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자 : 요모타 이누히코(四方田犬彦, 메이지대학 교수) 시바타 모토유키(紫田元幸, 도쿄대학 교수) 누마노 미츠요시(沼野充義, 도쿄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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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hoto by Shibanaga Office |
현재 세계의 여러 나라에서 무라카미 하루키 붐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실제로는 각각의 나라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은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또 거기에는 어떠한 문화적인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아시아, 미국, 유럽, 러시아의 문화 사정에 정통한 세분을 모시고 이야기를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모타 저와 같이 여기저기 전 세계를 방랑하다보면 여러 사람들로부터 무라카미 하루키에 관한 질문을 받습니다. 어느 나라에 가든 큰 서점에서는 나보코프(Vladimir Nabokov:1899~1977 미국의 작가이자 시인. 러시아의 명문귀족출신. 중년남자의 도착적인 소녀 애를 그린 <로리타> 등의 작품이 있다)와 함께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이 잘 보이게 진열되어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1970년대의 민주화 투쟁 후의 세대적인 노스탤지어가 무라카미 문학에 절호의 장소를 찾아내어 젊은 작가 중에 하루키 세대라는 것이 출현했고, 몽골에서는「양을 쫒는 모험」이 러시아어판으로 읽혀지고 있으며, 울란바토르에서는「자신들이 아니면 이 소설은 이해할 수 없다」고 평해지기도 했습니다. 제가 최근에 체류한 베오그라드(구 유고, 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의 수도)에서는 밀로세비치 정권 붕괴 후의 정치적 허탈감 속에서 학생들이 크로아티아에서 출판된「노르웨이의 숲」을 읽고 공감하고 있습니다. 해외에서의 일본 문화의 수용을 고찰하는데 있어서 무라카미 하루키는 지금까지 예를 볼 수 없는 독특한 것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테마는「문화의 국경초월」이라고 하는 것을 포함해 실로 다양한 관점에서 분석 가능하며, 또한 이 단계에서 한번쯤 잘 검증해 두어야 할 시기에 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미국, 유럽에서 무라카미 하루키가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 잘 알고 계시는 두 분에게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으며 심층적인 고찰을 하고자 합니다.
미국 문단속에서의 위치
시바타 최근 미국에서「해변의 카프카」가 출판되었습니다. 금년 1월 24일자「뉴요커」에서는 즉시 존 압다이크가 3페이지에 걸쳐서 서평을 썼습니다. 압다이크라면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의 등장인물이 읽을 것 같은 작가이지요.「뉴욕 타임즈·북 리뷰」의 일면에서도 스타 서평자인 로라 밀러가 서평했고,「빌리지 보이스」라고 하는 보다 더 활기찬 매체에서도 폴 라파지 라고 하는 신진기예의 작가가 진지한 서평을 썼습니다. 이미 무라카미 하루키라고 하는 작가는 바다 저 편에서 온 새로운 사람이 아니라 미국 문단의 일원으로서 취급되고 있습니다. 어느 서평에서나 지금까지의 무라카미 작품과 비교해서 어떻다 라고 하는 것을 확실히 근거해서 쓰고 있습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나 미시마 유키오와 같은 작가의 작품은 일본을 알기 위해서 읽는다고 하는 자세가 어딘가 있었다고 생각됩니다만, 오에 겐자부로와 같은 작가부터는 그러한 의식도 많이 희미해져서 현재는 일본을 알기 위해서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미국의 젊은 작가들 속에 동화되어 전혀 위화감 없는 존재인 반면, 역시 영어권의 작가들과는 다르다고 하는 의식도 있는 것 같고, 예를 들면 로라 밀러는「해변의 카프카」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만, 서양 소설의 쓰는 방법에서 보면 전부 잘못되어 있으나 그것이 오히려 재미있다는 견해를 보이고 있습니다. 존 압다이크는 무슨 이유에서인지「신도(神道)」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하면서 (웃음) 역시 신도(神道)를 모르면 이 소설은 이해할 수 없는 걸까? 라고 쓰기도 했습니다.
요모타 역시 일본의 표상을 거기서 보려고 하는 것일까요? 시바타 양쪽 모두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위화감 없이「야, 일본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는 작가가 나왔군」이라는 생각. 그것이 우선 출발점입니다. 그렇지만 잘 읽어 보면「응, 역시 이 부분은 다르구나」라는 부분도 점점 나옵니다. 뭐 압다이크가 신도(神道)를 제기해서 작품 그 자체의 명확한 평가를 피하는 것은 대작가의 신작, 그야말로 예를 들어 압다이크의 신작이 서평될 때 자주 사용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만.
