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바람구두 > 신세용 - 인터넷 문화비평
* "마뉴엘 카스텔"에 대해 좀더 알아보려고 정보를 검색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글인데 읽어볼만한 글인듯 싶어 퍼온다. 밑줄 강조는 내가 공감하는 부분이거나 다소 이견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부분이다. 물론 이견이 있다고 해서 별도의 반론을 제기할 형편은 못 된다.
인터넷 문화 비평 (上)
바야흐로 컨텐츠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원래 ''컨텐츠(contents)''라는 것은 형식에 대응하는 내용을 일컫는 말이지만, 요즘은 흔히 인터넷 상에서 주고 받는 정보의 묶음을 뜻한다. 단순히 글자만 나열하던 텍스트 위주의 컨텐츠조차 ''만들어 본 사람이나 만들 수 있었던'' 시절이 엇그제같은데, 이제는 거의 대부분의 컨텐츠들이 예쁜 배경에 다양한 글씨, 삽입된 그림과 음악, 혹은 동영상까지. 불과 몇 년 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야말로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이런 작업들이 가능해진 요즈음, 세계 최고의 인터넷 보급율과 최고 수준의 초고속 인터넷 환경을 자랑하는 우리 나라에서 각종 정보 포탈들이 활성화되고 있는 것은 그리 놀랍거나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처음에야 신기하고 재미있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조금만 돌아다녀 보면 무언가 지루하고 따분해짐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항상 새로운 이야기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마치 중독 증세처럼 접속하는 횟수가 늘어나긴 했어도 감흥은 갈수록 줄어들기 일쑤이다. 아주 특별히 가치있는 내용이라고 생각되지 않으면 구태여 잊거나 잃어 버릴까봐 애태우지도 않는다. 쉽게 접하기 힘든 컨텐츠들을 언제 어디서든 누구라도 편리하게 구할 수 있으리라던 처음의 취지와는 다르게, 그다지 중요치 않은 것은 그냥 어디엔가 있을 포탈 서비스 서버 컴퓨터의 하드 디스크에 버려 두고 정말 대단히 중요한 것들은 다시 종이 매체로 옮겨 모아 두거나 아니면 대개 그냥 잊어 버린다. 한 마디로 ''중요하지 않은 컨텐츠만 모여 있는 인터넷''의 시대가 되어가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우리가 보는 ''컨텐츠의 시대''에는, 중요하지 않다고 느껴지는 컨텐츠가 넘쳐나는 것 말고도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이 있다. 그것은 바로 ''실제로 무가치한 컨텐츠''가 너무나 많아졌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실제의 무가치함''이란 금전적인 가치, 혹은 구하는 사람이 댓가를 지불할 만한 가치를 말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돈을 내고 구해 볼만한'' 컨텐츠의 양은 ''공짜로 볼 수 있는'' 양에 비해 대단히 적다는 뜻이다. 앞서 설명한 내용이 이용자들의 ''느낌''을 말하는 것이라면, 이 특징은 컨텐츠 그 자체의 특징에 해당된다. 그만큼 ''공짜''가 많아서, 혹은 인터넷의 본래 속성이 그래서라고 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이러한 설명은 우리 자신의 어떤 면과 그것이 야기하는 인터넷 문화의 어떤 특성을 너무 쉽게 감추는 것일수도 있다.
