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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199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모디아노는 매번 잃어버린 기억, 사라져버린 삶의 흔적에 끈질기게 매달린다. 그럼에도 그의 모든 소설들은 지루하지 않다. 오히려 더욱 더 마법같이 끌어당기는 힘을 가지고 있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는 그만이 가지고 있는 그런 매혹적인 힘을 잘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다.
그는 이 소설에서 1940년대의 전쟁을 겪고 난 후 기억상실자가 되어버린 한 남자가 자신의 과거를 추적해 가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날 저녁 어느 카페의 테라스에서 나는 한낱 환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라는 이 한 문장만으로도 충분히 극찬을 받을 만한 유명한 구절로 소설은 시작된다.
오래되어 빛바랜 사진들, 의미를 알 수 없는 종이조각들, 그저 단편적인 기억들을 가지고 있는 증인들 그리고 그들의 불확실한 증언들. 그러한 불투명하고 단편적인 단서들을 가지고 자신의 과거에 대해 추적을 시작하는 남자. 그래서 그를 따라 그의 지나온 삶의 궤적을 추적해 나가는 일은 꽤나 어렵고 초조하다.
어디선가 맡아본 듯한 향기. 낯익은 거리의 풍경, 그런데 기억은 좀처럼 도와주지 않는다. 그리하여 삶이란 것도, 내가 나의 온전한 삶이라고 믿었던 것도 불투명하고 흐릿한, 언제 사라질 지 알 수 없는 그런 헛된 기억들에 의해 움직여진다는 사실.
그런데 그가 점차 자신의 과거로 들어가게 될수록, 그는 전쟁으로 인해 인간의 정체성이 훼손당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과 부닥치게 된다. 그러면서 그는 전쟁 중 스위스로 넘어가려고 하다가 실패한 어떤 남자의 모습이 자신과 많이 닮아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그조차도 그런 기억들이 그저 희미하게만 느껴져서 자신이 진실로 누구였는가를 확신할 수가 없다.
그 당시에는 전부인 것 같았던 것들이 이제는 그저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그런 기억들. 언제 증발될 지 알 수 없는 그런 연약한 존재들의 흔적들. 그런 존재의 가벼운 흔적들을 이 소설의 문장 사이 사이에서 느낄 수 있다.
'나'라는 존재는 그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어느 날 문득 무(無)에서 생겨났다가 잠깐 빛을 발한 다음 다시 무(無)로 돌아갈 그런 존재라는 것. 어쩌면 이 소설은 마치 이 사실을 말해주기 위해 불투명하고 단편적인 증거들 속에서도 그토록 힘든 여정을 계속했는지도 모른다.
그 여정을 따라가는 일은 무척 힘이 들면서도 매혹적이다. 바로 그러한 점이 자꾸만 모디아노의 책을 뒤적이도록 만드는 건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