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바람구두 > 책을 읽는 친구여, 이 책을 내려놓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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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인문학 - 클레멘트 코스 기적을 만들다
얼 쇼리스 지음, 이병곤.고병헌.임정아 옮김 / 이매진 / 2006년 11월
평점 :
얼 쇼리스의 『희망의 인문학』을 읽는 동안 참으로 많은 생각들이 머리를 스쳐갔다. 최근 노벨평화상을 받은 무하마드 유누스로부터 시작해서, 장자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 인문학의 위기를 외쳐대는 국내 인문학자들의 목소리까지…. 『희망의 인문학』은 제1장 「록펠러보다 더 부유하게」부터 제18장 「결론: 위험한 추론」에 이르기 까지 모두 18장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내용상으로는 미국의 빈곤계층에게 이른바 ‘클레멘트 코스’라는 인문학 교육을 실천해온 한 인문학자의 주장을 담은 1부(1장부터 12장 「급진적 인문학」)와 실제 진행해온 클레멘트 코스의 내용을 소개하는 2부(제13장 「클레멘트 실험이 시작되다」부터 나머지)로 구분할 수 있다.
빈곤의 역사가 인류의 역사만큼 오래되었으므로 이것을 극복하는 방법 역시 다양한 논쟁의 과거를 가졌다. 그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해법은 개인의 자발적인 노동을 강조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브레히트가 풍자한 자선과 기부이다. 브레히트는 <임시 야간 숙소>라는 시에서 빈곤문제에 대한 오래되었으며, 쉽게 해결하기 어려운 논쟁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듣건대, 뉴욕/ 26번가와 브로드웨이의 교차로 한 귀퉁이에/ 겨울철이면 저녁마다 한 남자가 서서/ 모여드는 무숙자(無宿者)들을 위하여/ 행인들로부터 동냥을 받아 임시 야간 숙소를 마련해 준다고 한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이 세계가 달라지지 않는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나아지지 않는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착취의 시대가 짧아지지 않는다./ 그러나 몇 명의 사내들이 임시 야간 숙소를 얻고/ 바람은 하룻밤 동안 그들을 비켜 가고/ 그들에게 내리려던 눈은 길 위로 떨어질 것이다.”
평화를 갈망해온 인류에게 언제나 제기되는 전쟁의 그림자가 그러하듯 풍요를 갈망하는 인류에게 드리워진 그림자는 가난과 굶주림이었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현책(賢策)들이 제시되어 왔으나 빈곤은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문제이다. 그 가운데 가장 논쟁적인 문제는 빈곤이 한 개인이나 집단의 선량함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인가? 하는 점이다. 시에 등장하고 있는 한 남자의 동냥 행위로 몇몇 사람은 추위와 배고픔을 피할 수 있겠지만 가난은 보다 근본적인 문제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브레히트가 제기하고 있는 또 다른 문제는 이와 같은 자선과 기부행위는 행위자 개인에겐 도덕적 만족감을 선사할지 모르겠으나 구조적 불평등을 근본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위기를 은폐시킨다는 점이다. 이것이 논쟁적일 수 있는 또 다른 까닭은 장자의 고사 “학철부어(涸轍鮒魚)”에 등장하는 물고기처럼 시급한 위기에 처한 빈곤계층은 언제나 한 바가지 물도 아쉽다는 것이다.
