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입] 버드맨 O.S.T.
불레즈 (Pierre Boulez) 지휘, 보자르 트리오 (Beaux Arts Trio) / Milan / 2015년 2월
평점 :
품절


#.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버드맨'은 자의식으로 가득 찬 영화입니다. 그리고 자의식에 가득 찬 영화에 어울리게, '원 씬 원 컷으로 찍은 것처럼 보이게' 연출된 영화입니다. 물론 원 테이크로 찍은 영화가 아니라는 걸 눈치채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카메라의 움직임은 절대로 끊기지 않지만, CG와 테크닉으로 이어붙인 지점을 찾는 것도 어렵지 않죠. 다만 이냐리투는 이러한 테크닉을 한 번 더 비틀어서 보여줍니다. 즉 원 테이크 연출과 연극의 구성을 결합시키는 것이죠. 카메라는 등장인물의 주위를 돌며 빙글빙글 보여주면서 그들의 갈등을 드러냅니다. 한 인물이 갈등하거나, 인물과 인물이 부딪치는 장면이 끝나면, 카메라는 이동하는데 이 카메라의 이동이 연극에서 막(ACT) 혹은 암전의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처음엔 음악도 이 막과 막 사이에만 삽입되며 시간의 흐름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카메라의 흐름은 끊기지 않고 이동하지만, 그동안 시간은 카메라의 움직임과 어긋나 있습니다. 이른 바 원 씬 원 컷, 혹은 원 테이크 연출의 경우 극중의 시간과 리얼 타임을 일치시키는 연출을 보여주는데, 이냐리투의 '버드맨'은 의도적으로 그 둘을 빗겨나게 연출합니다. 이를테면 에드워드 노튼이 조명대에서 엠마 스톤과 정사를 벌이는 장면을 봅니다. 정사 중간에 카메라는 이동하여 연극무대로 가는데, 그 순간 에드워드 노튼은 이미 의상을 챙겨 입고 연극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즉, 카메라가 이동하는 동안 시간은 상당히 많이 흐른 상태인 것이고, 이것은 연극의 막 또는 암전과 동일한 효과로 작용한 것이죠.

원 테이크인 '척' 하면서 리얼 타임과 극의 시간을 빗겨나가게 하고, 동시에 현실과 환상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극중의 연극과 영화와, 또 헐리우드라는 현실의 외연과 내연을 넘나드는 이냐리투의 연출은 현란하기 짝이 없습니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블랙 코미디이면서, 몰락한 헐리웃 스타의 눈물겨운 감동 스토리이기도 하고, 동시에 여러 명의 인물들이 상황을 꼬여버리게 만드는 앙상블 극이기도 하고, 때로는 환타지입니다. 이냐리투는 '어벤저스'부터 레이먼드 카버까지, 롤랑 바르트부터 '트랜스포머'까지의 폭 넓은 레인지를 다 커버하는 영화를 만들어 냈습니다.

#.

다시 말하지만, '버드맨'은 자의식으로 가득 찬 영화이고, 감독은 자신이 헐리우드의 바보같은 영화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감추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 시스템을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대신,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현란한 연출을 통해 보여줌으로써, 그들이 얼마나 멍청한 짓을 하고 있는지 거울처럼 비춰줍니다. 하긴 그들의 사정 역시 우리와 크게 다를 것은 없습니다. 지금의 영화는 기괴한 시스템으로 만들어 집니다. 시나리오를 열심히 공부하고 연구한 작가가 밤을 새워 극본을 써놓으면, 동네 아줌마와 백수들이 섞여있는, 이른바 '모니터링단'이 그것에 대해 '씬'별로 점수를 줍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재밌다'고 판단하는 점수가 높은 씬은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씬은 버려집니다. 그것이 전체적인 맥락에서 왜 필요한지, 작가가 왜 그 장면을 집어넣었는지에 대해 그들은 얼마나 고려할까요? 고려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돈을 버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요.

