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우리의 값싼 낭만에 대하여

작년말인가 올초인가 '조중걸 교수와 함께 열정적 고전 읽기' 시리즈가 10권짜리로 갈무리되어 언론에 주목을 받은 바 있고, 나도 관련 페이퍼를 쓴 적이 있다. 그리고 최근에 같은 저자의 <키치, 우리들의 행복한 세계>(프로네시스, 2007)가 '지식 전람회' 시리즈의 한권으로 출간됐는데, '키치'와 관련한 문헌이 드물던 차에 요긴한 책이 한권 출간됐다는 인상을 받았다(물론 '지식 전람회' 시리즈가 대중적인 인문학을 표방하고 있는지라 말 그대로 '전람회'에 그치는 듯싶은 책들이 더러 있지만). 우연히도 이 책에 관한 리뷰들을 검색하다가 읽게 된 글 두 꼭지를 자료삼아 옮겨놓는다. 하나는 한겨레21에 실린 서평기사이고, 다른 하나는 강유원씨가 미디어오늘에 실은 'Book소리'이다. 저자 조중걸씨에 대한 궁금증을 몇 가지 제시하고 있다.

한겨레21(07. 02. 02)  우리의 값싼 낭만에 대하여

<열정적 고전 읽기>로 놀라운 해박함과 독서 편력을 보여줬던 조중걸 교수가 <키치, 우리들의 행복한 세계>(프로네시스 펴냄)라는 책을 냈다. 이 책은 묵직한 문체로 현대사회의 키치에 대해 매우 독창적인 성찰을 하고 있다. 조 교수는 키치를 단순한 ‘그림 쪼가리’가 아니라 근대 이후 우리 삶의 태도와 세계관으로 확장시킨다. 그리고 근대 이후 예술사와 철학사를 키치에 대한 다양한 작용과 반작용으로 설명한다.

그렇다면 과연 키치란 무엇일까. 지은이의 비유를 빌리면 키치는 고전예술과 통속예술 사이에서 ‘양의 탈을 쓴 늑대’(고급예술의 탈을 쓴 저급예술)의 모습을 하고 있다. 고전예술은 감상을 위해 상당한 양의 교양과 긴장을 필요로 한다. 좋은 예술일수록 거짓 기만이나 타협을 하지 않고 진실을 보여준다. 반면 통속예술은 가장 저급한 현실 도피이고 오직 소비를 위한 문화이다. 산업혁명 이후 탈진할 정도의 노동시간에 짓눌린 시민들은 싸구려 감상을 통해 숨을 돌렸다. 키치는 위선적인 통속예술이다. 싸구려 감상에 호소하면서도 고급예술에서 한자리를 요구한다.

고급예술이 작품과 독자의 직접적인 만남을 전제한다면 키치는 작품과 독자 사이에 ‘환상’이 끼어든다. 예컨대 음악이 그 자체로 감상되는 게 아니라 헤어진 옛 애인과의 추억을 상기시킨다든지, 어떤 그림에서 어린 시절의 경험을 떠올린다든지 하는 식이다. 이것을 지은이는 키치가 불러내는 ‘이차적 눈물’이라 부른다. 키치는 이런 식으로 작품과 독자를 직접 대면시키지 않는 이중적 예술이다. 키치의 가장 큰 해악은 현실 옹호적이라는 점이다. 키치 안에서 세계는 늘 조화롭고 통일적이다. 키치는 대중들이 실존과 불안을 직시하지 못하게 눈을 가리고 세계의 가능성을 닫아버린다. 이것을 슬로건으로 표현하자면 “아아, 인생은 아름다워라”이다. 지은이는 프랑크푸르트학파보다 훨씬 과격한 대중문화의 적이며, 키치문화의 고발자다.

키치는 지극히 근대적인 예술이다. 자본주의와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예술에서만큼은 엄청난 해악을 끼쳤다. 산업혁명 이후 노동을 통한 자아실현이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이제 자아실현은 소비를 통해서만 달성될 수밖에 없다. 진정한 예술은 대중에게 불친절하며 고도의 집중력과 몰입을 요구한다. 그러나 키치는 편안하고 달콤한 예술이다. 혹은 대중의 슬픔이나 우울을 싸게 팔아먹는 시큼한 예술이다. “키치는 민주적이고 중간적이고 조촐한 것, 즉 프티부르주아적인 것이다.”

근대적 이성의 파탄은 키치를 번성시키는 토양이다. 신을 ‘불가지’의 영역으로 추방한 이성은 두 번의 세계대전과 함께 몰락했다. 합리적 세계라는 신념은 여지없이 부서졌다. 키치는 이런 절망의 토양에서 자라났다. 키치는 가장 나쁜 방식으로 나와 세계의 화해를 주선한다. 거짓된 위안, 달콤한 사탕발림, 위선의 낙원…. 키치가 보여주는 아름다운 세계는 실재하지 않는다. 다만 실재하는 척할 뿐이다. 이 시대에 키치는 예술에 안주하지 않고 다양한 사물들의 옷을 입고 나타난다. 상품의 사용가치와 아무 상관없는 이미지를 보여주는 상품광고들, 온갖 양식들이 비빔밥처럼 병렬된 강남의 건축물들, 고객을 헛된 꿈으로 인도하는 백화점 등이 그것이다.

지은이가 제안하는 키치의 개념을 이해했다면, 이제 우리는 지은이를 따라 좀더 복잡하고 내밀한 예술사로 여행을 떠나야 한다. 키치에 저항하는 다양한 근현대 예술사조들. 다다이스트들은 예술의 인습성과 구태의연함, 자기만족, 부르주아적 허위의식 등에 내재한 키치적 요소들을 철저히 파괴하려고 했다. 현대미술의 기하학주의는 키치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 가식적 진지함을 벗겨내려 한다. 인상주의자들은 인습으로 굳어진 시각상을 해체한다. 인상주의는 부르주아들이 세워놓은 가치의 전복이기 때문에 부르주아들의 혹독한 반발에 직면해야 한다.

지은이의 논의는 키치를 해체하고 넘어서려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다양한 기법들로 이어진다. 여기에는 몰입과 카타르시스를 넘어서는 브레히트의 소격효과가 있고, 자신을 부정하는 예술인 메타픽션과 실체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네오리얼리즘 등이 있다. 후반부의 복잡한 논의에 길을 잃은 독자라면 지은이가 서두에 제기한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보는 게 좋겠다. “언제까지 값싼 거짓 낭만과 삶의 역겨운 기만적 행복 속에 몸을 담그고 있을 것이냐.”(유현산 기자) 

미디어오늘(07. 02. 04) 석학에 관해 궁금한 두세 가지

대형서점에 가보면 ‘논술’이라는 항목에 꽂혀있는 책만 서너 서가를 넘는다. 그것은 공식적으로 분류된 경우이고, 저자 서문이나 띠지(책표지에 두르는 광고지)에 논술 관련임을 알린 것까지 치면 훨씬 더 많은 책들이 그 부류에 속하게 된다. 논술관련 책을 써서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고, 베스트셀러로 만들어 볼 생각이 있는 사람이나 출판사는 서점에 가서 서가를 한번이라도 둘러보는 게 좋을 듯도 하다. '저 많은 책들 틈에 끼어들 내 책을 어떻게 사람들이 뽑아들고 계산대로 가게 할까’를 고민하면서 말이다(*강유원도 그이들에 포함되는 것인가?).