빈곤 극복을 위한 최근의 대안 가운데 하나는 노벨상 수상으로 더욱 각광받고 있는 무하마드 유누스의 그라민 은행이다. 빈곤계층에 대한 소액신용투자(micro credit)를 통해 재활을 돕는다는 이 운동의 핵심은 자발적인 노동과 기부행위의 적극적인 결합에 있다. 무하마드 유누스는 자선과 기부만으로는 빈곤을 극복할 수 없으며 빈곤계층이 단순한 동정의 대상으로 전락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배고픈 이에게 물고기를 주기보다는 물고기를 잡는 도구를 마련해주는 것이 더욱 현명한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무하마드 유누스는 이것을 ‘민중적 자본주의’라고 주장하지만 다른 한편에선 이와 같은 그의 실천에 대해 빈곤계층에게 자본주의의 논리를 전파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그라민 은행이 주는 한 바가지 물로는 빈곤에 대한 근본적인 치유가 불가능할뿐더러 실제로도 그라민 은행의 투자가 당장 빵이 필요한 절대적 빈곤계층보다는 그나마 살만한 계층에게 유용한 방식이란 비판이 그것이다.
다른 한 편으로 『희망의 인문학』에서 얼 쇼리스가 제기하고 있는 근본적인 주장을 압축해보면 지금 현재 빈곤계층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당장의 기부나 자선 혹은 직업교육이 아니라 인문학 교육이란 것이다. 그의 이런 주장을 서울역 노숙자나 달동네 사람들에게 가서 들려주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이 어떨 것인지를 상상해보기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우리들 자신도 마찬가지일 테니까. 얼 쇼리스는 그것이 편견이자 기존의 사회가 만들어 놓은 신화에 좌파들조차 부지불식간에 잠식되어 버린 결과라고 주장한다. 그는 여러 장에 걸쳐 빈곤계층을 겹겹이 포위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불평등한 지배구조와 빈곤이 대물림될 수밖에 없는 구조를 인문학자의 시선으로 파헤치고, 어째서 빈곤계층에게 인문학 교육이 필요한지 차근차근 설득한다. 솔직히 고백컨대 처음 이 책을 읽을 무렵, 나는 얼 쇼리스와 클레멘트 코스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다. 그 역시 한국의 일부 궁핍한(?) 인문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어떻게 하면 정부를 설득해 국가가 투자하는 교육 프로젝트를 수행할 것인가? 학문의 시장에서 점차 배척당하고, 인기 없는 지식상품으로 전락하고 있는 인문학의 호구지책을 삼을 것인가? 정도겠지 생각했다. 그러나 이 책을 절반쯤 읽어나갔을 때, 나는 얼 쇼리스의 주장에 강력하게 감염되어 버렸고, 주변 사람들에게 이 책을 추천하기 시작했다.
얼 쇼리스는 사회적 약자인 빈곤계층 - 『희망의 인문학』에서 말하는 빈곤계층은 단순히 경제적 차원의 약자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도리어 성별, 인종 등 다양한 요인으로 인해 사회적 약자로 취급받는 존재들을 두루 포함한다. - 을 포위하고 있는 기존의 다양한 권력관계(이 책에서는 무력(force)이라고 표현하고 있는)와 약자의 힘(power)을 구분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무력은 한 사람 또는 사람들의 집단이 타인을 강제하는 상황, 무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원하는 대로 상대방이 행동하도록 강제하거나 강요하는 형태가 지속되는 관계를 가리킨다. 얼 쇼리스의 이와 같은 정의는 별로 새로울 것이 없는, 기존의 정치학이나 사회학에서 흔히 내리는 권력에 대한 정의와 다를 바 없다. 대상자의 인간성을 파괴하는 무력과 달리 힘은 빈곤한 이들, 시민들에게 내재된 연대의 힘을 의미한다. 다분히 포스트모더니즘을 의식한 듯 얼 쇼리스는 힘이란 그 안에 주체와 객체를 모두 담고 있다는 점에서 무력과 구별되며, 무엇보다 고립되어 있는 어떤 사람이 자기 혼자서 정당한 힘을 갖고 있을 수 없다는 점에서 무력과 구분된다고 말한다. 그가 이토록 무력과 힘을 구분하고자 애쓰는 것은 우리 세대가 경험한 과거의 역사적 체험들(가난을 둘러싼 신화를 뒤엎었던 평등주의의 실현을 위한 실천, 혁명)이 실패한 경험에서 비롯된다.
