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사 실프와 평행 우주의 인생들 민음사 모던 클래식 38
율리 체 지음, 이재금.이준서 옮김 / 민음사 / 201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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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 이 책의 제목을 처음 본 것은 몇 년 전 도서관에서였다. 제목만 놓고 보자면, '형사 실프'보다는 '평행 우주의 인생들' 쪽에 더 관심이 갔고, 책을 대여하긴 했으나, 당시엔 너무 바빠서 도저히 읽을 시간을 낼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한 줄도 읽지 못하다가 반납일이 다가와 그대로 반납했었다. 그러다가 얼마 전, 토마스 핀천의 <49호 품목의 경매>를 읽다가 다시 이 책이 생각났다. 다른 정보 없이 제목만 놓고 판단하기에, 당연히 <49호 품목의 경매>처럼 물리학의 개념을 포스트 모더니즘과 연관시킨 소설 중의 하나라고 짐작했던 것이고, 연이어 읽기에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해서 결국 이 책도 주문하고 말았다. 그리고 읽으면서 깨달았는데, 내 짐작은 반만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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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의 원제는 그냥 '실프'이다. '형사'도 없고, '평행 우주의 인생들'도 없다. 그리고 '실프'는 등장인물 중 한 명인 형사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갈대'라는 뜻도 함께 가지고 있다. 사실 저자가 부여한 타이틀은 적절했다. 한국의 출판사에서 제멋대로 '평행우주의 인생들'을 덧붙인 게 문제였을 뿐이다. '형사 실프'까지만 하더라도 그럭저럭 괜찮았을 것 같다. 물론 이해는 간다. 표지에 달랑 <형사 실프>라고만 찍혀 있다면, 그 책을 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또 설사 사더라도 일종의 경찰 추리소설 쯤 될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니 뭔가 더 사람들의 관심을 끌만한 제목이 필요했을 것이고, 이 책의 메인 테마 중 하나인 '평행우주'를 끌어다 붙였을 것이란 것은 짐작할 수 있다.  

  처음 제목만 보고 예상했던 건, 하나의 사건이 벌어지고 그 사건의 범인이 여러 평행 우주를 넘나들면서 다른 형태의 범죄를 저지르고, 역시 그 평행 우주를 넘나들면서 그 범인을 추적하는 형사에 대한 이야기였다. 비슷한 개념의 사건이 잠깐 등장하긴 하지만 별로 중요하지 않다. 더글러스 아담스의 <더크 젠틀리의 전체론적 탐정사무소>나 재더다이어 베리의 <탐정 매뉴얼>처럼 포스트 모더니즘을 끌어들인 추리소설은 아니었다. 문장이 복잡하고, 물리학적 개념을 끌어들여 설명하긴 하지만, 사건은 그래도 나름 리얼리즘의 테두리 안에서 설명이 가능한 형태로 벌어진다. 다만 인간의 선택과 인생의 여러 가능성에 대한 철학적 주제를 이끌어 나가기 위해, 추리물과 평행 우주란 물리학의 개념을 빌려온 것이다. 주제의식을 위해 물리학의 테제를 끌어들인다는 점에서는 <49호 품목의 경매>와 비슷한 점이 있으니, 애초의 짐작이 반은 맞았다. 하지만 생각보다 추리 쪽이 그닥 재미없었고, 그 이유는 뻔뻔스럽게 포스트 모더니즘의 방법론으로 가버리지 않고, 나름 리얼리즘의 범위 내에서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는 면에선 내 생각이 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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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초부터 그럴 마음도 없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추리물로서의 완성도는 떨어진다. 범죄를 저지르는 동기는 흔하지만 이해할 수 있는 범주라면, 그것을 그렇게 잔인한 방식으로 진행하는 것에 별다른 개연성이 없다. 별다른 트릭이 등장하는 것도 아니지만, 형사가 범인을 밝혀내는 과정도 하드한 추리물의 기준으로 보면 굉장히 어설프다. 어차피 유괴와 살인은 '다른 가능성이 존재하는 세계', 즉 '평행우주'가 존재한다는 것이 인간의 도덕적/윤리적 선택에 도피처가 될 수 있는가? 혹은 그것이 인생에서 (원하지 않았던) 선택에 대한 희망을 내포하고 있는가? 라는 철학적 주제를 표현하기 위한 장치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그럴 듯한 장르물처럼 시작했던 초반부에 비해 후반부의 해결이 너무 느슨해 보이는 게 걸린다. 나름 현실세계에서 평행우주를 구성해 내는 이야기를 짜내었으나, 그 부분은 곰곰히 따지고 들어가면 기발하거나 치밀하게 보이기 보다는 억지처럼 보이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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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감할 수 없거나 매력없이 보이는 부분이 많은 것에는, 번역의 문제에서 기인한 부분도 많은 것 같다. 독일어 소설이라 원문을 이해하기엔 무척 어렵지만, 같은 문단 내에서 술어나 동작이 생략된 부분이 상당히 많이 보인다. 물론 원본이 저렇게 불친절하게 쓰여있을 수도 있지만, 다른 부분에서 불만족스런 번역이 종종 눈에 띄는 걸 보면 번역에 책임이있을 거라는 의심을 거둘 수가 없다. 심지어 (믿을 순 없지만) 어떤 부분은 구글 번역기를 돌린 것처럼 느껴지는 곳까지 있을 정도. 특히 리타라는 등장인물에 대해서 설명하는 부분에서 '그녀의 외무부 장관은 ...했다'라는 문장이 2~3번 나오는데, 도대체 '그녀의 외무부 장관'이라는 것이 뭘 뜻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동음이의어를 잘못 해석한 것 같은데, 번역가가 2명이나 붙었는데 저런 문장이 반복해서 등장한다는 건 이해하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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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몇 블로그에서 이 소설에 대한 리뷰를 찾아보았는데, 아직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리뷰를 보진 못한 것 같다. 나도 마찬가지다. 물리학적 토론을 통해 지적인 유희를 보여주는 부분도 이해하기 힘들지만, 그중 상당부분은 불친절한 문장이나 서술, 그리고 번역에서 발생하고 있는 듯 하다. 독자를 끌기 위해 제목에 뭔가를 덧붙이는 장난을 하기 전에 번역에 좀 심경을 썼으면 좋았을텐데. '실프'는 '갈대'를 의미한다고 한다. 하나의 선택으로 인해 흔들리는 인간의 인생, 그리고 그것을 '평행 우주'라는 개념으로 변명하는 등장인물들을 한 단어로 함축한, 굉장히 훌륭한 타이틀이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뒤에 출판사가 덧붙인 '평행 우주의 인생들'은 이 소설에 등장하지 않는다. 적어도 이 소설은 단일한 우주공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이며(트릭으로 그것을 구성해내긴 했지만), 심지어 메인 등장인물은 평행우주를 인정하지도 않는다. 나는 또 한 번 제목에 속았다. 그리고 그 쓸데없는 제목과 마구잡이 번역 때문에 별 한 개는 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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