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죽은 지식인의 사회
한국일보의 '메아리'란에서 이준희 논설위원의 칼럼을 옮겨온다. 제목은 '지식인들에 대한 반감'인데, '지식인의 종언'론도 그 사실 유무와 무관하게 하나의 트렌드를 이룬 지 오래됐다. 때문에 새삼스러울 건 없지만, 한번 더 생각해볼 거리는 되겠다. 칼럼과 함께 두어 달쯤 전에 읽어본 소설가 김연수의 칼럼도 옮겨온다. '이 시대 최고의 지식인'이 그 제목인데 예상할 수 있는 바대로 반어적인 내용의 글이다.






한국일보(06. 07. 22) 지식인들에 대한 반감
-5공 출범 전 전두환씨가 국보위원장으로 있던 때니까, 그가 12·12 군사쿠데타와 광주항쟁 무력진압 등을 거치면서 집권행보를 구체화해 가던 시절이다. 당시 신군부 인사들에게 숱한 학자, 교수들의 자천타천 인사청탁이 줄을 이었고, 심지어 주위의 눈을 피해 밤이면 연희동 전씨 집을 찾아드는 이들도 많았다.






-개중에는 뜻밖에 양심적 지식인으로 널리 알려진 이들도 적지 않았다. 이 일은 내심 '배운 사람'들에 대한 외경과 두려움을 갖고 있던 전씨 등 군 출신 인사들이 콤플렉스를 털어버리고 도리어 지식인집단을 우습게 여기는 계기가 됐다. 오래 전 5공 인사의 전언이어서 어느 정도 사실인지 확인할 도리는 없으나 이후 선거 때마다 줄 좀 대보겠다고 몰려 다니는 지식인들의 볼썽사나운 행태로 볼진대 크게 과장된 얘기는 아니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진부하고도 번번이 추상적 논의에 그칠 수밖에 없는 지식인론을 새삼 꺼내는 이유는 요즘 우리 사회 지식인들에 대한 비판적 문제 제기가 부쩍 잦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서울대 정운찬 전 총장은 퇴임사에서 우리 사회에서 더 이상 존경 받지 못하는 존재로 전락한 지식인들의 통렬한 자기성찰과 자각을 호소했다. 앞서 서울대 전상인 교수는 올해 초 펴낸 책 <우리 시대 지식인을 말한다>를 통해 한국을 아예 '죽은 지식인의 사회'로 단정지었다(*최근 출간된 <한국사회 권력이동>에도 한국 사회 지식권력의 이동에 관한 전상인 교수의 글이 실려 있다).






-지식인들에 대한 일반의 인식이 이처럼 크게 떨어지게 된 데는 여러 시대적 요인들이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대중교육의 확산과 정보의 무제한 유통으로 인해 대중이 특정집단의 독점적 지식을 인정하지 않게 된 탓이 크다(*이 문제는 김연수의 칼럼에서 다루어진다). 누구든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필요한 정보나 지식을 얻을 수 있으므로 굳이 지식인들의 판단과 견해에 의지할 필요가 적어진 것이다.
-철학적으로도 현대의 포스트모더니즘적 입장은 사회가치를 창출하고 방향을 제시하는 전통적 지식인의 역할을 인정하지 않는다. 헤겔, 마르크스 등이 만든 것과 같은 큰 틀의 담론이 도리어 다양한 소수견해의 억압기제로 받아들여지는 상황에서 지식인은 그저 대중을 좇거나 그 속의 무력한 일원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나아가 피터 드러커 같은 이는 지식의 정의 자체를 바꿔 버렸다. 지식이란 정보를 특정 업무에 응용하는 능력이므로 실용성을 지닌,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성과를 얻을 수 있는 수단으로서의 지식이 진짜 지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정 전 총장의 말처럼 우리 지식인들이 존중 받지 못하는 정도를 넘어 사회적 반감을 사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 데는 시대상황보다 지식인들 스스로의 문제가 더 크다.
-이 대목에서 정 전 총장이나 전상인 교수는 지식의 도구화와 상품화, 이념적 편향성과 지성의 결핍 등을 공통적 원인으로 지목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소위 지식인들이라는 사람들이 제대로 공부는 하지 않으면서 제 개인적인 이득을 노리고 여기저기 헛된 이름을 파는 데나 여념이 없다는 얘기다.
-그러고 보면 이 정권 들어 유난한 이념적 쏠림 현상도 어떻게든 시류를 타고 권력과 대중의 주목을 끌어 한 자리쯤 얻어 걸치려는 얄팍한 의도가 깔린 것으로 비친다. 지식인들의 말과 글에서 깊은 공부와 성찰이 깔린 아카데믹한 분위기가 점차 사라지는 대신, 경박하고 자극적인 표현과 선동적이고 천박한 공격성이 날로 두드러지는 것도 이런 저의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동전의 앞뒤 면만 바뀌었을 뿐 앞의 전두환씨 집 주변을 얼쩡거리던 지식인들의 처신과 본질적으로 다를 게 없는 행태다.
-아무리 시대가 변해 일반이 기대를 접는다 해도 지식인 스스로는 사회적 보편가치의 수호자로서, 또 올바른 방향 제시자로서의 책임의식과 자부심을 포기해서는 안될 일이다(*더불어 필요한 것은 '사라지는 매개자'로서의 각오이다. 자기 역할을 수행했다면 떡고물이나 기다릴 게 아니라 알아서들 사라져줘야 한다. 지식인의 역할을 필요로 하는 사회는 여전히 불행한 사회이다. 하지만 지식인들이 그러한 역할마저 떠안지 않는 사회는 불운한 사회이며 더없이 초라한 사회이다). 독립적 사고와 자유로운 정신의 회복으로 현재의 반감을 다시 관심과 애정으로 돌리는 것 또한 그들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지성인은 자신의 내부를 끊임없이 동요시키는 현세적 유혹과, 자신의 선언을 줄기차게 회의시키는 타인의 무관심과 싸워야 한다.…' 지식인 사회의 변화를 기대하면서 일찍이 30여년 전 회자됐던 김병익의 경구 '지성과 반지성'을 다시 읽어보길 권한다(*평론가 김병익은 '지성'과 '지식인됨'의 의미를 주요한 화두로 삼은 드문 경우이다. 관련서들의 이미지가 제공되지 않아 주로 그의 산문집들의 이미지를 띄워놓는다).