“부와 빈곤의 신화는 일치한다. 서로가 어떻게 닮았는지 보여주기 위해서는 어느 한 쪽을 거꾸로 뒤집어 놓기만 하면 된다. 비록 미국이 정치적 혁명을 통해 수립됐을지는 모르지만, 이 나라의 핵심적인 신화는 경제다. 부자나 빈민이나 할 것 없이 모든 미국인들이 그것에 동의한다. 그러나 이 신화는 부자들에겐 도덕적 안락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해줬지만, 빈민들에겐 너무나 가혹하게 작용했다.”<본문 79쪽>
‘빈곤은 하느님도 구원하지 못 한다’는 케케묵은 이야기부터 ‘가난은 하늘이 내린 천형이다.’, ‘가난한 것은 자신의 무능과 게으름 때문이다.’ 등등 가난이 대물림되는 현상 때문인지 빈곤은 어느 한 편에선 역사 이래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인 것처럼 받아들여지거나 다른 한 편에선 이것이 마치 일종의 선천적 ․ 유전적 질환인 양 치부된다. 즉, 가난의 세습 때문에 가난한 이들은 경쟁을 해보기도 전에 이미 패자가 되었고, 대다수의 빈민에게 이런 위기는 태어날 때부터 계속 함께 해온 것이다. 가난이 지극히 자연스럽게 보이는 것, 일종의 유전병처럼 보이는 까닭은 그동안 부자들 혹은 지배계급이 만들어온 신화가 효과적으로 작동해왔고, 빈곤계층 역시 이를 정당한 것으로 내면화했기 때문이다. 혹은 이보다 좀더 영리한 이들은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선 누군가가 ‘캐비어’를 먹으려면, 다른 누군가는 반드시 ‘개밥’을 먹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다만 개밥을 먹어야 하는 사람이 나나 내 가족이 아니면 된다는 것에서 만족한다.
자유주의와 자본주의 체제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체제에 대하여 승리했으므로, 역사가 종말을 고했다는 자신만만한 선언 이후 세계의 민주주의는 도리어 커다란 위기에 처했다. 시장의 자유와 민주주의는 양립할 수 없는 적대적 모순 관계이며, 신자유주의의 진열대에서는 아무리 많은 돈을 들이더라도 민주주의를 구입할 수 없다는 사실이 점차 명백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대통령이 했다는 ‘좌파 신자유주의’란 말처럼 도저히 같은 반열에 놓일 수 없는 형용모순이 먹혀들고 있는 사회가 현재의 대한민국이다. 이것은 비단 한국사회 뿐만 아니라 세계에 널리 퍼진 정신분열 현상의 한 단면을 드러내준다. 얼 쇼리스의 『희망의 인문학』은 이와 같은 정신분열증에 대한 적절한 치유책이 될 수 있을까? 얼 쇼리스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다시 무력에 호소하는 과거의 방식은 성공하기도 어려우며, 성공하더라도 과거와 같은 실패의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그가 싸우면 군인들이 총을 쏠 것이고, 그는 죽게 된다. 반면, 그가 굴복하면 품위를 잃게 되어 더는 사람으로서 살아갈 수 없게 된다. 수치심과 공포감이 그의 인격을 갈기갈기 찢어놓을 것이며, 마음 속 깊은 곳의 자아를 산산조각 내버릴 것이다.”