논술 책에 가담하는 필자들도 정말 다양해졌다. 항생제를 많이 먹으면 내성이 생겨서 웬만한 약은 약발을 받지 않듯이, 중고등학생에게 논술을 가르치기에 딱 적당한 이들이라 여겨지는 사람들만이 아닌 이른바 석학들까지도 가세한 형국이다. 지난 연말 그 많은 논술 책 틈에 10권짜리 참고서가 덧붙여졌다. 띠지에 ‘생각의 폐활량을 높여라!-논술 달인을 위한 비밀 레시피’라는 문구를 단 <조중걸 교수와 함께 열정적 고전 읽기>가 그것이다.

어느 인터넷 서점에서 찾아본 저자 소개는 다음과 같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재학 중 프랑스로 유학하여 파리 제3대학에서 서양문화사와 서양철학을 공부했다. 미국 예일대학에서 서양예술사(미술사·음악사·문학사)와 수학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With a View to George', <영상의 시대, 관념의 시대> 등이 있다.”

“논술 달인”을 만들기 위한 턱없이 강한 처방처럼 보였다. 공부라는 게 수준과 단계가 있어 그에 알맞는 선생에게 배우는 게 가장 좋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그의 저서 'With a View to George'라는 책을 외국서점에서 찾아보았다. 내가 검색을 잘못한 탓인지 찾을 수 없었다(*나도 검색해봤지만 찾지 못했다. 하긴 모든 책이 다 검색되는 건 아닐 테니까).

그가 쓴 또다른 책인 <영상의 시대, 관념의 시대>를 검색해 보았다. 그랬더니 1999년에 개마고원 출판사에서 펴낸 <인물과 사상> 11권에 같은 이름의 논문이 보였다. 거기서 몇 가지를 옮겨보면 이렇다. “키취, 그 이해와 극복-키취는 우리 마음 속에 있다(제10권)” “영상의 시대-영상의 시대, 관념의 시대 3부작(제11권)”, “관념의 시대 / 조송배의 ‘영상의 시대 관념의 시대’ 4부작(제12권)”(*강유원씨 덕분에 알게 된 건데, 나는 '조송배'씨의 글들을 이전에 읽은 기억이 있다!) 

그런데 그 글을 쓴 이는 조중걸이 아니라 조송배였다. 개마고원 출판사의 저자 소개를 보았다. “파리 제3대학과 예일대학에서 예술사를 전공했으며, 캐나다 토론토대학에서 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캐나다에 체류하면서 예술사 집필에 전념하고 있다. 저서로는 'With a view to George'가 있다.” 나는 조중걸과 조송배가 동일 인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올해 초 나의 궁금증을 해소해줄 만한 인터뷰 기사가 어느 신문에 실렸다. 그 기사에 따르면 그는 “프랑스 파리3대학(소르본) 유학, ‘스승으로 만나 친구로 헤어진’ 조르주 뒤비의 지도로 서양예술사와 서양철학을 전공, 미국 예일대로 건너가 문학사와 수리철학으로 2개의 석사학위, 미술사 음악사 수리철학으로 3개의 박사학위를 획득”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인터뷰에는 내가 궁금했던 것들, 이를테면 'With a View to George'라는 책은 언제 어디서 출간된 것인지, 그게 그가 썼다고 하는 “몇 권의 대학 교재(영문)”인지, 조르주 뒤비는 서양중세사 전공자인데 어떻게 그 밑에서 서양예술사와 서양철학을 전공할 수 있었는지, 1950∼ 60년대에는 리용, 브장송, 엑상 프로방스 대학에서 교수를 하다가 70년대에 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가 되었던 뒤비가 과연 80년대에 파리 3대학에서 학생을 지도하기는 했었는지, 예전에 <인물과 사상>에 쓴 글들이 있는데 그건 어찌된 것인지 등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자질구레한 것들이지만 궁금하기는 지금도 마찬가지다.(강유원)

07. 02. 06.

 

 

 

 

P.S. <열정적 고전 읽기>는 저자의 이력을 표나게 내세웠던 책들인 만큼 그 사실 여부가 궁금한 것도 사실이다. 지난번 페이퍼에서 살짝 언급했듯이 가령 '미술사 음악사 수리철학'이라는 각기 다른 분야의 박사학위를 세 개나 받는 것이 '물리적으로' 가능한지 의구심이 드는 것이다(세 분야의 강의를 들어봤다, 정도는 가능하겠다). 강유원씨는 나보다 더 강렬한 궁금증을 가졌던 모양으로 덕분에, 조중걸씨가 조송배씨이며 예전에 <인물과 사상>에 몇 편의 글을 썼다는 이력을 알게 됐다(당시 <의미만들기와 의미찾기>(개마고원, 2001)의 저자 '조흡' 교수와 함께 기억에 남는 외부필자였다). 조송배/조중걸 교수의 '키치론'도 <인물과사상> 10호에 게재된 바 있는데, 이번에 나온 <키치, 우리들의 행복한 세계>는 그 확장판이 아닐까 싶다. 예전에 필자는 이렇게 적었다. 

키치하면 우선 연상되는 게 시골이발소 그림이다. 최후의 만찬, 모나리자, 물레방아가 있는  풍경, 고풍스런 중세건물,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성모 마리아 상 등등. 요즘은 진부한 이발소 그림 대신 경음악 메들리로 편곡된 베토벤 교향곡, 뉴에이지, 판타지 소설과 영화 따위로 바뀌었다. 적당히 아름답고 감미로우며, 부드럽고 평이해서 오로지 안락함만이 느껴지는 키치. 단순성의 미학. 시큼하고 느끼한 그것.(...) 키치는 나름대로 고상함을 가장하고 있어 통속 대중예술과는 차원을 달리 한다. 하지만 감상하는데는 굳이 고통스런 훈련,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치 않다. 한눈에 명확하고, 쉽게 각인 될 수 있도록 인상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 키취는 민주적이고 중간적이고 조촐한 것, 즉 프티부르주아적인 것이다. 키취는 단지 숫자만을 고려하며, 절대 다수의 적당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을 위한 민주적·공리적 예술양식이다. 고도의 집중과 오랜 훈련을 요구하는 모욕적인(?) 고급예술과는 반대로 키취는, 감상자의 마음에 스미며 그 달콤함(때로는 시큼함)으로 추근댄다. 키취는 독창성과는 반대의 예술양식이고, 탁월함에 대한 범용함의 승리이며 천재에 대한 재능의 승리다.

