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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선혈 ㅣ Nobless Club 15
하지은 지음 / 로크미디어 / 200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아끼고 아끼다 이제서야 읽은 모래선혈. 여러가지 의미에서 감동이었는데, 그 첫번째는 읽기가 편했다는 것. 노블레스클럽의 전작이었던 모 소설을 읽으며 엄청난 불편함을 겪은지 얼마 안 되어서인지, 이렇게 편하게 글을 써주는 작가가 고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역시나 이틀만에 가볍게 클리어.
이야기가 서로 독립되어 있고, 소재도 다르긴 한데, 같은 작가의 작품인 <얼음나무 숲>과 이번 작품은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본문에 전작을 암시하는 내용이 나오기도 한다.
두 작품은 다른듯 하면서도 닮았고, 어떤 면에서는 <모래선혈>을 이해하기 위해 <얼음나무 숲>을, <얼음나무 숲>을 이해하기 위해 <모래선혈>을 봐야 할 수도 있다. 이 둘은 동전의 양면같이 쌍을 이루는 이야기다. <얼음나무 숲>이 자신의 예술 세계를 이해해 줄 단 한 사람의 청중을 찾아 헤맨 예술가의 이야기라면, <모래선혈>은 자신을 감동시켜줄 한 명의 예술가를 찾아 나선 어느 독자의 이야기다. 전작이 음악으로 상징되는 젊은이들의 꿈과 이상을 다루고 있다면, 이번 작품은 사랑으로 대표되는 보다 보편적 주제를 이야기한다.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솔직히, <얼음나무 숲> 만큼의 "임팩트"는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재미라는 측면에서는 뒤지지 않았다. 처음 열 장 정도를 읽은 것만으로도 이미 가슴의 두금거림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이 책은 잔인하고 섬뜩하고 괴기스러울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유쾌하고 따뜻하며 아름답고 심지어 귀엽기까지 하다.
<얼음나무 숲>의 주인공들이 음악에 모든 것을 걸었다면 <모래선혈>의 주인공은 사랑에 모든 것을 내맡겼다. 단순한 로맨스 소설 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동시에 그 과정은 과거를 잃고 색깔을 잃은 한 남자의 자아찾기 이기도 하다.
<얼음나무 숲>에서도 고요와 바옐을 비롯해 개성 강하고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작품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었는데, 이번에는 메뉴가 더욱 다양하고 화려해졌다. 특히나 모든 면에서 완벽해 보이면서도 어린 아이 같은 순진한 면이 있는 레아킨이라는 캐릭터는 어지간한 순정 만화(?)에 갖다놔도 밀리지 않을 것 같이 매력이 철철 넘친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이번 작품에서도 중반 이후 환상성이 이야기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단순한 이야기속 환상으로 볼 수도 있으나 내 눈에는 레아킨의 자아처럼 보이기도 했다. 억압되고 거부당했던 또다른 자아. 궁궐에서의 완벽한 삶을 버리고 지상으로 내려온 순간 그는 일탈과 타락을 택한 셈이다. 밖으로 나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그에게 이국으로의 여행은 가출이었고, 감정이 지워졌던 그에게 사랑은 그 자체로 타락이었다. 정해진 길을 벗어났다는 점에서 타락일 수 있으나 한편으로 가려져 있던 진실을 보는 통로이기도 했다. 비록 그 끝이 파멸이라고 해도.
그전에 사랑에 빠지는 것 자체가 이미 충분한 환상이다. 그것도 속국의 평민 출신 여자와 제국의 태제의 만남이라니, 완전히 판타지다. 괴로운 과거를 잊고 화려한 궁궐에 갇혀 살았던 시간과 소설이 만들어낸 가상의 세계에 빠져 감정을 찾아 사랑을 쫓던 시간 중 레아킨에게는 어느 쪽이 현실이고 어느 쪽이 환상이었을까.
무척 만족스럽게 마지막 장을 넘기면서도 한편으로는 "한 소리 듣겠다"싶은 생각도 들었다. 본문중에는 모 일본 만화를 바로 떠올릴 법한 내용이 나오기도 하고. 이야기의 흐름이 진부한 면도 없지 않다.
하지만, 그런 재료들과 보편적인 주제를 잘 짜여진 이야기속에 녹여내는 것은 분명 작가의 능력이다. 여전히 이 작가의 다음 작품이 기대되는 이유이기도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