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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라는 거울에 자기 얼굴 비춰보기
[오마이뉴스 2002-12-14 12:06]
두 책은 프랑스라는 거울을 통해 자신들의 모습을 바라봤던 위대한 작가 괴테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여행기이다. 독일인 괴테와 러시아인 도스토예프스키는 변화하는 시대를 살았고 자신들의 ‘조국’이 그 험한 파도를 헤치며 발전하길 기원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 유럽에서 ‘발전과 진보의 기준’이 된 프랑스, 그들의 눈엔 그 나라가 어떻게 보였을까? 그리고 프랑스 여행을 통해 그들은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 <괴테의 프랑스기행>표지
2002 인화
괴테가 프랑스로 들어간 시점은 프랑스 혁명 발발 후 3년이 지난 1792년이었다(그렇기에 ‘기행’이라는 제목이 어울리지 않는다). 그는 프랑스를 ‘여행’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프랑스 혁명을 진압하고 루이 16세를 구출하려는 유럽 연합군의 일원으로서 ‘출정’했다. 그의 말처럼, “공화주의 사상과 그 영향을 결정적으로 종식시킬 임무를 띤 군대와 함께 출정하기 위해 준비를 서두르는 참”(21쪽)이었다.

괴테의 글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프랑스의 망명귀족, 즉 혁명을 피해 다른 나라로 떠났던 프랑스 귀족들에 대한 불평불만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빌려 그들의 속물 근성을 지적한다. “돈이면 무슨 일이라도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프랑스 여인들”(21쪽), “이제 하인도 없었고 마부조차도 없었”지만 연합군과 함께 “아내와 연인들, 그리고 아이들과 친척들을 데리고 한꺼번에 밀어닥치고 있”(29쪽)던, “이전의 모든 지위를 박탈당하여 극심한 곤궁에 빠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변함없이 옛날과 같은 명예욕과 거만한 태도를 보”(302쪽)이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망명귀족들.

요한 볼프강 폰 괴테 (Johann Wolfgangvon Goethe)

독일의 시인이자 작가(1749∼1832). 고전파의 대표자.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서 부유한 가정에 태어나 아버지의 방침에 따라 엄격한 교육을 받고 자랐다. 라이프치히 대학에 입학하여 법률을 공부하다가 병으로 일시 귀향, 다시 스트라스부르크 대학에서 학업을 계속하여 법학사가 되었다.


1774년 발표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슈투름 운트 드랑'(질풍노도시대, 문예의 혁명 운동)의 대표작으로서 전 독일 뿐만 아니라 전 유럽에 알려졌다. 1775년 아우구스트 공의 초청으로 그의 교육 겸 사담역으로 바이마르에 갔으며, 그 후 재상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한편 슈타인 부인과의 사랑과 1년 반의 이탈리아 여행을 통한 고대 및 르네상스 미술과의 접촉은, 그로 하여금 쉬투름 운트 드랑적인 어두운 정열에서 벗어나, 고전주의 예술 확립으로 향하게 했다. 1974년 무렵, 실러와 친교하게 되는데 이들의 우정은 실러 사망시까지 계속되었다.


그들은 서로 격려하면서 걸작품들을 세상에 많이 내어 놓게 되었는데 짧은 풍자적 비판시 <크세니엔>을 쓰기도 했다. 그후 <빌헬름 마이스터>, <파우스트> 같은 만년의 대작을 완성하여 독일 최대의 시인이자 세계문학의 한 거봉이 되었다. / 알라딘 소개글

그가 보기에 프랑스 구체제는 타락하고 썩어 무너질 기둥이었다. 사실 정확하게도 괴테는 다가올 세기의 주인공을 ‘신분’이 아니라 ‘개인’에서 찾았다. 봉건질서에서 개인은 아무리 뛰어난 자질을 가졌다 하더라도 자신의 신분을 뛰어넘진 못했다(드물게 전쟁을 통해 신분 상승의 기회가 열리기는 했지만). 하지만 시대의 전환기를 맞아 개인은 ‘그 자체로’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기 시작했다. “이제까지는 시민적 생활에 있어서나 정치적 경력에 있어서나 중요한 인물로 분류되거나 평가되지 못했던 많은 개인들이, 개인적인 가치로 인하여 확실한 존재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307~308쪽). 이제 “모든 사람들은 각자가 완수하고 원만한 존재로써 스스로 최고라고 생각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자신만의 개인적인 일도 완벽하게 강조되어, 심지어 특별한 성격이나 어리석은 행위, 그리고 실수까지도 자신의 가치있는 존재의 총체 속에 받아들여질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308쪽).

