 정도의 ''언어적 거리감''과 이를 해소하는 여러 행위들, 표정, 손짓, 혹은 의복이나 심지어 몸의 냄새나 뇌파의 간섭을 통해서 서로 소통하는 것이다. 사이버 공간에서 이런 것들이 가능할까. 기술이 발달하면서 조금씩 나아질런지는 몰라도 출발선 상에서 바라볼 때 이것은 철저히 가려진 가면의 축제와도 같다. 더욱이 그 가면을 필요로 하는 우리의 속성이 변하지 않는한 기술의 발달은 오히려 취사 선택되는 특수한 경우에나 도움을 줄 뿐이다. 우리는 우리를 속이려는 우리 자신에게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언어에 익숙하고 인터넷에 익숙한 많은 이들은 실제 사회에서도 능숙하게 자신의 ''이미지''를 유지한다. 인터넷을 통해 만난 사람들 중 상당수는 본래의 자신과 다르더라도 인터넷에서 보여져 온 모습을 고수하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익명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자. 이름을 밝힌다고 해소될까. 우리는 그 이름이 사실인지에 대해 확신할 수 없을 것이다. 성별, 혹은 생일과 나이는 어떨까. 살고 있는 지역, 좋아하는 음식이나 음악, 하는 일이나 직업을 밝힌다고 그를 실제의 사람으로 바로 연결시킬 수는 없다. 모든 것이 거짓일 수 있으며 또 모든 것이 진실일 수 있으되 그 진실들조차 그 사람 자신을 ''온전히 보여주지 못한다''. 사회 속의 개인을 명확히 ''지명''할 수 있는 정보들은 대체로 개인의 생존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기 때문에 감추어지고 삭제된다. 주민등록번호나 사회보장번호와 같은 사회 체제의 인식자들은 역으로 무수한 가짜 정보들이 난무하여 실제 가치의 고유성을 훼손시킴으로써 스스로를 보호한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일반 군중들을 향해 직장의 이름과 주소를 공개하거나 사는 집의 위치를 알리는 일은 거의 없다. 자신의 정보를 보호하는 요령들은 가족이나 친지, 동료들의 정보 보호에도 똑같이 적용되는데 이것이 때로는 그들을 공격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우리가 인터넷 상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때로 여럿일 수도, 때로 하나일 수도 있는 가상의 ''사이버 인간''들이다. 그리고 그 ''사이버 인간''들이 대화하는 대상 역시 내가 아니다. 내가 만들어 내고 있는 ''사이버 인간''이다.


사이버 인간들의 문화

이러한 현실의 상황을 충분히 인식하고 인터넷을 바라 본다면 그 문화의 특이성과 특수성에 대해 감탄할 수도 있고 때로 위협을 느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얼개가 나 자신, 또는 우리 각자에게 호의적이냐 위협적이냐가 아니라 그러한 사회가 지금 이 순간 우리 앞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회의 속성에 대해 고민하고 분석함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어떠한 사이버 인간들을 ''본능적으로 만들어 내고 있는가''에 대해 관여할 수 있다. 우리의 숨겨진 욕구일 수도 있고, 우리의 열렬한 이상향일 수도 있는 그들이 우리를 대신하여 인터넷을 메우고 있다.

그것이 욕구에 의해서든, 바램에 의해서든 사이버 인간들은 그래서 항상 우리의 목적과 연관을 갖는다. 큰 범주에서 볼 때 내면적인 욕구 충족의 목적과 공공이나 특정 집단을 향한 정보 전달의 목적으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는 이것은 ''사이버 인간''들의 ''존재 가치'', 그들의 생존을 담보하는 ''동인(動因)''이며 ''모티브(motive)''이다. 우리의 인터넷 문화는 거대한 가면 축제의 문화인 셈이다. 무엇을 위해서인지 저마다 말할 수는 있으되 그조차 가면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곳은 ''가상 공간(Cyberspace)''이다.

이제 생각해 보자. 당신은 누구인가.
아니, 당신이 지금 만나고 있는 이는 누구인가.

글쓴이 : 신세용 ( jewshin ) 
출처 :
http://assembly.joins.com/content.asp?board_idx=760&page=9&tb_name=d_econo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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