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바람구두 > 막부나 번말고 ‘일본이란 나라’를 어떻게 할지 생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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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검심 1~28(완결) 세트
와츠키 노부히로 지음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1998년 11월
평점 :
품절
"바람의 검심"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전후해 존왕파 혹은 반막부파와 막부파 사이의 대결,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 일본의 형성기라는 실제하는 역사를 배경으로 꾸며 낸 가상 극화다. 작가인 와츠키 노부히로는 실제 인물과 사건, 가상 인물과 사건을 적절히 배합함으로 극화에 리얼리티를 부여하고 있다. 흔한 수법이긴 하지만 "바람의 검심"에는 동아시아 근현대사를 송두리째 흔드는 계기가 되었던 '메이지 유신'을 바라보는 일본인들의 시각을 느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읽을 수도 있는 좋은 만화이다.
일본의 근대화 동력이 되었던 "메이지 유신"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멀리 임진왜란 부근의 역사까지 거슬러 올라야 한다. 임진왜란에서 패한 도요토미는 자신이 세운 막부(바쿠후)를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에게 대를 잇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쓰는 도요토미파를 숙청하고 쇼군의 지위를 빼앗는다. 이때 끝까지 도요토미 히데요리에게 충성하며 도쿠가와 막부에 저항하던 세력은 일본의 서쪽 끝 큐슈 지방의 사츠마 번(薩摩藩)과 초슈 번(長州藩)까지 밀려나게 된다. 가장 오랫동안 도쿠가와에게 저항했던 도요토미 파벌들은 이후 300여년 간 도쿠가와 막부로부터 갖은 고초와 감시를 받으며 사츠마와 초슈에서 겉으로는 충성을, 속으로는 복수를 외치며 와신상담의 과정을 겪는다. 한편 도쿠가와 막부는 일본의 전국시대를 마감하고 에도 300년의 평화시대를 여는 비법으로 일본 내 각 지역의 물류 이동과 거주 이전을 제한하고, 반란을 사전에 봉쇄하는 감시체제로 봉건제를 이용하며, 각각의 지역을 분리해 경계하며 차별한다.
막부 말기에 이르러 흑선(黑船, 구로후네, 서양 배)의 출현과 잇따른 외세의 진출에 노쇠한 막부는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사츠마와 초슈 지역의 지사들이 '막부타도와 존왕양이'를 주장하며 반란을 일으킨다. 오늘날까지도 일본인들이 가장 존경한다는 인물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가 출현한다. 그는 막부타도파였던 사츠마와 초슈 사이의 오랜 반목을 봉합하고, 막부에 저항하여 메이지 유신의 기초를 다진다. 에도 막부의 쇄국 정책은 우라가(浦賀)에 흑선이 출몰하면서부터 이미 정책으로서의 힘을 잃었고, 쇄국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수도, 그렇다고 개혁을 선두에서 이끌 추동력도 상실한 막부는 점차 약화되어간다. 이때 막부의 감시 대상이자 오랫동안 견원지간이었던 사츠마와 초슈 사이의 삿쵸 동맹(薩長同盟)을 체결시키며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의 원동력이 된 사람이 바로 사카모토 료마다.
그 와중에 벌어진 수많은 사건들, 드라마틱한 인물의 이야기들은 일본인들의 영감을 자극했고 많은 작품들이 만들어졌다. 막부파와 반막부파, 반막부파 사이에서도 끊임없이 배신과 모략을 일삼으며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는 살인과 모략이 일어났고, 그 과정에서 시대의 풍운아 사카모토 료마도 33세의 나이에 암살당하고 만다. "바람의 검심"에는 '메이지 유신'에 대한 수많은 단편적인 지식들이 가상의 설정들과 혼란스럽게 뒤섞여 있어서 팩션의 범주에 넣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그러나 이 만화의 진정한 가치는 현대 일본인들이 생각하는 메이지 유신의 의미이다. 물론 중반 이후로 넘어가면서 인기에 편승하여 억지로 이어붙인 듯한 설정들(인벌편)이 재미를 반감시키긴 했지만 사회과학, 역사학 서적에서는 느끼기 힘든 당시 분위기나 메이지 유신이 성공한 뒤의 일본인들이 느꼈을 심정과 사회 구조의 변화에 따른 혼란 같은 것을 상상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가치가 있다.
일본의 개항과 우리의 개항의 과정이 처음 시작은 비슷했음에도 일본은 유신에 성공했고, 우리는 실패한 까닭을 생각하면서 본다면 더욱 유익한 일일 것이다. 료마는 “막부나 번말고 ‘일본이란 나라’를 어떻게 할지 생각해야 한다!”며 일본에 근대적 민족국가 수립의 이상을 설파한 인물이다. 물론, 이 만화의 주인공 '히무라 겐신(일명, 칼잡이 히무라 발도제)'은 가상의 인물이지만 "바람의 검심"에는 사카모토 료마와 같이 역사상 실존했던 인물들이 무수하게 등장하고 있다. 후반부에 이를수록 일본 만화 특유의 과장과 억지스러운 이야기 늘이기가 재미를 반감시키기는 하지만 히무라 겐신과 그의 친구들을 따라 가노라면 저도 모르게 일본의 근대, 메이지유신을 전후로 한 일본 사회와 현대 일본인들이 메이지 유신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알 수 있다. 한중일 3국은 모두 근대화 과정에서 내전을 경험한다.
한국전쟁, 국공내전, 그리고 일본의 "타이세이 호칸(大政奉還)"은 그 진행과정과 주체는 각기 달랐으나 본질적으로 근대민족국가 수립을 위한 과정에서 치러진 내전이었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은 궁극적으로 내전을 통한 새로운 정권 수립이란 점에서 비록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란 한계가 있으나 이후 혁명에 버금가는 중대한 변화를 가져온다. 일본의 타이세이 호칸이 한국과 중국의 내전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면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좌우 이데올로기의 개입이 발생하기 전에 벌어진 내전이었다는 것 - 그 덕분에 일본인들은 근대화 과정을 선과 악의 대결로 보기 보다는 애국적인 지사들이 벌인, 다소 낭만적이기까지 한 권력 투쟁으로 볼 수 있는 여유를 얻었다 - 이고, 다른 한 가지는 국공내전과 한국전쟁이 국민만들기(state building) 과정에서 전국민이 총동원되었던 총력전이었던 반면, 일본은 지배계급 사이의 내전 - 한중의 경험이 국민 사이의 원한을 축적한 반면, 일본의 경우엔 내전 기간이 짧고, 지배계급 사이의 충돌이었던 탓에 그와 같은 내전의 후유증은 사실상 거의 없었다. 대신 근대화 과정에서 민중의 참여가 배제되어 이후 일본이 민주주의 국가로 성장하는데 장애가 되었다 - 이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역사적 전통은 이후 일본과 한국, 중국과 확연하게 구분되는 근대국가의 면모를 갖추게 만든다. 이런 점들에 주목해가며 "바람의 검심"을 읽는 건, 확실히 즐거운 경험이다.
어떤가? 재미로 읽고, 의미로 읽는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