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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최우영 납북자가족협의회 회장…아버지는 비전향 장기수
2006-06-26 11:33 | VIEW : 116

"진보, 더 이상 침묵하는 건 죄입니다"



이준규(평화네트워크 정책실장)/ 2006년 6월 26일



지난 6월19일, 최우영 (납북자가족협의회 회장, 87년 납북된 '동진호' 어로장 최종석씨 딸)를 만났다. 인터넷신문 <레디앙>과 함께 기획한 이번 인터뷰(인터뷰기사 [원문보기])는 이미 레디앙에 기사화되었으며 많은 반향이 있었다. 다음은 인터뷰 내용만을 정리한 부분이다. 기사는 레디앙의 윤재설기자가 작성했다.

- “동진호가 납북, 억류된 경위에 대해 먼저 말씀을 해주시죠.”

=“1987년 1월15일 텔레비전 속보를 통해 동진호가 납북되었음을 알게 되었어요. 그 당시에는 정부로부터 ‘아버님이 인천에 모 호텔에서 기자회견을 할 것이다, 2월초에 아버님이 오실 것이다’라는 통보를 받았죠. 그러고 나서 며칠 있다가 ‘아버님 기자회견이 취소됐다’고, ‘남북한에 미묘한 뭔가가 있어서 오지 못하게 됐다, 최선을 다하겠다…’ 그런 공문이 왔어요.

사실 저는 북한을 몰랐어요. 아버지가 납치되셨지만 배를 타시는 분이셨기 때문에, 매일 매일 돌아오는 분이 아니라 한달에 한번 정도 오셨기 때문에 아버지가 납치돼도 실감이 안 났어요. 언제나 그랫듯이 저희들이 좋아하는 선물을 사오시며 집으로 오실 것만 같았어요.

아버지가 납치되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 건 어머니가 힘들어 하시는 모습을 보고 사랑하는 아버지가 납북되었음을 절감하게 되었어요.

그러다가 1999년이었는데 북한 인권과 관련한 전반적인 실태조사가 모든 일간지에 실린 적이 있었어요. 거기서 정치범 수용소…. 저는 정치범 수용소가 있다는 생각을 해보지를 못했어요. 짐승도 먹지 않는 그런 것을 먹는 곳이라고 그러더라고요.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된 한국인 22명. 거기서 아버지 이름을 봤어요. 너무나 황당하고 믿을 수가 없었죠. 어떻게 믿어요.”

최우영 씨는 먼저 통일부에 전화를 했다. 통일부에서는 그 자료는 국가정보원에서 배포한 것이라며 자기들은 모른다고 했다. 국정원에 전화했더니 담당자는 만나지 않겠다, 자신이 누군지 밝힐 수 없다, 자료에 대해 알려줄 수 없다며 귀찮아했다.

“아버지가 어떤 상태인지, 인간 이하 삶을 살고 있는데 얼마나 힘드신지 알고 싶어 통일부 를 찾아갔죠. 갔더니 공무원이 87년도 자료를 그대로 읽고 있는 거예요. 똑같은 얘기 들었다고 얘기하니까 그 공무원은 충격을 받아서 부끄럽고 미안하다고 그러더라고요.


"왜 탈출 못하냐고 원망했었는데…"

저는 아버지를 원망한 시절이 더 많았어요. 제 아버지는 우리를 사랑했고 목숨을 걸고 오시는 분인데 기다려도 오지 않으시는 거예요. ‘목숨을 걸고 탈출을 왜 못해’하고 원망했던 마음이 너무 죄송스럽고 아버지가 너무 불쌍한 거예요. 한달을 울었어요.”

이 얘기를 지금까지 수백 번 했을 테지만 이 대목에서 최씨의 목소리는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 뒤에 아버지 소식을 듣기 위해서 탈북자들을 만나기 시작했어요. 탈북자들을 만나면서 놀라운 사실을 많이 듣게 됐죠. 그분들 중에 한분이 아버지를 봤는데 아버지가 한달에 한번 햇볕을 보러 나왔대요. 한달에 한번 햇볕을 보는 사람은 죽이지 않는다는 걸 의미한다고, 살아있을 확률이 높다고 희망을 가지라는 거예요.

