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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슴벌레 여자 - 윤대녕 장편소설
윤대녕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1년 4월
평점 :
품절
그쪽과 함께 지내면서 점점 마음이 약해지고 있는 걸 느껴요. 이때껏 느껴보지 못한 안온함이랄까 따뜻함 때문에 그런 걸까요. 솔직히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어요. 자칫 잘못 받아들이면 나중에 상처가 될 게 뻔하니까요.
(...)
그쪽이 남자여서 그런게 아녜요. 누군가 내방에 와서 머물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그런 걸 거예요. 밤마다 백상기념관 앞에서 누군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저절로 빨라지곤 해요. -46쪽
모든 정보 파일이 삭제되면 수뢰인께서 이식받은 기억은 자동적으로 현실 호환성과 유동성을 잃게 됩니다. 쉽게 말해 쓸모가 없게 돼 버리는거죠. 그래서 특별한 조치가 없더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회복력이 약화될 겁니다. 다만 환상으로 남게 되는거죠. -177쪽
시청역과 광화문, 종로, 안국동, 인사동 언저리의 자세한 묘사는 그 근처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당연히 그 자세한 묘사를 모두 더듬어 상상할 수 있었으므로 현실감이 또렷했다. 하지만, 지리적 배경의 현실적 묘사와는 달리 이야기는 전혀 현실감이 없었으므로 그 몽환적인 감각이 더욱 도드라졌을 뿐이다.
내가 지금의 내가 아니었을 수도 있을거다. 잘 보면 내 어깨 어딘가에 사슴벌레 낙인이 있을지도 모를테고, 내가 기억하는 그 모든 것이 내가 아닌 누군가의 것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나는 아무개가 아니고 서하숙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원하는대로 기억을 이식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나를 증거하는 신용카드와 주민증과 더불어 기억도 모두 교체할 수 있다면 나는 누구일까?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지만 그 기록 또한 기억에 의존하는 것은 아니겠나.
아, 언젠가 개미군이 이런 얘길 했었는데.
'우린 사이보그.'
그러게 우린 사이보그였음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