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의 열쇠>는 한 천주교 신부가 교단 내부의 배타적, 권위적 문화에 대해 대항하며 하느님의 참뜻을 실천하는 이야기이다. 이 책은 천주교 신자뿐만 아니라 “천주교 신자이면 상습적으로 죄를 짓고도 일요일만 참회하면 되냐?”, “한평생 가난한 이들의 벗이었지만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단 말이냐?”라는 의문에 대한 잔잔한 답이 될거다.주인공 치셤 신부는 가톨릭 교회의 엄격한 교리로 보면 신부도 아니다. 그는 무신론자이면서 페스트 환자들을 온 몸으로 돕다가 죽어간 의사에 천국행을 기도한다. 이를 따지는 수녀에게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처럼 그 의사가 환자를 위해 일하다 죽었노라고 항변한다. 불경하도다!! 감히 무신론자와 그리스도를 비교하다니. 그 수녀가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질 이야기다. 또 교회 확장이라는 지상 최대의 목표를 실천하는 ‘능력 있는’ 신부에 맞서서 이를 신자 매수 행위라며 거부한다. 윗 사람에게 까불기까지.. 그는 노자(老子)의 말을 인용, ‘종교는 많지만 진리는 하나며 우리는 모두 한 형제다’라며 배척적인 종교관을 배척한다. 그 밖에도 파격적인 종교관으로 다른 신부들의 노여움을 사서 급기야 신도 하나 없는, 심지어 성당 건물마저도 없는 중국에 파견을 나가는 등의 시련을 맞이한다. 그러나 그는 말보다 강한 구체적인 이웃 사랑을 실천한다. 과연 종교란 무엇이어야 할까? 아마도 사회적 도리가 어떻고, 도덕적 책무가 어떠니 하고 백 번 떠드는 것보다 당장의 위험에 처한 사람에게 인정을 베푸는 소박한 실천이 필요할거다. 물론 이것만으로 해야할 책임을 다하는 것은 아니지만 소박한 실천 없는 교리 암기는 더더욱 참된 종교 생활과 거리가 멀다. 어쩌면 시장에서 다 갈라터진 손바닥으로 장사 하시면서도 열심히 사시고 이웃을 배려하는 무신론자 아주머니가 일요일에 성당이나 교회에 가네하며 떠드는 것으로 죄를 씻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보다 하느님의 사랑을 더 잘 실천하는 사람일거다. 항상 말과 행동과 생각으로 죄를 짓게 되는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나는 책을 읽는 내내 찔렸다.
'개떡 같이 이야기하면 찰떡 같이 알아 먹어라!' 이심전심을 기대하는 말이겠지만 한 편으로 이는 말하는 사람의 표현상 미숙함을 엉뚱하게 듣는 사람의 이해력 부족 탓으로 돌리는 과격한 속담이 아닐까? 나는 회사에서 메일을 주고 받을 때, 회의를 할 때 통용되는 언어가 한국말인데도 불구하고 서로 말이 전혀 통하지 않아 엉뚱하게도 그냥 일본어나 중국어, 혹은 말갈어 등이 오가도 될 것 같다는 상상을 하며 좌절한 경험이 있다. 원탁에서 진행하지 말고 긴 탁자를 준비해 두고 싶다. 그 탁자에서 대화 대신 서로 각자 준비한 원고를 읽고 내려가면 그만이다. 이렇게 오가는 단어가 엉망이 되어버린 이유는 구성원들이 고집스러워서라기보다 논리적인 글쓰기, 말하기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이 모여서 살다보니 그렇게 된 것 같다.작가는 이공계 출신으로서 글쓰기의 애환과 경험을 생동감 있게 그렸다. 하지만 나는 인문계 출신이지만 나를 포함한 수많은 인문계 출신들의 말갈어 통용 현장을 목격해왔다. 그래서 메일이, 회의가 끝없이 길어지고 심한 경우는 결국 담당자와의 취재를 성사해가면서 확인해야 그 본의를 확인할 수 있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이유로 야근하고 집에 돌아오는 날은 허무하기 짝이 없다. 이 책은 이공계, 인문계 가릴 것 없이 부족한 글쓰기, 말하기 능력의 한계와 그 폐단을 느끼는 사람이 읽으면 좋을 것 같다. 다만 이 책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논리적인 글쓰기의 필요성과 비논리적 글쓰기의 현재에 대한 서술에 비해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쓰고 훈련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론이 상대적으로 간단히 처리되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방법론에대해 궁금한 사람은 바바라민토의 <피라미드 프린서플>, 남영신 <나의 한국어 바로쓰기 노트>,<말 잘하려면 국어부터 잘하고 외국말 잘하려면 한국말부터 잘해라>를 더 보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