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지역의 경제공동체를 건설하려면 역내 국가들 사이의 노동력 이동과 구조조정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해야 하며, 이는 역내 분업구조의 전환과 국가 간 개발격차 해소를 위해 필요하다.
노동력 이동과 구조조정을 수반하지 않는 금융자본시장 통합은 그 자체가 이미 금융자산이나 자본을 소유하지 못한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폭력이다. 노동력 이동과 구조조정의 원활화라는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구조조정에 따른 비용과 고통을 사회적 약자가 부담할 가능성이 높다. 지식, 기술, 인력의 국제협력이야말로 구조조정을 위한 필수적인 공급 측 조건이며, 사회적 진보와 상생의 연대로 나아가는 길이다.
금융이나 자본은 미래수익에 대한 기대를 바탕으로 해서만 존재한다. 미래수익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금융시장이나 자본시장이 활성화될 수 없다. 따라서 국가나 자본가들은 구조조정의 과정이야 어떻게 돼든, 누가 피해를 입게 되든, 어떤 방향의 구조조정이 이루어지든 상관없이 미래수익 기대가 실현되도록 하는 데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그렇기에 금융자본시장을 앞세운 경제통합은 호혜의 통합이 아니라 약육강식의 전쟁이 되며,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통합보다 분열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높은 수준의 한미 FTA는 위험하다
이런 관점에서 아시아 지역의 경제통합을 실현해가는 과정은 3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 중 첫 번째 단계는 물류, 교통, 에너지, 통신 등 인프라의 구축을 통해 협력의 경험을 쌓고, 국제적이 기구나 제도의 수립을 통해 안정적인 협력의 방식과 통로를 창출하고, 국지적인 범위에서 공동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과학기술 협력을 비롯한 상호협력을 추구하는 단계다. 두 번째 단계는 국가 간 개발격차를 좁히고 국가 간 분업구조를 재편하는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통해 역내 협력구조를 확산시키는 단계이며, 그래서 경제공동체 건설에서 핵심적인 단계이기도 하다. 세 번째 단계는 실질적인 통합의 단계로서 시장, 화폐, 금융의 통합은 물론이고 문화, 정치, 외교안보 차원의 상층통합이 추진되는 단계다.
첫 번째 단계는 이해갈등의 가능성은 낮은 대신 상호이익이 안정적으로 극대화될 수 있는 영역에서부터 출발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사회적 인프라와 에너지는 물론이고 자유무역협정(FTA)과 같은 국가 간 협정을 통해 교역조건을 조정하고 국내외 자원배분을 특정한 방향으로 유도하는 일련의 프로그램이 이 단계에서 추진될 것이다. 메콩강 유역의 경제개발 프로그램이나 중국이 아세안과의 국경지대에 건설하고 있는 산업 클러스터는 바로 이 단계의 경제통합 프로그램으로 분류할 수 있다. 아시아개발은행(ADB) 등 금융 관련 국제협력 기구를 설립하려는 노력도 마찬가지다.
첫 번째 단계에 해당하는 경제통합의 움직임은 이미 아시아 곳곳에서 다양하게 진행되고 있다. 우리나라도 그동안 이런 방향의 국제협력을 추진해왔다. 그런데 지금 진행되고 있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은 그간의 노력이 이루어놓은 성과들마저 유실시킬 것이다. 미국 측이 공공연히 주장해왔고 우리 정부도 인정했듯이 한미 FTA는 경제적 고려의 산물이기에 앞서 안보적 고려의 산물이다. 특히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고 아시아 지역에 대한 자국의 영향력을 증대시키는 것을 한미 FTA 추진의 주된 목표로 삼고 있다. 다른 아시아 국가들이 추진하는 미국과의 FTA는 낮은 차원의 FTA다.
예를 들어 태국은 미국과의 FTA 협상 과정에서 관세인하에는 동의하지만 금융이나 지식집약적 서비스 분야에서는 15년 이상의 유예기간을 요구하는 등 가능한 낮은 수준의 FTA를 체결하려고 하고 있다. 그런데 한미 FTA가 높은 수준에서 체결된다면 미국은 이것을 지렛대로 삼아 아시아 각국에 대해 더 높은 수준의 FTA를 강요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점에서 다른 아시아 국가들이 한미 FTA를 지역 경제공동체에 대한 위협 요인으로 간주하게 될 수 있다.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이 우리나라를 협력자가 아닌 경쟁자로 인식하게 된다면, 아시아 경제공동체 건설 과정에서 우리나라가 주도권을 행사하기가 어려워질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진행되고 있는 한미 FTA 협상을 중단해야 하고, 혹시 필요하다면 보다 낮은 수준의 FTA를 미국과 다시 교섭해야 한다. 그 대신 우리는 아시아 경제공동체 건설에 도움이 되는 인프라를 정비하고 아시아 역내 분업구조 재조정을 위한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아시아 각국과 논의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경제통합의 두 번째 단계를 유럽의 경험에 비추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유럽의 경우는 물류와 교통의 인프라는 이미 구축돼 있었고, 그 바탕 위에서 10여 년간에 걸쳐 에너지 분야의 협력이 이루어졌다. 이어 1968년 이후 약 30년 간에 걸쳐 역내 관세 철폐와 국가 간 경제개발 격차 해소와 구조조정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이 추진됐고, 1993년 이후에 상품, 자본, 노동의 자유로운 이동이 시작됐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해서 유럽은 1999년에 단일통화와 거시경제정책의 사전조율 체제를 도입했고, 2005년에 단일 금융정책 및 재정정책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특히 구조조정과 관련해 유럽은 1960년부터 1993년까지 유럽사회기금, 유럽농업설비및보장기금, 유럽지역발전기금, 결속기금 등을 통한 다양한 국가 간 협력을 진행해왔다.