그리고 이어서 몇 호인지는 모르겠지만, '영상의 시대, 관념의 시대'를 다룬 연재에서 '사실주의'에 대한 대목. 러시아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이름이 거명되고 있어서 눈길이 간다. 참고삼아 읽어볼 만하겠다.  

사실주의자들이야말로 우리 앞에 영상을 제시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사물과 사건과 인물에 대한 어떤 관념도 배제한 채로 그것들을 그 직접성의 빛 아래 우리에게 제시한다. 그리고 사실주의가 거둔 이 풍부한 결실이 어떠한 종류의 것인가는 다른 한 명의 천재적인 사실주의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음으로써 알 수 있다. 그의 작품들이 지닌 이를 데 없는 매력이 그 내용에 있다고 잘못 인식되어 왔다. 이를테면, 추리소설적인 구성, 그로테스크하고 때때로는 악마적인 사건들의 연속, 주정적인 이국적 격정 등, 그러나 이것은 충분한 설명이 되지 못한다. 이러한 요소들을 모두 지니고 있으면서도 걸작이 못 되는 작품들이 얼마든지 있고, 또 그의 작품들의 이러한 요소에 우리가 눈을 감는다고 해도 그것들이 걸작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의 소설들의 두꺼운 볼륨과 거기에서 다루어지는 시간의 짧음의 대비는 충격적이다. 『죄와 벌』이나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나 『백치』나 모두 대단한 장편들이지만 시간은 지극히 압축되어 있다. 그러나 읽어 나가기에 전혀 따분하지 않다. 오히려 대단히 격렬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다채로운 사건을 중첩시킴으로써-호메로스의 『오딧세이』가 그렇듯이-가 아니라, 오히려 단순한 사건 속에서 한없는 대화와 마음의 움직임과 소품적 디테일을 중첩시켜 그 박진성을 얻어내는 것이다. 사건의 중첩이 강도를 높인다는 것은 중세의 로망에서나 통하는 이야기이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밀도는 말도 안 되는 어거지의 사건들을 이어나감으로써가 아니라 단일한 사건의 그 미세하기 짝이 없는 구성요소를 확산적으로 표상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다. 즉, 그의 작품은 사건이 적은데도 불구하고 박진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기 때문에 박진적인 것이다. 독자는 지칠 줄 모르게 분출되는 그의 주인공들의 대화와 끊임없이 흐르는 디테일로부터, 개념상으로는 도저히 얻어낼 수 없는 생동하는 주인공, 발생 상태의 주인공을 만나는 것이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가 주는 영상적 효과는 자못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는 언제나 한 인물을 도입하기 전에 그 인물의 소개를 장황하게 늘어놓는다. 이것은 그의 선배인 투르게네프나 푸슈킨이나 고골리의 양식을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먼저 그가 누구의 아들이고 어떤 계급에 속해 있으며 어떤 성격의 사람이고 어떻게 살아 왔는가를 설명함으로써, 한 일문에 대한 확고한 정의를 내려버리는 비사실주의적 요소를 보이는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라임 라이트만을 제외하고는 모든 곳을 어둡게 만드는 무대장치와 같다. 그러나 주인공의 실재는 어둠 속에서 뛰어드는 새로운 인물들에 의해 밝혀진다. 주인공들은 무대에 뛰어들자마자 애초에 제시되었던 관념상 속의 인물들과는 완연히 모순되는 모습을 드러낸다. 제시된 장면들은 그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아무런 설명도 없이 관념과는 상반되는 인물을 연기하는 것이다. 이것은 영상이 관념을 배신하는 것이다.

방탕하고 광기어린 정열의 소유자로 소개되는 미쨔는 순진하고 자유분방한 영상적 제시에 의하여, 그의 전체상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 이상한 모순을 불러일으킨다. 난폭한 생명력과 정열이 시적 민감성과 명예에의 존중과 더불어 존재한다. 그는 부친 살인범의 선고를 받는다. 사실 그는 아버지의 죽음을 바랐고 죽일 생각까지 있었다. 따라서 그가 아버지를 죽이지 않은 것은 우연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동기 때문에 미쨔는 기꺼이 십자기를 진다. 이것이 받탕하고 난폭한 사람의 모습인가? 그러나 모순적으로 제시되는 그의 주인공들은 다른 작가의 일관된 주인공들보다 훨씬 선명하고 사실적이다. 우연적 모순이 오히려 내적 일관성을 주는, 사실주의가 지닌 영상적 효과라고 할 만한 것이다.

철두철미 악의 화신인 표도르는 오히려 가여운 속물, 교활한 야바위꾼, 질투에 눈먼 졸장부, 천박한 어릿광대로 묘사됨으로써 그 생명력을 얻는다. 악 그 자체에다 그것이 지닌 파렴치함과 난폭함에 덧붙여 누구에게나 발견되는 이러한 악들을 병치시킴으로써 새로운 조명을 비춘 것이다. 이렇게 되어 이류의 소설 속에서 얻게
되는 그 미이라 같은 악의 화신, 철두철미하고 악마적인 뉘앙스로서의 악인이 배제되고, 살아 있는 악의 화신, 생동하는 악의 화신을 우리는 '보게' 되는 것이다.

이들 주인공들에 대해 작가의 설명에 의해 도입된 정의는 그 정의로부터 독립된, 그리고 주로는 모순되는 그들이 생생한 '영상'들이 제시됨에 따라 독자와 더불어 생성(becoming)과정 중에 있게 되는 것이다. 이 관념과 영상의 두 개념상은 서로 부합되는 것이 아니 것이므로, 여기에 부딪힌 감상자들은 이 모순되는 사실들을 어떻게든지 통일시켜 정의해 보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하게 된다. 이 인물상들을 통일시켜 이해하지 않는 한 늘 이 교차점에서 그들을 놓치고야 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삶 역시도 이 소설적 현실과 다를 것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우리에게 의미가 있고 중요하기 때문에 어떡해서든지 이해하려 애쓰는 한 대상을 생각해 보자. 그는 우리에게 기지의 인물로서 제시되었는가? 마치 한 의학자가 심장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를 내릴 때처럼 그렇게 정의가 내려진 인물로서 우리에게 다가왔는가? 그렇지 않다. 그는 한 개념적 대상물로서가 아니라 우리의 이해와 소유로부터 독립된, 그리하여 복잡하고 일견 모순되어 보이는 여러 개성을 지닌 채로 다가온 것이다. 우리는 이 사람을 포착하고 소유한 채로 삶을 살아나갈 수는 없다. 같이 살아나가야 하고 영원히 이해하도록 애써야 하고, 결정되어 있는 관계로서가 아니라 생동하고 갱신되어가는 관계로서 받아들여야 한다. 도스토예프스키가 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것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주인공들은 감상자가 그들의 비밀을 뚫고 육박해 들어오는 것을 쉽지 않게 한다. 그들은, 그들에 관해 형성시키고자 애쓰는 독자의 관념으로부터 독립하여 거기에 자신들을 부합시키기를 단호히 거부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어 그들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여 하나의 효과적인 실상으로 변모해 나간다. 그는 이러한 효과를 장황한 심리묘사에 의해서가 아니라 지칠 줄 모르고 전개되어 나가는 주인공들의 대화에 의해서 얻어낸다. 그의 모든 소설은 연속되는 사건의 중첩이라기보다는 장면의 중첩이다. 그 각 부분은 연극의 극과 같은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한없이 많은 디테일을 설명 없이 제시함으로써 극적인 영상효과를 얻어내면서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어떤 인물을 창조했느냐가 아니라, 그 인물을 어떻게 창조 했느냐가 되는 것이다.
 


