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장국영이 죽었다고?
김경욱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5월
평점 :
품절
김경욱의 소설집 『장국영이 죽었다고?』속에는 인터넷의 가상공간에서 만나는 관계들만큼이나 불안정하고 불투명하게 존재하는 사람들이 있다. 관계 맺기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는 그들은 진정한 소통이 이루어지는 관계에 대한 기대를 하지 않는다. 현실 속에서 외롭게 존재하긴 하지만 그들은 관계에 대한 기대를 애초에 하지 않음으로써, 어느 누구보다도 자유로울 수 있다. 표제작인 단편 「장국영이 죽었다고?」에 나오는 남자 또한 그러하다. “그 누구와도 관계하지 않음으로써 나는 겨우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하는 남자는 지극히 제한된 말로만 생활할 수 있는 피시방 아르바이트를 하며 극히 단절적인 소통의 방식, 채팅을 통해 삶의 한 지점에 아슬아슬하게 접속하고 있다. 경제적인 이유로 아내와 이혼한 후 그가 선택한 삶의 방식은 불필요한 관계로부터의 도피였다.
「페르난도 서커스단의 라라 양」에 나오는 여자도 마찬가지다. 자동차와 휴대폰이 없는 것을 일종의 자부심으로 생각할 줄 아는 그녀는 소통의 채널이 부재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는 점에서 관계의 무거움으로부터 자유롭다. 친구가 넘긴 자동차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운전 연수를 받게 되면서 의도하지 않은 소통을 강요받는 그녀는 그러한 타인과의 소통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녀는 타인의 고압적인 시선들이 담긴 듯한 한 편의 그림을 통해 소통의 어려움을, 위압적인 시선들의 관계 속에 존재하는 관계의 불안한 모습을 토로한다.
「낭만적 서사와 그 적들」의 연인들 또한 소통에 대한 불필요한 기대를 하지 않는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연인들은 낭만적 사랑에 대한 판타지가 얼마나 무모한지를 잘 알고 있다. 사랑의 관계가 타인과의 진정한 소통이 아니라 사랑의 행위에서 비롯되는 자기만족이라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쉽게 헤어지고 만나는 그들의 행위는 마치 인터넷에서 이루어지는 채팅 상대와의 짧은 만남 같이 일시적인 우연에 기대어 있다.
「당신의 수상한 근황」에 나오는 남자는 어쩌면 김경욱 소설에 나오는 인물 중 가장 철저하게 타인과의 관계를 부정하는 인물이 아닐까 한다. 우연한 사고에서 비롯된 아내의 우울증과 아이의 장애는 그의 내면에 타인에 대한 지독한 불신을 심어준다. 그러한 그의 지독한 불신은 보험 조사원이라는 그의 직업으로 구체화된다.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믿음이나 연민조차 거부함으로써 인간에 대한 상처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고 했던 것일까. 관계에서 오는 자잘한 상처들을 피하기 위해선 쓸데없는 믿음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그의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은 잘 알고 있었다.
김경욱의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은 양방향적인 소통이 가져다주는 오해와 불신에서 벗어나기 위해 단편적이고 직선적인 소통의 채널에 의존한다. 텔레비전이나 인터넷 같은 대중매체는 그러한 단편적인 소통에 의존하는 고독한 인간의 존재 방식을 표현하는 데 적합한 도구가 된다. 「장국영이 죽었다고?」에 나오는 남자는 인터넷으로, 「나비를 위한 알리바이」 속 남자는 텔레비전으로 세상과 소통한다. 그러나 인터넷과 텔레비전이 우리에게 심어주는 것의 가상의 이미지일 뿐 실재하는 삶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들의 소통은 무기력하기만 하다.
내가 인터넷에 접속하는 순간 세상 반대편에 있는 누군가와 연결될 수는 있지만 그 연결은 단절되고 불확실한 의미의 교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인터넷에서 만나는 관계들은 쉽게 대화의 상대를 차단시킬 수 있고 언제든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로그아웃함으로써 빠져나올 수 있다. 소통하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인터넷이라는 공간에서 또한 소통이 가능하지 않다는 걸 앎으로써 그러한 기대와 행동은 역설적인 관계에 처한다. 인터넷이나 텔레비전 같은 가상의 공간 속에서 그들이 발견하는 것은 소통되지 못하는 현실의 서글픈 단면일 뿐이다. 「장국영이 죽었다고?」에서 남자가 결국 채팅을 통해 만난 이혼녀인 여자를 현실의 공간에서 만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김경욱의 소설들에서 소통의 몸짓을 찾으려고 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그의 소설들에서 우리가 다시금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소통되지 못하는 당신과 나의 관계, 그리고 그러한 분절적인 삶의 형식일 뿐이다. 소통 불가능한 삶을 영위해 나가기에 단편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에 나오는 구절처럼 우리 모두는 “존재해서 늘 가엾은” 것이다. 분절적이고 일시적인 존재 형식에 기인해 있는 우리의 삶이 가엾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