하지만 괴테는 자신의 조국이 프랑스처럼 병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깨끗하고 솔선수범하는 프로이센의 귀족체제는 건강한 것이었다. 더구나 괴테는 무질서를 원하지 않았다. 그는 변화보다 질서를 택했고(이것을 진보/보수라는 틀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세계적 유전병”(492쪽)을 극복할 방법을 찾았다. 그는 프랑스 혁명을 “소름끼치는 현실”로 보았고 국가가 “거대한 자신의 궤도를 이탈”(378쪽)한 것으로 봤다. 그리고 프랑스의 혁명사상을 받아들이려던 사람에 대해 “자신과 현실을 분명하게 파악하지 못한 채 알 수 없는 기대와 희망에 온 힘을 쏟아붓고 있었다”(378쪽)고 평가했다.

그는 프랑스에서 무질서를 목격했고 그것을 공화주의의 특징으로 보았다. “여러 파당으로 분열이 된 것도 아닌데, 이 정도까지 갈가리 찢겨지고 흩어져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되고 속속들이 뒤흔들려서 오로지 개개인의 개체로 분리되어 버리는 국민”(40쪽). “우리는 곧바로 공화주의적인 특징이라 할 만한 것에 직면하게 되었다. 포격으로 끊임없이 온 시가지가 불타고 파괴되는 것을 보아 온 시민들의 강요 때문에 사령관인 보르페르는 더 이상 항복을 거부할 수 없었다”(66쪽). “이미 파리의 잔인하고 포악한 무리들을 본보기로 삼았던 이들은 자신들의 뜻대로 희생자를 골랐다. 그래서 그것으로부터 닥치는 대로 그 권위와 소유와 심지어는 목숨까지도 빼앗으려 들었다”(141쪽).

질서를 고집하기에 그는 사람의 목숨이 오고가는 전쟁터에서도 차분하게 학문적인 관심을 유지한다(전형적인 딸깍발이의 모습). 그는 포격으로 부서진 도자기 파편이나 프랑스로 진격하는 연합군의 총검에서 빛나는 햇살을 통해 ‘색채학’에 대한 관심을 다시 불태운다. 심지어는 프랑스군의 배가 오스트리아군의 포격을 받아 강물 속으로 침몰하게 되는 광경을 이렇게 묘사한다. “맨 처음의 포탄이 흔들리는 수면과 만나자 몇 피트에 이르는 물기둥이 솟아오르고, 그 물기둥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벌써 두 번째 물기둥이 솟구쳤다. 강도는 처음 것과 같았으나 높이는 그렇지 않았다. 이와 같이 세 번, 네 번 지속되면서 점점 그 높이가 낮아지다가 끝내는 그 작은 배에 이르게 되었다.…이 광경은 보고 또 봐도 싫증나지 않았다”(427~428쪽). 그에게는 잔인한 전쟁도 하나의 관찰대상, 실험일 뿐이었다.

▲ <도스토예프스키의 유럽인상기>
2002 푸른숲
차분했던 괴테와 달리 뜨거운 영혼을 가졌던 도스토예프스키는 69년 뒤인 1862년 유럽을 여행하면서 서구사회에 대한 불만을 공격적으로 드러낸다. 그가 유럽을 방문한 시기는 산업혁명 이후 유럽이 세계의 발전을 주도하면서 자신들의 제국주의 야욕을 드러낼 때였다. 그렇기에 그는 러시아의 극작가 폰비진의 공격적인 문장을 빌린다. “프랑스인은 이성을 갖고 있지 않으며, 그것을 갖는 것을 스스로 아주 큰 불행으로 생각할 것이다”(31쪽).

