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글쓰기를 평생 동안, 또 생업으로 하려면무엇보다 글쓰기의 원리에 대한 통찰이 필요하다. 사람은 왜 쓰는가? 쓴다는 것이 인간에게 어떤 의미인가? 본성과 쓰기의 관계는무엇인가? 등등. 그래서 존재론을 먼저 구축한 다음 실전에 들어가는 것이 좋다. 실전부터 했다가는 금방 밑천이 바닥나 버린다. 그렇게 되면 무엇보다 글쓰기를 지속할 수 있는 동력을 상실해 버린다. 뭐든 근본에 닿아 있어야 삶의 기술로 운용할 수 있다는 것이나의 실용주의다. - P6
무엇보다 지금도 좋고 나중에도 좋은 일이 글쓰기 말고 또 있을까? 이생에도 좋고 다음 생에도 좋은‘ 일이 글쓰기 말고 또 있을까? 결정적으로 나에게도 좋고 남에게도좋은 일이 글쓰기 말고 또 있을까? - P7
어쩌면 기본기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진정으로 무언가를 원하고, 그 기쁨을 소소하게 누릴 수 있는능력 말이다. - P15
연암이 나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은 이런 식의 글쓰기를 그만하라는 메시지였다. 그는 말한다. 타인을 비판하는 것으로 명예를 얻는 것은 떳떳한 일이 못된다고, 그 말이 뇌리에 박히면서 비평이딱 재미없어졌다. - P16
의학, 즉 몸과 질병도 앎의 영역이었구나, 그런데 왜 우리는 그것을 오롯이 전문가에게 맡겨 놓고 전혀 돌아보지 않았을까? 삶의 가장 구체적 토대는 몸인데, 우리는 왜 몸을 생략한 채 온갖 이미지들로 삶을 기획했을까? - P19
돈의 맛‘이란 이런 것이다. 화폐의양적 증식이 아니라 연결망의 강/밀도가 성공의 척도다! - P21
비결이 나온다. 살다 보면 숱하게 던지는 질문이 있다. 내가 누구지? 어디로 가야 하지? 어떻게 살아야 하지? 그때 환기하라. 산다는 건 ‘서는‘ 것에서 시작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선다‘는 건 누구의 도움 없이 오로지 자신의 두 발로 온몸을 지탱하는 것, 곧 자립(自立)을 의미한다. 그것이 인간의 길이다. 거기에서 시작하면 된다. 그 자리에서 단 한 걸음만 내디디면 된다. 한 걸음이 두 걸음, 다시 세 걸음으로, 아기들이 걸음마를 연습할 때의 그 모습처럼, - P25
땅의 두터움과 하늘의 가없음을동시에 누릴 때 삶은 비로소 충만하다. 땅에만 들러붙어 있으면 ‘중력의 영‘(니체)에 사로잡힐 것이고, 하늘만 쳐다보고 있으면 공중부양되고 말 것이다. 일상은 튼실하되, 시선은 고귀하게! 현실은명료하되, 비전은 거룩하게! -이것이 사이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길이다. - P28
글쓰기의 원리도 그러하다. 사물을 처음처럼‘ 만나고, 매 순간 차이를 발명해 내며, 보이지 않는 것들을 서로 연결할 수 있는것, 이것이 글쓰기의 동력이다. 인류가 처음 천지 사이에 우뚝 섰던 태초의 신비로 돌아가는 길이자 갓난아기가 처음 세상과 만나는 그 순간을 일깨우는 길이기도 하다. - P31
두뇌는 운동을 위해 존재한다. 걷고 움직이고 사냥하고 먹고마시고 떠들고 등등. 뉴런은 이 행동들과 함께 증식, 연접한다. 뉴런 자체가 연결망이다. 무슨 뜻인가? 삶이 곧 연결이라는 뜻이다. 하늘과 땅을 연결하고, 이곳과 저곳을 연결하고, 오늘과 어제, 그리고 내일을 연결하고, 거대한 것과 미세한 것을 연결하고, 행동과마음을 연결하고…, 그렇게 해서 생각은 계속 증식된다. 생각에 생각을 더하는 퍼레이드가 펼쳐지는 것. 호모 사피엔스의 탄생! 우리는 모두 호모 사피엔스의 후예다. 생각의 크기가 곧 존재의 크기가되는 이치가 여기에 있다. - P32