물론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방송과 영화에서 '대중'으로 구성된 모니터링단의 의견이란 게 그들의 눈높이를 반영하고 있고, 그러므로 '돈을 버는 것'에 그들의 의견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의견이 하나의 작품을 만들고 통제하는 창작자의 의견보다 우선되어야 할까요?

실제와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를 해봅시다. 한 방송 연출자가 있습니다. 그는 이 일을 하기 위해 수능을 쳐서 좋은 점수를 받고 대학의 신문방송학과에 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서 4년동안 공부를 해서 좋은 점수를 받았고, 운이 좋아서 다행히 방송국에 들어가서 방송을 만들고 연출하는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열심히 방송을 만들었습니다. 열심히 기획하고 고민하고 촬영하고 편집하면서요. 그런데 어느날 회사에서 동네 아줌마들로 구성된 '모니터링단'이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그 모니터링단의 아줌마들은 방송을 보고 의견이라는 것을 남깁니다; 진행자의 빨간 옷이 맘에 안 들어요. 빨간 옷 입히지 마세요. 진행자가 살이 쪘어요. 그러지 마세요. 나는 저기 노란색 배경이 맘에 안 들어요. 내가 좋아하는 파란색으로 해주세요. 그런데 회사는 연출을 공부하고 방송을 전공한 사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의 의견대로 방송을 하고 반영된 사항을 남겨라." 연출자에 대한 존중이요? 왜 그런 게 필요하겠습니까. 그들은 내 돈을 가지고 방송을 만드는 애들이지, 나한테 돈을 주는 호구가 아닌데.

- 다시 말하지만, 현실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

우리의 현실과는 다르지만, 헐리우드는 확실히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듯 보입니다. 그리고 안타까운 것은, 확실히 그런 멍청한 방식이 돈을 버는 데 도움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마이클 베이는, 아마 중국 아줌마들이 대거 시나리오 모니터링에 참여했음이 분명한 '트랜스포머4'로 시리즈의 흥행기록을 다시 썼습니다. 이냐리투와 마이클 베이의 연출력을 놓고 비교해보면, 바보가 아닌 이상 '버드맨'의 연출력에 손을 들어줄 것이지만, 스튜디오는 아마 마이클 베이의 '트랜스포머4'를 백만 배 쯤 더 사랑하겠죠. 이런 세상이 마뜩 찮은 우리는 이냐리투의 '버드맨'을 보고 리건 톰슨처럼 행동해 보지만, 다른 사람들은 타임스퀘어 광장을 벌거 벗고 걷는 사람을 대하듯 병신처럼 바라볼 뿐입니다.

#.

캐스팅이 재미있는 영화입니다. 마이클 키튼은 한때 배트맨이었고, 에드워드 노튼은 인크레더블 헐크를 연기하고 연출했던 배우죠. 엠마 스톤은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의 연인이었고, 갖다 붙이자면 안드레아 라이즈보로도 역시 코믹스가 원작인 '오블리비언'에, 나오미 왓츠도 예전에 '탱크 걸'에 출연한 적이 있죠. 아마 현실과 환타지가 교묘하게 교차하는 이 영화에서 이 캐스팅이 단순한 우연만은 아닐 거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