거대하고 통일적인 세계상이 해체되어가는 이 시대, 예술은 예술만의 것으로 수렴되는 이 시대, 그렇기 때문에 직관과 감각과 영상이 점점 더 중요성을 더해가는 이 시대에,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의 시대정신을 비교할 수 없는 설득력을 지닌 채로 그의 소설 속에 구현한 것이다. 원한다면 관심을 그가 가난한 간질병 환자였고, 도박벽 때문에 끊임없는 모욕 속에 산 사람이었고, 숭고한 인간정신을 가진 사람 이었고, 종교적 문제에 끊임없이 집착한 천재였다는 데에 둘 수도 있다. 그리고 그가 심오한 관념을 구축했다는 데에 둘 수도 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초인은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알렉세이는 기독교적 사랑이라는,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음란이라는, 키릴로프는 자살함으로써 신이 되고자 하는, 이러한 관념들에 관심을 기울일 수도 있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는 이것으로 위대한 예술가가 된 것은 아니다. 그는 하나의 작가, 자기 직업에 충실했던 숙련된 장인이었지 그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사실주의 시대의 소설적 기법에 있어 최대의 거장이었고 소설형식의 최고의 개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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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질적연구방법론를 고민하는 새내기 연구자들을 위해
문화와 역사 연구를 위한 질적연구 방법론
윤택림 지음 / 아르케 / 2004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대학에서 대학원에서 졸업을 앞두고 혹은 학위를 목적으로 논문을 준비 중인 사람에게 가장 큰 스트레스는 무엇보다 논문이라는 낯선 형태의 글쓰기이다. 오랫동안 남들의 논문을 읽고, 교정을 보고, 교열을 하는 동안 익숙해질 만큼 익숙해진 것이 논문이지만, 막상 제 손으로 그것을 써야 하는 입장에 처해있는 나 역시도 논문쓰기라는 것을 눈앞에 두고는 어느 정도 중압감에 시달리고 있다. 논문을 과학적 글쓰기라고 한다면 그 까닭은 논거를 제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논거를 제시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자료를 바탕으로 하는 글쓰기를 해야 한다는 것인데, 일단 충분한 자료를 모으는 것이 쉽지 않다. 또 해당 분야에 충분한 연구성과들이 축적되어 있는 경우라도 여기에서 자신만의 논리를 펼쳐나가야 하기 때문에 이번엔 신선미가 결여된 논문이 되기 십상이다. 자료라는 것은 많으면 많은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대학(원) 교육이 고등학교 교육과 구분되는 것이 더이상 누가 시켜서 하는 공부가 아니라 스스로 하는 공부라고는 하지만 움베르토 에코 같은 이가 논문 쓰는 법으로 책까지 쓴 것을 보면 논문 쓰는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것이 우리만의 문제는 아닌 듯 싶다. 하지만 대학에서 이와 같은 것을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것 같지는 않다. 대개는 논문쓰는 막바지까지 지도교수와 일대일 면담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혹은 충분히 헤맬 만큼 헤맨 뒤에야 비로소 얻게된 깨달음으로 악전고투하며 전진하데 된다. 그것이 공부라면 공부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우는 입장에서는 뭔가 명확한 연구방법론을 제시받길 원하기 마련이다. 윤택림의 "문화와 역사연구를 위한 질적연구 방법론"은 최근 학계에서 크게 각광받고 있는 문화기술지(etnography)의 연구방법론이다.

대개 과학적인 논거로 제시되는 것들은 백분률로 표시되는 통계이다. 자연과학에서 실험이 중시되는 것처럼 사회과학 분야에서 언제나 중시되는 것이 무슨무슨 지수와 같이 수치화된 것들인데, 그러다보니 사회학 입문자들은 무수한 통계와 서베이 결과물들에 어리둥절해 하거나 이것을 신봉하도록 훈련받는다. 기존의 연구방법론들은 이와 같은 양적조사방법론만으로 이른바 과학적인 조사방법론으로 받아들이며 현재에도 학자에 따라서는 여전히 질적방법론을 학문적이지 않다거나 비과학적인 연구방법론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 윤택림은 양적인 방법만으로는 사회를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없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질적방법론의 출현은 기존의 연구방법론, 실증적 방법론이 지닌 한계로 인해 출현했다. 가장 대표적인 분야가 페미니즘이다. 페미니스트들은 기존의 가부장적 사회에서 형성된 사회과학이 여성의 경험을 제대로 다룰 수 없다고 보았다. 공식적인 역사, 공식적인 기록에서 여성이란 범주가 등장한 것 자체가 오래지 않았던데다가 외견상 가치중립적인 듯 보이는 이와 같은 연구방법이 실제로는 당파적이고 중립적이기 어렵다는 것이 그것이다. 문화가 그러하듯 지식 역시 역사의 전개과정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역사가 보여준다. "과학 역시 역사적 담론의 한 형태"라는 것이다. 연구자와 연구대상 사이의 객관이란 하나의 허구이며, 실제 연구의 현실이 될 수 없다. 다시 말해 우리의 일상이 매순간 정치적인 선택의 연속인 것처럼 학문이나 과학도 정치적인 선택의 연속선상에 놓인다는 사실을 이제 겸허하게 인정하자는 말이다.