중앙일보(06. 05. 13) 이 시대 최고의 지식인
-대학에서 강의하는 사람 몇몇과 어울려 저녁을 먹었다. 그 자리에서 우리 시대 최고의 지식인은 모 포털사이트의 지식검색이라는 말이 나왔다. 요즘 대학생은 보고서의 자료 출처를 책 이름 대신에 사이트 주소를 적는다고 했다. 블로그 페이지까지 검색한 경우는 그나마 성의가 넘치는(?) 학생이라고. 궁금해서 나도 지식검색 사이트에 들어가 "인문학은 위기인가"라고 물어봤다. 물론 우리 시대 최고의 지식인은 인문학이 왜 위기인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극복할 수 있는지 다 알고 있었다. 다만 그걸 읽으려면 1200원을 내야만 했다.



-하지만 이 주제를 놓고 다운로드한 숫자를 보니 두 번에 불과했다. '인문학의 위기'라는 건 별로 경제성이 없기 때문에 조만간 우리 시대 최고의 지식인께서는 이에 대해 곧 입을 다물 것 같다. 대신에 그분은 이력서나 자기소개서 작성법에 관심이 많은 것 같았다. 이력서 쓰는 방법에 대해서는 210건이 넘는 답변이 있었고 대부분 100번 이상씩 팔려나갔다. 아연실색한 내게 우리 시대 최고의 지식인은 "문제는 경제인 거야, 이 멍청이야"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그런 점에서 우리 시대 최고의 지식인은 정직하다. 취업과 성장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면 지식 따위는 헛된 것에 불과하며 도태되는 게 옳다고 암시한다.
-물론 나는 멍청이가 아니므로 경제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안다. 쫄쫄 굶어죽는 한이 있어도 책을 끼고 살겠다는 각오 따위는 내게 없다. 나는 풍요롭게 살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풍요와 경제성장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해 우리 시대 최고 지식인은 "경제성장이 꼭 풍요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친절하기도 하여라. 그분의 말씀대로 풍요롭게 살고 싶다는 내 소망이 반드시 국가 경제를 발전시켜야만 이뤄질 수 있는 건 아니다.



-타이타닉 현실주의라는 말이 있다. C 더글러스 러미스가 <경제성장이 아니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라는 책에서 쓴 말이다. 풍요롭게 살기 위해서는 경제를 발전시켜야만 한다는 주장을 그는 빙산을 향해 돌진하는 타이타닉호에 비유한다. 타이타닉 현실주의에 따르면 곧 빙산에 부딪치므로 타이타닉호를 당장 멈춰야만 한다고 말하는 건 요리를 만드는 요리사나 엔진에 연료를 주입하는 선원에게는 비현실적이고 비상식적이다. 타이타닉호가 멈추게 되면 요리사나 선원은 더 이상 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도 중요한 건 경제가 아니라 당신의 삶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이런 딜레마에 대해 러미스는 삶에서 경제라는 요소를 조금씩 줄여나가자고 주장한다. 시장 바깥에서 즐거움을 찾자는 소리다. 그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문화적이고 정신적인 즐거움을 누리자고 주장한다. 아무도 다운로드하지 않을 이런 답변을 러미스가 서슴지 않는 까닭은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얼굴을 한 경제가 아니라면, 그게 우리의 중요한 문제가 될 수는 없는 법이다.
-기업의 돈을 빼돌린 사주가 구속되는 순간에도 사람들은 경제를 걱정한다. 인간이 마땅히 지켜야만 하는 규범이나 가치도 그 순간만은 우선순위에서 밀려난다. 그건 국가 경제와 삶의 풍요로움을 혼동하기 때문이다. 내게는 의문이 하나 있다. 이 몇 년 동안 우리 경제가 난파 지경에 이르렀다는 소리를 수없이 들었다. 하지만 외국에 나가면 몇 년 전에 비해 한국을 바라보는 시선이 많이 달라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인정한다. 이 모든 것이 밤낮없이 경제활동에 매달린 기업인 덕분이다. 그렇다면 난파된 것은 무엇일까? 그건 우리가 소망했던 풍요로운 삶이 아닐까? 이 물음에 대해 우리 시대 최고 지식인께서는 묵묵부답이다.
06. 07.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