다양한 이야기와 형식이 뒤틀리며 섞인 영화이다 보니 때때로 위태위태하게 균형을 잡고 있는 모습이 종종 드러납니다. 무대와 대기실 등 극장 내만 오가던 카메라의 움직임이 거리로 세상으로 확대된 후가 특히 그렇죠. 시치미를 뚝 떼고 원 테이크인 척 하던 태도를 버리고 - 카메라의 움직임은 여전히 끊기지 않지만 - CG와 트릭을 드러내고, 이야기를 휘젓고 다니던 에드워드 노튼은 어느샌가 무대 밖으로 사라져버린 이후에, 중심을 못 잡고 몇 번 휘청거리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끝까지 고꾸라지진 않습니다. 사실 후반부의 현란함보다는 그냥 배우들이 불꽃튀게 부딪치는 초반이 더 좋았다는 생각도 들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 놓쳐서는 안 되는 영화임에는 틀림 없습니다. 그러니까, 꼭 보세요. 두 번 보세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코난 도일을 읽는 밤 - 셜록 홈즈로 보는 스토리텔링의 모든 기술
마이클 더다 지음, 김용언 옮김 / 을유문화사 / 201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스티븐 킹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조지 A.  로메로 감독의 영화 중에 ‘다크 하프’라는 영화가 있다. 돈이 되지 않는 순수문학 소설을 쓰는 작가가 돈을 벌기 위해 ‘조지 스타크’라는 필명을 만들어서 대중 소설을 쓰고, 그 소설이 성공해서 많은 돈을 번다. 하지만 다른 필명으로 돈을 버는 것에 염증을 느낀 그는 조지 스타크라는 필명을 폐기하고, 다시 순수문학 작가로 돌아오기로 결심하는데, 갑자기 조지 스타크라는 존재가 살아나서 그의 주변 사람들을 살해하기 시작한다는 내용의 소설이다.

‘다크 하프’는 자신의 문명(文名)에 부담을 느낀 스티븐 킹이 실제로 리처드 버크먼이라는 필명을 만들어서 6편의 소설을 발표한 것에서 착상을 얻어 쓰인 소설이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이 소설의 줄거리는 그보다 셜록 홈즈와 코난 도일의 관계를 호러로 전환한 이야기에 더 닮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코난 도일은 홈즈 이야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고 홈즈의 인기가 커져가는 것도 달가와 하지 않았다. 그는 진지한 역사소설을 쓰고 싶어했으며, 홈즈의 입을 빌려 끊임없이 ‘논리’와 ‘추리력’의 위대함을 설파했으면서도 말년에는 심령술에 빠져 죽은 사람과 대화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다. 실제로 그는 홈즈의 인기가 부담스러워 홈즈를 죽였으며, 결국 제대로 죽이지 조차 못하고 그를 억지로 살려내야 했다. 코난 도일은 전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캐릭터 중 하나를 창조했으나, 그것을 별로 즐기지도 않았고, 반가워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오늘 날 셜로키언이라 자칭하는 사람들은 셜록 홈즈의 위대함은 숭배하면서도 정작 코난 도일에 대해서는 ‘왓슨의 (그것도 실수투성이의) 문학적 대리인일 뿐’이라고 폄하하고 있다. 전 세계에 위대한 추리 문학가들은 많지만, 그 중에 코난 도일만큼 유명한 작품을 쓰고도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는 작가가 있을까? 사람들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창작력을 칭찬하지, 포와로나 미스 마플에 감정이입하여 크리스티를 깎아 내리지 않는다. 레이먼드 챈들러는 필립 말로우보다 많은 팬을 가지고 있을 것이고, 더쉴 해미트는 자신의 탐정 중 한 명에게는 이름조차 주지 않았다. 하지만 전 세계에서 이론의 여지 없이 가장 위대한 탐정을 창조해 낸 작가는 어떤가? 코난 도일의 이름은 결코 셜록 홈즈보다 앞에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앞으로도  영원히. 조지 스타크가 그의 창조주를 죽인 것처럼.

마이클 더다는 비록 셜로키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일리언(셜록 홈즈가 실존하지 않은, 코난 도일이 문학적으로 창작해 낸 인물이라고 믿는, 한 마디로 정상인)의 입장에서 코난 도일의 스토리 텔링 능력을 정당한 문학적 평가의 장으로 끌어낸다(라고 말하기엔, 사실 개인적 취향의 추억팔이라고 말하는 것이 적당할라나). 그는 물론 셜록 홈즈 스토리의 이야기도 중요하지만, 코난 도일이 그것 이외에도 많은 모험소설과 역사소설, 로맨틱한 이야기 등을 썼으며, 그런 소설 등에서도 반짝 반짝 빛나는 재능을 발휘하는 작가였음을 상기시킨다. 또한 그가 남긴 셜록 홈즈의 이야기들이 수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흥분시키고, 그들이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여러 놀이문화들을 만들어 냈는가도 함께 이야기 한다.

