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설탕이 녹는 동안
전경린 지음 / 문학동네 / 2002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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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얄팍했고, 읽기도 수월했다. 읽은지 며칠이나 지났지만 난 쉽게 이 책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전경린이 이런 작가였던가. 이렇게 섬세한 문체를 구사하던 작가였던가. 아프고 쓰리고 답답함으로 가득한 스무살 여자아이의 내면을 이렇게 촘촘하게 표현하는 이야기를 무어라 말해야 할까.

 

주인공 우수련의 스무살을 지배하는 것은, 집을 떠나 혼자만의 방을 갖고 싶다는 열망과 온갖 냄새들이다. 앓고 있는 할머니의 악취, 시장통의 냄새, 주변사람들의 독특한 냄새, 소극장과 찾집에 떠도는 냄새, 이웃건물에서 키우는 새의 비린 냄새. 우수련이 묘사하는 냄새는 지극히도 세밀해서 내 코 끝에도 냄새가 스친다.

 

책갈피마다 포스트잇을 붙이고, 맘에 드는 묘사들을 두 번, 세 번 되읽으면서도 난 이 책에 대해 무어라 할 말이 없음을 깨닫는다. 맵고 짠 내 스무살을 상기했던 탓이었을까? 사실 누구나 그 시기는 맵고 짤 수 밖에 없고, 가슴속에 지옥을 하나 키우는 시간일게다. 지구를 통째로 어깨에 짊어진 듯 무겁기만 하지만, 사실 그건 자신에게만 있는 일도 아니며, 혹은 타인에게 그 짐은 티끌 하나의 무게로 보일 수도 있는것이다. 하지만 그게 그 나이니까. 어른도 아니고 아이도 아닌 시기. 무엇을 해도 미숙하지만, 또 무엇이나 다 우습고 유치해 보이는 나이. (내게 그 시기는 정확하게는 스무살 보다 더 빨리 찾아왔지만.)

 

전경린(혹은 우수련)은 자신의 모습은 이미 스무살에 결정되었다고 말한다. 나 역시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와 달리 계속 변해가고 있음을 느낀다. 여전히 문득 가슴 속에 천불이 일어나는 시간도 있고, 평온한 날들도 있지만, 스무살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르다. 좋은 의미로 해석하고 싶다. 십 여 년 만에 만난 동창녀석들은  스무살 무렵의 나는 "참 당돌하다 싶을때도 있었고, 겁이라곤 전혀 없었다"고 말하더라. 어쩌면 그 때의 나는 자신을 부정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많이 건방졌고, 많이 까칠했으며, 많이 아팠다. 방구석을 파고 들며 살았다. 어쩌면 그건 방구석이 아니고 내 가슴이었는지도 모르지만.

 

여전히 나는 까칠하고, 건방지고, 아프다. 그러나 그 어떤일을 해도 허술하고, 두려움이 많으며, 까칠한 내 자신을 인정하고 있다. 나는 내가 소망하는것만큼 잘 나지 않았음을 인정한다.

 

전경린의 이 소설은 섬세한 묘사로 나를 사로잡는다. 그리고 스무살의 나를 떠올리게 한다. 난 이 책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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