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바람구두 > 문화망명자로 살아간다는 것 - 6주년에 즈음하여
일반/ No. 169. 문화망명자로 살아간다는 것
- 6주년에 즈음하여
"<인간을 인간으로서> 생각하고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인간적 관계로 생각하라. 그러면 당신은 사랑에는 사랑으로서만, 신뢰에는 신뢰로서만 교환하게 될 것이다. 예술을 감상하려고 한다면 당신은 예술적 훈련을 받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에 대해 영향력을 갖고 싶다면, 당신은 실제로 다른 사람을 격려하고 발전시키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만일 당신이 사랑을 일깨우지 못하는 사랑을 한다면, 곧 당신의 사랑이 사랑을 일으키지 못한다면, 만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의 <생명의 표현>에 의해서 당신 자신을 <사랑받는 자>로 만들지 못한다면, 당신의 사랑은 무능한 사랑이고 불행이 아닐 수 없다." - K. Marx
지금으로부터 6년 전 아마 그 해 여름도 올해만큼 더웠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당시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를 처음 인터넷이란 망망대해에 띄울 때 아마도 이곳은 익명의 바다에 떠 있는 작은 모래톱만큼의 자리도 차지하지 못했을 겁니다. 이제 나름의 시간이 흘러 태풍과 홍수, 범람과 가뭄의 6년 세월을 보내며 “문화망명지”는 익명의 바다에서 모여든 작은 산호와 모래알과 물고기와 이름 모를 씨앗들이 날아와 섬이 되었습니다.
처음 이곳을 시작할 무렵의 바람구두는 이제 막 결혼을 했고, 갓 서른이 된 이십대의 젊음과 십대 시절을 통과하며 온몸에 맺혔던 고통의 기억들이 생생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기억도 가물가물한 최초의 망명자들과 오붓하게 지냈던 1차 망명자대회는 이제 날짜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방문자가 하루하루 늘어날 때마다 그것을 헤아리면서 흐뭇해하고, 한 사람의 댓글에도 호들갑스럽게 굴던 소박한 시절도 있었습니다.
문화망명지라는 거창한 이름, 문화와 망명의 개념을 결합시키면서 나는 타락하지 않겠노라. 이곳에서 나의 깃발을 올리고 타협하지 않는 마음으로 홀로 비장하게 싸우다 장렬하게 산화하겠다던 결심 같은 것들 보다 이곳은 그저 바람구두라는 익명의 페르소나 뒤에 숨지 않으면 안될 만큼 나약한 한 인간이 세상에 홀로 남은 것 같은 쓸쓸함과 변해버린 사람들과 세상에 대한 씁쓸함을 담아 누군가 나와 같이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이들에게 보내던 유리병편지 같은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인터넷 공간에 띄어 보냈던 무수한 유리병편지들은 때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응답을 받았고, 때로 차라리 만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법한 인연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 공간은 그 자체로 생명을 가진 것처럼 제 멋대로 무수한 인연의 가지들을 만들어냈습니다. 세상의 근원을 더듬어가며 우주의 끝으로 갔던 우주비행사가 마지막에 만난 것은 그저 심심하다는 이유로 우주를 만들어냈던 컴퓨터와 대면하게 되는 SF만화영화의 허무한 엔딩 장면처럼 어쩌면 “문화망명지”의 끝은 허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됩니다.
어쩌면 이런 저의 쓸쓸함은 믿었던 사랑으로부터 배신당하고, 믿었던 신념이 신기루처럼 허망한 유토피아였다는 깨달음, 80년대의 해방적 기획들 속에서 잠시잠시 형성되었던 공동체의 따뜻함은 알고 보면 거품처럼 얄팍한 것이었다는 서글픈 기억들로부터 비롯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그 안에서의 나는 너무나 자유로웠고, 행복했으며 무엇보다 따뜻했었다는 일종의 향수병 같은 것에서 연유한 것일지도….
하지만 그 시절이 아무리 좋았다한들 삶은 좋았던 한 시절의 기억만으로는 살 수 없습니다. 또한 그 시절의 기억이 과연 깊어가는 겨울밤 어린 아이들에게 군밤을 구워주며 그때는 모두의 인심이 넉넉하고 자유로웠던 태평성대였단다라고 회고할 수 있을 만한 것이었던지요. 새로운 절망 없이 새로운 희망을 꿈꿀 수 없으며 나쁜 현재 없이는 보다 나은 미래에 대한 낙관과 희망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저는 어느 햇살 좋은 5월의 파리에서 한 송이 붉은 장미를 들고, 강베타 광장을 가로지르는 택시를 타고 페르 라세즈에 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어느 골목에 내린 뒤 페르 라세즈 뒷문을 통해 오랜 침묵 속에 쌓여있는 묘비들을 지나 허름한 벽 앞에 서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 벽엔 아마도 “꼬뮌의 죽은 이들에게”란 비석이 붙어 있을 겁니다. ‘꼬민 전사들의 벽’, 그곳은 1871년 5월 28일 페르 라세즈에서 마지막까지 항전했던 147명의 꼬뮈나르(communard)들이 처형당한 곳입니다.
파리 꼬뮌은 부르주아 정부군에게 완전히 포위당하여 고작 두 달여의 기간 동안만 존재했습니다. 바로 얼마 전까지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었던 프로이센과 프랑스의 부르주아지들은 꼬뮌을 처단하기 위해 서로에게 아낌없는 협력을 베풀며 누구보다 단단한 결속을 보여주었습니다. 최후의 꼬뮌 전사들이 페르 라세즈의 벽 앞에서 총살당하던 그날까지 ‘피의 일주일'간 프랑스 정부군은 2만 명의 파리 시민들을 학살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단지 손에 굳은살이 박혔다는 이유만으로 총살당했습니다.