미국적인 작가상과 일본적인 미학
누마노 러시아의 경우 상황은 미국과 비슷합니다. 큰 서점에 가서 문예서의 코너를 보면 무라카미 하루키가 제일 큰 공간을 차지하고 있고 그 옆에 쿤데라(체코의 시인, 소설가), 가르시아 마르케스(콜롬비아의 작가.1982년 노벨문학상 수상), 나보코프와 같은 20세기의 세계 문학 중에서도 우리에게 친숙한 작품들이 정렬되어 있습니다. 무라카미는 이미 일반적으로 독서인들이 읽는 범위의 책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러시아인들이 일반적으로「문학」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테두리 속에서 위화감 없이 읽고 있는가 하면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어서, 약간 짓궂은 말투로 들릴지도 모릅니다만, 적당히 이국적인 것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완전히 러시아 문학과 같다면 독자적인 매력은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러시아의 독자들은 대체로 러시아의 일상에 이미 모두 싫증을 내고 있습니다. 꿈이라고 할까 조금은 눈앞의 현실과는 다른 세계를 갖고 싶어 합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미시마 유키오나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완전히 다른 세계로 거기에 자기 투영은 불가능합니다. 그렇지만 무라카미 하루키의 주인공의 심리·행동이라면 러시아의 젊은 독자들은 자신의 일과 같이 공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점은 러시아어 번역자 트미트리 코바레이닌도 지적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적당히 이국적이면서 기본적으로는 보편적인 현대문학의 흐름에 편승하고 있는 것입니다. 러시아 독서계에서 그러한 지위를 차지하는 실력 있는 작가가 달리 없었고 그 공백을 무라카미씨의 책이 메운 것이지요. 러시아에서는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의 번역이 나오기 훨씬 전인 1980년에「현대의 외국 문학」이라는 수준 높은 서평지(외국의 신간서를 전문가가 원서로 읽고 서평을 쓰는 잡지)에「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의 서평이 이미 나왔었습니다. 거기서는 러시아의 일본 학자가 이것은 일본적인「모노노아와레(헤이안 시대의 문예나 귀족생활의 이념으로 깊숙이 파고드는 정취를 나타냄)」의 세계라고 쓰고 있습니다. 나의 기억으로는 일본에서는 그 당시 커트 보네것 쥬니어나 브로티간을 예로 들어서 미국적인 작가가 나왔다고 했었는데 러시아인 일본 학자는 거기서 일본의 전통적인 미학을 찾아내 버린 것입니다. 일본 우리의 경우와 해석 방법이 정반대가 되어 있습니다. 지금도 역시 그 차이는 있는 것 같습니다. 유럽이나 러시아에서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미국적인 작가라고는 인식되지 않은 것은 아닐까요? 시바타 그거 재미있네요. 누마노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 속에 러시아 혹은 유럽인 들에게 있어서 낯선 것이 나오면 그것이 일본적인 것이라고 생각해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지금 러시아 · 동구권에서는 일본 문화 전체에 대한 호감도가 높기 때문에 거기에 매우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미국적이라고 하기 보다는 기본적으로는 역시 일본적으로 보여서 그것이 인기의 원인이 되기도 하는 것은 아닐까요. 시바타 그런 의미에서는 영어권의 해석 방법과는 상당히 다르군요.
미국 문화의 중심을 옮기는 흥미로움 누마노 미국의 경우는 좀더 미묘한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무라카미의 작품 속에 미국적인 것이 나왔을 때, 거기에 대해서 일본인들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와 미국인들의 감각이 전혀 다르다는 것이지요. 시바타 그렇죠. 하지만 그것은 미국 문화가 일본까지 가면 형태가 달라진다든가 변용한다든가 하는 그러한 이야기가 아니라, 오히려 예를 들면 소설에 나오는 커넬 샌더스(KFC치킨의 안경 쓴 할아버지. KFC치킨창업주)라면 커넬 샌더스가 그 소설 속에서 본래 미국에서 가지고 있는 의미가, 소위 해체되고 있다는 식으로 보이지 않을까요. 예를 들어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를 보았을 때의「아! 그런가, 미국도 핀란드까지 가면 이정도 까지 별 볼일 없고 김새는 건가」라는 느낌과는 조금 다릅니다. 일본적으로 다시 읽혀지고 있다고 하기 보다는 이따금 일본의 작가가 미국적인 아이템의 의미를 해체해 보이고 있다고 하는 그러한 해석법이 아닐까요. 요모타 미국적이라고 하면 추상적이어서 이해하기 어렵네요. 제가 예전에 뉴욕에 2년 정도 있었을 때 스스로 미국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것이 하나 둘씩 무너져 갔습니다. 서해안 지역과 뉴욕과는 완전히 다른 나라라고 나는 생각하며 마이애미, 스페인어권의 미국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시바타 이 경우의「미국적인 것」은 요컨대 백인의 문화, WASP의 문화이지요. 