잘못된 출발
우리가 만들어내는 ''컨텐츠''들이 대부분 공짜이기 쉽다는 사실은, 우리가 쉽게 말하지 않는 중요한 현실과 직결되는 문제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인터넷 이용 행위 대부분이 일방적인 소비 행위라는 점이다. 모두가 어떤 ''컨텐츠''의 생산을 하는 듯 하지만 기실 그것은 소비를 대상으로 하는 시장 형성의 첫 걸음이 아니라 그 자체가 그냥 일방적인 소비 행위라는 점이다. 보다 쉽게 말한다면, 컨텐츠를 올리는 행위들 중 그 행위로 ''돈을 벌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뜻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이것은 바로 우리는 인터넷을 우리의 잉여 시간에 이용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 혹은 우리가 인터넷에서 만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잉여 시간을 소비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생계를 위해 일해야 하는 시간이 인터넷의 이용과 직결되어 있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건설 현장의 노동자, 소매점의 관리 직원, 공장의 기술자, 혹은 들판의 농부들도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하지만 우리가 인터넷을 통해 보는 사람들은 그들의 ''남는 시간''을 인터넷 이용에 할애하는 것이다. 만약 그 시간이 충분히 많지 않다면 우리가 그들을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바꾸어 말하자면 우리가 인터넷의 어떤 곳에서 제법 자주 만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인터넷에서의 컨텐츠 생산으로 돈벌이를 하는 사람이 아닌 이상 잉여 시간이 아주 많은 사람이기 쉽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 사람을 직접 만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생산''한 ''컨텐츠''를 통해 만난다면, 그리고 그 컨텐츠를 ''공짜로'' 접할 수 있었다면 그 사람은 ''돈이 되지 않는 컨텐츠를 만들 만한 시간이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의 인터넷에는 학생과 주부들이 넘쳐 난다. 그리고 컴퓨터와 밀접한 직종의 사람들, 프로그래머, 그래픽 디자이너, 혹은 사무실에서 개인용 컴퓨터를 지급받아 업무를 수행하는 사무직 인력들이 인터넷 컨텐츠를 공급하는 주축이 된다. 그런데 이들 중에서도 자신의 일이 너무나 바쁜 나머지 컨텐츠를 자주 가공해서 올리기 어려운 사람들은 애시당초 우리의 눈에 보이기도 어렵다. 어떤 정보 포탈에서든 그곳에서 보는 정보들은 대체로 ''댓가를 요구하기 어려운'' 정보들이며, 그런 정보들을 제공하는 데 들인 시간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의 것이다.
이들의 의견, 그러니까 이들이 만든 컨텐츠들의 내용이 서로 공감을 이루면 ''인터넷 문화'', ''인터넷 여론''이 되어 버린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끼리 인터넷의 컨텐츠들을 서로 서로 평가하며 좋고 나쁨을 가려낸다. 일례를 들어보자. 어떤 사람이 특정한 법률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어서 인터넷을 이용한다고 가정할 때, 그는 어떤 곳을 찾아보게 될까. 법률 자체가 있는 사이트, 혹은 그 법률을 쉽게 설명해 놓은 사람들의 사이트를 방문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인터넷의 효용 가치''가 가장 잘 드러나는 사례이다. 그런데 만약 어떤 사람이 특정한 법률의 문제점을 제기하고 이것이 적용되는 다양한 사례들을 검토하여 보다 나은 법률로 개정할 수 있도록 대안을 마련하고자 한다면, 그래서 인터넷에서 사람들과 의견을 교환하고자 한다면 어떨까.
언뜻 생각해 보면 멀리 있고 쉽게 접하기 어려운 사람들과 하나의 주제에 관해 손쉽게 의견을 교환할 수 있을 테니 시간적, 공간적인 거리감을 해소해 주는 도구로서의 인터넷은 이미 충분한 부가가치를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현실이 과연 그럴까. 그 사람이 만나는 대부분의 컨텐츠들은 학생이나 주부들, 혹은 생계와 무관하게 그런 주제의 컨텐츠를 만들 수 있는 사람들의 작품들이기 쉽다. 이렇게 해서 어떤 법률이 검토되고 재구성될 수 있을까. 대부분의 법률들은 첨예한 이해 당사자들 간의 관계를 설정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관계자들 중 ''인터넷 소비 행위''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들의 여론만을 모으게 되어 버린다. 이렇게 모인 의견이 갖는 실효성은 또 얼마나 될까.
