셜록 홈즈 : 모리어티의 죽음 앤터니 호로비츠 셜록 홈즈
앤터니 호로비츠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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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앤터니 호로비츠의 <셜록 홈즈-모리어티의 죽음>에는 두 가지의 텍스트 트릭이 있습니다. 하나는 작가가 의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작가와 상관없이) 출판사인 황금가지가 의도한 것이죠. 작가가 의도한 트릭을 밝히는 것은 엄청난 스포일러가 될테니 그만두죠. 사실상 이 소설에서 그 트릭은 80% 이상에 가까우니까요. 하지만 추리물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정확하게는 아니라도, 대충 그 트릭의 모양새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텍스트 트릭이라는 것 자체가 활용도가 그리 높지 않으니까요. 더군다나 이 분야에는 너무나도 엄청나고 유명한 레퍼런스가 있지 않습니까. 애거서 크리스티의 그 소설 말입니다. 텍스트 트릭하면 떠오르는 작품들이 애거서 크리스티의 그 소설과 아비코 다케마루의 <살육에 이르는 병> 정도일텐데, 앤터니 호로비츠가 <살육에 이르는 병>을 읽어봤을 리는 없을 것 같고, 애거서 크리스티를 참조한 것은 거의 확실합니다. 별 상관 없지만, 개인적으로 텍스트 트릭을 사용한 작품 중에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악의>를 좋아합니다. 어쨌든 저는 추리소설을 읽으면서 몇 가지 지침(?)들을 만들었는데, 그 중 하나가 이것입니다; 낯선 화자를 조심하라. 홈즈의 이야기를 왓슨이 기록하지 않거나, 포와로의 이야기를 헤이스팅즈가 기록하지 않았다면,그 기록자를 100퍼센트 신뢰해선 안 되는 것이죠. 작가가 쓸데없이 새로운 기록자를 만들어 내진 않았을테니까요. 새로운 기록자가 나타났다면 텍스트 트릭을 의심해봐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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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본적으로 클래식한 수수께끼 풀이형 추리소설의 임무는 작가와 독자가 두뇌싸움을 벌이도록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작가와 독자에게 공평하게 정보가 제공되어야 하죠. 독자가 보지 못한 증거나 단서를 갑자기 탐정이 들고 나와서 사건을 해결해 버리면, 독자는 작가에게 속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작가는 독자가 눈치채지 못하는 하찮은 사실인 것처럼 중요한 단서들을 흩뿌려 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텍스트 트릭은 이러한 경향을 극대화 한 것이죠. 작가는 서술과 텍스트를 통해 독자를 속입니다. 추리물을 읽는 독자 중에 모든 문장을 곰씹어 넘기는 독자는 확실히 드물죠. 그러므로 작가는 애매모호한 문장들을 통해 독자를 속이려 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의 경우, 작가는 신경써서 공정한 게임을 하려 했지만, 황금가지가 그 위에 텍스트 트릭을 한 번 더 덮어씌움으로써 그런 노력이 상당부분 희석됩니다.


  앤터니 호로비츠가 지은 원래 타이틀은  'Moriarty'입니다. 여기엔 다른 어떤 트릭도 없을 뿐더러, 중요한 단서가 숨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황금가지에서 출판한 번역제는 <셜록 홈즈 - 모리어티의 죽음>입니다. 이건 명백한 트릭이죠. 왜 이 제목이 트릭이 될까요?


 그것은  이 소설에는 셜록 홈즈가 등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목은 또 한 가지 거짓말을 감추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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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물론 사전적인 의미로 셜록 홈즈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셜록 홈즈는 주 등장인물들의 대화에서 여러 번 언급되며, 에필로그로 덧붙여진 사건에서 잠깐 무대의 주인공이 됩니다. 하지만 작품의 메인 스토리에서는 (그로 의심되는 인물만 맥거핀으로 등장할 뿐) 그가 등장하진 않습니다. 저는 작품을 읽는 내내 어딘가에서 홈즈가 "사실은 내가 셜록 홈즈였어!"라고 등장할 것을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그런 순간은 오지 않습니다. 물론 그런 독서 경험이 즐겁지 않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기대가 깨지는 그 순간도 나쁘진 않았습니다. (추리 소설을 읽는 대부분의 즐거운 경험은 독자가 작가에게 한 방 먹었다, 라고 생각하는 그때 오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그것이 출판사의 명백한 의도가 보이는 잘못된 제목짓기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다지 기분 좋은 일로 받아들이긴 힘들지요.


  물론 이해는 갑니다. 이 책에 '셜록 홈즈'라는 타이틀이 떨어지는 순간, 판매량은 급감하겠죠. 홈즈 컨텐츠의 라이트한 소비자들도 모리어티라는 이름은 들어봤겠지만, 제목에 단지 '모리어티' 네 글자만 박혀 있다면 큰 매력을 느끼기는 힘들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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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셜로키언들은 코난 도일이 남긴 단편 56편, 장편 4편을 가리켜 정전(正典)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예수의 흔적을 기록한 성경 역시 저마다의 기록에 오류와 기록의 상충되는 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코난 도일이 남긴 정전 역시 마찬가지죠. 앤터니 호로비츠의 <모리어티>는 바로 정전 상의 미심쩍은 부분들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한 소설입니다. 또한 정전이 셜록 홈즈의 행적을 기록한 복음서의 역할을 한다면, 이 소설은 그러한 홈즈가 사라진 세상에서 창궐하는 범죄를 막기 위해 홈즈의 추종자들이 어떻게 그의 가르침을 행하고 있는지에 대한 '사도행전'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홈즈는 부활하여 다시 세상에 재림하죠)