고작 두 달이란 짧은 세상을 위해 싸우다 죽어간 2만여 명의 죽음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저는 이에 대해 설명하고 해석하는 어떤 이론도 믿지 않습니다. 이들을 비롯해 자신이 믿고 있는 신념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모든 죽음 앞에서 이론은 회색이라는 식의 회의론을 주장하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제가 끝내 지식인 혹은 학문의 길을 걸어갈 수 없다면 그건 아마도 제가 합리형 인간이기 보다는 정서형 인간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혼자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이 낯선 어느 도시에 도착하는 것을 몹시도 원했었다. 나는 겸허하게, 그리고 가난하게 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무엇보다도 '비밀'을 간직할 수 있을 것이다. 나 자신에 대하여 말을 하고, 내가 예전에는 이러저러한 일을 했다든가, 나의 이름을 걸고 어떤 행동을 한다는 것은 분명 나 자신의 무엇인가를, 그것도 가장 소중한 무엇인가를 밖으로 드러내는 일이라고 나는 늘 생각해 왔다. 그렇다면 그 소중하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그것은 아마도 마음이 허약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표시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곧 모든 존재가 필요로 하는 힘이 결핍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일 따름이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살아있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위해서이다. 나는 이제 그 무엇에도 현혹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천성의 허약함을 어떤 영혼의 고귀함이라고도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나에게는 늘 그렇듯이 비밀을 즐기는 취향이 남아 있다. 나는 대수롭지 않은 행동들을 감추곤 하는데, 그것은 오직 나 혼자만의 삶을 간직하는 즐거움을 갖고 싶어서이다. 비밀스러운 삶. 고독한 삶이 아니라 비밀스러운 삶을 말하는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 그 꿈이 실현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 왔다. 고독한 삶이란, 그것은 곧 실현될 수 없는 일종의 유토피아이다.” - 장 그르니에
문화망명지는 다른 어떤 의미에서는 고독하고 비밀스러운 삶의 공간을 공유한 이들의 공간입니다. 물론 실현될 수 없는 일종의 유토피아인 셈이지요. 어떤 이들은 문화망명지를 아예 모르거나 필요한 정보를 얻고는 곧장 이곳을 떠나버립니다. 어떤 이들은 이곳의 높은 담장을 한탄하며 혹은 멸시의 눈길로 이 세상 너머의 저 세상에서 자신의 좀더 깊숙한 곳에 불안과 질투를 숨긴 채 넘봅니다. 그리고 또 어떤 이들은 한쪽 발을 담근 채 과연 이곳의 깊이는 이곳의 넓이는 어느 정도일까 측량하며 시간을 보냅니다. 저를 포함해서 이미 만들어졌거나 만들어질 퍼스낼리티에 안달하면서 이미지 관리에 여념이 없는 이들도 있을 겁니다.
종종 저에게 문화망명지는 무서운 곳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안 오면 그만인 이곳, 그저 스쳐가는 일상일 뿐인 이곳을 별일이 없다면 하루에도 열일곱 번도 넘게 들락거리며 스팸 광고와 누군가 나와는 평생 가야 단 한 번도 실제로는 마주 칠 일이 없는 사람의 글을 읽고, 그 마음을 헤아리고 누군가에게는 거짓일지 모르지만 나 자신에게는 거짓이어서는 안 될 거짓말 같은 댓글을 올립니다. 각양각색의 인연으로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각양각색의 글을 올리는 이곳 문화망명지에서 때로 사람들에게 감동하고, 때로 사람들에게 실망하면서 바깥세상의 제가 그러하듯 똑같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종종 무서운 사람들을 만납니다.
난처(難處)한 세상에
정처(定處) 없는 사람들이 모여
그나마 서로 기대어 살아내 보자는 것, 그것이 문화망명지의 마음입니다.
어떤 이들은 지금의 세상은 외부도 없고, 내부도 없는 세계가 되었다고 합니다. 저는 가끔 이 말이 F.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처럼 재미없는 말이란 생각을 합니다. 세계가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장 경제로 통합되었으므로 더 이상의 역사발전 단계는 없을 것이라는 후쿠야마의 단언만큼이나 하나의 세상이 단일한 통합을 이루어내어 체제의 바깥을 상상할 수 없다는 말인 내부도, 외부도 없는 세상이란 개념에 가장 잘 부합되는 세상은 서구의 중세시대였을 겁니다. 문화를 넓은 의미에서 첫째, 문화는 지적, 정신적, 심미적인 계발의 일반적인 과정, 둘째, 한 인간이나 시대 또는 집단의 특정 생활 방식, 셋째, 지적인 작품이나 실천 행위, 특히 예술적인 활동을 일컫는 용어로 정의할 수 있다면 중세 기독교 사회는 뤼시엥 페브르의 말처럼 믿지 않는 사람이 없었던, 모두가 믿기를 원했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중세 시대가 다른 어떤 시대보다도 많은 문화망명자들이 존재했던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여러분이 이곳 “문화망명지”를 찾은 이유는 각양각색이겠으나 저는 한 가지 공통점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는 지금과 다른 세상을 상상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죠. 다른 세상을 상상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문화망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