생각해 보면 수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셜록 홈즈라는 인물이 이토록 우리를 흥분시키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가이 리치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영화로, 스티븐 모팻과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드라마로, 그리고 한국에서는 뮤지컬로. 우리는 화려하게 재창조 된 수많은 셜록 홈즈를 보면서, 그 소박한 첫 시작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마이클 더다는 그것이 모험과 SF로도 신나는 이야기를 만들어 낼 줄 아는, 어떤 의사가 돈을 벌기 위해 써서 잡지의  크리스마스 호에 투고된 이야기로부터 시작된 것임을 잔잔한 필치로 이야기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은 셜록 홈즈를 읽고 있지만, 아주 가끔 조용한 밤에는, 셜록 홈즈가 아닌 코난 도일을 읽어보는 것도 괜찮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평점 :
절판


#. 

얼마 전 팟캐스트 이동진의 '빨간 책방'에서 김영하 작가의 '너의 목소리가 들려'를 다룬 것을 들었다. 김영하 작가가 직접 출연했었는데, 그곳에서 여전히 김영하 작가는 '처음 문학상을 받을 때 염색을 하고, 귀고리를 하고 시상대에 올라간 작가'로 이야기 되고 있었다. 더 재밌는 건, 2010년에 재정비해 출간된 김영하 작가의 데뷔작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의 알라딘 소갯글에도 똑같은 이야기가 있다는 점이다. 그 글에서 김영하는 '한국 문단 사상 처음으로 귀고리를 하고 문학상 시상대에 오른 남자'로 지칭되고 있었다. 

물론 그가 데뷔하던 해가 1996년이었고, 그때는 문단 뿐만 아니라 모두가 그렇게 보수적이던 시기였다. 소설가가 문제가 아니라 남자가수가 귀고리를 하고 무대에 올라도 방송금지를 먹던 시절이었으니, 김영하라는 작가의 등장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는 익히 짐작할 수 있겠다. 그렇지만 그 충격이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는 빼어난 데뷔작이 아닌, '시상대에 염색과 귀고리를 하고 올랐던' 사건으로 기억되는 것에 대해서 과연 김영하는 할 말이 없을까. 

#. 

김영하가 그 이후로 별달리 대표할 만한 소설이 없어서 아직도 '문학상 시상대에 귀고리를 하고 올라간 남자'라고 불린다면, 그에게는 조금 억울한 일이리라. 걸출한 데뷔작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이후로 김영하는 인상적인 소설들을 많이 썼다. 많지 않은 나이에 여러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고, 판매량도 본인이 '생각보단 많지 않다'라고 밝혔지만, 어쨌든 꾸준히 팔리고 있는 작가 중 한 명이고, 심지어 영화계에도 진출하여 흥행한 영화의 시나리오도 썼을 뿐더러, 본인의 팟캐스트도 진행하는, 다방면에서 다양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는, 주목받고 있는 젊은 작가인데, 왜 아직도 김영하의 앞엔 '검은 꽃'의 김영하나 '빛의 제국'의 김영하나 '퀴즈쇼'의 김영하가 아니라 '귀고리를 하고 시상대에 올라간 작가'가 먼저 붙는 것일까.

#.