요모타 혹은 할리우드의 영화입니까? 시바타 그렇죠. 그래서 다음에 나오는 것은「그렇지만 진짜 미국 문화는 재즈라든가 블루스이며 WASP(White Anglo-Saxon Protestant:영/미국계 기독교인. 즉 미국이민 초창기의 청교도들)가 아니라 소수의 민족적인 것이야말로 진짜다」라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무라카미씨가 재미있는 것은 그러한 진짜 지향으로부터도 벗어나 있는 부분입니다. 데뷔작「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의 속표지에는 비치 보이즈의「캘리포니아 걸즈」의 가사가 인용되고 있습니다만, 그 시절 비치 보이즈는 연약한, 락의 왕도에서 벗어난 것으로 평해지고 있었습니다. 왕도는 좀더 하드한 락. 누마노 이미 왕도에서는 벗어나 있지요. 시바타 그렇습니다. 게다가 무라카미씨가 작가의 표본이라고 처음부터 말하고 있는 것은 피츠제랄드(미국의 작가). 포크너(미 소설가 1950년 노벨문학상수상), 헤밍웨이와 같은 간단히 말해서 한 사람은 불필요한 부분을 도려내고 쓰는 타입이고 또 한 사람은 과잉함이 승부라고 생각하는 타입인데 피츠제랄드는 그 큰 흐름 속에서는 조금 떨어지지 않나 라고 보기 쉬운 작가입니다. 무라카미씨의 경우 재즈 역시 이스트코스트의 흑인 중심의 재즈 뿐 만이 아니라 웨스트코스트의 백인 중심의 재즈도 종종 긍정하는 식으로 진짜 지향 같은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부분이 있는데 일본의 경우 그 부분에 직감적으로 반응한 독자는 상당히 많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해외에서는 아메리칸 문화의 중심으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나 있는가 하는 이야기가 어디까지 전해지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뭔가를 가리켜「이것이 대답이다」라는 태도를 보이거나 하지 않는 것은 대강 전해지고 있지 않을까요?
붐으로부터 태어난 새로운 창조성
요모타 그런데 이 무라카미 하루키 붐이 낳고 있는 새로운 현상으로서「팬 문화」가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1990년대에「하루키 세대」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이전의 한국문학은 가족과의 관계없이는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을 계기로 가족과의 관계로부터 자유로운「나」가 문학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음을 알고 한국에서도 그러한 작품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 세대의 한 사람인 윤대녕 이라는 작가는「은어낚시통신」이라는 소설을 썼습니다. 주인공인「나」는 30대의 독신의 사진가로 서울의 한 아파트에서 밤에 혼자 위스키를 마시면서 빌리 홀리데이를 듣고 있다. 거기에 수수께끼의 편지가 온다. 옛 여자친구였던 패션모델로부터의 편지로, 거기에는 수수께끼와 같은 말이 써 있다. 그것을 읽고 있는데 전화가 걸려 와서「당신은 자신의 존재의 기원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돼요」하고 뚝 끊어 버린다. 편지에는「『은어 낚시 통신』중에서」. 내가「도대체 무언가」라고 독백하는 것으로부터 이야기가 전개된다. 읽기 시작했을 때 이것은 모방작품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다만 저는 지금의 세계의 문화를 보았을 때 무엇인가를 몹시 좋아하게 된 인간이 그 모방작품을 자신의 언어로 만듦으로써 새로운 문화가 발전해 나가는 예는 많다고 봅니다. 그 외에도 홍콩에서는 스탠리 쿠원 감독에 의해서 하루키라고 하는 소설가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이방인들」이 촬영되고 일본에서도 개봉되었습니다. 왕가위 감독은「노르웨이의 숲」을 영화화하고 싶어 했습니다만 그 권리를 얻을 수 없었기 때문에「사랑하는 혹성」이라는 영화를 찍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무라카미 하루키를 기원으로 하면서 새로운 서브 컬쳐를 포함해 여러 가지 것들이 증식해 나가는 현상이 있습니다. 시바타 미국은 작가 데뷔가 늦기 때문에 무라카미씨의 작품을 읽고 자란 작가가 나오기까지는 좀 기다려야 되리라 봅니다. 다만 수권의 작품을 쓰고 있는 생기 있는 젊은 작가에게 누가 재미있는지 물으면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대답이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현재의 미국 소설을 보고 있으면 무라카미 하루키 같다고 생각되는 것이 매우 많습니다. 요컨대 쓰는 사람의 잠재의식, 의식의 심층이 대중문화로 되어 있다는 것은 세계 공통이 되어 버린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은 미국의 국부적인 현상일지도 모르지만 8,90년대 전반 정도의 미국 소설이라고 하는 것은 압도적으로 리얼리즘 중심이었습니다. 그것이 지금은 무라카미 하루키적으로 현실로부터 시작해서 극히 자연스럽게 환상의 세계로 들어가는 작품이 많아졌습니다. 환상의 세계로 들어갈 때의 경로라든가 소도구 따위가 조니워커 라든가 커넬 샌더스와 같은 식의 방향입니다. 환상으로의 이행이 극히 자연스럽게 되고 있다는 점이 열쇠입니다. 