증폭되는 연쇄 반응 - 더욱, 더더욱 무가치하게
이런 상황이 반복되고 지속될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더 많은 곳을 돌아 다니고 더 많은 정보들을 흡수하여 그 중에 비교적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컨텐츠의 양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획득하려고 할까. 물론 그런 경우도 없지는 않겠지만 대개의 경우 그렇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대부분의 정보 포탈이 비슷하다는 인식을 하고 특별히 여러 곳을 돌아다니지 않은 채 자신이 선호하는 특정한 몇 곳 만을 주로 이용하게 된다. 그리고 정말 중요한 정보는 오프라인에서 얻거나 최소한 확인만이라도 바깥 세상에서 하려는 관성이 생기게 된다. 이렇게 되면 인터넷 상에서 개별적으로 생산된 컨텐츠들의 생명력은 그만큼 감소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 자체가 이미 바깥 세상의 어떤 자료로부터 기인한 것이기 쉬우며 다시 한 번 바깥 세상에서 검증받지 않는 이상은 ''미확인 정보''에 지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정보 포탈들의 경우, 컨텐츠 조회수의 평균치는 대략 100 에서 1000 사이를 오가게 되며 일만 단위의 조회수를 기록하는 것은 흔치 않은 인기도의 기준이 된다. 비록 포탈 자체, 사이트 자체의 방문수는 몇십만이나 몇백만이 되기도 하지만, 컨텐츠의 확산을 생각해 볼 때 포탈이나 사이트의 방문 횟수 누적치는 별 의미가 없다. 정작 그러한 방문 각각의 경우에 대해서 전달된 컨텐츠의 양을 평가한다면 대동소이하게 되는 것이다. 당신은 어떤 포탈을 방문했을 때 그곳의 모든 서비스를 매일 골고루 빠짐없이 한 번씩 이용하며 모든 분야의 모든 정보들을 일일이 둘러 보는가.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될 것으로 기대할 수 있는가. 잉여 시간이 무척 많지 않고서는 실제로 불가능한 이런 이용 활동에 참여하기란 쉽지 않다. 게다가 우리는 하루에도 수없이 어떤 정보 포탈을 방문하더라도 눌러 본 링크를 다시 눌러 보며, 보았던 컨텐츠를 다시 보게 된다. 그 이상의 노력을 투자하여 다양한 정보를 소화할 필요를 느끼기에 컨텐츠는 이미 너무 ''무용''한 것이기 쉽기 때문이다.
컨텐츠를 생산하는 행위가 재화의 생산과 이어지지 않으며 이런 환경 안에서 컨텐츠를 소비하는 행위, 즉 그 컨텐츠를 조회하고 정보를 습득하는 행위가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금 재화의 생산과 무관한 컨텐츠를 만들어 내는 행위와 연결되어 버린다. 이런 환경에 대한 반응은 대체로 다음의 두 가지 형태로 드러난다.
첫째, 컨텐츠 생산에 필요한 시간을 줄이려고 한다. 이것은 다시 두 가지 경우로 나뉘는데, 무성의하고 다듬지 않은 컨텐츠를 무턱대고 생산하는 행위와 다른 사람의 컨텐츠를 옮기는 행위이다. 여기에서 컨텐츠 생산에 소요되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다른 사람의 컨텐츠를 옮기는 행위는 다시금 보다 적극적인 반응으로 쉽게 연결되는데, 이것이 바로 두번째 반응이다. 컨텐츠들의 허브, 즉 교차로 역할을 자임하는 것이다.
우리가 어느 정보 포탈에서든 보게 되는 컨텐츠들의 거의 대부분은 바로 이 두 가지 반응에 의해 만들어진 것에 속한다. 짧게 쓰고, 쉽게 쓰고, 간단하게 쓴다. 많은 그림들, 예쁜 글씨들, 컨텐츠 본래의 의미인 ''형식에 대응하는 내용''이 아니라 ''내용이 사소하더라도 두각을 나타낼 수 있는 형식''에 치중하게 된다. 그리고 약간의 기술을 습득한 이후에는 자신을 더욱 부각시키기 위해 매우 많은 양의 컨텐츠들을 ''매우 효율적으로'' 퍼 옮긴다.
이러한 행위 각각에 대해 무슨 문제가 있다느니 시비를 가린다는 것은 불필요하다. 이것은 모두 우리가 즐길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하나의 지적 유희에 속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행위들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인터넷 컨텐츠 문화란 어떤 의미를 내포하는가에 있다. 이제는 이러한 컨텐츠들이 하나의 주된 흐름이자 문화 코드의 중심으로 자리 잡는다는 것, 그것은 새로운 컨텐츠의 생산 행위를 급기야 ''주류와 다른'',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없는''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움직임이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새로운 컨텐츠의 생산은 더욱 무가치하고 힘들어지며 우리가 보는 컨텐츠들은 점점 자기 만족을 위한 소도구들로 가득차게 된다. 이제 누구도 인터넷을 통한 생산 행위에 기대를 걸지 않는다. 인터넷은 놀이 기구이며 여가 선용의 장이다. 그리하여 인터넷은 ''생산하지 않는'', ''쉽고 간편한 것을 즐기는'', ''잉여 시간이 많은'' 소비자들의 천국이 되어 버린다. 이제 누가 눈독을 들일 것인가. 불특정 다수의 고객들을 향해 달려드는 상인들에게 인터넷은 엄청난 홍보의 장으로 기능한다. 그럼 인터넷은 과연 홍보의 장, 마케팅의 도구일 뿐인가.