질적연구방법론은 문화인류학자들의 현지조사 과정에서 연원한 것으로 최근 우리 학계에서 유행하고 있는 인터뷰를 이용한 구술사 방법론, 참여연구 등이 모두 이런 연구방법론에 해당한다. 저자 역시 인류학자이고, 그 자신이 이와 같은 방법론을 이용해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그렇다고 저자가 질적연구방법론만을 예찬하고, 기존의 양적방법론을 폄하하는 입장은 아니다. 양적방법론의 한계와 마찬가지로 질적방법론의 문제점도 고르게 지적하고 있다. 예를 들면 질적방법론은 연구자가 연구대상자를 착취하는 연구로 전락할 수 있으며 연구자 스스로 성찰하는 자세를 취하지 않을 경우엔 객관성을 상실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질적연구가 특수한 문화적 양식에 대한 연구라 할 지라도 일반화는 필요하다는 것이다. 최근 몇 권의 논문을 읽었는데, 연구자들이 밝히고 있는 참고문헌에 이 책이 수록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내 선택이 그릇되지 않았음을 새삼스레 확인하며 혹시라도 질적연구 방법을 이용하여 자신의 연구를 진행하고 싶은 분들이 있다면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 이외에도 꽤 여러 종의 책이 있지만, 녹음기 사용법 같은 소소한 부분부터 질적연구와 양적연구의 비교, 역사연구와 생애사 등등 다양한 부분에 대한 접근방식까지 난이도가 있는 주제까지 차근차근 알기 쉽게 잘 설명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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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프로이트가 햄릿을 만났을 때

커피 브레이크 시간에 신간들을 둘러보다가 제목 때문에 클릭하지 않을 수 없었던 책은 제드 러벤펠드의 <살인의 해석>(비채, 2007). 분류상 '외국문학'이고 '미국문학'이고 '추리문학/미스터리'이다. 이런 부류의 책에 별로 흥미를 갖고 있지 않은데 (물만두님보다 먼저!) 소개를 거들게 된 건 순전히 제목에 대한 흥미 때문이다. <살인의 해석>?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에 대한 비틀기 아닌가.

책에 대한 정보들을 읽어보니, 일단 저자가 흥미롭다. "프린스턴 대학 재학 당시 졸업논문으로 프로이트를 택했고, 줄리아드 연극원에 진학해 셰익스피어를 전공했다. 2007년 현재 예일대학 법과 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 <살인의 해석>, <사법부에 의한 혁명 - 미국 헌법의 구조>, <시간 속의 자유 - 입헌 자치 정부 이론> 등이 있다"고 소개돼 있는데, 간단히 말해서 멀쩡한 법학자인데다가 명문 법대 교수가 아닌가(그의 아내마저 직장 동료라고 한다). 웬 스릴러? 아무래도 '문학적 끼'를 주체하지 못했나 보다. 미 헌법 전문가로 돼 있는데, 아무래도 전공은 형법쪽이어야 했을 거 같고.

더 찾아보니 <살인의 해석>은 그의 첫 소설이다. 원저는 작년 9월에 나왔으니까 불과 6개월도 되지 않아 한국판이 나온 셈(이 순발력이라니!). 거의 '동시출간'이라고 봐야겠다. 일본소설들의 경우도 그렇거니와 이런 장르소설들에 오면 '문학의 위기'라는 게 적어도 상업적으로는 엄살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그러니까 그 위기는 그냥 '특정한 한국문학의 위기'로 이해해야 하지 않나 싶고(물론 고진이 말하는 진지한 '근대문학'이라고 할 때는 사정이 또 다르지만).

소개에 따르면, "미국의 법률학자 제드 러벤펠드가, 20세기 사상가 프로이트와 융의 학설을 바탕으로 쓴 범죄 추리극.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건들을 꼼꼼히 취재해 프로이트와 융을 살인사건에 개입시켰다. 20세기 초반 뉴욕의 풍경이 소설 속에서 생생히 묘사되며, 프로이트와 융의 정신분석학이 이야기 속에 아로새겨진다. 이야기는 프로이트가 실제로 미국을 방문한 해인 1909년 뉴욕을 배경으로 시작된다. 당시 뉴욕은 건축 산업의 발전으로 인해 인간의 어두운 욕망을 닮은 마천루들이 매일 경쟁하듯 세워지고 있었다. 그 고층 빌딩에서 어느 날 미모의 여성이 살해되고, 프로이트가 그 사건에 개입하게 된다." 

Jed Rubenfeld's The Interpretation of Murder is one of the new historical fiction titles that publishers and booksellers predict will be hot this fall.

그러니까 프로이트의 이론을 살인 해석에 갖다 쓰는 게 이나라 프로이트가 직접 등장하는 소설인 것. 현지에서 나온 한 서평을 보니 '프로이트가 햄릿을 만났을 때'란 제목을 달고 있다. 서평이라기보다는 작가 탐방 같은 기사이군. 책은 아직 나오지 않았으니까 기사부터 쉬엄쉬엄 읽어두면 되겠다.

 The Scotsman Sat 29 Jul 2006

When Freud met Hamlet

JACKIE McGLONE

JED RUBENFELD WEAVES HIS SILVER BMW SPORTS car expertly around the wide streets of New Haven, Connecticut, sighing heavily and murmuring that he wishes he could leave the country over the next few weeks. Certainly, he could afford to escape. The law professor at Yale University has recently received a whopping seven-figure sum for the sale of his first novel. He refuses to confirm the exact figure, but it is thought to be a US record.

Running away is not an option, however, since Rubenfeld becomes deputy dean of the law faculty at Yale in the autumn and his book, The Interpretation of Murder, is due out here next month and in September in the US. Already something of an international publishing phenomenon, the novel has been sold in 28 countries and his publishers have flown in fleets of booksellers to meet the "spectacularly entertaining storyteller". Soon, he faces a long, gruelling book tour across the States.

For once, though, the hype is not exaggerated. Rubenfeld's The Interpretation of Murder is a classy, literary crime novel that's also a thrilling, heart-in-the-mouth read. Set in early 20th-century Manhattan, it takes its inspiration from Sigmund Freud's visit to New York in 1909, accompanied by his protégé and rival Carl Jung. Once you start reading the atmospheric 400-page book, it's impossible to put down. Someone should snap up the film rights.

Bestseller-dom beckons, I tell 47-year-old Rubenfeld. He looks doubtful and insists that he awaits publication with trepidation. "I just don't want to be in this country when the reviews come out," he says over lunch.

His last book - Revolution by Judiciary: The Structure of American Constitutional Law - sold all of six copies when it came out last year. "And four of those were bought by members of my family!" Nonetheless, he has been described as "the most elegant legal writer of his generation," and his first academic tome, 2001's Freedom in Time: A Theory of Constitutional Self-Government, was acclaimed.

But, he says, a work of fiction is something else entirely, although "a very great deal" of The Interpretation of Murder is fact-based. "It's not a genre of literature with which I was familiar," says Rubenfeld, although he's since read Caleb Carr's The Alienist and Matthew Pearl's The Dante Club, and admires both. He wrote his first draft in six months. "It's doubly odd to me because I've never written a line of fiction before - The Interpretation of Murder just poured out.

"I was re-reading EL Doctorow's Ragtime while writing my own novel, mainly for his marvellous descriptions of turn-of-the-century New York, and I'd forgotten that Freud's visit to New York is mentioned in that book. He's a tremendous writer - if only I'd an eighth of his talent - but the details about Freud are not all that accurate because Doctorow is doing something much more fanciful than I am."

Rubenfeld spent months researching his novel. "You can get old newspapers on the internet now - a tremendous resource," he says. "I put countless hours into researching the New York City of 1909, which was far more fascinating than the city of my imagination. Sadly, I lack a vivid imagination. Taking so much from real life made the whole book possible."

