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년의 문턱에 선 아들에게
급히 마무리해야 할 글이 있어서 어제 네 졸업식에 가지 못했다. 서운했을 수도 있겠구나. 굳이 겨를을 내자면 못 낼 것도 없었지만, 네 어머니와 고모가 간다기에 따로 시간을 내지 않았다. 더구나 아비는 세 해 전 네 형 졸업식에도 가지 않았으니, 네 졸업식에도 가지 않는 것이 공평한 일인 듯도 했다. 졸업을 축하한다. 그리고 이제 성년의 문턱에 이른 네게 몇 마디 당부를 하고 싶다. 이것은 아비가 자식에게 건네는 당부이기도 하지만, 고등학교 문을 나서는 네 세대 청년들에게 앞선 세대가 건네는 당부이기도 하다.
너는 어제 열두 해의 학교 교육을 마쳤다. 우리 사회가 구성원들 모두에게 의무적 권리로 규정하고 있는 기간보다 세 해 더 학교를 다닌 것이다. 그것은, 네 둘레의 친구들 대다수와 마찬가지로, 너 역시 네 세대의 가장 불운한 한국인들에게 견주어 학교 교육의 혜택을 더 받았다는 뜻이다. 그 여분의 혜택을 누릴 수 없었던 네 동갑내기들 가운데는 학교 공부에 대한 열의와 재능이 너보다 컸던 사람들도 있었으리라는 사실을 늘 잊지 마라.
너는 이제 열아홉 살이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의 다정다감한 부모들이 20대, 30대의 어린아이들을 키워내고 있는 터라 네겐 생뚱맞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아비 생각에 열아홉이면 두 발로 설 수 있는 나이다. 그것은 이제 네가 부모로부터의 독립을 생각하기 시작할 나이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그 독립의 첫걸음으로 우선, 앞으로의 학교 공부는 네 힘으로 하려고 애써라. 국가가 고등교육을 책임지지 않는 사회에서, 대학에 다니고 싶으면 제가 벌어 다니라는 말이 야박하게 들릴 줄은 안다. 그러나 단지 경제적인 이유로 대학 진학을 포기한 네 동갑내기들이 적지 않다는 것을 기억해라. 또 네 형도 제 힘으로 대학 공부를 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해라. 지금 당장 온전히 독립하는 것은 어렵겠지만, 적어도 네가 아비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것이 꼭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은 아니라는 점을 잊지 마라.
성년의 표지로서 경제적 독립 못지않게 긴요한 것은 정신의 독립이다. 가족이나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든, 책을 읽거나 신문·방송을 보든, 네가 접하는 지식과 정보와 의견들에 늘 거리를 두도록 애써라. 줏대를 버린 뇌동은 그 당사자에게만이 아니라 공동체에게도 크게 해롭다. 그러나 줏대를 지닌다는 것은 독선적이 된다는 것과 크게 다르다. 줏대를 지니되, 진리는 늘 여러 겹이라는 사실도 잊지 마라. 독립은 고립과 아주 다르다. 고립은 단절된 상태를 뜻하지만, 독립은 연대 속에서도 우뚝하다. 연대는 어느 쪽으로도 향할 수 있지만, 아비는 네 연대가 공동체의 소수자들, 혜택을 덜 받은 사람들에게 건네지기를 바란다. 적어도 너 자신보다는 소수자의 표지를 더 짙게 지닌 사람들 쪽으로 네 연대가 길을 잡기 바란다. 높이 솟아오른 정신일수록 가장 낮은 곳을 응시한다.
네가 막 그 문턱에 다다른 세상은 중고등학교 교실에서 상상하던 세상과는 많이 다를 것이다. 사악한 이성과 욕망의 온갖 광기가 휩쓰는 세상에서 너는 너 자신과 아비를 포함한 인간의 비천함에 절망하고 지쳐, 어느덧 그 비천함의 능동적 실천자가 되고 싶은 유혹에 노출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더러워 보이는 세상 한 구석에 인류의 역사를 순화하고 지탱해 온 순금의 정신이 숨어 있다는 것도 잊지 마라. 그 순금의 정신은 상상 속의 엘도라도가 아니라 바로 네 둘레에 있을 수도 있다.
네가 잘 알고 있듯, 아비는 충분히 독립적이지 못했고 충분히 연대하지 못했다. 그러나 모든 생명체는 뒷세대가 저보다는 나아지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아비에게도 스스로 이루지 못한 것을 네게 당부할 권리가 있을 것이다. 독립적이 되도록 애써라. 소수자들과 연대하려고 애써라. 다시 한번, 네 졸업을 축하한다.