왕성한 지적 활동을 위해 창조된 세계 - 그러나.
본래의 인터넷은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정보원들로부터 수집된 국가의 기밀을 한 곳에서 집중 관리하기 위해 연구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것은 원격지에 위치한 동료 학자들과 연구 결과를 주고 받기 위해 무엇보다 유용한 도구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국가의 정보 관리를 위해 만들어진 부분들은 일반에 공개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학자들의 왕성한 지식 창조 활동을 위해 성장해 온 인터넷이 기실 우리에게 다가오기 시작한 최초의 인터넷이었던 셈이다. 어떻게 하면 보다 많은 종류의 지식을 더욱 유용하게 전달할 것인가 하는 물음에 답하기 위해 더 많은 기술이 개발되었고 도구들이 만들어졌다.
그래서 미국이나 유럽 등 초기의 인터넷을 충분히 경험해 온 사회일수록 유용한 자료들이 풍부하고 실제로 그런 자료, 컨텐츠들을 인터넷에 제공하는 행위로 자신의 생계를 유지하는 경우가 많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것은 인터넷 이용 기술이 달라서가 아니라 인터넷 이용 계층이 다르기 때문이다. 수많은 학자와 연구자들, 지식인들이 인터넷의 주 이용 계층이다. 기업체에서도 물론 사무 직원의 잉여 시간에 인터넷을 이용하는 경우도 있겠으나 그 효과를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고부가가치의 컨텐츠를 창출하는 집단, 경영 컨설턴트들과 회계 전문가들, 시장 분석가들이 많이 참여하고 있다.
그런 인터넷 공간에서라면 법률에 대해 토론하려고 할 때 다양한 대학의 법학 교수들, 학자들과 연구자들이 참여할 수 있다. 그곳에서는 20 쪽 분량의 시장 분석 자료가 몇천 달러에 판매될 수도 있고, 하다 못해 음식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면 어느 지역에서 제빵업에 수십년간 종사해 온 전문 요리사가 자신의 비법을 알려 주기도 한다. 그의 홈페이지를 방문해 보면 그는 이미 자신의 제과점을 경영하는 경영자이면서 인근 지역 주민들에게 온라인으로 주문 배달을 해 주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그는 자신의 비법 모두를 가르쳐주지 않으며 그 귀중한 정보를 더 많이 알기 원할 때 비용의 지불이나 자신이 운영하는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를 제안할 수도 있다. 그는 그런 목적으로 자신의 지식을 제공하고 댓가를 획득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그것이 가능할까. 우리에게도 그런 행위는 충분히 가능하다. 그런데 왜 우리는 아직껏 그러한 현실을 충분히 만나고 있지 못할까. 앞서 언급했다시피 우리가 바꾸어야 할 것은 우리의 환경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우리가 그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혹은 ''그것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로 이미 인터넷이 가득차 버렸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니 이제는 그런 단계를 훌쩍 넘어서서 인터넷 자체가 재화와 시간과 사람들의 의지를 끊임없이 일방적으로 소모할 뿐인 거대한 소각장이 되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인터넷 정보 포탈의 주 수입원은 광고, 쇼핑몰, 그리고 아바타와 같은 단순 구매 행위의 소산이며 이것에 성공하지 못하는 곳은 무작정 자본을 쏟아 붓다가 문을 닫게 된다. 참여하는 사람들이 수백만이더라도 그들 스스로 사회의 동력을 만들어내는 인간 본래의 특성은 전혀 공유하지 않는 놀라운 세계로 변질된 셈이다. 그들이 밤이 새도록 열띠게 참여하는 행위들, 컨텐츠의 생산이라는 행위의 본질은 엄청난 규모의 소비 행각으로 전락해 버리는 것이다.
