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기
장 필립 뚜생 / 고려원(고려원미디어) / 1994년 7월
평점 :
절판


조금 이상한 취향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지루한 영화가 좋다. 어떤 특별한 사건도 없이 그저 일상적인 삶을 군더더기 없이 보여주는 영화, 그런 영화가 좋다. 그 일상의 틈 속에서 삐죽이 새어나오는 의식의 면면을 느낄 수 있다면 더더욱 좋겠고. 이 책이 마음에 든 것도 어쩌면 그때문이었을까.

별다를 것 없이 무의미한 일상들, 운전교습을 시작하게 된 그가 운전학원 사무실에서 근무하던 파스칼이라는 이혼녀를 만나면서부터 시작되는 그녀와의 자잘한 일상들, 이를테면 그녀의 아들 피에르를 데리러 학교에 가기도 하고 빈 가스통을 채우러 돌아다니는 그런. 다소 지루할 수 있는 이야기 전개. 게다가 문득 문득 끼어드는 음울한 사색의 편린들. 어쩌면 이렇게 문득 문득 끼어드는 냉소적인 또는 다소 절망적이기까지 한 그의 의식마저 없었다면 더 지루했을 수도 있겠다.

그래, 한가지 더. 이 소설은 조금 우울하기까지 하다. 평범하다고 생각되는 하루 하루의 일상 속에서도 가끔씩 몰려드는 알 수 없는 우울함이 있지 않은가. 그런 우울, 나른한 일상의 한켠에서 마주칠 수밖에 없는 그런 우울함들이 소설의 중간중간에서 스며나온다. 나른하다는 느낌, 그 느낌에도 슬픔이 배어 있음을 새삼 느끼게 한다.

즐거웠던 기억들이 한 순간의 시간에 고정되어 버린 사진 속에서 왠지 모를 우울한 기분을 느꼈었던, 언젠가 암실에서 사진을 현상하면서 느꼈었던 그런 감정들과도 비슷한 느낌이 이 소설을 읽는 동안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도 어쩌면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직 어두운 새벽길을 혼자 나설 때의 그 느낌, 혹은 밤의 고속도로를 달리는 그 기분 같은.

"너와 현실과의 싸움에서 의욕을 버릴 것"
집요한 공격으로 저항을 잃고 흐물흐물해지는 현실을 바라보는 시선. 그의 상념을 느릿느릿 따라간다. 캄캄한 사진 박스, 주유소 화장실, 마치 세상과 격리된 듯한 어둠 속의 컴컴한 공중전화 부스같은 고립된 장소만 있으면 끊임없이 이어지는 그의 상념들. 그 고립된 세계 속으로 끊임없이 침잠해 들어가는 우울한 내면 풍경들. 더이상 가라앉을 찌꺼기마저 없을 것 같은 그런.

이렇게 우울하면서도 이 소설은 역설적이게도 무척이나 아름답다. 여행 중에 충동적으로 남의 사진기를 훔치고 남은 필름으로 사진을 마구 찍어대고 그리고 바다에 사진기를 던져버리는 장면, 깊은 밤 공중전화 부스에서 깊은 사색에 빠져드는 장면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한다. 나른하면서도 감각적인 한 편의 잘 만들어진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 이 소설은 "언어 기호가 영상 기호보다 화면적으로 풍부한 울림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소설가 윤대녕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마찬가지로, 이 소설이 뚜생의 소설 중 가장 돋보이는 작품이라는 데에 수긍할 수 있었던 것도 나른한 일상 속에서 펼쳐지는 감각적인 사유들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무척이나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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