박종철 사건 잘 아실 거예요. 수지김 사건도 알려졌고 아직도 알려지지 않은 게 있다면 바로 저희 아버지 사건일 거예요. 87년 그날 박종철 사건이 있었고 김만철 씨 가족이 탈북해서 대만으로 갔었죠. 북한에서는 김만철 씨가 탈북이 아니라 배가 떠내려 간 거라고 하면서 송환을 요구했죠.”

당시 전두환 정권은 탈북해서 대만으로 갔던 김만철 씨 가족을 남한으로 데려왔다. 그러자 북한은 동진호를 돌려보내겠다는 약속을 일방적으로 깨고 김만철 씨 가족과 맞교환을 요구했고, 남한 정부가 이를 거절하자 북한은 동진호를 간첩선으로, 선장인 김순근 씨와 어로장인 최종석 씨를 간첩으로 몰았다.

- “아버지가 생존해 있다는 것을 정부를 통해서 들은 적은 없나요.”

= “정부를 통해서 들은 적은 없어요. 기사를 통해서 봤죠. 적어도 나에게는 국가는 믿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기댈 곳이 없는 거죠. 그때 그 기사를 못 봤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거예요.”

- “납북 후에 최종석 씨가 북한에서 비전향장기수로 몰렸었는데요.”

= “북한은 아버지를 비전향장기수로 주장하고 있어요. 북한에서 유일하게 인정하는 비전향 장기수는 김순근씨와 아버지입니다. 우리정부는 비전향 장기수 63명을 보내주고 그 전에 이인모 씨도 보내줬죠. 그런데 한국은 북한이 인정하고 있는 비전향장기수에 대해서도 송환을 얘기하지 못하고 있어요. 경제적으로 어려워 경제적 지원이 없으면 견디기 어렵고 이미 300만 명의 주민이 굶어 죽었지만, 이 부분만큼은 우리 정부가 배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남한에서 학교 나왔고, 공무원으로 자리를 잡았고, 세금을 내고, 제 동생은 군대를 갔어요. 아무래도 팔이 안으로 굽는 건데 침묵 당하고 무시 당하고…. 자다가도 눈물이, 피눈물이 나요.”

- “납북자 가족들은 취직 등에서 불이익을 받아왔다고 들었는데 실제 불이익을 받은 적이 있습니까.”
    
= “국정원에서 연락이 와요. 이사 가면 찾아오고…. ‘납북자 가족’이란 말, 들어보셨어요? 납북자 가족이라고 지금도 밝히지 않아요. 전쟁 때 82,950명, 전쟁 후에 489명 납치가 됐어요. 한 집 건너 납북자와 관련이 다 있을텐데…. 언론인이 납치됐다는 얘기 들으셨어요? 방송국 피디가 납치됐어요. 학교 선생님이 납치됐어요. 한살짜리 애가 납치됐어요. 온가족이 납치가 됐고, 독일에서 공무원이 일하다 납치됐고, 학생들이 납치됐어요. 그런데 납북경위라든지 하나도 밝혀지지가 않았잖아요.”

- “납북자들 중에서 돌아오신 분들도 있지 않습니까. 이런 분들 같은 경우에는 정보기관에 불려가서 조사를 받는 등 돌아와서도 고통을 받고 있는데요.”

= “그렇죠. 그런데 저희가 그런 분들까지 못 챙겼어요. 저희는 피해자 단체이고 다들 직장들이 있고, 직업으로 활동하는 분이 없거든요. 갈 곳이 없으니까 저희한테 오시는데, 그런 분들을 지원할 수 있는 단체가 만들어졌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그분들은 고문을 많이 당해서 40세 이전에 많이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남은 분들이라도 살아계실 때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되었으면 해요”

- “납북자가 485명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국정원에서 명단을 통보해주는 것은 아닌가요.”