그 과정에서 유럽은 특히 경제적 개발격차의 해소뿐만 아니라 사회적 통합과 상생을 위해 국가 간 빈부격차와 각국 내 부의 양극화의 해소에도 주력했다. 노동조합은 물론이고 다양한 시민사회단체들에 대한 지원을 통해 통합 유럽의 미래에 대한 의사결정과정 참여를 촉진하는 방식으로 '소수만의 유럽'이 아닌 '다수를 위한 유럽'을 지향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구조조정에 따른 부의 편중, 고용불안의 문제들이 새로운 형태로 재생산되고 있으며, 이런 문제들은 각국의 정치적 변화를 규정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일본의 아시아 지역 연구도 타산지석 삼아야
유럽의 경험 중에서 특히 역내 공통의 과학기술 지식기반 형성과 혁신경쟁 촉진을 위해 1984년 이후 추진돼온 두 개의 대형 프로그램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중 하나는 장기적으로 공동의 과학기술 지식기반을 구축하기 위한 '유럽 프레임워크(EF; European Framework)이며, 또 다른 하나는 각국에서 혁신경쟁을 통해 신산업을 창출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구조조정 프로그램인 유레카(EUREKA)다. 특히 EF는 2007년부터 시작될 7차 사업기간에 670억 유로의 예산이 배정되는 등 그 활동규모가 급격하게 확대되고 있다. EF는 1차에서 4차에 이르기까지는 유럽통합에 필요한 중단기적 과학기술 기반을 갖추는 데 초점을 맞췄고, 5차 이후에는 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지식기반을 마련하는 동시에 과학기술 지식기반의 사회경제적인 효과에 주목했다. 이어 6차와 7차 프로그램에서는 사회문화적 측면에서 유리된 기술적 효율성만을 중시하는 미국 식의 과학기술 전략과 달리 과학기술의 가치를 결정하는 원천이 사회와 문화에 있다는 점을 프로그램의 3대 기초 내에 명시적으로 포함시켰다. 아울러 유럽은 과학기술 지식기반의 측면에서 유럽 전체 차원의 연구개발(R&D) 클러스터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다.
유럽의 경우는 이처럼 개발격차 해소 및 구조조정에 따르는 비용의 공동부담을 목표로 하는 각종 발전기금 및 사회기금을 운용하는 것은 물론이고 중단기 구조조정 프로그램인 유레카, 중장기 공동 지식기반 창출 프로그램인 EF, 그리고 R&D 네트워크 구축 등 다차원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구조조정을 추진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유럽은 기술의 사회경제적 영향에 대한 평가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 이를 위해 유럽은 시민사회가 주도적으로 실시하는 기술영향 평가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고, 그 주제도 기술이 환경, 보건, 고용, 소득분배 등에 미치는 영향에 집중돼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는 R&D 국제화 프로그램을 추진 중에 있긴 하지만 형식적인 양해각서(MOU) 체결로 가시적인 성과를 올리는 것에 급급한 실정이며, R&D 연구센터 유치도 실적에 급급한 나머지 전체적인 수요공급 상의 연관성을 거의 고려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의 국제화 사업은 그 중심이 해외, 특히 미국 중심의 우수 연구역량 국내유치에 집중되어 있다. 반면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진행돼야 할 장기적인 아시아 역내 분업구조 재조정에 필요한 과학기술시장, 즉 미래의 블루오션이랄 수 있는 동아시아 지역에 대한 R&D 역량의 진출 혹은 국제협력은 거의 추진되지 않고 있다.
한편 노동력 이동과 관련해서는 아시아 차원의 국제협약을 통해 단순 노동인력의 아시아 역내 이동 자유화 폭을 점진적으로 확대하는 방안이 필요하다. 이렇게 해야 국가 간 노동력 가치 격차가 완화될 수 있으며, 아시아의 평균적 노동력 가치 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국가 간, 기업 간 경쟁이 기술혁신을 촉진하는 방향으로 전환할 가능성 역시 높아진다. 여기에 전문적인 과학기술 및 서비스 관련 지식역량을 제공할 수 있는 공동의 공급기반을 구축하는 노력이 덧붙여져야 한다.
한 가지 흥미를 끄는 것은 일본의 경우 APU(아시아태평양 대학)을 비롯한 다수의 연구기관들이 아시아 지역경제에 대한 연구를 할 전문 지식인력 양성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의 이러한 시도는 매우 중요한 것인데, 이공계뿐만 아니라 인문사회과학 영역에서도 아시아 전체를 포괄하는 교육체계를 갖추는 것은 국가적 이해관계를 넘는 새로운 관점의 생산 및 확산에 중요한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