돈과 밥으로 삶은 정당해야 한다.
김 훈
아들아, 사내의 삶은 쉽지 않다. 돈과 밥의 두려움을 마땅히 알라. 돈과 밥 앞에서어리광을
부리지 말고 주접을 떨지 말라.사내의 삶이란, 어처구니없게도 간단한것이다. 어려운 말 하지
않겠다. 쉬운 말을 비틀어서 어렵게 하는 자들이 이 세상에는 너무 많다.그걸로 밥을 다
먹는 자들도 있는데, 그 또한 밥에 관한 일인지라 하는 수 없다, 다만 연민 스러울 뿐이다.
사내의 한 생애가 무엇인고 하니, 일언이 폐지해서,돈을 벌어오는 것이다. 알겠느냐?
이말이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느냐.그렇지 않다. 이 세상에는 돈보다 더 거룩하고 본질적인
국면이 반드시 있을것이다. 그런데, 얘야,돈이 없다면 돈보다 큰 것들이 이루어 질 수 있겠느냐?
부(否)라! 돈은 인의예지의 기초다. 물적 토대가무너지면그 위에 세워 놓은 것들이 대부분
무너진다. 그것은 인간의 삶의 적이다.그런 허망한 아름다움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없다. 이것은 유물론이 아니고,경험칙이다.이 경험칙은 과거와 미래에 대해서 공히 유효하다.
돈 없이도 혼자서 고상하게 잘난 척하면서 살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라.아마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러지 말아라. 추악하고 안쓰럽고 남세스럽다.
우리는 마땅히 돈의 소중함을 알고 돈을 사랑하고 존중해야 한다.돈을 사랑하고 돈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들만이 마침내 삶의아름다움을 알고 삶을 긍정할수가 있다. 주머니 속에 돈을 지니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그 대답은 자명한 바 있다.돈을 벌어야 한다. 우리는 기어코 돈을 벌어야 하는 것이다.노동의 고난으로 돈을 버는 사내들은 돈을 사랑할 수 있게된다. 돈은 지엄(至嚴)한 것이다. 아.'생의 외경', 외경 스러운 도덕은 밥벌이를 통해서 실현할 수 있다.
돈이 있어야 밥을 벌 수 있다. 우리는 구석기의 사내들처럼 자연으로부터 직접먹거리를 포획할 수가 없다.우리의 먹거리는 반드시 돈을 경유하게 되어있다. 그런점에 서 우리의 노동은 소외된 노동이다.밥은 끼니때마다 온 식구들이 둘러앉아 함께 먹는 것이다.밥이란 쌀을 삶은 것인데,그 의미 내용은 심오하다.그것은 공맹노장보다 심오하다.밥에 비할진대,유물론이나 유심론은 코흘리개의
장난만도 못한 짓거리다.다 큰 사내들은 이걸 혼동해서는 안 된다.밥은 김이 모락모락 나면서,
윤기 흐르는 낱알들이 입 속에서 개별적으로 씹히면서도 전체로서의 조화를 이룬다.
이게 목구멍을 넘어갈 때 느껴지는 그 비릿하고도 매끄러운 촉감, 이것이 바로 삶인 것이다.
이것이 인륜의 기초이며 사유의 토대인 것이다.
이 세상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모든 먹이 속에는 낚싯바늘이 들어있다.
우리는 먹이를 무는 순간에 낚시바늘을 동시에 물게 된다.낚싯바늘을 물면 어떻게 되는가.
입천정이 꿰여저서 끌려가게 된다.이 끌려감의 비극성을 또한 알고, 그 비극과 더불어
명랑해야 하는 것이 사내의 길이다.돈과 밥의 지엄함을 알라. 그것을 알면 사내의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아는 것이고, 이걸 모르면 영원한 미성년자다. 돈과 밥을 위해서,돈과 밥으로
더불어 삶은 정당해야한다. 알겠느냐? 그러니 돈을 벌어라.
벌어서 아버지한테 달라는 말이 아니다.네가 다 써라. 난 나대로 벌겠다.
[註] 부 (否) 라! -이 간결하고도 명석한 외마디 부정문은 부정되어야 할 것을 깡그리
초토화 시키는 권능을 갖는다.그리고 다시 부정될 수 없는 위엄을 갖추고있다.
조지훈 선생의 어법에서 차용한 이것을 선생의 혼백이 아시면 난 혼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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