우리의 현 주소
당신은 이런 세계에 만족하는가. 이른바 ''네티즌''이라는 말로 사람들을 현혹하며 마치 하나의 세력이 형성된 것인양 여론을 호도하는 오늘날 정치의 한 켠을 주시할 수 있다면 이 세계가 얼마나 불안하고 위험한 문제를 안고 있는지 외면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이 모였다면 자신들의 생존을 영위하기 위해 무언가 가치있는 것을 생산해 내야 한다''는 인간 사회의 본래적 의무에 귀속하는 과제이며,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애초부터 모이지 말았어야 한다는 점마저 내포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가치있는 것, 그것을 제공하는 행위로부터 자신의 생존이 보장될 수 있는, 우리의 ''생존 가치''를 가질 수 있는 것들이 충분히 생산되지 못한 채 막대한 수의 사람들이 모여서 그저 웅성거리는 마당이 있다는 것은 이들이 어느 때건 보여주게 될 엄청난 규모의 움직임과 그 결과에 대해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의미한다. 심지어 이 사회를 지탱하는 어떠한 지식 체계도 우리의 인터넷에 충분히 접목되지 못한 채 그러한 움직임과 결과에 대해 예측할 수 있는 어떤 방법론도 찾기 어려울 것임을 암시한다.
지금 이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이들 각각은 어디서든 만날 수 있는 친근하고 호감이 가는 사람들일 수 있다. 때로 유용한 소식을 전해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집단 전체를 하나로 보는 시각으로라면 이들은 사회의 정말 특별한 일부분, ''시간이 많고 막연한 소비 행위를 위해 이곳을 찾은 사람들''의 특성을 그대로 표현하게 됨을 알아야 한다. 설령 자기 자신은 없는 시간을 쪼개어 이곳을 찾았더라도 그 자신의 아주 사소하고 작은 일부분만이 이곳에 스며들게 되어 결국 집단 전체는 그런 사람들의 모습만을 보여주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곳의 ''여론''이나 ''다수의 의견''이라는 것이 실제의 사회에서는 매우 소수의 감흥에 지나지 않을 수 있고 심지어 그런 의견에 동참한 자신조차도 생활 대부분에서 전혀 별개의 의사 판단을 내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이곳에 들어오면 어떤 흐름에 순응할 수 밖에 없는 일종의 소외감마저 느끼게 된다.
인터넷 문화 비평 (下)
인터넷은 사람과 사람을 만나게 하는 광장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인터넷을 통해 쉽게, 혹은 자주 만나기 어려운 사람들과 좀더 수월하고 편리한 만남을 영위하려고 한다. 때문에 (上)편에서 바라 보았던 ''컨텐츠 교류''의 관점과는 달리 ''사람들의 만남''이라는 관점은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인터넷의 문화적인 특성을 잘 대변해 주는 듯 하고, 이러한 관점에서라면 우리의 인터넷 문화는 매우 융성하게 성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금까지 써 놓은 윗 문장들은 모두 착각에 불과하다.
익명성의 문제
익명성(匿名性, Anonymity, 혹은 Pseudonymity와도 동일한 의미로 함께 쓰임)은 흔히 ''이름을 감추는 행위'' 정도로 인식된다. 이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실명제(實名制)''라는 말을 쓰는 것에서 그 인식의 근거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번역이 어찌 되었든,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익명성'', 즉 ''어나니머티''란 그보다 좀 더 넓은 뜻의 낱글이다. 이 낱글의 의미 안에는 사회 집단의 거대화, 매스미디어의 발달, 분업의 세분화, 그리고 도시 사회의 거대한 권력 구조를 암시하는 여러 사회적 이슈들이 담겨 있다.
미국 죠지타운 법대의 데이빗 포스트(David G. Post) 교수가 1996년에 발표한 ''모여드는 지적 자산 (원제는 ''Pooling Intellectual Capital: Thoughts on Anonymity, Pseudonymity, and Limited Liability in Cyberspace'')''에서는 이러한 ''익명성(Anonymity)''의 문제를 포함한 인터넷의 여러 사회적 이슈들을 잘 다뤄주고 있다. 그는 이 글을 통해 익명성에 대하여 법적으로 어떠한 접근이 이루어져 왔으며 또한 이루어져야 할 것인지에 대해 매우 면밀하면서도 과감한 결론을 유추해 내고 있다.
