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릴케 현상 > [퍼온글] 오른쪽으로 이동하지 마

올해 회사 살림은 영 좋지 않았다.
지난해 기획되었던 것들을 만들어내는 것이지만,
어쨌든 올 1월 내가 출근하기 시작했고
그 뒤에 나온 책들이 잘 나가지 않는다는 건
꽤 부담스러운 일이다.
자본을 쌓아놓고 있는 회사도 아니고,
그달 수금해서 그달 먹고살아야 하는 영세한 출판사 형편에
빚만 늘어나는 월말 회계 보고서 보기가 괴로웠다.
(판매, 수입, 지출 등등 회계 명세가 100퍼센트 사원에게 공개되는 회사에 다녀요. -_-v)
 
그런데 지난 4월에 만든 책이
요 두어 달 사이에 부쩍 잘 나간다.
(이렇게 말하면 누구는 수만 부 팔린 줄 아는데, 그래봐야 이제 오천 부 나가주셨다.
수만 명이나 같은 책을 본다는 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정치판에서 화제가 된 덕분인데,
잘 나가는 건 좋은 일이고
또 정치인들이 이 책을 읽어주길 바랐기 때문에 희망이 이루어진 것도 좋지만,
이 책에 대한 반응을 소개한 신문 기사를 보면
제대로 읽은 사람은 별로 없구나 싶어 씁쓸하다.

물론 ‘진보 세력이 선거에서 이기는 법’을 표방한 책이고,
그 방법이란 상대편의 가치관에 따른 ‘말’ ‘표현’을 답습하지 마라,
상대방의 주장이 함축된 용어를 그대로 받아 쓰면 절대 이길 수 없으니
표현 자체를 바꾸라는 것이긴 하지만,
단순히 말장난, 혹은 표피적인 선전 기술을 이야기하는 책은 아니다.
내 생각에, 이 책의 핵심은 ‘오른쪽으로 이동하지 말라’는 것이다.

선거판에서는 어느 정도 보수적인 가치관과 타협해야
‘현실적인 당선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고 많은 이들이 생각하는 것 같다.
타협하지 않으려는 이들은, 당선 가능성을 위해 원칙을 포기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니까 타협하려는 사람이든 타협하지 않으려는 사람이든,
이기려면 어느 정도는 오른쪽으로 이동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의 지은이는 말한다.
공화당은 전혀 왼쪽으로 이동하지 않고도 선거에서 이긴다고.
왜? 그들의 주장은
보통 사람들(노동자들과 가난한 서민들)의 보수적인 가치관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보수적인 가치관과 진보적인 가치관
양쪽을 다 가지고 있으면서, 특정한 자극을 받았을 때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진다.
이를테면 성차별이 있어선 안 된다고 생각하는 남자라도
당장 늙은 어머니가 힘들게 집안일을 하는 걸 보면
자기와 같이 직장에서 퇴근해 저녁 밥상을 받는 아내를 째려보곤 한다.
그래서 진보 세력이 선거에서 이기려면
보수적인 가치관에 굴복(오른쪽으로 이동)할 게 아니라,
사람들이 갖고 있는 진보적인 가치관을 끄집어내야 한다.
아내에게 힘들더라도 집안일에 더 신경 쓰라고 할 게 아니라,
사랑은 다른 사람이 대신 표현해주는 게 아님을 일깨워야 한다.
내가 어머니를 사랑하는데, 왜 내 사랑을 아내에게 표현해달라고 떠넘기나?

그런데 요새 이 책을 탐독했다는 사람들의 행태를 보면,
‘오른쪽으로 이동하지 말라’ ‘원칙을 포기하지 말라’는 핵심 내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도리어 오른쪽으로 성큼 물러나서(사실 그다지 왼쪽에 있지도 않았던 것 같지만)
‘오른쪽’이 아니라 ‘바른쪽’으로 간 거라고 우기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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