그는 이와 같은 편견과 냉소의 신화를 극복하고, 다양한 권력관계의 포위 속에서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누군가의(당이나 전위의) 지도를 받는 민중이 아니라 자율적으로 해방되고자 하는 존재들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빈곤계층 스스로가 기존 지배체제의 무력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아노미 상태에 놓여있는 동안 캐비어를 먹는 자들은 그들이 즐기는 향락과 풍요에 대한 도덕적 정당성을 제공받고, 구조적 불평등과 사회적으로 재생산되는 빈곤에 대해 책임을 회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빈곤에 대한 가장 큰 해독제가 ‘노동’인 것은 틀림없지만, 빈곤의 포위망 안에서 반복적으로 수행하는 노동은 결국 더 큰 무력을 낳게 되고, 포위망 안의 혼돈은 더욱 커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가난한 사람들의 삶 속에 존재하는 무력은 다른 종류의 해독제를 필요로 한다. 그 안에 노동이 포함되기는 한다. 하지만, 겉보기에는 제한이 없고 지나치게 희망적이지만 실상은 착취의 요소를 감추고 있는 ‘노동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게으름이나 나태함이 아니라 무력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 무력에 대한 해독제가 발견되다면 노동은 해야 할 일이 있을 때 자연스레 뒤따르게 될 것이다. <본문 117쪽>
만약 무하마드 유누스의 그라민 은행이 실제로도 성공적이고, 성공적일 수 있었던 원인을 찾아야 한다면 그 까닭은 몇 푼의 돈 때문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곳에서 찾아야 한다. 여기에서 얼 쇼리스와 무하마드 유누스 사이의 어떤 공통점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분명히 노동은 빈곤에 대한 중요한 해독제 역할을 할 수 있지만, 노동은 지금까지 과대평가된 것처럼 그 자체로는 아무런 도덕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다. 우리는 현재 노동운동의 위기와 직면하고 있다. 20세기 후반까지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주류 사회로부터 소외되어 왔지만 서로를 소외시키진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의 우리들은 가난한 사람들끼리도 서로를 소외시키고 있다.
만약 현재 우리 사회가 절망적인 까닭을 얼 쇼리스에게 묻는다면 그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한국 사회가 현재 절망적이라면 그 원인은 ‘외로움’에 있으며, 그 외로움의 정체는 정치적 외로움이다. 정치적 외로움에는 두 가지 근원이 있다. 하나는 친구나 협력자가 되기에 충분치 못한 사람에 대한 증오이며, 다른 하나는 친구나 협력자를 만들지 못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증오이다. 지금까지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되어 왔으며, 그들 스스로는 아무 것도 자율적으로 할 수 없을 것이라 믿었던 이들에게 그들의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가 곧 사회적 공공영역의 문제이며, 이를 정치화하는 것, 성찰적 사고와 정치적 삶에 입문하는 도구로서의 인문학을 습득하도록 해준다면 그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해방될 것이다. 역사적으로 진보적인 노동조직들은 조직원들을 정치 활동으로 이끌기 위해 문학, 역사, 정치, 경제 등의 교육을 실시해온 반면, 부패한 노동조합들은 대체로 이러한 노력을 하지 않는다. 기성지배체제에서 인문학은 언제나 권위에 도전하는 성가신 존재였으며, 민주주의 사회에서 권력에게 시민은 언제나 위험한 존재들이었다. 그러므로 인문학을 배운 빈곤계층은 더욱 위험한 존재가 될 것이다.
브레히트의 시 마지막 구절은 아래와 같다. 어쩌면 얼 쇼리스가 하고자 하는 말도 이와 같을 것이다.
“책을 읽는 친구여, 이 책을 내려놓지 마라./ 몇 명의 사내들이 임시 야간 숙소를 얻고/ 바람은 하룻밤 동안 그들을 비켜 가고/ 그들에게 내리려던 눈은 길 위로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방법으로는 이 세계가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나아지지 않는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착취의 시대가 짧아지지 않는다.”
* 이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을 생각해보면 별 다섯도 적다. 1장부터 12장까지는 인문학이 필요한 이유, 살아있는 인문학이 되기 위한 필요조건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그 뒷부분부터 마지막까지는 실제 현장에서의 경험을 응축시켜놓고 있다. 인문학의 현재와 미래를 고심하는 이들에게 꼭 필요한 시기에 나온 중요한 책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