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세트 - 전3권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까치 / 199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어찌 말할까.

감동적이고 충격적이고 놀라운 작품이다. 하루 반 나절동안 모두 읽어버릴 수 있었던 것은, 소설인 탓도 있겠지만, 그만큼 흡입력이 대단한 작품인 탓이다.

누구에게라도 권해주고 싶은 책.
 

사실 이 세 권은 하나의 장편으로 발표된 것이 아니다. 몇 년의 시차를 두고 차례로 발표된 것인데, 각각이 하나의 장편으로 완결성이 있으면서 동시에 세 권은 연작으로 볼 수 있을만큼 연결도 매끄럽다.

첫 권, 어린 쌍둥이 형제 이야기는 전쟁이 아이들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전쟁이 사람들을 어떻게 만드는지 보여준다. 담담하고 건조하게. 등장인물 누구도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 그저 '우리' '엄마' '할머니' '토끼 주둥이' 등등. 가슴이 시큰했다.
 

그 녀석은 우리에게 다가와서, 물통 안에 침을 뱉으려 했다. 그러나 우리 중 하나가 녀석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자, 다른 하나가 모래주머니로 녀석의 머리를 갈겼다. 녀석은 쓰러져서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다른 두 놈이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중 한 놈이 우리에게로 다가왔다. 다른 한 명이 말했다. - 조심해! 저 더러운 자식들은 못 할 짓이 없다고. 한번은 저 새끼들 돌에 내 관자놀이 뼈가 금이 갔어. 저놈들은 면도칼도 가지고 다니면서 막 그어대. 맘만 먹으면 네 목이라도 딸러 덤빌 거야. 저것들은 완전히 미친 놈들이라고. 녀석들은 가벼렸다. 우리가 물을 가득 받은 물통을 토끼주둥이에게 내밀었다. 소녀가 우리에게 물었다. 
-너희들은 왜 진작 날 도와주지 않았니? 
-네가 어떻게 하나 보려구. 
-덩치 큰 세 녀석이 덤비는데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니? 
-네 물통을 놈들 대가리에 던져버리든지, 손톱으로 얼굴을 온통 할퀴어놓든지, 불알을 발로 걷어차든지, 그도 저도 안되면, 고함을 치고, 울부짖기라도 해야지. 아니면 아예 달아니버렸다가 나중에 다시 오든가.   - (상) 비밀노트 63쪽
  

 


두 번째 권. 국경을 넘지 않고 남은 쌍둥이 중 하나인 루카스의 이야기. 몇 년이 지나 성인이 된 루카스는 그 쌍둥이가 맞나 싶게 사람들을 도우려들고, 매우 감성적이다. 그래서 어린 시절과 달리 가슴 아픈 일도 생기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전쟁은 지나갔지만, 사람들에겐 여전히 상처가 남아있다. 그런데, 어째서 루카스는 이토록 다른 사람이 된 걸까? 
 

난 이제 쉰살밖에 안 됐어. 내가 담배와 술을, 그래, 술과 담배를 끊는다면, 난 책 한 권쯤 쓸 수 있을 거야. 여러 권도 쓸 수 있겠지만 어쩌면 단 한 권이 될 거야. 난 이제 깨달았네, 루카스, 모든 인간은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걸. 그 외엔 아무 것도 없다는 걸. 독창적인 책이건, 보잘것없는 책이건, 보잘것없는 책이건, 그야 무슨 상관이 있나. 하지만 아무것도 쓰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잊혀질 걸세. 그런 사람은 이 세상을 흔적도 없이 스쳐지나갈 뿐이네. - (중)타인의 증거 133쪽 


세 번째 권- 어릴 적 국경을 넘은 클라우스의 이야기로 시작해 루카스 이야기로 이어지면서, 루카스와 클라우스(Claus)와 클라우스(Klaus)의 관계를 밝힌다. 그들은 정말 쌍둥이인가? 아니면 형제인가? 아니 같은 인물일까? 모두 허구일까? 50세가 넘은 클라우스와 루카스의 과거를 밝혀가면서 그들의 가족사와 함께 어린시절의 트라우마와 비밀이 벗겨진다. 그래서? 루카스가 클라우스이고 클라우스가 루카스인가? 아니면....

 

문체는 건조하고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다. 여성 작가의 책이라니 참으로 놀랍다. 그녀는 혹시 이들 클라우스와 루카스의 모습이 아닐까? 그녀는 오빠와 자신의 이야기를 쌍둥이 형제로 고쳐 썼다고 한다. 아이들은 이유없이 잔인해지고, 또 이유없이 너그러워진다. 아이들뿐 아니라 전쟁에 휘말린 모든 이들이 그렇다. 전쟁이 지난 후에는 삶이 그들을 갉아먹는다. 삶을 즐기지 못하고, 허우적 거린다. 30여년 흐른 뒤, 그들은 또 가족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것은 전쟁을 겪은 유럽인들의 삶이기도 하겠고, 일반적인 삶의 모습이기도 하리라. 작가의 건조한 문체, 그리고 풍자. 섬뜩한 묘사.
 

누군가의 정체성에 관한, 혹은 거짓과 진실에 관한 게임이라고 보아도 좋겠다. 그리 보면 전 3권을 가로지르며 추리소설처럼 읽는다면 재미있으리. 물론, 겁 많은 나는 이 책으로 '전쟁'이 더 많이 보인다. 전쟁이 어떻게 사람을 변하게 하는가, 전쟁이 인간성을 어떻게 파괴하는가에 관한  보고. 어차피 독서는 주관적이고 개인적 활동이니 어찌 읽거나 그것은 읽는 자의 몫. 내겐 이리 인상적인 책이 누군가에겐 엄청 지루한 책이 될 수도 있겠으나, 그럼에도 지인들에게 추천하곤 한다.

 
같이 일하던 언니가 추천하길래 골랐는데, 촌스러운 표지와 달리 매력이 가득한 소설이다.
이후 김영하의 <랄랄라 하우스>를 보니, 김영하도 추천했더라. 섬뜩하면서 매력적인 작품인데 절판되었던 책이 다시 나와 반갑다고.

다행이다. 재출간 된 책을 볼 수 있게 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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