인터넷에서 익명성의 문제가 대두된 것은 이것이 거대 집단, 특히 정부의 권력에 대항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곧바로 체제의 보안(security)과 사생활 보호(privacy)의 영역에서 첨예하게 다루어졌으며 막대한 비용을 들여 이를 관리하는 중앙 집중식 감시 모델의 성립이 요구되게 했다. 반면, 벤덤의 원형 감옥을 연상케 하는 이러한 인터넷의 변화와 관련하여 1988년 미 연방 법원이 맥클린타이어 여사의 유인물 배포와 관련한 판결(윗 문서 참조)에서 ''정치적 표현의 자유는 그것의 잘못된 적용보다 더 값진 것이다''라고 공표한 판결문은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같은 해 미 연방 대법원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제리 폴웰 목사에 대한 래리 플린트의 명예 훼손 취하 상고심에 대해 원고 승소, 즉 래리 플린트에게 죄가 없음을 선고한 바 있다) 이처럼 인터넷에서의 익명성 논쟁은 표현의 자유와 체제 보안, 혹은 사생활 보호라는 양자의 필요성에 의해 매우 첨예하게 전개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익명성의 문제가 단순히 법적 책임 소지의 한계를 설정하는 것, 다시 말해서 특정 사건에 대한 유무죄 판결 정도에 머무른다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법 제도는 나라와 문화마다 다르고, 또 다르게 적용되는 것인데 반하여 인터넷 상에서 드러나는 인간 사회 집단의 행태는 매우 유사하고 동질적인, 인간 본래의 속성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십수년 전부터 미국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온 익명성 논쟁의 얼개를 파악하는 것은 곧 우리의 인터넷 문화에서 드러나는 중요한 구조를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익명성 논쟁의 본질은 ''어째서 익명성을 추구하는가''라는 질문에 있다. 근본적으로 거대 사회 집단에서 드러나게 되는 ''공공성(publicity)''은 권위적이고 위압적인 특성을 갖는다. 왜냐하면 ''공공(public)'' 스스로가 자신에게 순응하는 개인성은 보호하되 반대하는 개인성은 제거하려는 속성을 어느 정도 가지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거대화한 사회 집단에서 전체가 추구하는, 특별히 배타적인 어떤 논리에 맞서고자 하는 개인은 누구나 자신의 정체성이 제거될 위협에 직면하게 된다. 이것은 비단 반체제 운동가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의 활동 영역이 세분화되고, 발달된 매스 미디어를 통해 이런 영역들이 쉽게 합종 연횡하여 거대 집단을 구성할 수 있게 되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 사회는 여러 구획, 여러 계층의 다분화된 권력 구조를 갖게 되었다. 어떤 구획의 어느 계층에서라도 특정한 개인이 다수의 논리에 맞서고자 하는 경우 그 개인은 다수로 대변되는 ''권력 집단''이 자신의 정체성, 곧 해당 사회 집단에 소속되어 있다는 사실과 이로부터 비롯되는 여러 가지 생존 활동의 요건들을 일부분, 혹은 모두 말소할 수 있다는 위험을 끌어 안아야 하는 것이다. 익명성은 이러한 필요로부터 개인이 그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추구된다.
이처럼 익명성의 필요가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것이 아니라 인간 사회 집단으로부터 발복한 자연 발생적인 것''이라면 이것의 상대어를 ''인터넷 실명제''라고 할 수 있을까. 익명성의 상대 개념은 오히려 ''체제의 보안(system security)''이나 ''사생활의 보호(privacy protection)''가 되어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체제의 보안이나 사생활의 보호에 반하는 그 무엇, 혹은 ''표현의 자유(right of free speech)'', ''중앙 권력의 견제(restraint on central power)''가 익명성(anonymity or pseudonymity)의 본래 의미가 된다.
