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학의 시 1 세미콜론 코믹스
고다 요시이에 지음, 송치민 옮김 / 세미콜론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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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비더버그의 엘비라 마디간이란 영화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대부분은 햇살 가득한 초원에서 맑게 웃는 싱그러운 미소의 한 소녀와 그녀의 뒤로 흐르던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 마로니에의 칵테일 사랑이라는 노래의 가사에도 등장하는, 그 유명한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같은 아름다운 장면으로 그 영화를 기억한다. 하지만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것은 그런 아름다운 사랑이, 어쩔 수 없이 지저분한 현실과 만나게 되는 접점이다. 기병대에서 도망친 군인과 서커스단에서 도망친 소녀는 결국 배고픔이라는 벽에 부딪치게 되고, 결국 소녀는 햇살 아래 빛나던 미소를 술집에서 팔며 그녀의 다리를 보여주고 돈을 얻는다. 그런 그녀에게 남자는 화를 내고, 둘은 싸우다가 소녀가 울며 말을 한다.

 

나는 지금 우리가 내 다리 때문에 싸우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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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사랑처럼 아름다우면 얼마나 좋겠냐만, 또 사랑만으로 생활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만, 대부분의 사랑은 현실이라는 장벽과 맞닥뜨릴 수밖에 없게 되어 있고, 많은 사람들은 드라마처럼 그것을 뛰어넘거나 극복하는 대신, 자신의 처지와 형편에 맞게 타협을 하며 살아간다. 사랑이라는 것 때문에 현실의 벽을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은, 사실 극소수의, 아주 형편이 좋은 사람들 뿐이다. 문제는, 그다지 형편이 좋지도 않으면서 오직 사랑만을 위해 살아가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는, 세속의 기준으로 보자면 어리석기 짝이 없는 사람들의 경우다. 그들은 삶의 모든 것을 무시하면서 사랑을 추구하길 바란다. 그리하여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자신을 괴롭히는 자학(自虐)처럼 보이게 된다. 이 책에서는 유키에의 경우가 그러하며, 유키에를 사랑하는 음식점 사장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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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컷 만화를 좋아한다. 짧아서 좋고, 그 안의 경쾌한 흐름과 반전이 좋다. ‘자학의 시라는 제목과 상관없이, 내용에 대한 별다른 정보도 없이, 단지 유명한 작품이라는 것과 ‘4컷 만화라는 사실 때문에 집어든 책이었다. 책장을 펼치면서, ‘아즈망가 대왕이나 요시히토 우스이의 스크램블 에그같은 코믹한 4컷 만화의 전개를 기대했었다. 그러나 첫 몇 페이지를 보는 동안 그런 기대는 무참히 깨져버렸고, 무방비 상태였던 내 멘탈엔 엄청난 린치가 가해졌다. 어찌하여 고다 요시이에는 (혼인신고도 하지 않고) 여자에게 빌붙어 일도 하지 않은 채 매일 도박만 일삼는 놈팽이와 그 놈팽이에게 몸과 마음과 순정과 노동력을 모조리 갖다 바치는 여자의 이야기를 4컷 만화로 그릴 생각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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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라 불리는 자학. 어쩌면 삶 역시 자학의 한 갈래는 아닐까. 우리는 뻔히 죽어서 돌아갈 것을 알면서도 하루하루 행복해 지기 위하여 자신을 괴롭힌다. 이 실존적인 전제 하에서, 고다 요시이에는 능청스럽게 4컷 만화의 형식을 빌어 묻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을 것이 뻔한 삶 속에서 어떻게든 행복해져 보겠다고 아등바등 거리는 너의 모습이 진짜 아름다운 것 아니겠냐고. 사랑이라는, 삶이라는 이름의 자학을 통해 네가 쓰는 하나의 시()가 바로 너의 삶이 아니겠느냐고.

 

모르겠다. 어찌하여 짧은 4컷 만화의 호흡을 가지고, 고다 요시이에는 그런 실존적인 주제를 밀어붙일 수 있는 것일까. 선 몇 개로 가볍게 그린 인물들을 가지고 삶의 그런 깊고 어두운 면을 능청스럽게 담아낼 수 있는 것일까. 그리고 마치 그것을 하나도 슬프거나 무겁지 않은 척, 의뭉스럽게 웃기는 척 이야기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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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게도 다른 사람들의 평을 읽어보면, ‘처음엔 재밌게 읽다가 마지막 부분엔 눈물을 많이 흘렸습니다와 같은 이야기가 많았다. 책을 읽다가 우는 경험을 적게 하는 편은 아닌데, 마지막이 감동스럽지 않았던 것도 아니건만, 그닥 많이 울진 않았던 것 같다. 생각해 보면 그렇게 깊거나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남자를 잘못 만난 여자의 고생담은 신파 시절부터 많았다. 하지만 적당히 사소설(私小說)스러운 일본적인 아기자기함과 4컷 만화라는 형식이 만나 일종의 실존의 형태로까지 나아가는 과정이 꽤 인상 깊게 그려지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남들도 끝에서 울었다고 하니, 나도 울어야지라는 강박 같은 걸 가질 필요는 없을 것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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