As for the novel becoming a bestseller, he jokes: "I have to have a bestseller for my own self-respect." His wife is Amy Chua, also a professor of law at Yale. Her book, World On Fire - based on her immensely readable academic essays - argues that when Third World countries embrace democracy and free markets too quickly, ethnic hatred and even genocide can result. It has become an international blockbuster, reaching the dizzy heights of the New York Times bestseller lists this spring.

His wife is brilliant, he tells me over black bean soup. Indeed, The Interpretation of Murder was her idea and she's his most acute critic, along with their daughters, Sophia (13) and Louisa (10), who saw mistakes in the novel no-one else had spotted, starting on the very first page. For instance, Louisa noted that the sentence "Even the keening gulls could be only seen, not heard" should read "Even the keening gulls could be only heard, not seen".

"It took a ten-year-old to point this out, after the manuscript had been read by five or six editors, proofread by a dozen others, and countless agents!" he exclaims. "Our daughters are little geniuses; I don't know what we're going to do with them."

For Sophia and Louisa, he wrote a bowdlerised version of The Interpretation of Murder, lest anyone accuse him of corrupting minors since the book takes in not only the moneyed salons of Gramercy Park and glamorous society balls, but opium dens in New York's Chinatown, sleazy brothels and mental asylums. It also includes Rubenfeld's unique take on Freudian theory and the eternal mysteries of Hamlet, as well as discussions and descriptions of certain sadistic sexual practices.

The novel opens with Freud's arrival in New York to deliver a series of lectures at Clark University, in Worcester, Massachusetts. Shortly afterwards, the bound, whipped and strangled body of a wealthy young debutante is discovered in a luxurious Manhattan apartment. When another wealthy society beauty narrowly escapes a similar fate, the mayor of New York - George B McClellan, one of many historical figures featured in the gripping story - asks Freud to use his revolutionary new ideas about psychoanalysis to help the survivor recover her memory of the attack.

The 17-year-old girl is called Nora. "For Nora, read Dora, the young woman described in Freud's most controversial case history, which reads like a 19th-century sensation novel, and which I've always thought someone should fictionalise," says Rubenfeld, adding that Dora, whose real name was Ida Bauer, was not an American, although she died in New York in 1945.

Nora is by no means a carbon copy of Dora, but her predicament is the same: advances are made on her by her father's lugubrious best friend and her father refuses to take her side when she protests, because he's having an affair with his friend's seductive wife, to whom Nora is erotically attracted.

The Oedipal interpretation of Nora's hysterics, which Freud offers Dr Stratham Younger - the book's dashing main narrator who falls in love with Nora - is the actual interpretation that Freud offered the real-life Dora. The case fascinates Rubenfeld, as does Freud's brief American sojourn.

Despite the great success of the Viennese psychiatrist's visit to the US, he always spoke, in later years, as if some trauma has befallen him there. "Freud called Americans 'savages'. He blamed America for physical ailments that afflicted him long before 1909. His biographers have puzzled over this mystery, speculating about whether some unknown event might have happened in America that would make sense of his otherwise inexplicable reaction," says Rubenfeld.

While there is no evidence that Freud was ever asked to investigate a murder, Rubenfeld has drawn directly and extensively from letters, writings or other published sources for much of the dialogue attributed to both Freud and Jung in his novel.

Since Rubenfeld grew up in a highly intellectual household in Washington DC, he was steeped in the works of Freud from an early age. The son of a psychologist and psychotherapist father - "not a Freudian" - and a renowned art critic and biographer mother, he read philosophy and psychology at Princeton, before attempting to fulfil his lifelong ambition to act.

After graduating, he studied acting at the Juilliard School of Drama in New York, where he was one of 18 students chosen from 1,000 applicants. He spent a year "pretending to be an unemployed actor but being a well-employed waiter," suffering rejection after rejection at "cattle-call auditions".

Eventually, after failing to land a single role, he repaired to Harvard University, where he read law and met his wife. "I don't know how I became a professor. I swore I wouldn't become an academic. I wanted to be in the real world and to deal with people's real problems, but now I really love my job. "As for a sequel to the novel, well, the jury's out. I do have this day job and it's time I produced another legal work, which will probably sell another six copies." Before we part, I tell Rubenfeld how riveting I found his theories on Hamlet, although I won't ruin it for prospective readers by revealing his thoughts on the gloomy Dane. "I have to admit I am worried about that, too," he says. "I hope that I haven't written too highbrow a book. There comes a point in this novel when the demands on the reader are perhaps just too great."

To paraphrase his favourite Shakespeare play, the gentleman doth protest too much.

07. 02. 01.

P.S. 사진은 소설의 배경이기도 한 1909년 클라크대학 앞에서 찍은 프로이트(앞줄 왼쪽)와 그의 수제자 융(앞줄 오른쪽)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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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책을 읽는 친구여, 이 책을 내려놓지 마라!
희망의 인문학 - 클레멘트 코스 기적을 만들다
얼 쇼리스 지음, 이병곤.고병헌.임정아 옮김 / 이매진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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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 쇼리스의 『희망의 인문학』을 읽는 동안 참으로 많은 생각들이 머리를 스쳐갔다. 최근 노벨평화상을 받은 무하마드 유누스로부터 시작해서, 장자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 인문학의 위기를 외쳐대는 국내 인문학자들의 목소리까지….  『희망의 인문학』은 제1장 「록펠러보다 더 부유하게」부터 제18장 「결론: 위험한 추론」에 이르기 까지 모두 18장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내용상으로는 미국의 빈곤계층에게 이른바 ‘클레멘트 코스’라는 인문학 교육을 실천해온 한 인문학자의 주장을 담은 1부(1장부터 12장 「급진적 인문학」)와 실제 진행해온 클레멘트 코스의 내용을 소개하는 2부(제13장 「클레멘트 실험이 시작되다」부터 나머지)로 구분할 수 있다.

빈곤의 역사가 인류의 역사만큼 오래되었으므로 이것을 극복하는 방법 역시 다양한 논쟁의 과거를 가졌다. 그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해법은 개인의 자발적인 노동을 강조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브레히트가 풍자한 자선과 기부이다. 브레히트는 <임시 야간 숙소>라는 시에서 빈곤문제에 대한 오래되었으며, 쉽게 해결하기 어려운 논쟁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듣건대, 뉴욕/ 26번가와 브로드웨이의 교차로 한 귀퉁이에/ 겨울철이면 저녁마다 한 남자가 서서/ 모여드는 무숙자(無宿者)들을 위하여/ 행인들로부터 동냥을 받아 임시 야간 숙소를 마련해 준다고 한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이 세계가 달라지지 않는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나아지지 않는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착취의 시대가 짧아지지 않는다./ 그러나 몇 명의 사내들이 임시 야간 숙소를 얻고/ 바람은 하룻밤 동안 그들을 비켜 가고/ 그들에게 내리려던 눈은 길 위로 떨어질 것이다.”

