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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햇발] 남의 고통에 무덤덤한 사회 / 신기섭
아침햇발
 
 
» 신기섭 논설위원
 
 
 
얼마 전 지하철에서 묘한 느낌에 젖은 적이 있다. 모처럼 유심히 주위를 둘러보니, 귀에 이어폰을 끼고 뭔가를 듣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젊은이들만이 아니었다. 남녀노소를 가릴 게 없었다. 이어폰은 꽂지 않았더라도 이동전화로 뭔가를 열심히 하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았다. 쉰살은 족히 됐을 한 남성은 승강장을 지나가면서도 이동전화로 블록 맞추기 게임을 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서로 외면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이를 보면서, 사람들이 타인의 시선이나 참견을 차단하려 애쓰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사실 이어폰 꽂고 음악을 조금 크게 틀면, 아무리 복잡한 곳에서도 거의 완벽하게 차단된 공간을 확보할 수 있다. 여러 사람이 주고받는 유언·무언의 의사소통 과정에서 탈출하는 데 이만큼 간단한 방법이 없다. 그런데 여기엔 아주 큰 대가가 따른다. 감각과 지각을 잃게 되는 것이다. 옆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감정 상태에 있는지 전혀 모르게 된다. 아니 알고 싶지 않기에 음악이나 전화기 따위에 몰두한다고 해야 옳은지 모른다. 이런 상태가 집단적으로 나타나면 어느 순간 심각한 부작용이 생긴다. 생각만 해도 소름끼치는 집단적 현실감 상실이 그것이다.

사람들이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거나 아예 회피한다는 건, 얼마 전 포항 포스코 본사를 점거했던 건설노조에 대한 언론보도와 ‘여론’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점거농성이 아무리 용납하기 어려운 일일지언정, 그들이 도대체 어떤 심정에서, 왜 이런 일을 벌였는지 알려는 노력조차 거의 없는 건 너무 심하다. 환갑을 넘긴 이들까지 점거 농성에 합세해, 음식 반입마저 차단된 공간에서 일주일 이상 버틸 때 어떤 심정이었을지 궁금하지 않은가? ‘국가 경제’ 앞에서 그들의 분노나 울분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인가? 게다가 단지 그들을 외면하는 데 그친 게 아니다. 부분적인 사실을 부각시켜서 노조가 마치 조직폭력배 모임이라도 되는 양 매도하기까지 했다. 아무래도 이건 정상이 아니다.

사실 당사자가 고통을 남에게 분명히 표현하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영국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는 “가장 단순한 여학생도 사랑에 빠지면 셰익스피어 또는 키츠를 통해 제 심정을 자신에게 표현한다. 그러나 어떤 이에게 단지 두통을 느끼게 만들어도 금방 언어가 메말라 버린다”고 했다. 고문과 폭력을 연구한 영문학자 일레인 스캐리는 고통을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까지 말한다. 그렇다면 타인의 고통은 말이 아니라 몸으로 느껴야 한다.

하지만 요즘 우리는 느끼기도 거부하는 것같다. 고시원의 쪽방에서 8명이나 되는 사람이 숨져도 세상이 너무 무덤덤하다. 지난해 말 농민대회에 참석했던 두 농민이 숨졌을 때도 별 차이가 없었다. 평택 대추리 농민들이 절규할 때도, 1~2년 전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분신과 자살이 이어질 때도 마찬가지였다. 독재시절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길 기대하는 건 아니지만, 세상은 야속하리만치 태연하다.

가장 밑바닥에서 신음하는 이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사회는 희망이 없다. 기득권층은 원래 그렇다고 해도, 이들과 엇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은 달라야 한다. 그런데 왜 그들조차 점점 외면할까? 제 스스로 고통을 감당하기도 버겁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귀에 이어폰이라도 꽂지 않으면 견뎌내기 힘들지만, 그래도 이건 해법이 아니다. 그래선 각자의 고통에서도 헤어날 길이 없고, 현실을 바꾸는 건 꿈도 못꾼다. 서로 이웃의 고통에 예민해지는 것이 함께 사는 길이다.

신기섭 논설위원 mari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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