김영하의 소설들은 - 소설적인 완성도와는 별개로 - 마치 김영하란 브랜드를 달고 나온 하나의 시리즈처럼 보인다. 김영하의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지금 이 독자가 한국문단의 트렌드에 민감하다는 취향을 이야기 해주고, 동시에 쌔끈한 영문학 서적들처럼 스마트한 소설들을 좋아한다는 것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김영하의 '검은 꽃'은 초판본으로 겨우(?) 356페이지짜리 소설이다.참고로 '검은 꽃'은 애니깽으로 불리는 한국인들의 멕시코 이민사를 다루고 있다. 아마 조정래 같은 작가가 애니깽으로 비슷한 내용의 소설을 썼다면 최소한 5권 이상의 대하소설을 써냈을 것이다.  이 사건을 영화화한 김호선 감독의 애니깽은 1997년에 완성된 영화였는데, 러닝타임이 무려 130분이었다. 당시 한국영화의 상영시간은 대체적으로 100분에서 120분 사이였으며, 특히 120분을 넘지 않는 것은 불문율에 가까웠는데 애니깽은 다루고자 하는 소재가 너무 무겁고 커서 길어지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참고로 같은 해 개봉한 비트는 113분, 초록물고기는 114분, 넘버3는 109분, 편지는 102분, 접속은 각각 106분이었다. 그러나 김영하는 이 길고 무거운 이야기를 356페이지에 압축했는데, 반면 PC통신 세대의 연애담이라 할 수 있는 '퀴즈쇼'의 초판본은 무려 463페이지였다.

#. 

무거운 소재는 분량이 많아야 하고, 가벼운 소재는 분량이 적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물론 아니다. 하지만 이것은 김영하라는 작가의 세계를 이야기하는 데 재밌는 힌트를 준다. 김영하라는 작가의 등장 이후, 한국 문단의 젊은 작가들은 사회보다는 개인의 이야기를, 개인의 입장에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많은 소설들이 3인칭보다는 1인칭을 사용했으며, 사건의 서사보다는 개인의 감정과 정서 변화를 중심으로 페이지를 채워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검은 꽃'처럼 거대한 사건들이 벌어지는 소설이, 오히려 90년대 PC통신 세대를 관통하는 추억담 보다 더 적은 분량으로 끝맺음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

김영하의 소설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그러한 특성들에서 보이는 일종의 문학적 댄디즘이다. 그의 소설은 역사를 태백산맥처럼 구질구질하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현실의 벽도 처연하게 그리지 않는다. 그가 직접 이동진의 '빨간 책방'에서 '어두운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소설로 다뤄보고 싶었다'라고 밝힌 '너의 목소리가 들려'는 델리스파이스의 '챠우챠우' 가사에서 제목을 차용했다. 이것을 보고 그의 소설을 읽는 사람들이 느끼는 문학적 댄디즘과, 인디 음악을 향유하는 계층이 느끼는 일종의 댄디즘이 연결되어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는 '현실'이라는 세계에 들어가서 리얼하게 표현하고 싶었다고 하지만, '너의 목소리가 들려'는 시점이 이동하는 것은 물론이고, 의도적으로 성경의 복음서의 구성을 차용하고 있기도 하며, 독특하게 에필로그를 40페이지 정도나 길게 가져가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여러 문학적인 시도들로 그 리얼함을 상쇄시키고 있다. 그는 '빨간 책방'에서 '작가들이 점점 더 부르주아 화(化) 되어 가고 있으며, 문학 역시 그것을 향유하는 계층에 맞춰 중산층의 전유물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우려를 이야기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어두운 이야기를 다루면서 그 중산층들이 감당하지 못할 현실에 대해서는 필터링하고, 동시에 문학적인 시도들로 그들이 받아들이지 못할 부분들에 대해서 일종의 조미료를 친 것은 아니었을까. 

#. 

