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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 한강 소설
한강 지음, 차미혜 사진 / 난다 / 2016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 만일 당신이 아직 살아 있다면, 지금 나는 이 삶을 살고 있지 않아야 한다.
지금 내가 살아 있다면 당신이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어둠과 빛 사이에서만, 그 파르스름한 틈에서만 우리는 가까스로 얼굴을 마주본다. - 117쪽
누군가의 불행이 내 행복의 디딤돌이 되고
누군가의 죽음이 내 삶의 연장이 되는
그렇게 원하지 않아도 뚜벅뚜벅 살아지는 생의 굴레 속에서
타인의 불행과 죽음은 나라는 존재와 끊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꿰매지 않은 자리마다 깨끗한 장막을 덧대 가린',
그래서 일상 속에서 외면한 어떤 것들을 그녀의 글에서 찾을 수 있었다.
.. 왜나하면, 당신은 언젠가 반드시 나를 버릴 테니까.
내가 가장 약하고 도움이 필요할 때,
돌이킬 수 없이 서늘하게 등을 돌릴 테니까.
그걸 나는 투명하게 알고 있으니까.
그걸 알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으니까. - 99쪽
애써 외면하던 삶의 불행이 나에게 닥쳤을때
내편이라 생각했던 삶이 나를 배신했다고 느낄 때
왜 살아야 하는지, 차라리 존재하지 않았다면 좋았겠다고 생각될 때
그럴 때, 이미 존재할 기회를 잃어버린 누군가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삶과 다시 화해할 수 있을까.
.. 물큰하게 방금 보도를 덮은 새벽 눈 위로 내 검은 구두 자국들이 찍히고 있었다.
백지 위에 쓰는 몇 마디 말처럼. - 123쪽
백지보다 더 흰 말들을 백지 위에 쓸 수는 없을 것이다.
.. 죽지 마, 죽지 마라 제발.
말을 모르던 당신이 검은 눈을 뜨고 들은 말을 내가 입술을 열어 중얼거린다. 백지에 힘껏 눌러쓴다. 그것만이 최선의 작별의 말이라고 믿는다. 죽지 말아요. 살아가요. -128쪽
이미 죽어버린 존재에게 건네는 말은 그 존재를 지나 나에게 돌아왔다.
어쨋든 살아있으니 죽지 말라고/죽이지 말라고.
흰 종이를 더럽히더라도.
누군가의 불행과 죽음을 외면할 수 없더라도.
나를 살아있게 한 삶이 나를 죽일듯이 괴롭히더라도.
피로만큼의 때가 묻은 삶을 다정하게 닦아 주는 하얀 천처럼
삶을 직시하면서도 위안을 주는
그런 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