= “생사확인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고 현재로선 이산가족 만날 때 한번 만나는 것이 전부입니다.”

비전향 장기수는 똑같은 간첩이었는데 북한에서는 가족들이 영웅대접을 받잖아요. 장기수들은 국내 30여 인권단체들 도움으로 자유롭게 여행도 다니고 북한에 있는 가족들 생활하는 모습을 비디오테이프를 통해 보기도 하지만, 납북자 가족들은 생사확인조차 못하고 있지요.”

인터뷰 말미에 최씨는 “<송환>을 보면 우리가 비전향 장기수 송환을 반대하는 단체로 비쳐졌다”며 “그건 명백히 왜곡된 이미지”라고 말했다.

“납북자 가족들 만나보세요. 가난이 대물림되는 생계 속에서 힘들게 살아가고 있어요.

납북자 가족들은 지난 6년간 (납북자 관련 특별)법제정을 요구해왔지만 아직도 법제정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요.

- “김대중 정부 시절에 정부를 향해서 청원을 한다던가 그런 적은 없었는지요.”

= “방법을 몰랐어요. 최근에 한나라당 정형근 의원님이 도와주셔서 하게 됐죠. 일찍 알았으면 그런 것부터 했었어야 했는데 아쉬워요”

- “2003년 12월 국가인권위원회 점거 농성이 있었고 이듬해 4월 국가인권위가 ‘납북자가족 인권침해에 관한 실태 파악과 특별법 제정 권고안’을 발표했는데요. 그 이후 이종석 통일부 장관 청문회에서 특별법 제정을 약속하는 등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 “역대 장관들 중에 특별법 제정에 대한 적극적인 의지를 표명한 분입니다. 기대하고 있습니다.”

- “납북인지, 월북인지 어떻게 아냐, 그런 질문을 받았던 경험을 얘기한 인터뷰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 “그땐 너무 충격적이었어요. 예를 들어 아이가 유괴를 당했어요. 유괴 납치범이, ‘가출해서 나한테 왔다’고 하면 그 얘길 누가 믿나요? 그런 사람한테 손을 잡고, 괜찮을 거라고, 곧 올 거라고, 고생이 얼마나 많냐고 하는 게 인지상정이잖아요. 저희들은 북한보다 남한의 벽이 더 두터워 상처를 많이 받았어요. ”

그 고통을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진보단체들의 무관심, 냉대, 의혹의 눈초리

최우영 씨는 처음 활동을 시작할 때 금세 납북자 가족을 지원해줄 단체가 생길 것으로 생각했다. 일본에서는 한달만에 생겼기 때문에 한국에서도 지원단체가 쉽게 만들어질 것으로 생각하고 평화, 인권, 통일과 관련된 단체를 찾아다녔다. 그런데 최씨에게 돌아온 것은 무관심과 냉대, 의혹의 눈초리뿐이었다.

= “더 상처를 많이 받았어요. 진보진영에서는 어느 정도 대안을 갖고 있는지 궁금해요. 이제 납치 문제는 전세계의 인권문제가 되어 미국, 일본 뿐아니라 유럽의회에서도 납치문제의 심각성을 논의하고 있어요. 독일, 폴란드 언론에서도 관심을 보이며 인터뷰 요청을 하고 있어요.

2003년에는 이미 영국의 목사님이 납북된 안승운 목사에 대한 생사확인을 북한에 제기한 사례도 있어요. 시대가 많이 변해 세계적으로 한국의 납북자 인권문제에 대해 행동을 시작하고 있는데 과연 납북된 노동자들을 위해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네요. 언제까지 그렇게 팔짱만 끼고 있을런지요. 진정한 진보주의자는 납북자 문제를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피켓 하나 들어주는 게 고마울 따름

물론 피해자와 제3자의 생각은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진보진영이 그동안 얼마나 납북 피해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왔는가를 되묻게 하는 최씨의 토로는 많은 고민을 던져주고 있었다.