생각이란 무엇인가?‘생각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그것은 안에서 생겨나는가?‘ ‘밖으로부터 오는가?‘ 등에 생각이 미친 것이다. 이전의 생각이 구체적 현장과 관련된 것이라면, 이제는 거기에 추상의 경지를 더한 것이다. 생각을 ‘생각하는 존재 —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이제 생각은 질주한다. 기술이 폭발적으로 진화하는 지점도 바로 여기다. 제국을 건설하고 신을 창조하고, 사후세계를 탐색하고, 그렇게 해서 우리가아는 문명, 역사, 세계가 창조되었다. - P34
동시에 자아가 무한팽창하기 시작했다.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면서 자의식은 비대해지고 수많은 꿈과 환상이 삶을 뒤덮어 버렸다. 그 열망은 언제나 정복, 불멸, 천상에 대한 판타지로 가득하다. 늘 일장춘몽으로 끝났음에도 이 망상의 퍼레이드는 그칠 줄을 모른다. 수천 년 동안 그래 왔고, 지금도 그러하다. - P34
돌원숭이가 서쪽으로 간 까닭은? - 생각에서 탈주하라!
결국 문명이란 생각의 무한질주, 무한증식의 결과물이다. 그와 동시에 새로운 질문들이 생겨났다. 폭력은 대체 언제 종식되는가? 제국이 확장될수록, 부가 증식될수록 왜 괴로움은 더욱 늘어나 가?얼마만큼 노력해야, 얼마나 누려야 이 갈증은 해소되는가? 그와 더불어 더 궁극의 질문, 왜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소멸해야 하는가? 생과 사의 경계는 대체 무엇인가? 등등. 그때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것은 자아를 무작정 팽창한다고 되는 것이 아님을, 소유와 증식과 팽창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때부터 생각은 방향을 선회했다. 외부를 향해 치달리던 생각이 이제 자신을, 자신의 내면을향하기 시작한 것이다. - P35
생각에 생각을 더하다가 생각 자체로부터 탈주하기 시작한것이다. 그러려면 일단 멈춰야 한다. 그래야 방향을 바꿀 수 있다. - P36
욕망 자체는 죄가 없다. 그것은 생명의 토대이자 동력이므로. 다만 그것이 향하는 방향과 속도는 알아차려야 한다. 생명이라는 토대를 벗어날 때, 그것은 과속으로 치달린다. 치달리는 순간 방향이 어긋난다. 이때 해야 할 일은 이 어긋남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더더욱 치달리게 된다. 그런 점에서 무지야말로 폭력이자 반생명이다. 생각에 생각을 더했는데, 결국은 무지에 도달한다는 이 우주적 역설, 그 역설로부터의 해방, 이것이 돌원숭이가삼장법사와 함께 서쪽으로 간 까닭이다. - P38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앎의 방향은 크게 두 가지다. 세계를 향해 무한히 뻗어나가는 것, 또 하나는 내부를 향해 깊이 침잠하는 것. 전자가 증식이라면, 후자는 비움이다. 전자가 유위법이라면, 후자는 무위법이다. 궁극에 도달하면 둘은 결국 만나게 되어있다. epistemology(인식론) = cosmology (우주론), 고로, 얇은 인간의 본성이다. - P40
따라서 인간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일은 다름 아닌 무지다. 세계의 이치를 알지 못하면 늘 길을 잃고 헤맨다. 한발 내딛기도 벅차다. 동시에 마음의 구조를 알지 못하면 늘 충동과 망상에 휘둘린다. 그때 브레인은 삶의 지도가 아닌 번뇌의 원천이 된다. 어느 쪽이건 무지는 단절과 적대를 낳는다. 외로움과 괴로움에서 헤어날수 없다. 그러므로 생을 잘 보존하려면 무엇보다 무지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 P40