드디어 '살인자의 기억법'으로 넘어가자. 이것은 더 어두운 이야기이다. 하지만 김영하는 사이코패스 살인자를 다루면서도 기시 유스케처럼 어둠의 극한으로 내려가지 않는다. 누가 보아도 아멜리 노통의 소설을 연상시키는 제목을 뽑은 것부터, 역시 그는 또 한 번 그의 문학적 댄디즘을 확인시켜준다. 생각보다 얇은 책의 두께로 보면 알겠지만, 채 200페이지가 되지 않는 아주 짧은 소설인데, 그 분량과는 상관없이 꽤 어둡고 강한 이야기다. 하지만 동시에 김영하 식 조미료가 여기저기 쳐져 있어, 심성이 약한 책을 사랑하는 여성독자들도 쉽게 읽을 수 있는 연쇄살인범에 대한 소설이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의 소설은 참 영리하게 잘 썼다는 생각이 든다. 1인칭 독백체의 짧은 문장으로 멈출 틈 없이 달려나가니, 200페이지가 되지 않는 소설을 끝까지 읽는 것에 채 3시간이 걸리지 않으며, 그 안의 내용들도 흥미진진하다. 꽤 강한 내용의 살인사건들이 소설 안에 있지만, 눈쌀을 찌푸리게 하는 장면이나 정신적으로 데미지를 주는 장면은 없다. 몇 번 안타까운 감정이 들긴 하지만, 결국 결말에 이르면 그 모든 것을 예술적인 모호함 안에서 정리하고 깔끔하게 마무리 한다.

#.

누가 보아도 참으로 '김영하다운' 소설이라 하겠다. 좋은 재능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성실하게 자신의 작품으로 만든 것도 사실이다. 자신의 이름값에 걸맞게 어느 정도 이상의 퀄리티의 소설을 꾸준히 뽑아내 주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 '살인자의 기억법' 역시 그런 범주에 충분히 들어갈만한 작품인 것도 사실이다. 이렇게 댄디한 문학가에게, '그래도 그 이상의 뭔가, 좀 세련되지 못하더라도 걸죽한 것'을 뽑아주기를 바라는 것은 독자의 촌스러운 욕심일까? 어쨌든 다음 작품이 나올 때도 김영하는 '살인자의 기억법'의 김영하가 아니라 그냥 '문단 사상 최초로 귀고리를 하고 시상대에 올라간 작가'일 것 같다. 물론 그게 임팩트가 강한 사건이긴 했겠지만, 그래도 그것보다 임팩트가 강한 소설이 하나 쯤 있다면 더 괜찮은 커리어가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학의 시 1 세미콜론 코믹스
고다 요시이에 지음, 송치민 옮김 / 세미콜론 / 200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보 비더버그의 엘비라 마디간이란 영화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대부분은 햇살 가득한 초원에서 맑게 웃는 싱그러운 미소의 한 소녀와 그녀의 뒤로 흐르던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 마로니에의 칵테일 사랑이라는 노래의 가사에도 등장하는, 그 유명한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같은 아름다운 장면으로 그 영화를 기억한다. 하지만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것은 그런 아름다운 사랑이, 어쩔 수 없이 지저분한 현실과 만나게 되는 접점이다. 기병대에서 도망친 군인과 서커스단에서 도망친 소녀는 결국 배고픔이라는 벽에 부딪치게 되고, 결국 소녀는 햇살 아래 빛나던 미소를 술집에서 팔며 그녀의 다리를 보여주고 돈을 얻는다. 그런 그녀에게 남자는 화를 내고, 둘은 싸우다가 소녀가 울며 말을 한다.

 

나는 지금 우리가 내 다리 때문에 싸우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아요.

 

#.

 

사랑이 사랑처럼 아름다우면 얼마나 좋겠냐만, 또 사랑만으로 생활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만, 대부분의 사랑은 현실이라는 장벽과 맞닥뜨릴 수밖에 없게 되어 있고, 많은 사람들은 드라마처럼 그것을 뛰어넘거나 극복하는 대신, 자신의 처지와 형편에 맞게 타협을 하며 살아간다. 사랑이라는 것 때문에 현실의 벽을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은, 사실 극소수의, 아주 형편이 좋은 사람들 뿐이다. 문제는, 그다지 형편이 좋지도 않으면서 오직 사랑만을 위해 살아가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는, 세속의 기준으로 보자면 어리석기 짝이 없는 사람들의 경우다. 그들은 삶의 모든 것을 무시하면서 사랑을 추구하길 바란다. 그리하여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자신을 괴롭히는 자학(自虐)처럼 보이게 된다. 이 책에서는 유키에의 경우가 그러하며, 유키에를 사랑하는 음식점 사장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