- “일본내 주류의 움직임은 북한에 대한 경제제재나 인권법 제정을 통해 압박하는 데 초점이 맞춰진 듯 합니다. 한국에서도 시청 앞에서 30만이 모여 북한인권대회를 하면서 압박을 하는데 그게 과연 문제해결에 도움이 될 것인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인도주의적인 접근일텐데요. 2월에 적십자 회담에서 북한이 낮은 수준이지만 납북자 문제를 언급한 바 있습니다. ‘이산가족문제에 전쟁시기 및 그 이후 시기 소식을 알 수 없게 된 사람들에 대한 생사 확인 문제를 포함시켜 협의 해결해 나가기로 한다’는 것인데요. 가족들은 더디고 답답하게 느끼겠지만 그나마 이런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의 남북화해협력 정책이나 대화채널 확보로 가능했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 “지금부터 한국의 납북자 문제해결 방향은 중요한 실험대에 오르게 되었다고 봅니다. 그동안 이산가족 상봉을 통해 납북자 가족들은 만나야겠고 만난 가족들은 송환을 포기하고 국민들 관심 속에서 사라져 버렸지요. 오는 28일 최계월 씨가 아들 김영남 씨를 만나러 가는데 분명, 북한은 ‘자기가 스스로 왔다. 북에서 살고 싶다.’ 그리고 북한에 대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해 찬양을 하리라 생각돼요. 이 상황에서 납북자 김영남 씨 가족이 포기하지 않도록 우리 사회가 받쳐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래요. 그래서 단 1명이라도 송환되기를 기원합니다.”


“북한, 일본에는 잘 하면서 우리는 무시”

- “그게 고민되는 부분입니다. 일본 납치피해자 가족들은 그래서 만나지 말라고 하는데요.”

= “일본에서는 이미 ‘만나는 문제’가 아니에요. 일본에서는 귀국의 사례가 있었잖아요. 요코다 메구미 씨는 유골이 송환됐고요. 그런데 그게 가짜였고 한 분은 동물뼈가 섞여 있었다고 하고요. 우리는 돌아온 사례가 없어요. 송환이라는 개념이 없어요.

살아계시면 송환해야 되고, 돌아가셨으면 유해라도 모셔와야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북한은 일본의 납북자문제만큼 우리를 존중해줬으면 해요. 그것이 진정한 통일의 지름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납북자 문제는 북한 인권 문제 아니다"

우리는 북한 인권을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이건 국내 인권의 문제예요. 우리도 북한인권에 들어갈 수밖에 없지만 납북자 문제는 국내문제예요.

- “납북자 문제가 북한 인권 문제가 아니라는 말씀에 동의합니다. 북한인권 문제와 납북자 문제를 섞어서 얘기하면 진보는 얘기하기 꺼려지고 보수는 북한체제를 공격하는 수단으로 활용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납북자 문제는 남한 정부가 책임을 다 했는가라는 문제이고, 북한이 힘없는 민간인에게 가한 국가적 범죄행위로 성격을 규정해야 할 것입니다.”

최씨의 얼굴이 다소 밝아졌다. 두 시간 넘도록 길게 이어진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최우영 씨는 작은 소망을 밝혔다.

“저도 아름다운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그러기에는 납치피해자 가족만으로는 힘이 없습니다. 많은 국민들과 양심있는 지식인과 NGO활동가들의 역할을 기대해봅니다.”

다음 주면 김영남 씨 모자의 상봉이 이뤄질 것이고, 미국과 일본의 압박은 더욱 거세질 것이고, 국회에서는 납북자 관련 특별법 제정 논의가 진행될 것이다. 그동안 납북자 문제를 애써 외면하고, 침묵으로 일관해온 진보진영이 이제 최씨의 작은 소망이 이뤄질 수 있도록 조금이나마 도움을 줄 자세가 되어 있는가라는 물음을 던지는 인터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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