도스토예프스키는 러시아인에게 두 개의 조국, 즉 “러시아와 유럽”(178쪽)이 있다고 얘기한다. 당시 러시아는 표뜨르 대제 이후 ‘유럽 따라잡기’에 열심이었다. 하지만 기대에 부푼 도스토예프스키의 눈에 비친 유럽 사회, 특히 프랑스는 ‘영혼을 잃어버린 속물들의 나라’, ‘돈을 위해 영혼을 팔아버린 부르주아 파우스트의 나라’였다.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Fyodor Mikhailovich Dostoevskii)

1821년 모스크바에서 가난한 군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당대 러시아에서 드문 전업 작가로 일생을 가난과 역경 속에 살았다. 19세기 중엽 다른 귀족 출신 작가나 시인들과 달리 그는 평생을 가난 속에 살며 돈과 시간에 쫓기고, 사형 언도와 간질병 같은 고난에 찬 특이한 경험들을 했다.


그는 러시아 민중을 누구보다 사랑한 이른바 비판적 리얼리즘 작가로 사회적, 철학적 주제를 추구한 작가이다. 그의 사상과 미학은 때론 민족 문제와 고고한 인류학적, 신학적 문제에까지 닿아 있다. 특히 러시아와 인류의 미래, 그리고 신과 인간의 문제를 아우른다. 이러한 거장의 모습은 흔히 동시대에 세계적 명성을 떨친 톨스토이와 함께,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세계 문학의 정상으로 끌어올린 인물로 평가된다.


그의 작품들은 '문학의 심리학'이라 불릴 정도로 인간 심성의 깊은 곳을 파헤친다. 작품으로 <가난한 사람들>, <지하 생활자의 수기>, <죄와 벌>, <백치>, <영원한 남편>, <악령>, <작가 일기>, <카라마조프의 형제> 등이 있다. / 알라딘 소개글

러시아인이 유럽을 조국으로 삼은 것은 물질적인 욕망 때문이었다. 러시아인의 삶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온통 유럽의 유산으로 영위된 것”(34쪽)이었고, 상류계급은 유럽을 동경하며 살았다. 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렇게 묻는다. 푸슈킨에게 러시아말을 가르쳤던 유모가 없었다면 러시아의 대문호 푸슈킨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 “지금도 많은 러시아 아이들이 공부하기 위해 프랑스로 보내지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들 중 또 하나의 푸슈킨이 있어서 프랑스에 보내졌으나, 거기에 아리나 로지오노브나도 없고, 요람 속에서 들을 수 있는 러시아 말도 없었다면 어떻겠는가?”(35쪽).

러시아의 정신을 파괴하고 조국을 무능력하게 만드는 것은 상류층이다. “그들은 모두 여행 안내서를 들고 돌아다니며, 도시마다 진기한 것에 굶주린 듯이 덤벼든다. 마치 무슨 의무라도 되는 듯이, 국가적인 책무라도 띠고 있는 듯이 덤벼든다. 일단 안내서에 기재된 것이라면, 창문 세 개짜리 궁전이라고 빼놓지 않으려 한다. 시장의 집 하나도 빼놓지 않고 본다. 그런데 이런 집들은 모스크바나 페테르부르크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68쪽).

그의 비판은 러시아의 풍습을 미개한 것으로 몰아붙이고 무조건 유럽을 칭송했던 언론에게도 향한다. “도대체 자기가 무엇이기에 거만하게 허리에 양손을 짚고, 게다가 침을 마구 뱉으며 대중 앞에 군림하는 것인가!…그런 믿음이 대중에 대한 허세일 뿐이거나 유럽의 문명에 대한 무조건적이며 노예적인 숭배에서 나왔다면, 그것이 더욱더 우습지 않은가?”(63~64쪽).

러시아인들이 바쳤던 칭송과 숭배와 달리 프랑스의 부르주아들은 물질을 숭배하고 소유욕으로 가득 차 있다. 최고의 것으로 군림하던 그들의 문화는 위선적인 교양의 가면일 뿐이다. “이 부르주아라는 것은 이상한 인종이다. 돈이 최고의 선행이며 인간으로서 의무라고 솔직하게 제창하고 있으면서도, 또한 좋은 가문을 내세우기를 무척 좋아한다. 프랑스 사람들은 늘 모두가 놀랄 만큼 도도한 모습을 하고 있다. 가장 저급한 프랑스인, 즉 자기 친아버지를 단 몇 푼에 팔면서 거기에다 덤까지도 붙여줄 정도의 프랑스인이라도, 아비를 팔아먹는 바로 그 순간에도 당당한 모습을 보여 오히려 보는 사람을 당혹스럽게 만든다”(103쪽).

