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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걷다 - 2010 경계문학 베스트 컬렉션 ㅣ Nobless Club 21
김이환 외 지음 / 로크미디어 / 2010년 3월
평점 :
품절
노블레스클럽이 2009년에 이어 두번째로 내놓은 단편집 <꿈을 걷다 2010>. 이 책은 노블레스클럽 라인업에서도 차별화된 책이라 할 수 있다.
먼저 이 책은 "하드웨어"부터가 다르다. 표지는 심플하면서도 세련된 디자인으로 눈길을 끈다. 광택나는 소재와 음각 기법을 사용해 역시 다른 책들과 차별을 두고 있다. 본문에 사용된 종이도 전체적으로 밝아진 느낌이다. 실제로 다른 종이를 쓴 것인지 디자인이나 인쇄의 차이인지는 모르겠지만.
내용으로 들어가면, 역시나 이번에도 작품의 배치는 작가이름의 가나다순. 어차피 다 따로 떨어진 이야기들이니 굳이 페이지 순서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대로 읽어도 상관 없으리라.
- 하지은 <나를 위한 노래>
뒷부분에 나오지만 책을 받고 제일 먼저 읽은 글이 이 작품이었다. 개인적으로 가장 관심있는 작가이다보니.
뻔한 시간여행 이야기라고도 볼 수 있지만, 결말 부분을 보면 단순히 꿈을 꾼 것같은 느낌도 든다. 아주 꿀꿀하고 기분 나쁜 꿈. 그게 시간여행이든, 혹은 그냥 꿈이든 환상을 빌어 인간의 욕망과 어두운 심리를 묘사하는 부분은 흥미로웠다. 설정은 환상이지만 그 느낌은 시궁창 같은 현실을 너무도 닮아 있기에.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밀려드는 허무와 절망.
- 김이환 <개학 날>
<양말줍는 소년>의 에필로그격인 이야기라던데 전작은 안 봐서 모르겠고.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 현실과 환상을 오가는 구성이나 다양한 상상력은 좋았다. 단지,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도 아니고 끝나는 것도 아닌 좀 애매한 느낌이랄까. 완성된 단편이라기보다 더 큰 이야기의 한 부분을 어중간하게 떼어놓은 것 같았다. 본편을 재미있게 읽은 독자라면 반가운 글이겠지만 모르는 독자라면 나처럼 멍때리게 될지도.
- 김지훈 <페르마의 부탁>
짧은 분량안에 나름의 형식과 내용과 반전을 담은 작품. 그치만 개인적인 감상을 말하자면 앞부분은 장황하고 결말은 허무했다. 주인공의 대사 처럼 "내가 대체 뭘 읽은 거지?" 대충 이런 느낌.
- 문영 <아내를 위하여>
글 자체는 나쁘지 않았는데, 소재도 전개도 식상했다. 아기 얘기가 나올 때쯤에는 이미 결말까지 대충 다 보이더라지. 먼지 쌓인 지하실의 풍경이나 아버지와 아들의 만남, 시간 여행의 반복을 암시하는 내용 등은 이미 다른 시간여행 소설이나 영화 등에서 지겹게 봤던 것들이다. 그래도 이미 여러 작품을 출간한 작가라 그런가 식상한 재료를 적절히 엮은 문장이나 구성력은 괜찮았다.
보기에 따라서는 뒤에 나오는 하지은 작가의 <나를 위한 노래>와 겹치는 부분도 있다. 2009년판 <꿈을 걷다>에서도 언급했던 얘기지만, 이 책은 여전히 잘 짜여진 한 권의 책이라기보다 여러 단편을 단순히 나열해 놓기만 했다는 느낌이 강하다. 서로 겹치거나 혹은 어울리지 않는 작품이 있어도 그걸 전혀 고려하지 않는 듯한 편집 방식을 보여주니까.
- 수담옥 <일검쟁위>
무협 세계가 배경이고 이것저것 어려운 말도 많이 나오는 것 같은데, 느낌은 그냥 소년만화 보는 기분. 무슨 게임 같기도 하고. 특히 뒷부분은 이누야샤가 연상되었다. (요즘 열심히 시청중인지라.) 바람의 상처를 날리는 이누야샤와 만룡을 휘두르는 반코츠가 싸우고 있더라지. 전체적으로 무난하고 딱히 이런 쪽에 거부감이 없다면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정도일 듯.
- 이재일 <문지기>
개인적으로 무협을 멀리하는 이유중 하나가 어려운 한자어들이다. 더군다나 무협에서만 쓰이는 말투와 용어들로 도배가 되어버리면 울렁증이 나올 판이다.
그에 비해 이번 작품은 어린 아이의 시선에서 제한된 환경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다 보니 비교적 쉽게 따라갈 수 있었다. 강호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조금 납득하기 힘든 부분도 있지만 양형이라는 캐릭터도 귀엽고 꽤 재미있게 읽었다.
- 좌백 <마음을 베는 칼>
무협영화 한 편을 "다이제스트"로 본 기분이랄까. 묵직하지만 허무해지는 이야기였다. 그런 게 인생이겠지.
짧은 분량에 좀 많은 내용을 담은 감도 있지만, 압축된 만큼 군더더기도 없어 보였다.
- 진산 <안다미>
<체리피커>와 연작을 이루는 작품이라더니 과연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체리피커>만 봐서는 불교적 세계관같았는데, 이번에는 기독교까지 끌어왔더라지. 불평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는데, 두 종교의 세계관을 절묘하게 접합하는 방식도 재미있다.
하나의 세계를 구축하는 상상력으로나 이야기를 꾸려가는 능력으로나 매번 감탄하게 만드는 작가다.
- 한상운 <강호>
배경은 무협이지만 왠지 현실 세계를 보는 듯한 이야기였다. 서로 속고 속이고 이용하고, 구차하고 찌질한 걸 알면서도 살기위해 버둥거리는 인생들. 상사 눈치보며 출세를 노리는 직장인의 모습이나, 특출나게 강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정의롭고 착한 것도 아닌 주인공에서 같은 작가의 작품인 <무심한 듯 시크하게>가 연상되기도 한다.
- 홍성화 <세상 끝으로>
세상 끝을 찾아 여행을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
하늘에 떠 있는 섬에 살면서 그것이 세상의 전부인줄 아는 인간들이 더 넓은 세계의 진실을 그저 허황된 거짓이라고 치부하는 이야기를 무겁고 진중하게 다룰 수도 있을텐데 여기서는 가볍고 단순하게 그리고 있다. 동화라고 해도 될듯 싶을 만큼 전체적으로 쉽고 무난한 내용이었다.
노블레스클럽은 경계소설 지향인 만큼 딱히 정해진 장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번에도 판타지와 무협의 영역이 커 보인다. 그에 비해 SF라고 할만한 작품이 그닥 눈에 띄지 않는 것이 개인적으로 아쉽기도 하고.
각각의 단편들이 장르도 분위기도 제각각이다보니 "걷다(walk)"라는 표현보다 "뛰다(leap)"라는 말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다. 시공간의 벽을 뚫고 무협 세계부터 판타지 세계까지 건너 뛴다. 그러다가 간혹 운 나쁘게 지뢰(...)를 밟는 경우도 있고. 너무 정신 없이 뛰어다녀서 길을 잃지 않을까 싶기도 하지만 나름 재미있는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