새로운 개념의 대두 : 사이버 인간(e-person)
앞서 소개한 데이빗 포스트 교수의 글은 ''가상 공간(Cyberspace)''에서 드러나는 익명성의 문제는 인간 사회에 잠재되어 있는 고유한 욕구와 필요들, 나아가서는 법적인 규약의 필요 문제 등에 적절히 연결되어 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또한 그는 이 글에서 기업 이론 분야에서 대두되었던 개념을 제시하면서, 적어도 가상 공간에서라면, 익명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법적 대상의 개념이 필요함을 말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커티스 카르노(Curtis Karnow)가 제안한 바 있는 ''사이버 인간(e-person, electronic persona)''의 개념이다.
사이버 인간의 개념은 생소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이와 유사한 ''변종 인간''의 개념을 익숙하게 받아 들이고 있다. ''법인(corporation)''이라는 것은 경제 활동을 하는 법적 개인을 규정해 놓은 것으로 일반적인 회사를 뜻하지만 법적으로는 한 사람의 개인에 준하는 권리와 의무를 별도로 부여받는다. 사이버 인간은, 마치 경제 활동이 규격화, 거대화되고 인간 사회 전반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발휘하게 된 ''기업''이라는 객체를 인간 사회의 구성원으로 흡수했던 것과 같이 사이버 공간이 인간 사회 전반에 걸쳐 연동하는 환경을 설명하려는 시도이다. ''법인(法人)''과 같이 표현한다면 ''전인(電人)''이라는 다소 낯설은 이름이 되어 봄직한 이 사이버 인간은 가상 공간에서 존재하는 모든 인격체를 대변하는 하나의 규격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이버 인간은 현실 세계의 사람이 바로 드러나지 않으려는 익명성의 욕구를 정당화하는 동시에 체제의 보안이나 사생활 보호를 위해 부과되는 의무를 짊어지게 할 법적 대상이기도 하다. 현실 사회에서는 반체제 게릴라로나 전락할 개인들도 사이버 공간에서라면 어느 정도의 자유도를 확보하고 활동을 전개할 수 있다. 물론 ''법인''과 같이, ''사이버 인간''도 권리와 책임의 어느 정도는 실제의 사람과 연결되어 있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사실이 있다. ''법인''이라는 법적 대상이 규정되기 전에 이미 기업 활동이 있었던 것처럼, ''사이버 인간''이 어떠한 법적 개체로 규정되기 전인 지금 이 순간에도 이미 우리는 그러한 속성의 ''그 무엇인가''를 대하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 ''법인''처럼 ''전인(電人)''이 규정되지 않았다고 해서 앞서 말한 ''사이버 공간에서의 자유도''를 누리지 못하는가? 우리는 이미 스스로 사이버 인간화된 자신의 복제물을 인터넷 상에서 ''부리고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인터넷에서 만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훗날 어느 순간에 ''사이버 인간'', ''e-person'', ''electronic persona'' 등으로 불리게 될 미래형 객체의 원시 모델인 셈이다. 우리는 사람을 만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만나는 것은 사람의 활동에서 야기된 또 하나의 어떤 ''상(象, image)''에 불과하다.
눈속임
우리가 인터넷에서 만나는 것은 사람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의 활동에서 비롯된 복제물들이다. 문자를 통해, 영상이나 음향, 혹은 좀 더 기호화된 음향 신호로서의 음성 정보들을 통해 우리는 그 대상이 말하고자 하는 ''사람''을 유추하려고 노력할 뿐이다. 누구도 완전히 성공할 수 없고 또한 누구라도 대강은 접근할 수 있는 이러한 눈속임의 규칙이 우리의 인터넷을 떠 받치고 있다. 그리고 그 규칙을 지탱하는 거대한 체제는 바로 ''언어''이다.