그 점과 요모타씨가 말씀하신 팬 문화 이야기는 아마도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무라카미 문학 자체가 서브 컬쳐를 심층 깊게 들어간 것으로 잘 사용하고 있고 수용하는 쪽도 그러한 서브 컬쳐의 최선의 것으로서 무라카미 문학을 읽고 있습니다. 요모타 지금 말씀하신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서브 컬쳐의 틀이 있고 그 안에서 완성되어 가는 문화. 무라카미씨의 소설 자체가 비치 보이즈 등의 다양한 서브 컬쳐가 서로 겹치는 부분에서 우연히 만들어진 것으로 개인의 사상을 표상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읽은 사람들도 같은 틀에서 반응 공감 현상이 나와서 일종의 팬 문화의 원인이 되는 것은 아닐까요? 미시마 유키오나 오에 겐자부로에 대해서 아무리 좋아한다 해도 그것을 뭔가 만지작거려서 모방작품을 만들고자 하는 분위기는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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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hoto by Satoru Seki |
심볼에 대한 의미 함축방법
누마노 유럽의 경우 미국적인 대중문화에 대한 반발은 원래 강해서 특히 러시아 등지에서는 진지하게 현실에 관계하는 타입의 무거운 문학이 가치관의 주류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가치관도 많이 변해서 대중문화적인 것도 점차로 유럽에 침투하게 되었습니다. 러시아의 경우 무라카미 문학의 애독자는 꽤 폭넓은 층에 이르고 있습니다만, 그 중심은 역시 대중문화적인 것에 친화감을 가지고 있는 젊은 세대입니다. 기성세대의 일본 문학자들은 역시 따라갈 수 없다고 하는 느낌이지요. 이런 젊은 세대는 답답한 사회적 관계의 리얼리즘 문학을 단념하고 좀더 즐기면서 세계 문학을 읽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라카미 하루키도 그 독서 레파토리 속에 극히 자연스럽게 침투하게 됩니다. 러시아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고 자란 작가가 있을지는 의문입니다만 젊은 여성 작가 중에「원숭이를 쫓는 모험」이라는 작품을 쓴 사람이 있습니다. 단순한 타이틀의 패러디입니다만 무라카미 문학은 그 정도로 모두에게 공통의 장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시바타 무라카미 하루키가 아메리칸 문화의 여러 가지 아이템을 많이 사용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지만 그 의미는 꽤 미묘합니다. 그 점이 미국의 독자들이 당황하는 점이기도 해서 앞서 언급한 조니워커 라든가 커넬 샌더스 역시 일본에서도 그렇습니다만 영어권의 독자에게는 당연히 어떤 종류의 의미가 있습니다. 무라카미씨는 그런 의미와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한다고나 할까, 어떤 의미를 갖게 하는지 확실치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뭐 그것을 말하면 미국의 아이템만이 아니라「양을 쫒는 모험」의「양」역시 그것이 무슨 심볼일까 생각하면 지금까지 양이라고 하는 동물에 부여 되어 온 것 같은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했었지요.
요모타 크리스트교의 세계에 있다면 그런 식의 소설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몽골인은 무라카미의 양의 이미지에 공감합니다. 양을 늘 봐와서 익숙하기 때문에 그 양은 우리가 안다고. 시바타 과연! 그거 참 재미있습니다. 문자 그대로의「양을 쫒는 모험」이군요. 요모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듣고 있는 동안에 아직도 이 테마는 큰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며 다양한 관점에서 고찰 가능하고 고찰해야 한다고 확신을 가졌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무라카미 작품의 수용을 통해서 거울과 같이 보여줄 각국의 문화나 사회의 패러다임, 문학관 등에도 큰 흥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아직 저의 가설입니다만,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이 전 세계에서 읽혀지고 있는 배경에는 독자 사이에 대중문화라고 하는 문화적인 공통 기반이 있는 것만이 아니라, 한국이든 구 유고슬라비아의 나라들이든 어떠한 형태로든 정치적 좌절감을 맛본 그러한 젊은이들에게 특히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도대체 어느 나라에서 어떤 이유로 무라카미 하루키는 히트하고 있는 것인가? 흥미는 끝이 없습니다. 각국에서 번역에 관계하고 있는 사람들을 일본에 한번 초대해서 심포지엄 등의 형태로 그러한 이야기를 들으면 향후의 문화 교류의 바람직한 모양을 생각하는데도 큰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정말로 감사합니다.
遠近(wochi kochi) 제6호(Aug. / Sep. 2005)에서 전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