평화를 갈망해온 인류에게 언제나 제기되는 전쟁의 그림자가 그러하듯 풍요를 갈망하는 인류에게 드리워진 그림자는 가난과 굶주림이었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현책(賢策)들이 제시되어 왔으나 빈곤은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문제이다. 그 가운데 가장 논쟁적인 문제는 빈곤이 한 개인이나 집단의 선량함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인가? 하는 점이다. 시에 등장하고 있는 한 남자의 동냥 행위로 몇몇 사람은 추위와 배고픔을 피할 수 있겠지만 가난은 보다 근본적인 문제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브레히트가 제기하고 있는 또 다른 문제는 이와 같은 자선과 기부행위는 행위자 개인에겐 도덕적 만족감을 선사할지 모르겠으나 구조적 불평등을 근본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위기를 은폐시킨다는 점이다. 이것이 논쟁적일 수 있는 또 다른 까닭은 장자의 고사 “학철부어(涸轍鮒魚)”에 등장하는 물고기처럼 시급한 위기에 처한 빈곤계층은 언제나 한 바가지 물도 아쉽다는 것이다.

빈곤 극복을 위한 최근의 대안 가운데 하나는 노벨상 수상으로 더욱 각광받고 있는 무하마드 유누스의 그라민 은행이다. 빈곤계층에 대한 소액신용투자(micro credit)를 통해 재활을 돕는다는 이 운동의 핵심은 자발적인 노동과 기부행위의 적극적인 결합에 있다. 무하마드 유누스는 자선과 기부만으로는 빈곤을 극복할 수 없으며 빈곤계층이 단순한 동정의 대상으로 전락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배고픈 이에게 물고기를 주기보다는 물고기를 잡는 도구를 마련해주는 것이 더욱 현명한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무하마드 유누스는 이것을 ‘민중적 자본주의’라고 주장하지만 다른 한편에선 이와 같은 그의 실천에 대해 빈곤계층에게 자본주의의 논리를 전파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그라민 은행이 주는 한 바가지 물로는 빈곤에 대한 근본적인 치유가 불가능할뿐더러 실제로도 그라민 은행의 투자가 당장 빵이 필요한 절대적 빈곤계층보다는 그나마 살만한 계층에게 유용한 방식이란 비판이 그것이다.

다른 한 편으로 『희망의 인문학』에서 얼 쇼리스가 제기하고 있는 근본적인 주장을 압축해보면 지금 현재 빈곤계층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당장의 기부나 자선 혹은 직업교육이 아니라 인문학 교육이란 것이다. 그의 이런 주장을 서울역 노숙자나 달동네 사람들에게 가서 들려주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이 어떨 것인지를 상상해보기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우리들 자신도 마찬가지일 테니까. 얼 쇼리스는 그것이 편견이자 기존의 사회가 만들어 놓은 신화에 좌파들조차 부지불식간에 잠식되어 버린 결과라고 주장한다. 그는 여러 장에 걸쳐 빈곤계층을 겹겹이 포위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불평등한 지배구조와 빈곤이 대물림될 수밖에 없는 구조를 인문학자의 시선으로 파헤치고, 어째서 빈곤계층에게 인문학 교육이 필요한지 차근차근 설득한다. 솔직히 고백컨대 처음 이 책을 읽을 무렵, 나는 얼 쇼리스와 클레멘트 코스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다. 그 역시 한국의 일부 궁핍한(?) 인문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어떻게 하면 정부를 설득해 국가가 투자하는 교육 프로젝트를 수행할 것인가? 학문의 시장에서 점차 배척당하고, 인기 없는 지식상품으로 전락하고 있는 인문학의 호구지책을 삼을 것인가? 정도겠지 생각했다. 그러나 이 책을 절반쯤 읽어나갔을 때, 나는 얼 쇼리스의 주장에 강력하게 감염되어 버렸고, 주변 사람들에게 이 책을 추천하기 시작했다.

얼 쇼리스는 사회적 약자인 빈곤계층 - 『희망의 인문학』에서 말하는 빈곤계층은 단순히 경제적 차원의 약자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도리어 성별, 인종 등 다양한 요인으로 인해 사회적 약자로 취급받는 존재들을 두루 포함한다. - 을 포위하고 있는 기존의 다양한 권력관계(이 책에서는 무력(force)이라고 표현하고 있는)와 약자의 힘(power)을 구분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무력은 한 사람 또는 사람들의 집단이 타인을 강제하는 상황, 무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원하는 대로 상대방이 행동하도록 강제하거나 강요하는 형태가 지속되는 관계를 가리킨다. 얼 쇼리스의 이와 같은 정의는 별로 새로울 것이 없는, 기존의 정치학이나 사회학에서 흔히 내리는 권력에 대한 정의와 다를 바 없다. 대상자의 인간성을 파괴하는 무력과 달리 힘은 빈곤한 이들, 시민들에게 내재된 연대의 힘을 의미한다. 다분히 포스트모더니즘을 의식한 듯 얼 쇼리스는 힘이란 그 안에 주체와 객체를 모두 담고 있다는 점에서 무력과 구별되며, 무엇보다 고립되어 있는 어떤 사람이 자기 혼자서 정당한 힘을 갖고 있을 수 없다는 점에서 무력과 구분된다고 말한다. 그가 이토록 무력과 힘을 구분하고자 애쓰는 것은 우리 세대가 경험한 과거의 역사적 체험들(가난을 둘러싼 신화를 뒤엎었던 평등주의의 실현을 위한 실천, 혁명)이 실패한 경험에서 비롯된다.

“부와 빈곤의 신화는 일치한다. 서로가 어떻게 닮았는지 보여주기 위해서는 어느 한 쪽을 거꾸로 뒤집어 놓기만 하면 된다. 비록 미국이 정치적 혁명을 통해 수립됐을지는 모르지만, 이 나라의 핵심적인 신화는 경제다. 부자나 빈민이나 할 것 없이 모든 미국인들이 그것에 동의한다. 그러나 이 신화는 부자들에겐 도덕적 안락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해줬지만, 빈민들에겐 너무나 가혹하게 작용했다.”<본문 79쪽>

‘빈곤은 하느님도 구원하지 못 한다’는 케케묵은 이야기부터 ‘가난은 하늘이 내린 천형이다.’, ‘가난한 것은 자신의 무능과 게으름 때문이다.’ 등등 가난이 대물림되는 현상 때문인지 빈곤은 어느 한 편에선 역사 이래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인 것처럼 받아들여지거나 다른 한 편에선 이것이 마치 일종의 선천적 ․ 유전적 질환인 양 치부된다. 즉, 가난의 세습 때문에 가난한 이들은 경쟁을 해보기도 전에 이미 패자가 되었고, 대다수의 빈민에게 이런 위기는 태어날 때부터 계속 함께 해온 것이다. 가난이 지극히 자연스럽게 보이는 것, 일종의 유전병처럼 보이는 까닭은 그동안 부자들 혹은 지배계급이 만들어온 신화가 효과적으로 작동해왔고, 빈곤계층  역시 이를 정당한 것으로 내면화했기 때문이다. 혹은 이보다 좀더 영리한 이들은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선 누군가가 ‘캐비어’를 먹으려면, 다른 누군가는 반드시 ‘개밥’을 먹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다만 개밥을 먹어야 하는 사람이 나나 내 가족이 아니면 된다는 것에서 만족한다.