근대 언어학의 창시자로 불리우는 페르디낭 드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 1857~1913)는 ''언어란 기호의 부분 집합으로서 기표와 기의에 의해 설명되는 명명(naming)의 구조체''라고 말했다. 즉, 언어란 그 언어가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기의)과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기표)으로 나뉘어 구성되었다는 말이다. 가상 공간에서의 인식 대상이 ''사이버 인간''이라는 새로운 개체이며 이 사이버 인간들이 서로 의사를 소통하는 방식은, 영상과 음향 메시지를 넓은 범주의 ''기호성 언어''에 포함시킨다고 했을 때 ''언어''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실제 공간(real world)''에서는 그렇지 않은가? 답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관조적으로 고찰해 보는 것만으로 충분히 드러난다. 우리는 실제의 사람들을 만날 때 어느 정도의 ''언어적 거리감''과 이를 해소하는 여러 행위들, 표정, 손짓, 혹은 의복이나 심지어 몸의 냄새나 뇌파의 간섭을 통해서 서로 소통하는 것이다. 사이버 공간에서 이런 것들이 가능할까. 기술이 발달하면서 조금씩 나아질런지는 몰라도 출발선 상에서 바라볼 때 이것은 철저히 가려진 가면의 축제와도 같다. 더욱이 그 가면을 필요로 하는 우리의 속성이 변하지 않는한 기술의 발달은 오히려 취사 선택되는 특수한 경우에나 도움을 줄 뿐이다. 우리는 우리를 속이려는 우리 자신에게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언어에 익숙하고 인터넷에 익숙한 많은 이들은 실제 사회에서도 능숙하게 자신의 ''이미지''를 유지한다. 인터넷을 통해 만난 사람들 중 상당수는 본래의 자신과 다르더라도 인터넷에서 보여져 온 모습을 고수하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익명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자. 이름을 밝힌다고 해소될까. 우리는 그 이름이 사실인지에 대해 확신할 수 없을 것이다. 성별, 혹은 생일과 나이는 어떨까. 살고 있는 지역, 좋아하는 음식이나 음악, 하는 일이나 직업을 밝힌다고 그를 실제의 사람으로 바로 연결시킬 수는 없다. 모든 것이 거짓일 수 있으며 또 모든 것이 진실일 수 있으되 그 진실들조차 그 사람 자신을 ''온전히 보여주지 못한다''. 사회 속의 개인을 명확히 ''지명''할 수 있는 정보들은 대체로 개인의 생존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기 때문에 감추어지고 삭제된다. 주민등록번호나 사회보장번호와 같은 사회 체제의 인식자들은 역으로 무수한 가짜 정보들이 난무하여 실제 가치의 고유성을 훼손시킴으로써 스스로를 보호한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일반 군중들을 향해 직장의 이름과 주소를 공개하거나 사는 집의 위치를 알리는 일은 거의 없다. 자신의 정보를 보호하는 요령들은 가족이나 친지, 동료들의 정보 보호에도 똑같이 적용되는데 이것이 때로는 그들을 공격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우리가 인터넷 상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때로 여럿일 수도, 때로 하나일 수도 있는 가상의 ''사이버 인간''들이다. 그리고 그 ''사이버 인간''들이 대화하는 대상 역시 내가 아니다. 내가 만들어 내고 있는 ''사이버 인간''이다.
사이버 인간들의 문화
이러한 현실의 상황을 충분히 인식하고 인터넷을 바라 본다면 그 문화의 특이성과 특수성에 대해 감탄할 수도 있고 때로 위협을 느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얼개가 나 자신, 또는 우리 각자에게 호의적이냐 위협적이냐가 아니라 그러한 사회가 지금 이 순간 우리 앞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회의 속성에 대해 고민하고 분석함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어떠한 사이버 인간들을 ''본능적으로 만들어 내고 있는가''에 대해 관여할 수 있다. 우리의 숨겨진 욕구일 수도 있고, 우리의 열렬한 이상향일 수도 있는 그들이 우리를 대신하여 인터넷을 메우고 있다.
그것이 욕구에 의해서든, 바램에 의해서든 사이버 인간들은 그래서 항상 우리의 목적과 연관을 갖는다. 큰 범주에서 볼 때 내면적인 욕구 충족의 목적과 공공이나 특정 집단을 향한 정보 전달의 목적으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는 이것은 ''사이버 인간''들의 ''존재 가치'', 그들의 생존을 담보하는 ''동인(動因)''이며 ''모티브(motive)''이다. 우리의 인터넷 문화는 거대한 가면 축제의 문화인 셈이다. 무엇을 위해서인지 저마다 말할 수는 있으되 그조차 가면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곳은 ''가상 공간(Cyberspace)''이다.
이제 생각해 보자. 당신은 누구인가.
아니, 당신이 지금 만나고 있는 이는 누구인가.
글쓴이 : 신세용 ( jewshin )
출처 : http://assembly.joins.com/content.asp?board_idx=760&page=9&tb_name=d_econom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