생명을 보존하려면 자연의 이치와 천성을 알아야 한다. 갓난아기처럼 호흡하는 것, 사물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것, 그것이 생명을 보존하는 도다. 그 도를 터득하려면 알아야 한다. 길흉을 알고 멈춰야 할 때를 알고 자연의 속도와 리듬을 알아야 한다. 그 얇이 바로 생명의 원동력이다. 하여, 우리가 일상적으로 해야 할 실천은 간단하다. "간절히궁금해하는 것"(운성스님, 명상 -유튜브) 무엇에 대해? 세계의 근원에 대해서, 존재의 심연에 대해서. 어떻게? "마음을 텅 비운 채, 우주적 가능성으로!" 모든 배움의 기초가 질문인 것도 그 때문이다. - P41
존재와 사유로부터, 둘의 가장 내밀한 만남에서부터 삶의 가치에 대한 질문이 제기된다. 드디어 이곳까지 온 것이다. 이곳이 철학의 중심이다. 우리는 욕망하고, 해명하고, 해방하고, 자신을 알고자 애쓰고, 행동한다. 그리고 문득 동굴 속에서 그리스적 질문, 아폴론의 신탁을 받은 무녀의 질문을 듣는다. 너에게 이 삶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리고 다시 침묵, 이 질문을 즐기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현명한 방법일 것이다. 대답하지 않는 편이 낫다. 이 질문은 길들이기 어려운 새와도 같다. 붙잡으려고 하면 날아가 버린다. 그냥 이 질문을지닌 채로 살아가는 편이 낫다. 답이 없는 질문을 평생 대면하는 것이다. 굳이 서두른다면 어떤 식으로든 대답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서두르는 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다. 침묵을 즐기는 게 낫다. 철학의 중심에서는 어떤 말도, 어떤 개념도 움직이지 않는다. 한 줌의 바람이 이 질문을 스쳐 지나간다. 무슨 일인가가 벌어진다. 무슨 소리인가가 들린다. 하나의 관계가 끊어진다. 이제 큰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철학의 중심에서 부는 바람이다. 우주적인 차원을 획득한, 존재하는 내가 내쉬는 숨이다. 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늘에 구름이 한 점 지나간다. 참으로 아름다운 구름이다. (파스칼 샤보, 『논 피니토 : 미완의 철학, 정기헌 옮김, 함께읽는책, 2014.97~98쪽)
! 루이제 린저의 「삶의 한가운데」에도 비슷한 말이 나오는데... - P42
무슨 일을 하든, 어디에 있든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자기가 서 있는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다. 존재의 GPS라고 할까. 자신과 세계가 마주치는 접점을 알려면 하늘을 봐야 한다. "고개를 들어 하늘의 뭇별을헤아리라." (창세기) 그다음에 자신이 발딛고 있는 땅을 살펴야 한다. 방향이 어디인지, 좌표값이 얼마인지. 거기에서 삶의 비전이 나온다는 것. 살다 보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하지만, 사실 이치는 간단하다. 관어천문(觀於天文) 찰어지리(察於地理)! - P45
이것이 바로 ‘안다‘는 것의 본질이다. 이 앎과 함께 인간의 길이 시작된다. 인생이란 길 위에서 ‘길‘ 찾기다. 길을 찾으려면 지도가 있어야 한다. 앞이 바로 지도다. 앞이 없으면 정처없이 방황할수밖에 없다. 그것은 마치 깜깜한 밤에 낯선 곳에 툭! 던져진 것과같은 상태다. 그때 온몸은 공포에 휩싸이고 만다. 위험한 곳이라서두려운 게 아니다. 모르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 그렇듯이, 무지는 그 자체로 고통이요 괴로움이다. 그렇게 헤매다 마침내 길을 파악하게 되었을 때 온 존재는 환희로 넘쳐난다. -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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