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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테라
박민규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6월
평점 :
그 귓속의 달팽이관 속의 달팽이처럼, 나는 잠시 고요한 감회에 젖어 들었다. 그랬다. 나는 분명 쥐의 몸에서 자라난 사람 귓속의 달팽이관 속의 달팽이처럼, 그 고시원의 복도 끝 방에서 살았던 적이 있다. 아주 오래전의 일이지만, 분명한 사실이다. 만약 당신이 그런 고시원에서 살아본 적이 없다면, 부디 <달팽이관 속엔 달팽이가 없어>라는 식의 힐난은 삼가주기 바란다. 장담컨대, 세상의 일은 아무도 알 수 없다. -p. 274 <갑을고시원 체류기> 중
얼마전 신문 리뷰에 소개 되었던 박민규의 소설집. 감칠맛 나는 글쓰기로 나를 유혹하는 최재봉 기자의 리뷰는, 나를 결국 이 책에 이르게 했다. 세상에 박민규라는 인물을 요란하게 알렸다던 <지구영웅전설>도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도 난 읽지 못했다. 다만, 이 소설집을 읽고 나자 책 뒤편에 실린 이외수와 김영하의 추천사에 많은 공감을 했다.
참으로 이상한 글쓰기를 하는 사람이다. 낯설고 인상적이다. 이야기들은 대부분 일상을 벗어나 있어서 어느 순간엔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집을 읽는듯한 기묘한 착각을 일으켰다. 잘 쓰지 않는 독특한 비유에서 느끼는 감상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김민규의 문장들은 그동안 보아온 어떤 것과도 다르다. 긴 문장을 일부러 배제한 듯한 짧은 호흡, 의외의 자리에서 문장 자르기,문단(이라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사이사이를 떼어 놓은 구성. 내게 가장 인상적인것은 그 중에서도 문장 자르기다.
(......)왜 세상은 온통 푸시인가. 왜 세상엔 <푸시맨>만 있고 <풀맨>이 없는 것인가. 그리고 왜, 이 열차는
삶은, 세상은, 언제나 흔들리는가. 그렇게
흔들리던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봄은 금성인과 화성인이 모두 부러워할 만큼이나 근사한 계절이었다.(.....) p.91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중
정말 독특한 문장이다. 이런 식으로 입말투인듯, 글말투인듯 쓰는 글들을 본 적이 없는 내겐 그 능력이 신기하기까지 하다.
열 편의 단편들에 나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사회에 처음 발을 딛는 남자들. 그리고 대부분 부적응 혹은 소외자들이다. 무엇보다 자본의 시스템이 품어주지 않는 사람들이다. 하루종일 알바를 뛰어야 하는 고등학생, 토익 900의 점수에도 일흔 세 번이나 취업에 실패해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는 남자, 인턴쉽에서 정직원으로 살아남기 위해 남색 부장에게 몸을 내주는 락커. 의도하지 않았지만 조금씩 어른이 되어가는 이들이다. 그들은 비참하거나 슬프지는 않지만, 외롭다.
한편 그들 앞에 느닷없이 모습을 드러내는 동물들. 그 동물들은 자신이기도 하고, 가족이기도 하고, 꿈이기도 하다. 조직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들은 너구리 게임을 하면서 점차 너구리로 변신한다. 150미터나 되는 대왕오징어가 분명 존재한다고 믿었던 소년시절을 다 잊어버린 성년의 어느 날, 대왕오징어가 도시를 습격한다. 한없이 무기력하던 아버지가 실종되어 버린 어느 날 지하철 플랫폼에는 아버지같은 기린이 서 있다. 오리배를 타고 떠난 사장 가족이 되돌아 왔을 땐 오리가 아니라 펠리컨이였다. 이 동물들은 이 팍팍한 시스템에선 적응하지 못하는 존재들인것이다.
결론적으로, 박민규 소설은 재미있다.
무엇보다 독특하다.
문학평론가들이 뭐라고 중얼거리는지 알 바 없다. 뭐라더라, 역사가 없다던가, 사회가 없다던가. 80년대 소설이 가진 의식이 없다던가. 그러거나 말거나. (박민규 말대로 "좃까라 마이싱이다")
나를 유혹한 최재봉 기자의 리뷰 http://www.hani.co.kr/section-009100003/2005/06/009100003200506091425001.html
수정)20050730 내 블로그에서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