자유주의와 자본주의 체제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체제에 대하여 승리했으므로, 역사가 종말을 고했다는 자신만만한 선언 이후 세계의 민주주의는 도리어 커다란 위기에 처했다. 시장의 자유와 민주주의는 양립할 수 없는 적대적 모순 관계이며, 신자유주의의 진열대에서는 아무리 많은 돈을 들이더라도 민주주의를 구입할 수 없다는 사실이 점차 명백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대통령이 했다는 ‘좌파 신자유주의’란 말처럼 도저히 같은 반열에 놓일 수 없는 형용모순이 먹혀들고 있는 사회가 현재의 대한민국이다. 이것은 비단 한국사회 뿐만 아니라 세계에 널리 퍼진 정신분열 현상의 한 단면을 드러내준다. 얼 쇼리스의 『희망의 인문학』은 이와 같은 정신분열증에 대한 적절한 치유책이 될 수 있을까? 얼 쇼리스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다시 무력에 호소하는 과거의 방식은 성공하기도 어려우며, 성공하더라도 과거와 같은 실패의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그가 싸우면 군인들이 총을 쏠 것이고, 그는 죽게 된다. 반면, 그가 굴복하면 품위를 잃게 되어 더는 사람으로서 살아갈 수 없게 된다. 수치심과 공포감이 그의 인격을 갈기갈기 찢어놓을 것이며, 마음 속 깊은 곳의 자아를 산산조각 내버릴 것이다.”

그는 이와 같은 편견과 냉소의 신화를 극복하고, 다양한 권력관계의 포위 속에서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누군가의(당이나 전위의) 지도를 받는 민중이 아니라 자율적으로 해방되고자 하는 존재들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빈곤계층 스스로가 기존 지배체제의 무력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아노미 상태에 놓여있는 동안 캐비어를 먹는 자들은 그들이 즐기는 향락과 풍요에 대한 도덕적 정당성을 제공받고, 구조적 불평등과 사회적으로 재생산되는 빈곤에 대해 책임을 회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빈곤에 대한 가장 큰 해독제가 ‘노동’인 것은 틀림없지만, 빈곤의 포위망 안에서 반복적으로 수행하는 노동은 결국 더 큰 무력을 낳게 되고, 포위망 안의 혼돈은 더욱 커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가난한 사람들의 삶 속에 존재하는 무력은 다른 종류의 해독제를 필요로 한다. 그 안에 노동이 포함되기는 한다. 하지만, 겉보기에는 제한이 없고 지나치게 희망적이지만 실상은 착취의 요소를 감추고 있는 ‘노동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게으름이나 나태함이 아니라 무력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 무력에 대한 해독제가 발견되다면 노동은 해야 할 일이 있을 때 자연스레 뒤따르게 될 것이다. <본문 117쪽>

만약 무하마드 유누스의 그라민 은행이 실제로도 성공적이고, 성공적일 수 있었던 원인을 찾아야 한다면 그 까닭은 몇 푼의 돈 때문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곳에서 찾아야 한다. 여기에서 얼 쇼리스와 무하마드 유누스 사이의 어떤 공통점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분명히 노동은 빈곤에 대한 중요한 해독제 역할을 할 수 있지만, 노동은 지금까지 과대평가된 것처럼 그 자체로는 아무런 도덕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다. 우리는 현재 노동운동의 위기와 직면하고 있다. 20세기 후반까지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주류 사회로부터 소외되어 왔지만 서로를 소외시키진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의 우리들은 가난한 사람들끼리도 서로를 소외시키고 있다.

만약 현재 우리 사회가 절망적인 까닭을 얼 쇼리스에게 묻는다면 그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한국 사회가 현재 절망적이라면 그 원인은 ‘외로움’에 있으며, 그 외로움의 정체는 정치적 외로움이다. 정치적 외로움에는 두 가지 근원이 있다. 하나는 친구나 협력자가 되기에 충분치 못한 사람에 대한 증오이며, 다른 하나는 친구나 협력자를 만들지 못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증오이다. 지금까지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되어 왔으며, 그들 스스로는 아무 것도 자율적으로 할 수 없을 것이라 믿었던 이들에게 그들의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가 곧 사회적 공공영역의 문제이며, 이를 정치화하는 것, 성찰적 사고와 정치적 삶에 입문하는 도구로서의 인문학을 습득하도록 해준다면 그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해방될 것이다. 역사적으로 진보적인 노동조직들은 조직원들을 정치 활동으로 이끌기 위해 문학, 역사, 정치, 경제 등의 교육을 실시해온 반면, 부패한 노동조합들은 대체로 이러한 노력을 하지 않는다. 기성지배체제에서 인문학은 언제나 권위에 도전하는 성가신 존재였으며, 민주주의 사회에서 권력에게 시민은 언제나 위험한 존재들이었다. 그러므로 인문학을 배운 빈곤계층은 더욱 위험한 존재가 될 것이다.

브레히트의 시 마지막 구절은 아래와 같다. 어쩌면 얼 쇼리스가 하고자 하는 말도 이와 같을 것이다.

“책을 읽는 친구여, 이 책을 내려놓지 마라./ 몇 명의 사내들이 임시 야간 숙소를 얻고/ 바람은 하룻밤 동안 그들을 비켜 가고/ 그들에게 내리려던 눈은 길 위로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방법으로는 이 세계가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나아지지 않는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착취의 시대가 짧아지지 않는다.”

* 이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을 생각해보면 별 다섯도 적다. 1장부터 12장까지는 인문학이 필요한 이유, 살아있는 인문학이 되기 위한 필요조건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그 뒷부분부터 마지막까지는 실제 현장에서의 경험을 응축시켜놓고 있다. 인문학의 현재와 미래를 고심하는 이들에게 꼭 필요한 시기에 나온 중요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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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달팽이 > 빗장

내 마음이

당신을 향해

언제 열렸는지

시리기만 합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논둑길을 마구 달려보지만

내달아도 내달아도

속떨림은 멈추지 않습니다

하루 종일 시도 때도 없이

곳곳에서 떠올라

비켜주지 않는 당신 얼굴 때문에

어쩔 줄 모르겠어요

무얼 잡은 손이 마구 떨리고

시방 당신 생각으로

먼 산이 다가오며 어지럽습니다

밤이면 밤마다

당신을 향해 열린

마음을 닫아보려고

찬 바람 속으로 나가지만

빗장 걸지 못하고

시린 바람만 가득 안고

돌아옵니다.

 

 

 

                                              - 김용택 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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