프랑스는 ‘개미집’으로 묘사된다.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똘레랑스'라는 개념조차 ‘윤리적 개념’이 아니라 그 개미집을 유지하기 위한 ‘실용적인 방편’일 뿐이다. “서로가 완고하게 자기를 주장하며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존재하지만, 서로 방해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도 서로 타협할 수 없는 완고하고, 이미 만성화된 보이지 않는 투쟁이 벌어지고 있다. 그것은 전체 서구의 특징인 개인적 원리와, 어떻게든 함께 공존하며 일종의 공동체를 이루어 하나의 개미집을 형성해야 할 필요성 사이의 생사를 건 투쟁이다. 단지 서로가 물어뜯지 않기 위해 하나의 개미집이라도 설계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식인종이 될 염려가 있다!”(84쪽).

괴테의 상대가 공화주의자였다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상대에는 부르주아만이 아니라 당시 유럽에서 확산되던 사회주의자도 포함되었다. 특히 그는 ‘박애’가 프랑스의 상징일 수 없다고 비판한다. 박애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되는 것이고 주어지는 것이며, 자연 중에 존재하는 것”(109쪽)이고 “먼저 피와 살로 스며들”(110쪽)어야 하는데, 프랑스나 유럽에서는 그런 정신이 이미 개인의 욕망으로 대체되었다.

개성은 이기적인 욕망이나 닫혀진 개인이 아니라 사회 속의 개인, 타자 속의 나에서 발현된다. “누구에게 강요받지 않고 완전히 자각하여 만인을 위해 자기 전부를 희생하는 것이야말로, 개성이 최고로 발달한 것이며, 최고의 위력이며, 최고의 극기이며, 최고의 자유의지의 표현이다. 자유의지로서 만인을 위해 생명을 버리고, 십자가에 매달리고, 불길 속에 뛰어든다는 것은, 개성이 가장 강하게 발달했을 때에만 가능하다.…그것은 다른 사람들도 자신과 같이 자주 정신을 가진 행복한 개성으로 만들기 위해서이며, 자연의 법칙이기 때문이다”(111쪽). 이것은 “이성이 아닌 감성과 자연성에 기초를 두고 있다”(114쪽).

도스토예프스키는 사회주의자들의 실험이 실패하리라고 예측했다. 왜냐하면 그들의 박애는 "무게나 크기를 계산하고, 이해를 저울질하면서, 이 박애로부터 누구에게 얼마만큼의 이익이 돌아가며, 누가 얼마만큼 이득을 볼 수 있는가를 설명하거나 셈하는 것”인데, “누가 얼마의 공헌을 했는가, 각자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를 미리 결정하며 분배”(115쪽)해야 하기에 불가능한 유토피아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회주의는 가능하지만, 다만 그것은 프랑스가 아닌 어떤 다른 곳에서 가능하다는 것이다”(117쪽).

괴테와 도스토예프스키는 여행을 통해 자신들의 모습을 되돌아 볼 기회를 얻었다. 괴테의 모습이 의기양양한 승리자의 것이라면, 도스토예프스키의 모습은 굴욕을 딛고 일어서려는 도전자의 것이다.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타자를 통해 자기 속의 모습을 비판하는 그들의 방식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와 무관하다고 우리는 자신할 수 있을까? 사실 타자를 무조건 따라잡거나 무조건 거부하는 극단적인 두 가지 방식만을 고집해 온 우리에게 그런 비판은 절실하게 필요하다. 이 두 권의 책은 그 비판의 여유를 준다.

여행의 묘미는 무엇일까?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은 낯선 신기함만이 아니라 익숙한 자기 속에 숨어있던 또 다른 자기의 모습을 발견해서 돌아온다. 내가 내 얼굴을 볼 수 없기에 우리는 거울을, 자신의 얼굴을 비춰줄 타자의 눈망울을 필요로 한다. 내가 타자를 바라보는 방식은 내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을 드러낸다. 그렇기에 우리는 타자를 존중해야 하고, 그런 사람만이 자신을 존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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