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수사학과 고전문헌학
로마 최고의 웅변가이자 정치가 마르쿠스 톨리우스 키케로의 <수사학>(길, 2006)이 번역돼 나왔다. 최근에 나온 책들에서 다룰까 했지만, 역자 인터뷰 기사가 눈에 띄길래 따로 자리를 마련한다. 키케로의 책으로 오래전에 출간된 <의무론>(서광사, 1989)와 작년 천병희 교수의 번역으로 출간된 <노년에 관하여, 우정에 관하여>(도서출판 숲, 2005) 정도를 꼽아두고 있었는데, 이번에 찾아보니 화술에 대한 책들이 그간에 더 출간돼 있었다. 양태종 교수의 번역으로 나온 <화술의 법칙>(유로서적, 2005), <화술과 논증>(유로서적, 2006)이 그것이다. '말하기의 규칙과 체계'란 부제를 달고 있는 <수사학>이 같은 책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얼마간은 겹치지 않을까 싶다.
사실 수사학에 관한 책들이 아주 드물진 않다. 박성창, 김욱동 교수의 입문서가 각각 <수사학>(문학과지성사, 2000), <수사학이란 무엇인가>(민음사, 2002)로 출간돼 있고, 고전수사학과 수사학의 역사 등을 다룬 번역서들도 여러 종 나와 있다. 물론 아직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도 번역되지 않았으니까 사정이 '양호'하다는 말은 못하겠다. 더불어 서양 수사학의 고전들과 함께 리쾨르의 <살아있는 은유>(영역본은 <은유의 규칙>) 정도까지 출간되어야 어느 정도 다리를 뻗을 수 있는 게 아닌가 한다.
해서 갈길은 아직 멀다 하겠지만 이번처럼 역량 있는 전공자들에 의해서 고전들이 번역/출간된다면 먼길의 수고가 그래도 많이 덜어질 수 있겠다. 소개에 따르면 이번 책은 "그리스의 수사학 전통을 집대성한 수사학의 대가인 키케로의 책 <수사학 : 말하기의 규칙과 체계>를 분석하고 라틴어 원문을 함께 담았다. 사론이나 그릇된 내용을 현학적으로 수식한다는 편견을 넘어, 수사학을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해 체계로서 전달하고자 하였다."
눈에 띄는 건 책에 들인 공인데, "라틴어 원문과 현대어 해석과 더불어 상세한 옮긴이 주"가 달려 있는바, "일례로 비유법에서 알고 있는 은유, 환유, 제유, 아이러니 등의 기법을 실제 정확히 이용되도록 환유, 제유 등의 실례를 들고 그리스 로마의 학술 전문 용어에 대해서 상세한 주석을 달았다"고 한다. "또한 'stasis'를 '쟁점'으로 바꾸는 등 우리나라 어문학계에서 아직 수사학 전문 용어로 정착되지 못한 것을 '우리말'로 바꾸는 작업을 시도하였다"니까 여러 모로 눈길이 가는 책이다. 게다가 아래 인터뷰 기사의 사진을 보니 안면도 있는 양반이 아닌가?(나이 들어서 오히려 젊어보이누만.)
경향신문(06. 09. 16) ‘고전문헌학’입각 키케로 원전 번역
그리스·로마 고전 번역서가 있다. 영어판이나 독어판의 ‘이중 번역’이 아니라 그리스어나 라틴어 원전 번역이다. 이쯤 되면 번역서로는 최상급이라 할 만하다. 여기서 질문 한 가지. 과연 그 원전이 원저자의 저술이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대부분의 고전 문헌들이 원저자의 필체로 기록되지 않은 데다, 설령 그것이 원저자의 기록이라고 하더라도 이를 확인할 방법이 없지 않은가.
“서양 고전문헌학은 ‘주어진 텍스트’를 ‘원전’으로 인정하지 않는 데서 출발합니다. 모든 필사본을 수집해 이들 중 원전에 가장 가까운 것을 찾아내고, 다른 필사본과 비교해 오류를 바로 잡고 원전을 복원코자 하는 학문입니다.”
안재원 서울대 강사(38)는 국내 몇 안되는 ‘고전문헌학’ 전공자다. 최근 키케로의 ‘수사학’(도서출판 길)을 국내 최초로 고전문헌학의 원전 작업 방식에 입각해 번역했다. 한글 번역 아래에 라틴어 원문을 수록하고, ‘비판장치’(다른 판본들과의 비교)를 본문 밑에 넣었다. 또 옆 페이지에는 옮긴이 주를 상세하게 달았다. 이 때문에 원 텍스트는 40쪽 정도지만 번역서는 400쪽이 넘는다. 이처럼 지난한 작업을 자처한 것은 “이제 우리도 우리의 원전을 갖자는 노력의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19세기 독일·영국·프랑스 등은 그리스·로마 고전의 부활을 외치면서 그들만의 시각으로 원전에 접근했고, 이는 그들 각각의 문화적·사상적·이념적인 고유성과 독창성을 만들었습니다. 우리도 정본 텍스트에 대한 주석 작업을 통해 우리 문화의 고유성과 독창성을 모색하자는 거지요.”
그는 “원전 번역 같은 기본적인 것이 안된다면 인문학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질 수밖에 없다”면서 “‘우리 원전’들과 그에 대한 지식들이 쌓이면 그것이 우리 사회의 ‘아이덴터티’를 이룰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우리 인문학이 ‘수입학문’이라고 하는데 이런 작업을 용기내 해보면 더딘 작업과정 중에 그들보다 나은 시각과 깊이를 가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
고전문헌학은 글자 하나하나의 해석에 매달린다는 점에서 ‘미시 진리(micro veritas)’를 추구하는 학문이라는 설명이다. 그러나 그 해석 하나 하나에 따라 전혀 ‘다른 세계’로 나아가게 된다는 점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작업이다. “조그마한 미시 진리가 결국 거시 진리와 연결됩니다. 우리 사회는 거대 담론에 강하지만 과연 그것이 구체적인 대안들을 만들어 냈습니까. 거대 담론 하는 것도 좋지만 겸손하게 텍스트를 잘 번역하고 주석을 잘 다는 작업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왜 ‘키케로’이고, ‘수사학’일까. 키케로는 단지 빼어난 연설가나 정치가가 아니라 그리스 정신과 사유세계를 서양 사회에 ‘번역’한 인물이고, 보편시민이 가져야 할 덕목을 강조한 인문학자였다. 키케로가 말한 수사학도 단순히 말을 잘하는 기술이 아니었다.
“수사학은 한 인간이 공동체에서 어떤 입장과 언어 표현을 가지고 갈등을 조율할 것인가에 대한 학문입니다. 이는 보편교양인으로서의 시민사회와 연결됩니다. 지금 한국 사회는 시민사회의 진입로에서 개인들이 갈등하고 투쟁하고 있지만 이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몰라요. 이런 의미에서 키케로와 수사학은 지금의 한국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다른 길이 없겠다. 논술과 함께 웅변도 입시과목에 집어넣는 수밖에.)
06. 09.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