 

4컷 만화를 좋아한다. 짧아서 좋고, 그 안의 경쾌한 흐름과 반전이 좋다. ‘자학의 시라는 제목과 상관없이, 내용에 대한 별다른 정보도 없이, 단지 유명한 작품이라는 것과 ‘4컷 만화라는 사실 때문에 집어든 책이었다. 책장을 펼치면서, ‘아즈망가 대왕이나 요시히토 우스이의 스크램블 에그같은 코믹한 4컷 만화의 전개를 기대했었다. 그러나 첫 몇 페이지를 보는 동안 그런 기대는 무참히 깨져버렸고, 무방비 상태였던 내 멘탈엔 엄청난 린치가 가해졌다. 어찌하여 고다 요시이에는 (혼인신고도 하지 않고) 여자에게 빌붙어 일도 하지 않은 채 매일 도박만 일삼는 놈팽이와 그 놈팽이에게 몸과 마음과 순정과 노동력을 모조리 갖다 바치는 여자의 이야기를 4컷 만화로 그릴 생각을 했을까.

 

#.

 

사랑이라 불리는 자학. 어쩌면 삶 역시 자학의 한 갈래는 아닐까. 우리는 뻔히 죽어서 돌아갈 것을 알면서도 하루하루 행복해 지기 위하여 자신을 괴롭힌다. 이 실존적인 전제 하에서, 고다 요시이에는 능청스럽게 4컷 만화의 형식을 빌어 묻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을 것이 뻔한 삶 속에서 어떻게든 행복해져 보겠다고 아등바등 거리는 너의 모습이 진짜 아름다운 것 아니겠냐고. 사랑이라는, 삶이라는 이름의 자학을 통해 네가 쓰는 하나의 시()가 바로 너의 삶이 아니겠느냐고.

 

모르겠다. 어찌하여 짧은 4컷 만화의 호흡을 가지고, 고다 요시이에는 그런 실존적인 주제를 밀어붙일 수 있는 것일까. 선 몇 개로 가볍게 그린 인물들을 가지고 삶의 그런 깊고 어두운 면을 능청스럽게 담아낼 수 있는 것일까. 그리고 마치 그것을 하나도 슬프거나 무겁지 않은 척, 의뭉스럽게 웃기는 척 이야기하는 것일까.

 

#.

 

재밌게도 다른 사람들의 평을 읽어보면, ‘처음엔 재밌게 읽다가 마지막 부분엔 눈물을 많이 흘렸습니다와 같은 이야기가 많았다. 책을 읽다가 우는 경험을 적게 하는 편은 아닌데, 마지막이 감동스럽지 않았던 것도 아니건만, 그닥 많이 울진 않았던 것 같다. 생각해 보면 그렇게 깊거나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남자를 잘못 만난 여자의 고생담은 신파 시절부터 많았다. 하지만 적당히 사소설(私小說)스러운 일본적인 아기자기함과 4컷 만화라는 형식이 만나 일종의 실존의 형태로까지 나아가는 과정이 꽤 인상 깊게 그려지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남들도 끝에서 울었다고 하니, 나도 울어야지라는 강박 같은 걸 가질 필요는 없을 것 같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64 D현경 시리즈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검은숲 / 201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경찰판 <하얀 거탑>. 에드 맥베인이 경찰의 수사과정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경찰소설 리얼리즘을 마련했다면, 요코야마 히데오의 <64>는 경찰 내부의 조직과 정치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것으로 새로운 경찰소설 리얼리즘의 문을 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