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4
제임스 미치너 지음, 윤희기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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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선희(서른 중반 여성)

내가 이 책을 손에 든 것은 한창 마감에 쫓기던 때였다. 한꺼번에 3개 잡지에 연재를 하고 있으니 아무리 텀을 두어 연재를 한다 해도 항상 마감이 코앞이었다. 글은 안 나오고 초초해서 발정난 개 마냥 좁은 방안에서 왔다 갔다 하다가 바닥부터 쌓아 놓은 책탑 하나가 무너져 내렸다! 으악! 채털리 부인이 내 정수리를 찍었고, 타치오가 내 가슴으로 뛰어 들었으며, 아오마메가 내 발가락에 독침을 놓을 뻔했다. 씩씩거리며 일어나려는데 딱 눈에 띄는 책이 있었다. 응? 소설책 이름이 [소설]이야? 작가님 네이밍센스 게으르시네(그런데 내가 이걸 언제 산거지). 그래서 현실도피......는 아니고 소설을 소설이라 직언하는 작가의 용기가 궁금해서 읽기 시작했다. 작가로서 이 소설을 읽고 이 작가를 평해 보자면 일단- 이 양반은 고상하군. 문체는 언제나 조용하고 인물들은 교양이 있어. 내 취향의 캐릭터들은 아니야. 하지만 이 소설의 진지함이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흐르는 건 바람직한 일이야. 실험적인 소설들이 지니지 못한 성숙함이 있어. 작가 자신이 투영되지 않고는 나올 수 없는 성숙함이지. 그래. 이것이 이 작가가 집필을 대하는 자세인거야. 진지하게 인물들을 대하고 소설이라는 틀 안에서 그들을 잘 중재하는 것. (갑자기 방에 렛잇고~ 렛잇고~ 가 울린다. 김선희 작가의 벨소리...). 으악! 김서니 편집자다!!!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나는 툭 하면 감정적이 되는 내 아이들을 돌봐야 할 때!

 

편집자 김서니(서른 중반 여성)

하아...정말 피곤한 직업이다. 방금 통화를 마친 김선희 작가랑 매월 한바탕 하고 나면 체력장에서 100m 달리기를 하고 난 후 다시 오래달리기를 해야 하는 중학생이 된 심정이다. 김선희 작가는 꼭 마감임박 때 책 한 권을 독파하는 버릇이 있어서 제때에 전화를 해서 정신을 차리게 해야 한다. 하지만 이번에 읽은 책은 제임스 미치너의 [소설]이라니, 용서해 줄까. 조금 공부가 됐을까나 몰라. 이런 작품을 쓰는 작가의 담당 편집자는 참 편할꺼야...아니 또 모르는 일이지. 이 소설의 진행속도와 집필의 진행속도가 비례할지도(내 성격엔 김선희 작가의 날라리 같은 진행속도가 맞는 다는 뼈아픈 현실이 슬프다...). 소설 한 권이 있기까지의 중요한 네사람으로 기둥을 잡은 플롯이 좋았어. 문장이 전체적으로 조금 늘어지는 감이 있지만 오히려 그것이 이 작품에서는 믿음직하고 진정성을 준달까? 사실 내가 이 소설의 편집자라면 문장을 조금 쳐내겠지만. 그리고 마지막 독자부분에 인간관계와 사건들이 너무 쏠리지 않게 좀 더 분배를 했을 텐데. 하지만 아주 느렸던 작가 부분부터 균형을 잡아준 편집자 이야기, 이 작품의 주제를 드러내주는 비평가 부분을 지나 독자까지 서서히 피치를 올려 마지막에 큰 사건 하나를 터트리는 방법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아니 아주 좋았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그래도 좀 느려!(다시 한번 역시 난 김선희 작가의 날라리 속도가 맞는 현실이 너무 슬프다...).

 

비평가 김서닌(서른 중반 여성)

너무 오래 책을 봤더니 눈이 침침하다. 오랜만에 제임스 미치너의 [소설]을 다시 읽었다. 역시 좋은 소설이다(어제까지 나를 괴롭혔던 김선희 작가의 소설과는 얼마나 대조적인가!). 내가 이 소설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비평가 부분이 아닌, 작가 루카스 요더 부분이다. 비평가 칼 스트라이버트는 일견 파격적이기까지 한 진보적인 사상가지만 요더 작가를 견제하는 편협함과 특권의식은 나를 언짢게 했다. 그것은 불안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도피하려는 방어기제로 보인다. 하지만 요더는 얼마나 순수한가. 소설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아무리 엄청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어도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사명감을 가지고 매 작품에 임한다. 융의 원형을 제대로 구현한 작품들이다. 그래서 작품 끝까지 작가 루카스 요더가 시대에 뒤떨어진 베스트셀러 대중소설작가로 인식되는 건 아쉬운 부분이다. 결국 요더 자신도 변화가 필요함을 느끼고 자기를 바꾸려 하는 것은 씁쓸했다. 이 격변하는 세계의 패러다임의 변화에 인간이 적응하고 적응해야 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하지만 이 소설에서 그것은 작은 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이 좋은 소설이란 것은 내가 말한 이런 부분들을 편집자 이본 마멜이 요더를 끝까지 신뢰하고 보호함으로서 균형을 잡는다. 그래. 우리 비평가들이 할 일은 그 균형을 함부로 무너뜨리지 않고 자신이 비평할 소설을 진심으로 대해야 하는 것일 게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 나는 괴로워했다. /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 걸어가야겠다. //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윤동주, 서시(序詩))

 

독자 김서늬(서른 중반 여성)

아, 좋다. 블로그 독서모임인 고블린 2월 도서가 [소설]이 되었을 때 나는 10여년 전에 읽은 책인데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는 것이 슬펐다(내가 그렇지 뭐ㅠ_ㅠ). 하지만 그때는 지금처럼 좋다고 느끼지 않았다는 건 기억한다. 아무래도 이 책은 나이를 따지는 듯하다. 하나의 기인 호흡으로 이루어진 소설이다. 자칫 지루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이 부분에서 연령대별로 갈릴 확률이 높다). 하지만 긴 호흡의 그 편안함이 안락하게 느껴진다면 이 소설에 진심으로 반하게 될 것이다. 책을 만들어가는 다양한 직종의 사람들의 전문적인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좋았고 그들이 진지하다는 것이 좋았다. 요즘 골치 아프다며 아카가와 지로와 히가시가와 도쿠야에만 몰두했던(물론 이 작가들이 안 좋다는 게 아니다. 결코.) 몸과 마음이 편안한 휴식을 받은 기분이다. 역시 좋은 책은 사람을 기분 좋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김선희 작가님. 더욱 분발하세요! 저번 작품은 그저 그랬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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