  라이헨바흐에서 실제로 어떤 사건이 벌어졌는가, 에 대한 문제는 실제로 굉장히 까다롭습니다. 왓슨의 기록이 말이 안 되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죠. 이를테면 왓슨이 모리어티의 수하에게 속아서 홈즈를 폭포에 놔두고 돌아갔을 때 왓슨은 폭포에서 내려오는 데 한 시간, 올라가는 데 두 시간이 걸렸다고 적고 있습니다. 하지만 칼 베데커의 <이탈리아, 사보이, 티롤 인접 지역과 스위스: 여행안내서>에 따르면 라이헨바흐 호텔에서 아래쪽 폭포까지는 15분, 위쪽 폭포까지는 45분 밖에 걸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특히 홈즈가 그 시간에 '어두워져 가는 하늘'을 보았다고 말한 부분은 더 큰 문제입니다. 왓슨이 왕복에 3시간이나 걸렸다면 이미 시간은 밤 10시를 훌쩍 넘어있었을 것이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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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앤터니 호로비츠는 정전에서 보이는 이런 헛점들을 가지고 전혀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냅니다. 모리어티라는 대악당이 지배하는 영국의 범죄세계와 그에 침입한 클래런스 데버루라는 인물의 대결로 이루어진 흥미진진한 이야기죠. 조지 오웰은 <영국식 살인의 몰락 Decline of the English Murfder>라는 에세이를 통해, 동기와 이유를 가지고 저지르는 '나름의 명분이 있는' 영국식 살인보다 최근의 범죄는 더 잔인하고 무차별적으로 저질러지고 있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이 소설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도 마찬가지죠. 클래런스 데버루는 나름대로 모리어티가 세우고 있는 범죄 세계의 철칙들을 모두 다 깨버리고, 오직 돈과 이익만을 추구하는 탐욕스런 미국의 제국주의적 자본주의 - 쿨럭, 죄송 - 가 아니라 범죄의 모습을 런던에 끌고 옵니다. (그러나 나 책을 다 읽고 가만히 생각해보면, 모리어티 잔당 쪽이 훨씬 잔인하게 사람을 죽이고 다녔다는 생각이 들죠) 그래서 이 소설은 기존의 홈즈 소설에 비해 훨씬 잔인한 묘사가 많습니다. 홈즈 소설 역시 잘린 귀 등의 신체 훼손이 등장하고, 여러 종류의 살인을 다루고 있긴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이렇게 역동적인 문장들로 묘사하진 않죠. 적어도 앤터니 호로비츠의 잔인한 장면 묘사는 영국식(?) 보다는 미국식(?)에 가깝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이 작품의 화자가 미국인으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건지도 모르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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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셜로키언이 되기엔 믿음이 좀 부족하지만 나름 셜록 홈즈에 대해 공부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앤터니 호로비츠의 모리어티에 대한 가설은 꽤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읽는 시간도 꽤 빨랐구요. 셜록 홈즈만큼이나 모리어티에 대한 학설도 꽤 여러 가지가 있는데요. 이를테면 크리스 콜럼버스가 각본을 쓰고 배리 레빈슨이 연출한 - 우리에게는 <피라미드의 공포>라는 제목으로 개봉된 - <젊은 셜록 홈즈 Young Sherlock Holmes> 란 영화에선 모리어티의 기원을 또 재밌는 방식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방영되고 있는 <엘리멘터리 Elementary>란 미드는 모리어티를 아이린 애들러와 동일인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죠. 앨런 무어의 <젠틀맨 리그 The League of Extraordinary Gentlemen>엔 셜록 홈즈는 등장하지 않지만, 모리어티는 등장합니다. 그러고 보니 모리어티는 단순히 '셜록 홈즈의 숙적'으로 불리고 있을 뿐, 별로 알려져 있는 것이 많지 않은데, 그렇게 묻혀있기에는 아쉬운 인물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대학교수이면서 타고난 지능을 이용해 영국 전역의 범죄를 지휘하는 인물이라면 홈즈만큼이나 매력적인 인물이 될 수도 있었을텐데 말이죠. 하지만 우리가 그에 대해서 들을 수 있는 정보는 모두 셜록 홈즈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제한적인 것들 뿐입니다. 셜록 홈즈는 물론 탐정으로서는 세계 최고입니다만, 결코 남에 대해서 편견없이 공정하게 말하는 인물이라고 보긴 어렵죠. 특히 모리어티에 대해서는요.


  아마 앤터니 호로비츠가 해낸 이번의 작업도 거기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호로비츠는 셜록 홈즈에 의해 폄훼되어 왔던 모리어티를 끄집어 내서 매력적인 악당의 자리로 끌어올리는 것에 성공했습니다. 단순히 생각해 보건대, 그가 왓슨과 홈즈가 말하는 대로 악하기만 한, 실수투성이의 악당이라면 홈즈의 호적수가 될 정도로 큰 인물이 되지도 못했을 겁니다. 호로비츠는 그래서 모리어티에게 그에 알맞은 캐릭터를 다시 부여하는 작업을 수행했고, 제목에서 홈즈를 지우고 그의 이름만을 남겨 놓았습니다. 근데 황금가지는 거기에 다시 셜록 홈즈의 이름을 크게 붙이고, 그의 이름을 작게 만들었죠. 그래서 우리가 읽는 표지에는 지금 이렇게 인쇄되어 있습니다.


셜록 홈즈-모리어티의 죽음. 


ps. 이 리뷰는 황금가지의 사전서평단에 선정되어 가제본된 책을 미리 제공받아 작성된 것입니다. 하지만 무조건적으로 호의적인 리뷰를 작성하진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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